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 라투르’(프랑스 최고급 와인)는 너무 비싼 것 같아. 그냥 세컨드 와인(질은 높지만 명품 기준에 조금 못 미쳐 저렴하게 파는 제품)인 ‘레 포르 드 라투르’로 할까?
“그 와인은 너무 영(young)한데…. 그냥 ‘알테 에고 드 팔메’ 어때? 아, 이거 디캔팅(decanting·와인을 용기를 옮겨가면서 따라 숙성과정에서 생긴 침전물을 제거하는 것)해 주세요.”
소믈리에들의 대화가 아니다. 회사원 박재석(32) 씨가 동료들과 나눈 이야기다. 그는 와인을 다룬 만화 ‘신의 물방울’의 애독자다.
○ 자동차, 사진… 아는 만큼 재미있다
최근 30, 40대에게 인기 있는 책 중 상당수는 만화책이다.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특정 전문 분야를 정교하게 다룬 만화를 찾는 성인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만화가 ‘신의 물방울’. 누적 판매량은 25만 부다. 일본 만화가 40대에까지 인기가 많았던 적은 드물었다.
주인공이 일본 최고 와인 평론가가 되는 과정을 그린 단순한 스토리지만 수많은 와인 동호회의 지침서가 됐고, 와인업계 매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백화점 와인 코너마다 이 책에 등장한 ‘몽페라’, ‘루이 자도 샤블리’, ‘샤토 팔메’, ‘크로 파랑투’ 등은 없어서 못 팔 지경.
이 책의 장점은 전문서적을 능가하는 전문성. 소믈리에 유경호(38) 씨는 “전문가들의 테이스팅 노트(와인을 시음한 후 기록하는 것)조차 만화에 나오는 표현법에 영향을 받았을 정도”라고 말했다. 와인을 마신 뒤 “1992년산 샤토 무통 로칠드는 밀레의 ‘만종’이 그려지는 듯한 맛”, “2001년산 샤토 몽페라를 입술에 댄 순간 록그룹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들린다” 등 풍부한 표현도 인기다.
미술품을 다룬 ‘갤러리 페이크(GALLERY FAKE·복제 화랑)’도 꾸준히 화제다. 세계 고미술품에 대한 정교한 해설은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30, 40대 일반인에게도 인기다. 큐레이터 주인공이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 르누아르의 ‘목욕 후’, 피카소의 ‘청색시대’, 세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유명 작품의 미학적 의미와 그에 얽힌 사연을 다양한 스토리로 풀어나간다. 윤범모(회화 전공) 경원대 교수는 “만화와는 담을 쌓았는데 미술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진 유능한 미술사학자가 들려주는 자상한 미술 이야기에 매혹됐다”고 밝혔다.
‘팩토리 Z’는 자동차와 이를 취재하는 카메라맨의 세계를 그렸다. 카 튜닝, 디자인 등 유명 자동차에 대한 정교한 해설과 사진기, 촬영기술 등 사진 관련 전문 지식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의학 전문만화 ‘타임슬립 진’, 초밥 전문만화 ‘키라라의 일’ 등도 40대까지 빠져들게 하는 전문만화다.
‘신의 물방울’ 와인 만나기
만화적 상상력으로 다시 태어나는 와인들
국내 와인 업계에 느닷없이 불어 닥친 만화 열풍은 생각보다 거세였다. 일본 만화책, ‘신의 물방울’은 일반 만화독자뿐만 아니라 와인 애호가들까지도 찾아서 볼 정도로 인기를 얻었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와인 또한 관심과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55차 와인 아카데미, ‘신의 물방울’ 와인 만나기는 궁금했던 만화 속의 와인들을 맛볼 수 있는 자리였다. 만화 속에서 와인의 맛을 표현하는 장면은 다소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데, 만화적인 상상력의 결과로 이해하기 쉽고 빠르다. 머리 속에 빙빙 도는 단어들을 그림으로 묘사해 이해를 돕지만 어쩔 땐 ‘이건 아니다’란 거부감이 들기도 하다.
‘신의 물방울’은 특히 부르고뉴 와인에 관한 대중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등 어느 정도 와인 붐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소개되는 와인들이 유명하고 비싼 와인에 국한되는 것과 극적인 에피소드를 가지기 위해 과대포장을 하는 등 문제점들도 지적되고 있다. 더구나 만화 내용에 너무 경도되어 만화를 와인 평가의 잣대로 삼는 일부 독자들의 태도 등 부정적인 영향도 나타나고 있다.
와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만화 속에서 묘사되는 와인은 작가 개인이 느끼는 것일 뿐이며 우리와 똑같이 테이스팅 노트를 쓰는 것이다. 그렇기에 맹신할 필요도 무시할 필요도 없다. 와인을 즐기듯이 이야기를, 이야기 속의 와인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만화 속 인물이 말하듯이 말이다.
‘와인이란 원래 가볍게 마개를 퐁, 따서 친구와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즐기는 거라구.’
시음와인 소개
1. Chateau Mont-Perat 1998 - 메를로 90%, 카베르네 프랑 10%
푹 익은 카시스의 향이 진하게 다가온다. 검은 과실의 아로마가 잘 응축되어 있고 타닌도 잘 정돈되어 부드럽다. 시간이 좀 지나서 인지 신맛은 드러나지 않았고 지금 마시기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