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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백두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파란문
황희라고만 하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의 이름 뒤에는 반드시 '정승(政丞)'이라는 단어가 붙어야 제격인 모양입니다.
그많큼 그는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속에서 관료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분이시며,
淸白吏로서도 너무나 유명한 黃喜政丞의 숨결을 느낀다는 것은 감회 새로운 일이라 여겨
눈이 내리는 지난주초에 횡하니 발길을 "半鷗亭"으로 내디뎠습니다.
일산에 살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황희정승의 유적지 "半鷗亭"을 찾아 본다는게 벌써 십년이 넘었지만
오늘이 처음이라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모습이 모두 역사 속으로 달리는 듯
눈 내린 거리는 한가롭기까지 했습니다
도시를 벗어나니 뻥~뚤린 '자유로'가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낙하리 근처에서 손님을 유혹하고있는 호화 유람선이 산비탈에 올라 앉아있었습니다.
저 유람선의 주인은 여러명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배가 산으로 올라 가려면 사공이 많아야할테니 사장님이 혹시 여러명이 아닐까하는 씰때없는 생각을 하면서,
"半鷗亭"으로 들어가는 문산 나들목으로 나갔습니다.
문산 나들목을 나가자마자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5~600m정도 가면 바로 "半鷗亭"이 나옵니다
생각했던것보다 규모가 크고, 깨끗하게 단장되있는 "半鷗亭"을
저의 생애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라 다소 흥분되기도 했습니다
월요일 오전 눈이 내린 날이라서인지 방문객은 저와 저의 愛犬 '하루' 뿐이어서
아무런 제약없이 돌아 볼수 있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기대했던 역사의 숨결 -유물-등은 전혀 볼수 없어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기념관 한쪽은 영상으로 황희정승의 생애와 업적을 관람하는 곳이라 했는데
관람객이 한 사람뿐이라 상영하지 않는 듯해서 또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정문에서 좌측으로 바라보니 짜~짠~
자료 사진에서만 보던 "半鷗亭"이 회색빛 하늘 아래 우뚝 솟아 정겹게 나타났습니다.
사진 속에 저의 愛犬 '하루'가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구정을 마음대로 돌아 다니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ㅎㅎ
앞으로는 공공장소에 애완동물을 묶어 다니지 않으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한다니
우리 '하루'는 이번이 마지막 '자유'였을 가능성이 큼니다
그러나 저는 평시에 우리 '하루'라기보단 묶어야 할 인간이 너무 많은 우리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淸政門이라는 정문 뒤에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半鷗亭"과 "仰止臺"가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이제서야 찾았다니 게으른 습성을 탓할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사실 이곳은 "半鷗亭"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식 명칭은 "黃喜先生影堂"이었으며,
"黃喜先生影堂" 속에 "半鷗亭"과 "仰止臺"가 있다고 표현 하는게 더 나을 듯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에겐 그나마 "半鷗亭"이 더 친숙한 느낌이 드는건 어찌 할수 없었습니다.
月軒祠는 황희정승의 高孫인 소양공 月軒 황맹헌(1457~1535)선생의 신주를 모신 부조묘라고합니다.
月軒선생은 문장 글씨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明나라에서까지 격찬을 받았다고 하네요
黃喜先生의 호는 방촌이시며 본관은 장수라고 합니다.
여담임니다만, 그래서 지방자치가 활발한 요즈음 전라북도 장수군도 본관이 장수임을 강조하며
黃喜先生을 자기 고을 인물화하는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합니다. 요즘 곳곳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죠?
방촌 황희선생의 일생을 간략히 훌터보고 가야겠습니다.
黃喜先生은 고려의 왕들중 마지막왕 공양왕으로부터 뒷쪽으로 세번째 왕인 공민왕 때인
1363년 지금의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말의 정치 상황
우선 이 당시의 우리나라 고려말의 정치 상황을 되짚어 보고 가겠습니다.
노국공주와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며, 원나라 침입을 몰아내고 원나라 배척화와 국토회복에 앞장선 공민왕.
그도 무인정권으로 대변되는 로마제국의 씨이져를 시해하는 부루터스와 같은 역활을 하는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처참하게 시해당하고 맙니다.
그의 아들이 열살에 왕위에 오르니 그가 우왕이었으며 그 시절 신군부세력 이성계를 못마땅히 여긴 집권세력은
이성계를 전장터로 내 몰지만,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으로 집권세력을 무너뜨리고 실권을 쥐게되지요
이때부터 '신군부 국보위 위원장'은 이성계가 훗날 전두환처럼 되며,
장세동이 같은 정보부장은 이성계의 셋째아들 이방원이가 서슬퍼런 칼날을 휘두릅니다.
이성계가 우왕을 내몰고 창왕을 꼭두각시 왕으로 내세워 섭정을 하게 되는데,
최규하대통령과 국보위 위원장 전두환이와의 관계처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도 최규하같은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이성계와 이방원이의 얼굴 마담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했던 고려말시절,
黃喜先生은 1383년 우왕 시절에 21세로 생원시, 그후 23세에 진사시, 27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기나긴 관료생활을 시작합니다.
고려의 실권을 쥐고 있던 이성계였으나,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했으니...
그래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와의 시조 대결이 성사 되죠.
군바리들 치고 주고 받는 시조가 품격이 있다고 아직도 유명합니다요
이방원 :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따식아 내편 되어 주라~~!!" 아무리 애걸구걸을 해도...
정몽주 :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따식아 니가 아무리 꼬셔도 안넘어 간다~ 이 전두환 장세동이 같은 넘들아~~!!"
이방원은 정몽주와는 도져히 같이 공생할수 없음을 확인하고 12.12사태를 일으키죠....선죽교에서...
잔인하게 정몽주를 살해하고 이제 어느 누구도 덤비지 못하는 명실공히 절대 권력을 쥐고
새로운 5共을 탄생 시키니 바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 "朝鮮"입니다...
에구~ 조용할 날 하루도 없는 나라인데...
고려의 관료로 일하고 있던 黃喜先生은 피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세력과 손잡고 政事를 함께 할수 없었습니다.
두문불출
쿠데타 철혈정권인 신군부 세력에 협력해서 政事를 함께 할수 없었던 고려의 충신들 73명이
현실 정치를 떠나 지금의 송악산인 만수산의 어느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숨어 살며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 73명중에 黃喜先生도 있었습니다.
이 만수산의 깊은 산속을 "두문동(杜門洞)"이라 했으며,
그 두문동에서 일체의 세상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탄생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문동에 들어 간 고려의 충신 73명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된 말인 것입니다.
이 "두문불출(杜門不出)" 이야기에 얽힌 古史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첫 과거 시험을 치뤘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시험장에 나온 이성계는 과거시험장에 시험보러 온 선비가 거의 없는 것을 보고 거의 기절할 지경이되었다고 합니다. 젊은 선비가 없다는 것은 정권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왕조의 운명이 어떻게될지 알 수 없었기때문입니다.
이 때 과거시험장의 한 선비가 "이제 보셨소이까? 이것이 바로 백성들의 마음이고,
또한 하늘의 뜻이올시다!"라고 외치며, "우리도 두문동으로 갑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당시 두문동에는 신규, 조의생, 임선미등 73명의 선비가 정권에 거부하고 은거하고 있었다고 위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성질 더럽게 난 이성계와 이방원은 두문동의 선비들을 끌어내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고려왕조를 무력으로 무너뜨린 이성계 이방원이가 아무리 설득해도 고집불통인 두문동의 선비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성계와 이방원이는 성질이 개뿔따구까지 솟아 이들을 끌어내기위해 두문동에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에 타 죽을 운명을 맞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불에 타 죽고 말았답니다.
이때 죽은 72명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며
이때부터 한곳에 오래 머무르며 문밖 출입을 하지않는 것을 두고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두문동(杜門洞)에서 살아 나온 유일한 한 사람 --- 그가 바로 黃喜였습니다
72명의 고려 충신들이 "黃喜!~ 당신만은 살아 나가 그 학식과 덕을 백성을 위해 베풀게나~!!"라고 했다나요?
이 말은 좋게 평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신군부 세력에 동조했다는 평이지요.
사실, 黃喜는 나중 자신을 회고 할때 "내 생애에 최고로 수치스런 두가지 사건 중에 하나"라고 실토합니다.
" 그 하나는 杜門洞에서 나온 일이며, 다음은 제주 감목관 태석균을 사정으로 구원을 청한 일"이라고 합니다.
仰止臺 올라 가는 담 옆으로 국토분단의 상징 "휴전선 철책"이 지나고 있습니다
半毆亭이 원래 이 仰止臺 자리에 있었는데 1915년 半毆亭을 현 위치로 옮겨 지어면서
방촌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짓고 仰止臺라 하였답니다.
半毆亭인 이곳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 바다로 사라져 가는 洛河里에 있어
원래 洛河亭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답니다.
황희선생이 틈틈이 갈매기와 벗하며 삶의 충전을 위해 보냈다는 데에서 다시 半毆亭으로 개명 되었다는군요
같은 시대에 한동안 함께했던 한명회는 정계은퇴후 한강변에 狎毆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는데
현재 그곳은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狎毆亭은 이제는 찾아 볼수 없습니다.
황희 정승과 한명회 - 비교되는 인물이죠.
우선 황희선생은 뒤에 "정승"이란 말이 붙으나 한명회 뒤에는 아무 것도 붙이지 않습니다.
실제 한명회도 엄청나게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의 핵심에서 군림했으며 영의정도 오래 했고
특히, 한명회의 딸들은 모두 왕비가 되었을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습니다만
조선의 두번째 쿠데타정권의 핵심 수양대군에 빌붙었던 그를 역사는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뿐 아니라 전세계 역사에서도 찾아 볼수 없는 두딸이 모두 왕비가 된 일...
예종,성종의 마눌이 모두 한명회의 딸이며,조선 왕 두명을 사위로 둔 시집보내기의 명수인 한명회,
세조의 둘째 아들이 예종으로..예종이 일찍 꼴까닥하자 후세가 너무 어려...
더 일찍 고향 앞으로 간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의 차남이 제9대 성종이 되는데.....
어휴~ 족보 따지기도 골머리 아픈데, 삼촌 조카 사이인가요? 예종과 성종 관계가...
그러면 언니 남편이 뭐가 되던가요? 아유 골머리 아프~~
여하튼 한명회는 왕들을 사위로 만들기의 대가이며 권모술수 모사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술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이라고 누가 평가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기심에 불타는 한명회를 부러워하는 넘들이나, 좀 무식한 분들이
압구정의 압은 누를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압구정도 반구정과 거의 같은 뜻으로
갈매기와 함께 벗하며 지낸다는 익숙할 狎이오니 외곡되지 않길 바람니다 .
우스게 소리입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淸白吏의 대명사 황희정승이 노닐던 半毆亭 동네는 땅값이 개값이고
쿠데타정권에 빌붙어 사리사욕에 눈멀었던 한명회가 노닐던 狎毆亭 동네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땅값을 자랑하고 있는데...역시 돈은 붙는 놈 한테만 붙는 모양입니다.
- 2부에서는 황희정승의 화려한 공직생활을 조명합니다 -
- 2부에서 또 만나요 -
첫댓글 블랙홀님 덕분에 반구정 옆을 차 타고 지나면서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