공동제(인연)
껍데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 박중기
‘껍데기는 가라’*
근본을 모르는 말이다
살아보면 안다
껍데기 속 삶
옛집 겨울 따뜻한 아랫목이었다는 것
쨍쨍한 햇볕 얼결에 쩍 벌어져
톡 톡 멋대로 튀어나온 강낭콩
어둠에 갇혀 살다
환한 세상 밖 살게 되었다고
제멋대로 구르고 사는 놈들
껍데기는 구속이었다고
껍데기는 가라고
껍데기
헌혈하듯 진액 다 뽑아주다
더 이상 감내 할 수 없을 때
생살 찢기는 아픔으로
날 선 세상 보낸다는 것
비록 험난하지만
매미가 날 수 있는 것도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껍데기 때문 아닌가
교도소에서 콩밥을 먹이는 이유
근본을 모르고 생을 다친 놈들
정신 차리라는 뜻이었으리라
껍데기는 가라는 것
근본을 부정하는
호래자식이다
*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시에서 인용
감꽃 / 박중기
수십 년 된 감나무 아래
열매가 되지 못한 감꽃
구겨진 원고지처럼 흩어져 있다
제 딴엔 홍시를 꿈꾸었겠지
지나는 사람들 몸 읽곤
“고놈 참 붉기도 하다”
“ 잘 익었네”
칭찬을 희망하며 피어났겠지
세상은 조급해서
가을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감나무 밑을 지나지 않는다
딸기밭 지나
참외, 수박밭 지나서
사과밭 지나서 온다
소외의 시간들 사이
스스로 떨어지는 무수한 감꽃
감꽃 하나 주워든다
가락동 청과물시장 경매장
최상품의 홍시
이 작은 감꽃이었겠지
붉은 몸 한 번 읽히지 못해도
감꽃은 핀다
광어와 도다리 / 박중기
광어와 도다리는 원래 눈이 양쪽으로 나있었단다
몹쓸 잘못 저질러서
볼때기 너무 세게 맞는 바람에 눈이 한쪽으로 쏠렸단다.
생김새는 비슷하다 눈만 빼곤
인간 세상에도 광어와 도다리가 산다
눈이 왼쪽으로 쏠려있는 놈
눈이 오른쪽으로 쏠려있는 놈
콩 알 만 한 눈, 그것도 실눈 뜨고 본다.
어린애들 땅 따먹기 하듯
왼쪽, 오른쪽으로 선 긋고 싸우는 꼬락서니라니
보기에 꼴사납다
불이 번쩍 나게 볼때기 맞으면
두 눈 제대로 돌아와
좌와 우가 없는 한 세상 볼 수 있지 않을까
광어와 도다리 한 하늘 아래 살고 있다
시인과 어부 / 박중기
초로의 시인과 젊은 어부가 연못에 물고기를 기르고 있다
시인은 물고기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고
어부는 물고기의 몸을 읽으려 애쓴다
연못 마른 바닥을 드러내자
시인은 나무로 탁본을 떠 벽에 걸어두고 시를 얻었고
어부는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얻었다.
생을 자작하게 끓이던 밥이 사라지자
시인은 탁본된 목어에게서 허기를 다스리는 법을 배웠고
어부는 오병이어를 배웠다
겨울, 겨울, 겨울이 빠르게 흘러갔고
시인은 동안거에 들고 어부는 강으로 떠났다.
봄, 봄, 봄, 봄이 돌아오자
젊은 어부였던 초로의 시인과 젊은 어부가 연못에 물고기를 기르고 있다
수상한 지명수배 / 박중기
나는 밤의 지명수배자다
시국공안 사범이 아니라 잡범이다
상습적 가정파괴범이다 그러나
한 번도 체포된 적은 없다
매번 자진출두 한다
혼인서약 미 이행의 신의성실원칙 위반죄
지나친 풍류로 가정경제를 곤궁하게 한 죄
자녀와 놀아주지 못한 애정결핍 죄
(……)
매의 눈매와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
취조는 밤늦도록 이어진다.
인정하지 못하는 억울한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죄를 순순히 자백한다.
어제처럼, 이루지 못할 첫사랑 같은
각서를 쓰고 풀려난다. 또
아침을 나서자
어제의 범죄를 모의하는 전화가 온다.
아직 집행유예가 끝나지 않았는데……
절창(切唱) / 박중기
세상이 시끄럽다
발 동동 구르며 떼쓰는 소리
바가지 긁는 악다구니
소프라노 발성 연습
믿을 수 있는 것
오직 소리뿐
소나기 퍼붓듯 쏟아 붓는다 그러나
안다
소나기의 시간은 길지 않으므로
깊은 곳까지 적실 수 없다는 것
위장된 고요만 잠시 베일뿐
귀 닫아걸면
제풀에 지쳐 떨어진다는 것
매미가 운다
새떼가 소리를 물고 간다.
적요하다
미용실에 간다 / 박중기
미용실에 간다.
성(性)적 취향 때문만은 아니다.
이발사는 머리를 깎을 때 가르마부터 가른다.
“오른쪽, 왼쪽?”
편 가르기 하는 것 같아 싫다.
은유 없는 저항, 수염까지 면도칼로 밀어버린다.
저항하지 말고 순종하란다.
값싼 향수를 바른다.
세상 냄새 풍긴다.
미용실 아가씨는 덥수룩한 머리카락만 자른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 사라진 거리
미용실이 늘어간다.
민초들의 난 / 박중기
“터전을 되돌려달라”
민초들이 난을 일으켰다
저항은 거셌다
하늘의 원군을 받은 다음날은 파죽지세였다
난의 목적은 소박했다
생존 이었다
터전을 빼앗긴 절박성으로 똘똘 뭉쳤다
일주일의 한두 번 원정(遠征)으로는 버거웠다
‘동학혁명 진압의 역사를 배우라’
원군(援軍)의 도움으로 토벌해야 한다는 풍문이 돌았고
곳곳에서 강력한 살상력을 가진 원군의 토벌이 시작되었다
민초들의 본거지는 누렇게 타들어갔다
거세지는 민초들의 저항에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나
원군의 도움 없이 싸워보기로 했다
탐욕스런 영주가 되기 싫었다
세상은 청맹과니라고 비웃었다
결국, 일부는 민초들의 세상이 되었다
입추가 되자 그들의 기세도 주춤해졌고
나의 욕심도 앙상해졌다
서서히 끝나가는 낭비 없는 싸움
짧은 한해살이 그악스러운 투쟁
억척의 삶은 피의 대가이다
들풀에게 배운다
무죄 / 박중기
세상의 한 풍경
특별할 것 없는
하늘 언저리 반의 반 평 지탱하던
수십 년 세월 ‘쿵’ 하고 무너졌다
제 몸 크기만큼의 세상이 사라졌다
먼 먼 옛날
엄청난 빚이라도 졌던가!
‘쿵’소리는 짧은 비명처럼 숲에 울렸고
흉흉한 소문은 숲길에 불안으로 깔렸다
숲 저 너머엔 아직 무사한 한숨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거기 있었다는 것 뿐 이다
어제 수락산 등산로에서 50대로 보이는 여성이
(……)
뉴스는 앞 다투어 세상을 고발하고 있다
공전公轉 / 박중기
놀이동산 가서
디스코팡팡을 탄다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상하 좌우로 마구 흔들며 돈다
서는 듯 악세레이다를 밟고
달리다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술 취한 아버지 걸음으로 돌다
쫓기는 도둑놈 걸음으로 돈다
왼쪽으로 팽이처럼 돌다
오른쪽으로 탱고춤사위로 돈다
널뛰기 하며 돈다
쓰러지는 사람
안간힘을 쓰는 사람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혼이 나간다
아기 숨소리처럼
백세 할머니 저승 가듯
세상 돌았으면
그렇게
시작노트
감꽃 하나 주워든다
가락동 청과물시장 경매장
최상품의 홍시
이 작은 감꽃이었겠지
붉은 몸 한 번 읽히지 못해도
감꽃은 핀다
약 력
강원대학교 사범대 졸
2007년 수필문학 등단
2011년 문장21 신인상(시)
홍천고등학교 교사
풀무 28집 원고(박중기).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