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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른 정진(정정진)
앞의 세 가지 요소인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로 행위가 청정해지면, 도의 다음 단계인 집중 무더기[定蘊. samādhi- kkhandha]로 나아가는 기반이 된다. 도덕적 절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적인 정신훈련을 하는 이 단계는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의 세 요소로 이루어진다.
이 단계를 집중 무더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서 추구하는 목표가 지속적 집중력이기 때문이고, 집중 그 자체는 통찰지(위빳사나 지혜)를 위한 토대로 꼭 필요하기 때문이며, 다시 통찰지는 해탈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찰지로부터 나오는 꿰뚫어 보는 능력은 먼저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한 군데로 모아져야만 비로소 갖추어질 수 있다.
바른 삼매는 적절한 대상에 흩뜨려짐 없이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통일함으로써, 필요불가결한 고요함을 갖추도록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바른 삼매는 바른 정진과 바른 사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바른 정진은 이 과업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주고, 바른 사띠는 알아차림에 필요한 확고한 초점을 제공한다.
주석가들은 집중 무더기인 이 세 항목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세 소년이 공원에 놀러 간다. 공원을 거닐다가 어떤 나무 꼭대기에 핀 꽃을 발견하고 그 꽃을 꺾기로 한다. 그러나 그 꽃은 키가 가장 큰 소년도 딸 수 없는 높이에 있다. 그때 한 친구가 몸을 굽히며 자기 등에 올라서라고 한다. 키 큰 소년이 올라서지만 등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꽃을 향해 손을 마음껏 뻗지 못한다. 이에 세 번째 소년이 자기 어깨를 짚으라고 한다. 첫 번째 소년은 두 번째 소년의 등에 올라선 채 세 번째 소년의 어깨를 짚고 손을 뻗어 마침내 꽃을 꺾는다.
이 비유에서 꽃을 꺾는 키 큰 소년은 마음을 통일시키는 기능을 하는 집중을 나타낸다. 그러나 마음을 집중하고 통일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 등을 대준 소년의 경우처럼 바른 정진이 제공하는 에너지가 그 역할을 한다. 집중은 또 어깨를 대준 소년의 경우처럼 사띠가 제공하는 안정시켜주는 알아차림을 필요로 한다. 바른 삼매가 이런 도움을 받게 되면, 마침내 바른 정진에 의해 힘이 강화되고, 바른 사띠에 의해 균형이 잡혀서 흐트러진 생각의 가닥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확고하게 목표에다 마음을 고정시킬 수 있게 된다.
바른 정진에 내재되어 있는 정진(에너지)이라는 마음부수는 선할 수도 있고 불선할 수도 있다. 같은 요소이지만 한편으로는 욕망, 공격, 폭력, 야심 등에, 다른 한편으로는 보시, 지계, 자애, 집중, 이해에 연료를 공급한다. 바른 정진에 포함되는 정근(正勤. padhāna)은 선한 형태의 에너지이지만 좀 더 특수한 것으로서, 곧바로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 마음에 있는 정진이다. 여기서 ‘곧바로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한다.’는 수식어는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선한 에너지가 도에 기여하려면 반드시 바른 이해와 바른 사유의 안내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도의 다른 항목들과 유기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한 마음의 정진이 대개 그렇듯이, 생사윤회 속에서 공덕 쌓기에 불과할 뿐,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이루어내지는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부지런함, 분발, 방일함이 없는 불굴의 인내, 이 세 가지 정진의 필요성을 거듭거듭 역설하셨다. 왜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해탈은 각자 스스로 이루어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해탈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는 것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일인데 이 일에는 정진이 필요하다. 이 정진은 마음을 계발하는 데 소요되며 마음의 계발이야말로 전체 도의 핵심을 이룬다. 출발점은 어리석고 괴롭고 오염된 마음이고, 목표는 청정하고 지혜로 밝아진 해탈한 마음이다. 오염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바꾸는 것은 오로지 꾸준한 정진에 의해서이다.
자기 계발이라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고, 남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부처님과 깨달은 제자들이야말로, 이 과업이 우리가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산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은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 같은 목표 지점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음을 보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정진 없이는 안 된다. “나는 인간다운 힘과 인간다운 정진과 인간다운 분발로, 이룰 수 있는 일을 다 이루어내기 전에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결심으로 수행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
수행의 진전에 따라 바른 정진(정정진)은 다음 네 가지 ‘바른 정근[四正勤]’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아직 생기지 않은 불선법을 생기지 않게 하기,
(2) 이미 생긴 불선법을 버리기,
(3)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을 생기게 하기,
(4) 이미 생긴 선법을 증장시키기.
불선법들(akusalā dhammā)이란 번뇌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생각과 감정, 의도들인데, 행동으로 드러난 것도 있고 잠재되어 있는 것도 있다. 선법들(kusalā dhammā)이란 번뇌로 오염되지 않은 마음부수들, 특히 해탈에 도움이 되는 마음부수들이다. 이 두 가지 마음부수에 대해서는 각각 두 가지씩 할 일이 있다. 불선법인 경우, 아직 잠재해 있는 번뇌들이 표출되지 않도록 막고, 그리고 이미 활동을 벌이고 있는 번뇌는 제거하는 일이다. 선법인 경우, 아직 계발되지 못한 해탈의 요소들을 일단 생기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충분히 성숙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그 요소들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바른 정진으로 분류한 이 네 가지를, ‘수행을 통한 마음의 계발’이라는 텃밭을 효과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데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5.1 아직 생기지 않은 불선법을 생기지 않게 하기
이 교법에서 비구는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쁘고 불선한 법들이 생기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바른 정진의 첫 번째 면은 번뇌로 오염된 마음부수인 불선법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집중을 방해하는 측면에서 살필 때는 이 번뇌들을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ā]’라는 한 묶음으로 거론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섯 가지 장애란 감각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이다. 이것들은 해탈로 가는 길을 가로막기 때문에 ‘장애’라고 부른다. 이 장애가 자라나면 마음을 덮어서 향상에 필요불가결한 고요함(samatha)과 위빳사나 지혜라는 두 수단을 일어날 수 없도록 막아버린다.
탐욕과 성냄이라는 불선의 뿌리들을 각기 대표하는 처음의 두 장애인 감각욕망과 악의는, 다섯 가지 장애 중에서도 특히 강력해서 수행의 발전에 가장 강력한 장벽 노릇을 한다. 나머지 세 가지 장애는 앞의 것에 비해 독성은 덜하지만 역시 방해가 되는 것들로 어리석음의 파생물들이며, 흔히 마음의 다른 번뇌와 결합된 상태로 존재한다.
‘감각욕망’은 두 길로 해석된다. 좁은 의미에서, 마음에 드는 볼거리, 소리, 냄새, 맛, 접촉 등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 감각적 쾌락, 부, 권력, 지위, 명예 등 애착이 붙는 모든 것, 즉 모든 형태의 갈애를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두 번째 장애인 ‘악의’는 혐오와 동의어이다. 악의는 다른 사람이나 자기자신 또는 대상물이나 상황을 막론하고 이들을 향한 불만, 혐오, 노여움, 원망, 반감 등 모든 어두운 측면을 포함한다.
세 번째 장애인 ‘해태와 혼침’은 정신적 몽롱함이라는 공통된 특성에 의해 연결된 두 요소의 혼성체로서, 그 중 하나는 마음의 몽롱함으로 나타나는 해태(thīna)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까라짐, 마음의 무거움, 지나친 졸음 등에서 볼 수 있는 혼침(昏沈. middha)이다.
이와 정반대가 네 번째 장애인 ‘들뜸과 후회’이다. 이는 불안정성을 공통적 특성으로 하는 두 요소의 혼성체이다. 들뜸(uddhacca)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빠르고 격하게 오가는 교란되고 흥분된 마음이고, 후회(kukkucca)는 과거의 실수에 대한 후회와 이런 실수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다.
다섯 번째 장애인 ‘의심’은 고질적인 우유부단함, 즉 과단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권장하신,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지성과는 전혀 다른 의심하는 태도, 다시 말해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 부처님의 팔정도에 대하여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좀체 수행의 길로 뛰어들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뜻한다.
장애와 관련해서 해야 할 첫 번째 노력은 아직 생기지 않은 장애가 생기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일이다. 이는 제어 또는 방호하려는 노력(saṁvarappadhāna)이라고 한다. 장애를 제어하려는 노력은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나 수행을 발전시켜가는 과정 내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장애가 일어나면 주의를 분산시키고 알아차림의 눈을 흐리게 해서 고요함과 명료함을 해치기 때문이다. 장애는 마음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생긴다. 장애는 마음상속 깊은 곳에 잠재해 있으면서, 표면으로 드러날 기회를 노리고 있는 특정한 성향이 활성화되어 표출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애가 활성화되도록 촉발시키는 것은 감각적 경험이 제공하는 정보이다. 몸이라는 유기체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어서 그 각 기관에 해당하는 특정 자료, 즉 눈은 형상을,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감각접촉을 받아들인다. 감각 대상들은 계속해서 감각기관들에 와서 부딪치는데, 이때 감각기관들은 받은 정보를 마음으로 중계한다. 그 정보는 마음에서 처리되고 평가되어 적절한 반응을 일으킨다.
한편 마음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감각접촉들을 처음에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르게 처리한다. 마음이, 입력되는 자료를 ‘지혜롭지 못한 마음기울임(ayoniso manasikāra)’으로 부주의하게 맞이하게 되면 그 감각 대상은 불선법을 부추기게 된다. 감각 대상이 직접적 충격으로 작용하여 반응을 즉각 촉발할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기억 흔적으로 저장되었다가 후에 오염된 생각, 이미지, 환상 등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통례로 미루어 보건대, 대상은 그에 상응하는 번뇌를 일으킨다. 마음에 드는 대상은 욕망을 일으키며, 못마땅한 대상은 악의를 일으키고, 이도저도 아닌 대상은 어리석음과 관련된 번뇌를 일으킨다.
감각기관에 들어오는 감각적 입력에 대해 제어되지 않은 반응을 할 경우, 잠재해 있는 번뇌를 자극하여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이 번뇌가 생기지 않도록 막으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감각기관을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장애를 제어하는 수행방법으로 ‘감각기능 방호(indriya-saṁvara)’라 불리는 수행을 가르치셨다.
비구가 눈으로 형상을, 귀로 소리를,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감촉을, 마노(意)로 법을 인지할 때, 표상[全體相]이나 세세한 부분상[細部相]을 취하지도 않는다. 그는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못하면 생길 나쁘고 불선한 법인, 탐애와 근심이 생기지 않도록 위해 진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감각기능을 단속하고 방호한다.
그러나 감각기능을 방호한다고 해서 감각기능을 부정하거나 감각세계에서 완전히 물러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설사 가능하다 해도 진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왜냐하면 번뇌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 감각기관이나 감각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기능 제어의 열쇠는 “표상이나 세세한 부분상을 취하지도 않는다.”는 말에 담겨 있다. ‘표상(nimitta)’이란 대상의 대체적인 겉모습인데, 그 중에서도 이 겉모습을 포착하는 것이 오염된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는 바탕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부분상(anubyañjana)’은 대상의 잘 드러나지 않는 특징이다. 만약 감각기능을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마음은 감각의 영역들[六外處]을 거침없이 쏘다니게 된다. 먼저 ‘전체상’을 붙들 것이고 그러면 번뇌가 발동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부분상’들을 정밀히 탐색해냄으로써 번뇌들이 늘어나 무성해지게끔 만든다.
감각기관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감각기관이 감각 영역들과 만날 때[觸], 사띠와 분명한 이해[正知]가 개입될 필요가 있다. 인식과정의 마음은 각기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있는 순간적 인지 활동들의 연속 형태로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이 순차적 연속의 초기 단계들은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처음에 마음이 대상 쪽으로 전향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인지한다. 그 다음에는 인식을 받아들이고, 대상을 검토하고, 대상을 식별한다. 이 식별에 곧바로 이어 한 빈틈이 열리고 그 안에서 대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가 이루어져서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이때 사띠를 놓치면, 표출될 기회를 찾고 있던 여러 잠재적 번뇌들이 밀고 나와서 그릇된 생각을 유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대상의 전체상을 붙잡게 될 것이고, 다시 그 대상의 세부를 탐색할 것이고, 마침내 번뇌에게 기회를 내주게 될 것이다. 탐욕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드는 대상에 정신이 팔리게 될 것이고, 싫은 마음 때문에 못마땅한 대상은 뿌리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감각접촉이 생기는 순간에 사띠하고 있다면, 잠복상태에 있는 번뇌를 자극하여 인식과정의 마음에 들어오는 단계로 진전되기 전에, 그 싹을 미리 잘라버릴 수 있다. 사띠는 마음을 감각접촉의 수준에서 동결시켜버림으로써 다섯 장애[五蓋]를 저지한다. 사띠는 대상에 알아차림을 고정시킴으로써, 마음이 입력된 자료를 탐진치에서 생기는 관념들로 윤색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렇게 하면 이 명료한 알아차림을 길잡이로 삼아서, 마음은 옆길로 빠지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이해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5.2 이미 생긴 불선법을 버리기
이 교법에서 비구는 이미 생긴 나쁘고 불선한 법들을 극복하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감각기능을 제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뇌는 여전히 떠오를 것이다. 번뇌는 ‘마음–연속체’의 밑바닥에서, 과거 축적물의 매립층에서 솟아올라 불선한 생각과 감정으로 응고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새로운 종류의 정진이 필요하게 된다. 이 정진은 이미 생긴 불선법을 제거하려는 정근으로, 줄여서 ‘버리려는 정근(pahānappadhāna)’이라 한다.
그는 이미 생긴 감각욕망, 악의, 또는 해치려는 생각들, 또는 그 외의 어떤 나쁘고 불선한 법들도 간직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생각들을 품고 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장내고 없앤다.
마치 유능한 의사가 갖가지 병에 알맞게 여러 약을 쓰듯, 부처님은 갖가지 장애에 대해 여러 가지 대응수단을 마련해 두셨는데 그 중 어떤 것은 두루 쓰이고 어떤 것은 특정 장애에 특히 잘 듣는다. 부처님은 산만한 생각을 쫓아내는 다섯 가지 기법을 설명하셨다.
그 첫 번째가 번뇌로 더럽혀진 생각을 그와 정반대되는 선한 생각으로 몰아내는 방식인데 이는 마치 목수가 썩은 나무못을 뽑아내기 위해 새 못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구체적으로 이 기법은 다섯 가지 장애 각각에 대한 특수처방으로 각 장애를 약화시켜 무기력하게 만드는 특별히 강구된 일련의 수행법으로 되어 있다. 이 기법은 어떤 장애가 솟아올라 수행주제에 대한 집중을 중단시킬 때마다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장애가 반복해서 자신의 수행을 방해할 때, 그 장애에 대처하기 위한 수행 주제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장애가 맹위를 떨칠 때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로 채택한 교정수단도,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최소한의 기간만이라도, 그 방편주제를 근본주제로 삼아서 어느 정도 친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탐욕에 대처하는 요법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무상에 대한 수행이다. 집착대상을 고정불변한 것이라 믿는 맹목적 가정이 바로 집착을 떠받치고 있는 지주인데, 이 수행은 그와 같은 가정을 떨어낸다. 관능적 욕망이라는 특정형태의 탐욕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몸의 더러움 측면에 대한 수행[不淨觀]이다.
‘악의’에 대한 적절한 치유법은 자애(mettā)에 대한 수행(자애관)이다. 모든 중생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는 이타적 기원을 규칙적으로 방사함으로써 혐오와 노여움의 모든 흔적을 씻어낼 수 있는 수행법이다.
‘해태와 혼침’을 쫓기 위해서는 힘을 북돋우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몇 가지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밝은 빛을 이미지로 떠올리거나, 일어서서 한동안 활기차게 행선(行禪)을 하거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는 것 등이다.
‘들뜸과 후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는 어떤 간단한 대상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호흡관찰이 많이 추천된다.
‘의심’의 경우 특별한 처방은 상세한 조사이다. 즉, 모호한 점들이 분명해질 때까지 무엇이 불분명한지 밝혀 문제점을 정리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검토 연구하는 것이다.
산만한 생각을 쫓아내는 다섯 가지 기법 중에서 지금까지 설명한 첫 번째 방법이 장애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책이라면 다음의 네 가지 기법은 모든 장애에 대해 두루 효력이 있는 기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버리기 위해 도덕적 부끄러워함(hirī)과 도덕적 두려움(ottappa)이라는 힘을 동원한다. 즉, 그 생각이 수치스럽고 저열한 것이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그 생각이 가져올 달갑지 않은 결과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서,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나게 하여 결국 그 생각을 몰아낸다.
세 번째 방법은 의도적으로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다. 생긴 불선한 생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면, 거기에 빠지지 말고 마치 보기 싫은 장면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감아버리는 것처럼,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그 생각을 차단하는 방법이다.
네 번째 방법은 이와 반대되는 접근방식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에 직면하여 그 성질을 검토하고, 원인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이 가라앉고 결국 사라진다. 불선한 생각은 마치 도둑과 같아서 모른 체하면 문제를 일으키지만, 잘 주시하고 있으면 활동을 그친다.
마지막 다섯 번째 방법은 억누르는 것인데 이는 최후 수단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땅에 쓰러뜨린 후, 내리 눌러서 꼼짝 못하게 하는 것처럼, 불선한 생각을 의지력으로 철저히 제압함으로써 다스리는 방법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상의 다섯 가지 기법을 능숙하고 분별력 있게 적용하면, 생각의 모든 통로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마음의 노예가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고 싶은 생각은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쩌다 불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마치 벌겋게 단 냄비에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리듯이, 불선한 생각을 즉시 몰아낼 수 있다.
5.3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을 생기게 하기
이 교법에서 비구는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들을 생기게 하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바른 정진은 번뇌의 제거와 동시에 선한 마음상태의 계발이라는 과업도 수행한다. 이 과업에는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을 생기게 하는 것과, 이미 생긴 선법을 증장시키는 것 두 부분이 포함된다.
이 둘 중 첫 번째 것은 계발하려는 노력(bhāvanāppadhāna)이라고도 한다. 계발해야 할 선법은 사마타(고요함)과 통찰지(위빳사나 지혜), 사념처, 팔정도 등으로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지만, 부처님은 그 중에서도 사띠[念覺支], 법 고찰[擇法覺支], 정진[精進覺支], 희열[喜覺支], 편안함[輕安覺支], 집중[定覺支], 평온[捨覺支]으로 구성된 ‘깨달음의 일곱 요소[七覺支, satta bojjhaṅgā]’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셨다.
그래서 그는 떨쳐버림(viveka)에 의지하고, 탐욕의 빛바램(virāga)에 의지하고, 소멸(nirodha)에 의지하고, 철저한 버림(vossagga)으로 기우는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 법 고찰, 정진, 희열, 편안함, 집중, 평온을 계발한다.
이 일곱 가지 법은 깨달음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의 요소들’로 같이 묶을 수 있다. 그것들은 팔정도의 예비 단계에서는 실현을 위해 길을 준비하고, 끝에 이르면 깨달음의 구성요소로 남는다. 깨달음을 경험한다는 것, 즉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이 일곱 가지 요소들이 합동으로 작용하여, 모든 속박을 끊어내고 괴로움으로부터의 최종적 해방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길은 사띠[念覺支]에서 시작된다. 사띠는, 모든 주관적 해석, 해설 및 주관을 벗겨내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현상을 밝게 조명함으로써 사물의 본성을 꿰뚫는 통찰지를 위한 준비 작업을 한다. 사띠가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초점을 맞춰 놓으면, 법 고찰[擇法覺支]이 들어서서 그것들의 특성과 조건, 그리고 진행방향을 조사한다. 사띠는 기본적으로 수용적인 요소인 데 비해, 법 고찰은 현상의 기본 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현상을 과감하게 탐사, 분석, 해부하는 능동적 요소이다.
검토 작업에는 정진[精進覺支]이 요구된다. 깨달음의 세 번째 요소인 정진은 세 단계로 발전한다. 첫 번째 시초단계의 정진은 무기력을 떨쳐내고 초기 열정을 일으킨다. 관찰하는 수행이 진전되면서 정진에 관성(momentum)이 붙으면 두 번째 꾸준함의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느슨해지지 않고 수행을 진척시킬 수 있다. 끝으로 정점에 이르면 정진은 세 번째 단계인 불굴의 단계에 도달한다. 이 단계의 정진은 장애들을 손쓸 여지없이 무력화시키면서 관찰하는 수행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정진이 증가될수록 깨달음의 네 번째 요소인 희열[喜覺支]이 생긴다. 대상을 즐거워하는 감흥인 희열은 점차로 증가되어 마침내 황홀경에 도달한다. 극도의 행복감이 온 몸에 퍼지고 마음은 기쁨으로 달아오르며, 열성과 확신이 한층 더 강해진다. 이런 경험들이 힘이 되는 건 분명하지만 한 가지 결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들뜸에 가까운 흥분상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더욱 밀고 나가면, 희열은 잦아들고, 고요한 기운이 감돌면서 편안함이라는 다섯 번째 요소[輕安覺支]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희열이 남아있긴 하지만 숨이 죽어 얌전해지고, 관찰하는 수행은 냉정하고 침착하게 진전된다.
편안함[輕安]이 무르익으면 여섯 번째 요소인 집중[定覺支], 즉 마음이 한 점을 향해 초점이 맞춰진 상태가 된다. 집중이 깊어지면 다음에는 마지막 깨달음의 요소가 우위를 이어받는다. 그것은 평온[捨覺支]으로, 흥분과 무기력이라는 두 가지 결함에서 벗어나 내적 안정과 균형을 이룬 상태다. 무기력이 우세할 때는 정진해야 하고, 흥분이 우세할 때는 제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결함을 극복하고 나면 수행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도 평탄하게 전개될 수 있다. 평온한 마음은, 말들이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채찍질할 필요도, 제어할 필요도 없이 마차에 편안히 앉아서 스쳐가는 경치를 그저 구경만 해도 되는 마부에 비유될 수 있다. 평온에는 이러한 방관하는 성질도 있다. 다른 요소들이 균형을 유지하면 마음은 현상들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태연히 있을 수 있다.
5.4 이미 생긴 선법을 증장시키기
이 교법에서 비구는 이미 생긴 선법들을 지속하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닦기 위해서,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네 가지 바른 정진 중 마지막은 이미 생긴 선한 요소들을 유지해서 성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지하려는 노력(anurakkhaṇā- ppadhāna)’이고 하는 이것은, ‘이미 생긴 선한 집중대상을 마음에 확고하게 고정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설명된다. 이렇듯 집중대상을 방호하는 수행은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로 하여금 안정성을 얻어 점진적으로 힘을 키워 나가게 하고, 최종적으로는 해탈을 실현시키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이것은 바른 정진이 절정에 달했음을 나타내며, 수 없는 생에 걸친 개인의 지속적인 정진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첫댓글 사두사두사두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사두사두사두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