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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데살로니가후서 개관
1. 서론
교회는 옛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항상 세 가지 문제로 인해 위기를 겪게 된다. 외적인 박해, 이단 사설의 침투 그리고 교회 스스로 나태에 빠지는 일이 그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더 심화가 된 고로 사도 바울이 더 큰 목소리로 교훈과 깨우침과 경책을 하는 내용으로 쓴 서신서다. 그러므로 본 서신서는 전서와는 달리 엄중한 표현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온다. 본 서는 종말의 시대에 사는 현대 신앙인들의 그릇된 신앙의식을 교정해 주는 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저자 문제
본 서의 저자가 사도 바울이라는 사실을 초대교회는 의심없이 인정했다. 그와 같은 분위기는 19세기까지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몇몇 비평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론을 들고 나왔다. 첫째, 살후2:3의 '불법은 사람'은 주후 60년 이후 네로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당시 사람들은 네로 황제가 죽지 않고 부활했다는 신화를 믿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본서는 바울 시대 이후 타인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둘째,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주제가 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신학적인 시각이 상반된다는 점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의 재림을 삶의 종국적인 소망과 기쁨으로 삼는 것을 권고하는 반면 후서에서는 오히려 재림이 관한 기대나 소망을 억제하는 듯한 내용으로 일관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본 서는 전서와 동일인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비평가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반박한다. 먼저 불법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은 네로 부활의 신화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의 종말 예언부터 등장하는 말세의 악한 존재를 배경으로 한 것이며(단7:25 단11:36 사14:13)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성경의 종말론의 보편적인 주제임을 상기시킨다(요일2:18 계13:6,7). 셋째, 전서와 주의 재림에 대한 자세가 다른 이유로는 재림에 관해 열광주의적인 자세를 지닌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으며 그들로 인해 교회가 무질서의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열광적, 신비주의적인 재림주의자들을 경계한 것임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비평가들의 추측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며, 본 서가 일찍이 초대교회로부터 사도 바울의 서신으로, 정경으로 인정받아왔다는 사실이 사도 바울의 저작권의 가장 큰 증거일 것이다.
3. 기록 연대와 수신자 문제
1) 기록연대
전통적으로 본 서는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시기에 고린도에서 기록 되었으며, 그 시기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쓴 후 10개월 지나 기록한 것으로 본다. 즉 주후51년 후반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몇몇 진보적인 비평가들은(Baur, Daridson, Ewald) 먼저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살전5:1에서 바울이 더 이상 쓸 것이 없다는 내용, 후서보다 전서에서 문제들이 평정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분위기 등을 들어 후서가 전서보다 먼저 기록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에는 확실한 확증이 없다. 전후서의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전서가 초기의 것이라는 증거를 너무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수신자 문제
전서와 다름없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전체 구성원을 향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역시 근대 비평학자 몇 명은 이의를 제기했다. 하르낙(Harnack)은 후서가 유대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점을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내 유대인 성도가 그 수신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한교회내의 어느 특정 그룹에만 따로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외에 슈바이처(Schweitzer)는 본 서가 본래 빌립보인들에게 보내려고 했던 것인데 데살로니가 지역에 보존되어 있다가 그 지역 교회로 보낸 것으로 오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론 역시 본 서와 전서사이의 개연성, 즉 재림에 관한 그릇된 자세를 교정하려는 일관적인 내용이 수신자가 전서처럼 데살로니가 교인 전체임을 증명해 준다.
4. 기록 목적
전서의 상황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사회로부터 당하는 박해가 더 심화된 듯하다. 그래서 일부 신자들은 매우 낙심해 있고 일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임할 신천신지를 삶의 전 소망으로 삼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신자들 가운데는 도피주의, 체념주의, 무위도식하는 자들이 생겨나 교회의 직분에 대한 사역을 외면하고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한 채 오직 재림의 시기에 연연하는 일들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박해받는 신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시에 받을 보상을 상기시키고, 재림의 시기에 열중하는 자들에 대해 이단에 미혹될 것을 경계하며, 무위도식하고 현실 도피적인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본분과 책임을 다할 것을 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본 서의 기록 목적은 오늘 현대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는 미신적, 극단적 종말론에 대비한 신앙 지침으로써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5. 특징
본 서 역시 전서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주제로 삼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전서가 주의 재림을 신앙적 삶의 궁극적인 소망임을 강조한 것에 반해 본 서는 재림받을 신앙의 전 내용으로 오해하는 열광주의 자들의 열기를 냉각시키는 내용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전서는 비교적 위안과 칭송과 격려로 구성된 반면 본 서는 훈계, 명령적인 내용이 많다. 특히 재림의 시기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후임을 깨우치는 내용은 본서만이 지닌 종말 신학의 큰 특징이다(살후2:1-12). 그리고 주의 재림이 가까워 왔을지라도 사회인으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온당한 것임을 교훈함으로써 종말 시대에 지녀야 할 신앙의 참자세에 대한 기독교적 종말론의 귀중한 모범을 제시해 주고 있다.
6. 내용 구성
① 재림으로 인한 영광의 보상(살후1장)
② 재림 진리에 대한 그릇된 오해와 그 결과(살후2장)
③ 재림을 기다리는 온전한 삶의 자세(살후3장)
◉[연구1] 환난을 이긴 교회(1장)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의 이 첫 부분을 헬라어 원어로 읽어 보면, 살후 1장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잡한 문장구성이지만 바울은 자신의 뜻을 단락없이 한 문장으로 분명히 전하고 있다. 살후1:3,4과 살후1:11,12은 첫 번째 편지(살전)을 바탕으로 썼고 살후1:5-10은 자신의 가르침을 새롭게 쓰고 있다. 감사와 기도가 가르침 양 끝에 있음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애정을 느끼고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마음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우리의 자랑(살후1:1-4)
살전의 서두와 살후의 서두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교훈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울이 감사하고 있는 내용과 자랑은 무엇이며 살전의 감사와 자랑과는 어떻게 다른가?
1) 바울과 감사와 자랑
인사말을 볼 때 살후1:1은 살전의 인사말과 흡사하고 살후1:2은 다른 바울서신의 인사말과 흡사하다. 이것을 두고 혹자는 바울의 권위를 이용한 위조된 편지라 한다. 그러나 진보적인 말크센조차도 인사말 자체로 판단하기란 불가능하며 오히려 바울이 그의 권위로 쓴 편지라 하였다.
또 감사의 강도가 다르다. 살전1:2에서는 '감사하고'(thanks=NIV)라고 하였으나 살후1:3에서도 '감사할지니'
(ought always to thank)라고 감사가 강조되고 있다. 자랑함의 주체도 살전1:8에는 소문의 주체가 주변의 교회였으나 살후1:4에서는 자랑함의 주체가 '우리'(바울 일행) 이었다. 감사와 자랑의 내용도 살전 1장의 내용 요약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첫 번째 편지로 인한 혼란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먼저 첫 번째 편지를 상기시켜 주고 몇 가지를 더욱 강조함으로써 데살로니가에 대한 애정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2) 예수님의 권면과 자랑
예수님도 부활 수에 베드로의 배신을 꾸짖기보다는 오히려 아침 식사에 초대함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감싸 주었다(요21장). 바울 또한 잘못된 것을 시정하기 전데 자신의 애정을 확인,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지혜이다. 진실한 애정이 있을 때 그 권면과 꾸짖음 자체가 사랑과 위로로 시작됨을 배운다.
2. 강림하는 그날(살후1:5-10)
이 부분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 성도가 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가치는 있는가? 그날이 불신자에게는 왜 무서운 날인가? 그리고 인내하는 성도들에게는 왜 영광의 날이 되는가?
1) 심판의 날
심판의 날은 핍박자와 핍박을 받는 자 모두에게 임하게 되어 있다. 핍박을 받는 자들이란 하나님 나라로 인하여 고난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가 진정 가치 있다면 그 가치로 인한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치를 부인하고 거부하는 자들은 고난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날은 분명히 온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믿고 기꺼이 고난을 받은 자는 그날에 안식을 얻고 영광을 얻게 된다(살후1:7,10). 그러나 가부하고 오히려 믿는 자들을 핍박한 이들은 그에 대한 보응으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된다(살후1:6,8,9).
2) 인내의 신앙
안이숙 여사가 쓴 「죽으면 죽으리라」를 읽어보면 안이숙 여사가 감옥에 있을 때 여사를 몹시도 괴롭힌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인내로써 참은 여사에게 감옥에 있던 여죄수들은 모여들었다. 심판날이 아닌 현세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인내로써 이겨내여 영광을 얻은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다. 하물며 심판의 날에 있을 안식과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핍박과 환난을 인내로써 참아야 할 것이다.
3. 바울의 기도(살후1:11,12)
바울은 살후1:5-10에서 교리적인 가르침을 적은 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기도의 내용과 목적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살후1:3,4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처해 있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 기도의 내용과 목적 그리고 기도의 근거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영광
기도의 내용 중 첫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하는 기도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구별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모든 선을 기뻐함 가운데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함과 기뻐하심이란 그의 백성인 우리를 향한 것이라고 메튜 헨리는 지적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주님께서 친히 능력으로 채워주심을 의미한다. 기도의 목적은 먼저 주 예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영광을 얻게 하고 또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은 그날(심판 때)에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 모든 기도의 근거도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2) 교인들을 위한 기도
바울의 보편적 기도를 너무 편협하게 해석하여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문자 그대로 데살로니가 교인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적 기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아멘'으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새롭게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이지만 이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심판날 모두 주님 앞에 서야 함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거부한 자는 형벌에, 주님을 믿고 성결된 삶을 인내하며 살아간 자는 인식을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인내로써 살아가야 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할 때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우리도 영광을 얻을 것이다.
◉[연구2] 재림에 대한 바른 견해(2장)
일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가 바로 오시는 줄 알고 혼돈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혼돈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재림의 과정을 설명하고 또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1. 바울이 구하는 것(살후2:1-3)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재림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은 잘못된 점을 시정하기를 바라고 있다. 잘못을 지적하는 바울의 방법은 무엇인가? 잘못된 가르침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바울은 그럼으로써 무엇을 명하고 있는가?
1) 흔들리지 않는 믿음
우선 바울은 그들에게 '형제들아' 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가족적인 애정을 보여 준다. 실제로 바울은 가족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럼으로써 잘못을 시정받을 때 느낄 수 있는 불쾌한 감정을 억누를 수 있게 해주었다. 바울은 주의 재림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와 과정에 대하여 그리고 재림을 바라는 성도들의 태도에 대하여 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구하는 것은 성도들의 태도에 대하여 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구하는 것은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잘못된 가르침은 평안한 가운데 있는 믿는 자들을 흔들어 놓고 속이기까지 한다.
바울이 원하는 성도의 신앙은 요동하는 신앙이 아니라 믿음 가운데 굳게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성도는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즉 바울은 미혹에 빠지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
2) 평안한 믿음
잘못된 가르침은 우리를 흔들어 믿음에서 멀어지게 한다. 한동안 잘못된 재림 사상으로 전국이 떠들썩했던 기억이 새롭다.
참된 신앙이란 냄비처럼 들끓고 식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굳건한 가운데의 평안함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진리를 바로 알아야 하며, 또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여 올바로 가야 하겠다.
2.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멸망(살후2:3b-12)
재림 때에 일어날 현상들을 바울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말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요한계시록의 가르침이 서로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언급한 재림의 때, 그 순서는 어떠한가?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떠한가? 왜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시는가? 이에 대해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어떻게 해석되어졌고 앞으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1) 주님의 재림의 때 그 순서는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그 다음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 전에 적그리스도의 활동을 막는 세력이 있다. 적그리스도가 활동한 뒤에는 그리스도가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신다. 적그리스도는 교만하여 기적을 일으키고 속이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 하시는 이유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주후 40년에 가이우스(Gaius Caesar) 황제 동상이 예루살렘 성전에 섰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났을 것이다.(막13:14). 그러나 그 때도 아직 재림의 때는 아니었다.
부르스(F.F.Bruce)는 바울의 생각에 살후2:7의 막은 자를 로마 제국 또는 황제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복음의 대적자인 유대인의 훼방을 로마 제국의 법이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스의 말대로 바울이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2) 깨어 있는 신앙
시대마다 적그리스도와 막는 자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루터(Luther)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최근에는 고르바초프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신앙인이 있었다. 재림의 때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려운 날을 준비하는 신앙인들은 깨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3. 바울의 격려(살후3:13-17)
다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애정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도해준다. 바울은 그들을 어떻게 부르는가?
감사 조건은 무엇인가?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또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1) 자기 확신을 가지게 함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신보다도 주님이 더욱 사랑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어 자기 확신을 갖도록 해준다. 감사 조건으로는 선택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에는 상하(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의 가정과 믿음(진리를 믿음)이 필요하다. 즉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부주의 하고 방탕하게 살아서는 안 되고 더욱 성결하게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야 한다. 이에 대한 결과로 주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다(살후2:14). 이를 위해서 사도들이 전한 바를 지켜야 한다(살후2:15). 이에 대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있다(살후2:17)
2) 구원에 이르는 삶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에 굳게 서서 인내로써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우리를 택하여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잘 감당하여 성결된 생활을 함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행여 종말이 온다고 하여, 또 택하심을 받았다 하여 느슨해지거나 나태하게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갈 때 우리는 주의 영광을 얻게 된다.
재림의 시기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은 분명히 있다(살후2:3-12). 역사상 재림의 시기를 놓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동에 빠지기도 하고 미혹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이 장에서 우리에게 명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성결된 삶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다. 행여 종말 사상으로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과도한 기대감으로 빚어진 상실감은 치료하기가 더욱 힘들다. 잘못된 재림 운동으로 시간과 정열과 물질을 잃어버린 상처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치유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한다.
◉[연구3] 하나님의 신실성과 경건훈련(3장)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부 교인들의 문제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견책함으로 다루어 주고 있다. 단 이와 더불어 격려와 위로도 잊지 않고 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바울 스스로가 사도임에 불구하고 양무리에게 경건하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자세를 본 장에서 배울 수 있다.
1. 바울의 기도 요청(살후3:1-5)
바울은 참으로 겸손한 분이시다. 자기에게 주께서 맡긴 양무리(데살로니가 교인)에게 겸허하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단 양무리에게 바라는 바도 있다. 바울은 무엇을 기도해 주기를 원하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로부터 무엇을 확신하는가? 그리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기원하는가?
1) 양무리를 위한 기도
바울이 양무리들에게 기도받기를 원하는 것은 첫째, 복음 사역의 성공이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 또한 바울과 같은 동역자에 의해 되어지며 이에는 기도 지원이 필요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보호를 위해서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어디서나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그들의 목숨까지도 위태롭다. 바울 또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후11:23-33). 복음과 자신들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면서도 또 바울은 양무리들을 격려한다(살후3:3). 바울이 확신하는 것은 양무리들이 자신이 명한 것을 지킬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형(행하고)과 미래형(행할줄)을 쓴 것은 바울이 확신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양무리들을 대해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또 양무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기를 기도한다(살후3:5).
2)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
요즘 교회에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다. 그리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것을 자랑하는 교회도 많다. 어떤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파송한 선교사의 사역을 자랑하기도 하고 선교사가 잘못하였을 경우에는 문책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소환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파송한 선교사를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 사역을 위해, 또 문화가 다르고 이질적인 기후와 핍박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안전과 보호와 건강과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2. 규모 있는 삶(살후3:6-15)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원 중에 재정을 잘못 이해하여 규모없이 사는 이들을 바울은 엄하게 꾸짖고 있다. 꾸짖는 바울의 권위는 무엇인가? 이을 해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 '일만 만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규모없이 행하는 이들을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1) 올바른 길을 가르치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적인 권위로 엄히 명하고 있다(살후3:6). 사도의 권위는 주님의 권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행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아담에게 내린 저주 이후 인간은 수고하여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유대인 격언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가 있다. 생존을 위하여 때로는 자아 실현을 위해서도 우리는 노동하여야 한다.
살후3:11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의 의미를 존 낙스(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는 '자신의 일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자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바울은 출교시키라고 명하지는 않고 있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그들 스스로 바른 길을 가도록 교회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복음이 이방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2) 열심 있는 삶
'일'의 의미는 생존권 확보와 자아 실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게으른 자에 대해서 엄히 꾸짖고 있다. 6일간 열심히 일하고 안식일에 쉬는 것이 주의 뜻이다. '일'은 이렇게 주의 뜻이요, 계명이며 실제적으로도 우리를 생존케 한다.
또한 우리를 즐겁게 해주며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더 나아가서 나태함과 죄의 유혹에서 건져준다. 그러므로 행여 잘못된 재림 사상으로 나태함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내일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가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의 태도이다.
3. 주님의 은혜(살후3:16-18)
바울은 편지의 끝맺음을 맺으면서 축복과 기도를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친필로 문안한다는 말을 삽입하였다. '친필로 문안한다'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1) 평강을 주심
바울은 주께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였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도 모든 인류의 공통된 소망이다. 평화는 주님이 함께 하실 때만 얻을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친필로'라는 의미는 고전16:21, 갈6:11, 골4:18에서도 나오며, 이는 이 서신에 바울의 권위를 더하는 것을 의미하여 악한 자들이 편지를 날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2) 영원한 평강
우리 인사말에 '안녕하세요'가 있다. '안녕', 즉 어떤 의미에서는 '샬롬'(평화)과 같다. 많은 나라 인사말에 '평화', '안녕'은 들어 있다. 그만큼 인류의 보편적인 희망 사항이다. 그러나 이 '안녕', '평화'는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
바울은 목자로서 따뜻함과 엄격함과 겸허함 그리고 권위를 갖춘 분임을 알 수 있다. 철저히 주님께 의지하면서 자신의 양무리(데살로니가 교회)를 견책도 하고 격려도 하고 중보기도 하며 더 나아가 겸허히 기도를 요청한다. 이 모든 것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또한 우리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그 스스로 본을 보여 주셨다(살후3:9).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삶으로 인도한다. 올바른 종말 사상으로 인생을 열심 있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함을 배운다. 사도요 목자인 바울에게서 참다운 삶의 모범을 배우며, 이 모든 기초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는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