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원 용호정원(龍湖庭園)
진주시 문화재자료 제176호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아름다운 정원인 용호정원이 있다. 정원의 아름다움도 빼어나지만 이보다 더욱 용호정원을 칭송하게 만드는 것은 그 바탕에 조성한 주인의 적선공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인 것이다.
용호정원은 1922년 당시 만석꾼의 거부였던 참봉 박헌경(朴憲慶, 1872~1937)이 조성하였다. 박헌경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시조이자 단종 때의 명신이었던 청재 박심문(淸齋 朴審問)의 18세손이다. 그는 부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웃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마음 또한 남달랐다.
1919년부터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 일대에는 몇 년 동안 혹심한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어 흉년이 계속해서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밥을 굶고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박헌경은 자신의 재산을 이웃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구호사업을 벌인다.
먼저 1920년에는 용산리 마을 동쪽 산간에 용산사라는 절을 세우는 공사를 벌여 이재민을 도왔으며, 두 번째로 벌인 사업이 용호정원 조성공사였다. 수만금의 재산을 풀어 굶주린 마을 주민들을 이런 식으로 도왔던 것이다. 또한 1929년에는 폭우가 쏟아져 개천의 제방이 터지는 바람에 마을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마을의 절반이 물에 떠내려가고 주민 4명이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때에도 사재를 과감히 털어 동네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이재민들에게 집과 땅을 주어 살게 하였다.
게다가 그가 소작인들에게 베풀었던 일화 또한 유명하다. 당시 소작인들의 형편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한 해 동안의 소작료와 지난봄에 빌려 온 양식의 이자를 지주에게 갚고 나면 남는 것은 벼 한 바가지 정도뿐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장에 끼니를 잇기 위해서는 또다시 지주로부터 양식을 빌려야만 하는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이를 견디지 못한 소작인들이 지세거부운동을 벌였는데 당시 다른 모든 지주들은 이를 당연히 반대하였는데 유일하게 박헌경만은 소작인들의 지세거부운동을 받아 들였다. 그는 소작인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돈을 빌려 준 채권장부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 없애고 소작인들에게 그 해의 지세를 모두 돌려주는 결단을 내렸다.
이러한 그의 공덕은 진주 일대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며 감사의 표시로 공덕비를 세웠는데 무려 7개의 공덕비가 용호정원의 호숫가에 세워져 있다. 공덕비 중에는 박헌경이 죽자 이 집을 드나들었던 과객들이 돈을 내어 세워준 공덕비도 있다.
박헌경의 이웃사랑 실천은 그의 할머니였던 숙부인 인동 장씨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명석면 용산리에서 50여리나 떨어진 사천시 곤명면에는 인동 장씨 할머니를 기리는 공덕비가 서 있는데 여성을 추모하는 공덕비로서는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당시 500석의 재산을 가졌던 장씨 할머니는 춘궁기가 되면 해마다 100호 남짓 되는 곤명면 일대 사람들에게 쌀 한 되씩을 공짜로 내어주었다. 먹을 것이 귀하여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던 당시에 쌀 한 되는 엄청난 식량이었다. 뿐만 아니라 심하게 흉년이 들 때면 쌀 창고를 열어 동네사람들과 식량을 나누어 먹었기에 이 일대 사람들은 지금도 장씨 할머니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박헌경도 이 같은 가풍을 이어받아 만석꾼의 부를 혼자만 누리지 않고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었으리라 여겨진다.
용호정원을 조성한 경위는 풍수적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용산리 일대에는 세 개의 산줄기가 내려오고 있는데 각각 용맥(龍脈), 호맥(虎脈), 사맥(巳脈)이라 부르고 있다. 그 중 가운데에 위치한 호맥의 끝자락인 호두(虎頭)자리에 박헌경의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형국에서는 세 개의 산줄기가 심하게 다툼을 벌이게 되므로 강한 지기를 응집시켜 주는 중심 혈자리 앞에 반드시 연못이 필요하다.
풍수에서는 이를 혈구(穴口)라고 하는데 혈의 입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입과 같이 중심 맥의 앞에 혈구가 있어야만 기가 들어가고 나올 수가 있어 그 자리가 명당이 되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정원이 집의 담장 안에 자리 잡는데 비해 용호정원은 담장 밖의 마을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조성은 박씨 집안에서 하였지만 소유는 마을 공동소유가 된 셈이다.
용호정원은 600평 넓이의 용호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열 두 개의 봉분 같은 흙무더기를 쌓아올려 조성하였는데 이것은 중국 사천성 동쪽의 파산산맥(巴山山脈) 중에 솟아 있는 무산(巫山)의 아름다운 십이봉(十二峰)을 본떠 형상화한 것이다. 무산은 산 모습이 무(巫)자 형태를 띠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첩첩이 솟아오른 열 두 개의 봉우리 사이로 강이 흘러가면서 만들어낸 무협(巫峽)은 중국 삼협(三峽) 가운데 하나로 일찍이 이태백과 두보를 비롯한 많은 시인 묵객들이 무산의 십이봉과 무협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는 이런 정원의 경치는 우리 조상들이 가장 동경하던 형태이다.
용호지의 한 가운데에는 팔각정자가 있고 연못에는 연꽃을 심어 떠 있는 모습의 팔각정이 연못의 연꽃과 함께 어우러져 신선이 노니는 경치를 연상케 한다.
주변에 쌓아올린 열 두 봉우리에는 두세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고 백일홍이 보태어져 심겨져 있다. 부채만한 크기의 연잎이 녹색으로 무성해졌을 때 팔각정에 앉아 있노라면 주변의 붉은 색 백일홍 꽃과 연꽃의 향기가 어우러져 가히 신선의 경지를 맛볼 수 있다. 바람 부는 날에는 물 위에 비친 무산십이봉이 일렁이는 물결에 떠다니는 모습이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꿈틀거리게 된다.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른 밤에 용호정에 앉아 한잔 술에 취기라도 감돌면 여기가 바로 선경이요 내가 곧 신선이라 할 것이다.
무산십이봉에서 연못 가운데 용호정으로 건너가려면 조그만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연못가에 배는 줄로 매어놓아 건널 수 없게 해 놓았다. 연꽃들을 감상하며 잠시 신선이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잔디를 깎고 있던 주인장이 다가와 “한 번 건너가 볼래요”라고 말하며 배를 타라고 한다. 이런 횡재가...... 아마도 아까 입구에서 인사말 몇 마디 건넨 것이 호감으로 작용하였나보다.
배를 타고 가며 주고받은 대화에서 주인장의 용호정원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인심 좋은 집안의 후손이라 그런지 소문만큼이나 자상한 웃음을 시종 얼굴에 띠며 친절을 베풀어 준다. 천장에 자리도 있으니 내려서 깔고 앉아 놀다 가라며 정자에 내려주고는 이내 다시 일하러 떠나간다.
정자에 오르니 강선대(降仙坮)라 쓴 편액이 걸려있다. 그렇다. 여기 내려앉은 내가 바로 신선이다.
오늘 하루 나는 상상이 아닌 진짜로 무산 십이봉에 둘러싸여 용호정에 올라앉은 신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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