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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당선소감
거위의 화려한 날갯짓
이 성 애
1959년 장흥 출생
1984년 하와이로 유학
2005년 장편소설 『하와이에 핀 민들레』 출간
2009년 계간 『서시』 해외문학부문 신인상
2009년 해외문학 신인상
2009년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수상
해외문인협회 회원
미주 한국일보(Washington D.C.) 수필 기고
신인상 당선이라는 소식을 듣고 내 기억의 창은 물오른 석류의 반란처럼 퍽! 하고 열렸다. 열린 창을 통해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는 거위 한 마리가 보였다.
고아 출신인 그 거위는 성장하면서 습득했어야 할 아주 중요한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 그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외톨이 거위에게는 아주 다정한 강아지 친구가 있었다. 그 강아지는 자신감을 잃은 거위에게 열심히 연습하면 다른 거위들처럼 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어느 날, 거위는 드디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힘차게 날아오르는 거위를 바라보고 있는 강아지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번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큰딸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던가, 손수 삽화까지 곁들여 쓴 동화의 줄거리다. 그 동화를 읽고,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듯 살아가고 있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익숙치 않은 외국 땅에 살면서 아이에게 남겨 줄 것이 무엇인지 더듬거려 보았지만 없었다. 불현듯, 하늘을 향한 거위의 화려한 날갯짓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꿈을 향한 날갯짓을 시작했다. 내가 꿈을 향해 날아 봐야 아이에게도 해 줄 말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면역되지 않은 이별의 아픔을 안고 떠나왔던 고국. 그 이후, 이십육 년을 목마르게 살아왔는데 이제야 시원한 냉수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켠 기분이다. 상은 끝이 아니고 시작의 격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신인상이라는 격려에 그 거위처럼 날갯죽지를 쫙 펴고 파아란 하늘을 응시해 본다.
신인상 당선작품
누명 외 2편
이 성 애
부모라면 자식에게 미래를 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태몽이라는 것도 부모의 그런 기대감으로 인해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런데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부모가 원하는 모범생이 된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가장 힘들게 하는 자식이 가장 효도하는 자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듯 자식은 절망 속에 핀 희망일 수 있고 인고의 세월 끝에 맺힌 열매일 수도 있다.
우리 집에도 엄마에게 그 인고의 세월을 지내게 한 자식이 있다. 바로 작은오빠다. 작은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던 엄마의 영상이 지금도 내 앞에 떠 있다. 얼마나 잔머리를 잘 굴렸으면 초등학교 성적표에 잔머리를 굴림이라는 말을 했어야만 했을까. 어쩌다가 한두 번 굴린 것을 가지고 선생님이 평생 지문처럼 남겨질 성적표에 그렇게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오빠에게 세상은 호기심 자체였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오빠는 몸이 근질거려 집에 있질 못했다. 매일 동네 아이들의 혼을 사로잡아 한번 뻐겨 보고 싶어 고심하는 오빠에게 오일장은 그야말로 환상의 세계였다. 장터에서 봤던 모든 것을 영화를 본 듯 쫘아악 풀어 젖히면 동네 아이들은 최고의 지휘관에게 복종하는 사병들처럼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그날도 오일장이 선 다음 날로 기억한다. 나는 늘 그렇듯 엄마가 밭일을 나가면서 업혀 준 젖먹이 동생을 업고 있었다. 등에 업힌 동생은 절대로 떼어 낼 수 없는 나의 분신과도 같았다. 동생을 업고 고무줄이며 사방치기, 달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종종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아기를 업은 채 작은오빠가 일을 저지르는 곳에 나는 언제나 함께했다. 일을 저지르는 고수 옆에는 이유를 묻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거들어 주는 심복이 필수다. 내가 바로 그 심복 역할을 해냈다. 오빠도 나의 그런 복종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오빠가 큰일을 저지를 때는 주로 방학 때였다. 그날도 방학 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오빠는 오전부터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나는 방앗간 주위를 맴도는 새처럼 부엌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언제 어떤 심부름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오빠가 나를 불렀다. 오늘 기막힌 불꽃놀이를 보여 줄 테니 온 동네 아이들을 빨리 불러오라는 명령이었다. 나는 오빠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헐떡거리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동생이 포대기 밑으로 미끄러지는 줄도 모르고 동네를 뛰어다니며 아이들을 모았다. 열댓 명이 우리 집에 모여들었다. 오빠는 모두 부엌으로 불러 모았다. 부엌에는 세 개의 무쇠솥이 걸려져 있었다. 가장 큰 무쇠솥은 주로 밥을 지을 때 쓰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국을 끓이는 조금 작은 솥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무쇠솥 왼쪽에는 주로 쇠여물을 삶던 또 다른 무쇠솥이 걸려 있었다. 무쇠솥은 기역자형으로 걸려 있었다. 쇠여물을 삶던 무쇠솥 옆에는 작은방으로 들어가는 토방이 있고 그 토방 왼쪽에는 이층으로 된 살강 찬장이 있었다. 살강에는 가족 숫자대로 가장 기본적인 밥그릇 국그릇 반찬 그릇이 피라미드식으로 쌓여 있고 숟가락 그리고 젓가락은 커다란 대접에 무질서하게 담겨져 있었다. 살강 옆에서부터는 벽을 따라 산에서 긁어 온 나무며 장작더미가 천장이 거의 닿을 정도록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리고 부엌 바닥은 신발에 묻어 온 흙 때문인지 조개껍질이 엎어진 듯 옴팍옴팍 울퉁불퉁했다.
작은오빠는 밥을 짓는 무쇠솥과 그옆에 놓여 있는 물 항아리 사이의 빈 공간을 무대로 삼았다. 나는 오빠의 지시에 따라 부엌 바닥에 깔린 동그란 멍석에 아이들을 조르르 앉게 했다. 물론 나의 자리는 중앙이었다. 오빠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이제 조금 후면 자기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 동네 아이들은 술렁거렸다. 오빠는 두 팔을 뻗어 모두 잠잠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옆에서 호기심과 긴장으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뚜막에 선 오빠는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때 함성과 함께 어떻게 박수를 쳐야 하는지 시범을 보였다. 등에 업힌 동생은 포대기에서 몸이 반쯤 빠져나온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드디어 오빠는 불을 뿜어낼 준비를 했다. 병에 든 액체를 한 모금 가득 물고서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성냥을 치익 그었다. 우린 모두 숨을 죽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땀이 쥐어졌다. 오빠는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힌 채 입에 머금고 있던 액체를 푸아하 뿜어내면서 들고 있던 성냥불을 던졌다. 순간 섬광이 번쩍했다. 오빠 입에서 나온 불똥인지 천장에서 떨어진 불똥인지 분간할 새도 없이 아아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부엌은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후두둑 떨어지는 불똥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뛰쳐나갔다. 등에 업혀 있던 동생도 아이들의 비명에 놀라 자지러지듯 울어 댔다. 부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오직 오빠뿐이었다. 예상치 않게 묘기가 빗나가 버리고 부엌이 불길에 휩싸이자 오빠는 필사적으로 불과 싸웠다. 불꽃이 튀어 쌓여 있던 땔감으로 옮겨 붙자 오빠는 우리가 깔고 앉았던 멍석을 들어 불길을 제압했다. 부엌에서 올라오는 시꺼먼 연기를 보고 나는 두려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뻘건 불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순간 시커먼 연기 속에서 오빠가 악을 쓰며 뛰쳐나오더니 부엌 근처에 물이 가득 담겨져 있는 빨간 고무다라이에 얼굴을 처박고 씻어 댔다. 괴로움으로 울부짖는 오빠의 얼굴을 보고 난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오빠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벌게진 것뿐만이 아니라 껍질이 얼룩덜룩 벗겨졌기 때문이었다. 오빠는 쓰라린 얼굴을 감싸 쥔 채 목 놓아 울었다. 동네에 어른들은 모두 일터에 나가고 없었다. 오빠는 꺼억거리며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논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가서 빨리 알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으로 놀라웠다. 소가 뒷발로 오빠 얼굴을 차서 얼굴이 뭉개졌다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엉뚱한 발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조건 논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등에 업혀 있는 동생이 자꾸 포대기 밑으로 미끄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헐떡거리는 검정 타이어 고무신은 아예 벗어서 손에 쥐고 달렸다. 여름 햇빛이 함께 할딱거렸다. 오빠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에게 전하자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삽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논고랑에 푹 떨어졌다.
그날 오빠의 묘기는 지난 장날 회충약을 팔던 약장수가 입에 석유를 머금었다가 뿜어내면서 성냥불을 던져 불꽃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본 것이다. 뿜어내는 석유에 불꽃이 화려하게 붙은 것을 보고 흉내를 내기 위해 석유 대신 집에 있는 휘발유를 사용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그날 저녁 온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낮에 오빠의 묘기를 보기 위해 왔던 아이들은 대문 밖 저만치에서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그 누구도 낮에 보았던 사실을 어른들에게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외양간과 불에 타다가 만 시커먼 부엌을 번갈아 보면서 두런거리며 혀를 끌끌 찼다. 외양간에 있는 소는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되새김질만 하고 있었다.
사라진 언덕
우리 집에서 꿩도 먹고 알도 먹자, 새끼를 쳐서 돈도 벌고 그 돈으로 자식들 공부도 시키려는 심산으로 암소를 키우던 중에 쇠꼬리가 뽑히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꼬리가 없는 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기에 도살장에 헐값으로 팔 수밖에 없었다. 소는 그렇게 사라지고 없는데 집에서는 쇠꼬리 후유증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그 후유증의 여파에는 작은오빠가 우뚝 서 있었다.
소가 없는 우리 집 외양간은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집 골목을 들어서면 바리톤으로 음메 하던 발성 연습도 비올라의 A선 선율처럼 사각거리던 여물 씹는 소리도 드럼판을 봉으로 탕탕 두들기듯 파리를 쫓기 위해 꼬리로 엉덩이를 탁탁 치던 힘찬 박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명예퇴직도 아니고 대형 사고로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한 거나 다름없던 작은오빠는 학교를 갔다 오면 일이 없어 온몸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 온 동네 아이들을 우리 집 마당으로 불러들여 팽이치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루에 동생을 앉혀 놓고 팽이치기 대결을 지켜보곤 했다. 작은오빠는 일 년에 하나 사 줄까 말까 하는 귀한 색연필로 팽이의 윗부분에 무지개 색을 정성껏 칠했다. 팽이가 멋지고 화려한 모습으로 가장 오랫동안 돌게 하기 위해 오빠는 별의별 묘수를 다 부렸다.
그런데 팽이 못지않게 중요한 게 팽이채였던 모양이다. 대여섯 살 난 아이의 팔 길이만 한 막대기를 반질반질하게 다듬었다. 그리곤 엄마가 쓰다 남겨 둔 천 조각으로 넓이 1센티 길이 30센티 정도의 끈을 4~5개 정도 만들어 막대기에 묶은 다음 그 천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팽이를 쳐 댔다. 그런데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오빠는 팽이를 치다 말고 부리나케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아버지 가방 귀퉁이에 걸어 둔 쇠꼬리를 들고 나왔다. 쇠꼬리의 끝은 뭉텅하지 않고 털이 팽이채로 쓰기 딱 좋게끔 나풀나풀하게 풀어져 있었다. 작은오빠는 동네 아이들 앞에 거만한 모습으로 쇠꼬리를 어깨에 턱 걸치고 토방을 내려섰다. 그때까지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팽이가 가장 오래 돌도록 응원하던 아이들의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일순간에 잦아들었다. 그 어느 누구의 팽이채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생전 처음 보는 팽이채를 본 때문이었다. 오빠가 들고 있는 팽이채는 삐들삐들 말라 있었지만 꼬리 끝 부분의 털만큼은 아직도 팽이채로 썩 쓸 만해 보였다.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온 동네 아이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오빠는 의기양양하게 그 쇠꼬리로 팽이를 따악 치자 팽이가 신들린 듯 돌기 시작했다. 오빠는 신들린 듯한 팽이 앞에서 아주 멋들어진 폼까지 연출해 냈다. 그 멋들어진 폼 하며 신기하기 그지없는 팽이채로 하여 오빠는 동네 아이들 위에 또다시 우뚝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논에 일을 나가셨던 아버지가 떡하니 집에 돌아와 버린 것이 아닌가. 오빠가 들고 있던 팽이채가 허공을 향해 발길질을 하는 순간 아버지의 눈에 번쩍하고 불빛이 일었다. 그 쇠꼬리를 보자 도살장에다 헐값에 팔아 버린 소가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부아가 치민 아버지는 오빠 손에 들려 있던 쇠꼬리를 뺏어 들더니 매 타작에 들어갔다. 그날 작은오빠는 뒈지게 맞았다. 그래도 화가 덜 풀렸던지 아버지는 오빠에게 이제 학비 밑천인 소도 없어졌으니 중학교를 가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엄포를 놨다. 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없었다. 아버지의 그런 으름장에 우리는 벌벌 떨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태연했다.
중학교 입학 원서 제출 일자가 다가오자 담임선생님까지 찾아와 사정했으나 아버지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제야 작은오빠의 눈이 다급함으로 깜박거렸다.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의 화가 풀리겠지 내심 기대를 했던 모양이었다. 소의 도살장행 2년이 아버지에게는 어제의 일로, 작은오빠에게는 20년 전의 일로 기억됐던 것이다. 비빌 언덕이 사라져 버린 사실을 알게 된 오빠는 불철주야 골방에 틀어박혀 책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달빛에 비춰진 오빠의 그림자는 하얀 창호지 문에 박제된 문형과도 같았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땀방울을 흘리며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 할 길이다. 주변의 환경과 배경은 비벼야 할 언덕이 아니고 그저 나아가는 길에 그늘이 되어 주고 잠시 쉼터가 되어 주는 역할이면 족하지 않을까. 비빌 수 있는 언덕을 찾아 헤매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도전의 특권을 포기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과 같다.
도전은 곧 길이다. 고통 없는 도전은 있을 수 없고 도전 없는 성취가 존재하지 않듯 성취감 없는 인생은 길을 만들어 갈 수 없다.
소를 삼킨 파리
나에게는 좀 별난 작은오빠가 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얼굴빛은 최소한 면 서기의 아들처럼 희멀거니 말끔했다. 말끔한 얼굴 생김새에 버금가는 명석한 두뇌도 있었다. 가끔 두뇌 회전이 너무 빨랐던지 초등학교 성적표에 총명하나 잔머리를 굴림.이라는 담임선생님의 의견이 쓰여져 있기도 했다. 시골 초등학교 상급반 교실에 있는 환경물 판은 언제나 작은오빠의 작품 전시장과도 같았다.
그런 오빠가 집에서 책임지고 있는 일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우리 집의 보물 제1호인 소의 꼴을 먹이는 일이었다. 소에게 꼴을 먹이는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소를 끌고 나가 풀이 많은 들판이나 언덕을 찾아다니면서 먹도록 하면 되었다. 나는 동생을 업고 소를 먹이러 다니는 오빠를 종종 따라 나섰다. 별로 재미있는 놀이도 아닌데 오빠에게 충성심을 발휘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오빠는 가끔 눈깔사탕은 아니었지만 비과와 같은 사탕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사탕이 순전히 공짜는 아니었다. 가끔 오빠가 소를 먹이러 나온 다른 친구들과 서리를 하러 가면 나는 아주 유능한 목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했기에 주어진 보상이었다.
그날도 오빠는 소를 몰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 근처로 향했다. 신작로의 윗길에 있는 그곳은 소나무가 빽빽하니 들어서 있었다. 작은 소나무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그곳은 어린 아기의 살갗처럼 보드라운 풀들이 성깔 사나운 여름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이기도 했다. 오빠는 작달막한 소나무에 고삐를 묶어 놓고 옆에 있는 넓적한 바위에 누워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낮잠 속으로 미끄러졌다. 난 업고 있던 동생을 내려 풀밭에 앉혀 놓고 신작로에서 주워 온 돌로 1인 2역 소꿉놀이를 하면서 간간이 소가 그 주변에서 풀을 잘 뜯어 먹고 있는지를 보았다. 한참을 놀다가 오빠를 흔들어 깨웠다. 오빠는 눈을 뜨더니 해가 기운 것을 보고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나도 정성스럽게 차렸던 상을 아깝지만 흩트려 버리고 동생을 들쳐 업었다. 소는 어지간히 풀을 뜯어 먹었는지 서서 계속 되새김질을 해 댔다. 오빠는 소나무에 묶어 놓았던 고삐를 풀어서 소 엉덩이를 이럇! 하는 소리와 함께 힘껏 쳤다. 그러자 되새김질을 하고 있던 소가 깜짝 놀라 앞으로 퉁 튀어나갔다. 그 찰나 내 눈에 뻥 뚫린 구멍 하나가 클로즈업되어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원래 소 거시기에 저렇게 큰 구멍이 뚫어져 있었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도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잠시 그 구멍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소나무로 눈길을 돌렸다. 여름 햇빛에 약간 지친 소나무 가지에 밤색 밧줄이 칭칭 감겨져 있었다. 그건 밧줄이 아니고 소의 꼬리였다! 꼬리는 빠졌지만 소가 죽은 것도 아니고 해서 엉킨 꼬리를 풀어서 오빠는 어깨에 걸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논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탈곡하고 남은 볏단과 콩깍지 등을 삶으면서 오늘 소에게 꼴을 잘 먹였는지를 물었다. 작은오빠는 태연스럽게 배불리 먹였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여물을 들고 문간 옆에 있는 외양간으로 들어갔다. 부드럽고 애정 어린 목소리로 소의 여물을 먹이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더니 뚝 끊어졌다. 이놈아, 이거이 뭔 일이여! 하는 아버지의 숨 넘어가는 외침을 듣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외침과 함께 외양간에서 투다닥 튀어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튀는 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 소를 잘 키워서 농사일도 거들게 하고 새끼도 치게 해서 오글오글하니 많은 자식들의 학자금으로 쓰겠다던 것이 아버지의 꿈이었다. 꼬리가 없는 소는 파리를 쫓지 못해 결국은 죽게 된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의 꿈이었던 소는 농사일도 못 거들고 새끼도 못 치고 도살장으로 헐값에 팔려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소가 팔려 가던 날 아침, 아버지의 눈도 소의 눈처럼 벌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를 어루만지고 있던 아버지의 목 울대가 불뚝 올라오더니 툭 떨어졌다. 아버지의 손길을 느낀 소는 고개를 돌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대문을 나서는 소의 엉덩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똥파리 한 마리가 어디선가 휘익 날아와 찰싹 달라붙었다. 꼬리가 없는 소는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터벅터벅 대문을 벗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