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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여성시인회 산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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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까치 이야기 스크랩 생명 속에서 길어 올리는 힘찬 날개짓
김경미 추천 0 조회 30 14.12.11 15: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생명 속에서 길어 올리는 힘찬 날개짓



권갑하

1

어제 밤에는 느닷없이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이 가을날에 천둥비라니! 우연히 마주친 이름 모를 소녀의 눈망울처럼 가을 속으로 차분히 잦아들던 내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놓았다. 그리곤 어디로 떠나버린 것일까. 꿈결처럼 아득한 어젯밤의 사연들이 문득 떠올라 문을 나섰다. 아직 물들지 못한 마음이 바깥 공기에 바싹 몸을 움츠린다. 아스팔트 바닥이며 나무 가지들이 물기를 머금어 까맣다. 길바닥에는 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나뭇잎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가슴 한켠에 아직 푸른 수액을 품고 있는 나뭇잎들. 차마 떼어놓기 싫은 발걸음처럼 나뭇잎들의 눈빛이 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 거기, 아 거기에 품 넓은 벚나무 한 그루 조용히 서 있었다.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나무가 뭔지 아세요? 허공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의 옆구리로 미처 덜 익은 생각들이 올망졸망 달라붙는다. 벚나무 단풍 본적 있으세요? 가을 물소리처럼 갑자기 마음이 맑고 환해지던 기억. 그 나무가, 거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형형색색의 빛깔로-. 어머님처럼, 세상의 모든 빛깔을 가슴에 품어 왔음일까. 강아지를 품에 안은 짧은 머리 소녀가 그 나무 밑을 껑충껑충 뛰어간다. 그 순간, 한 빛깔을 또 우려내려는지 잎새 하나가 파르르 몸을 떤다.

2

강원 여류시를 대표하는 산까지 동인들의 작품을 읽는다. 한편 한편에서 창립 20년, 동인지 15집의 시력이 느껴진다. 강원도 각 지역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들임에 다들 각자의 시세계를 올곧게 펼치고 있다. 이런 역량 있는 시인들이 '동인'이라는 끈으로 손을 잡고 있음은 시인 자신을 위해서나 지역 문학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을 터이다. 이런 애씀이 없다면 누가 골골 마다 피어오르는 저 강원의 숨결을 가슴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산까치'라는 동인명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온다. 강원도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기쁜 소식을 머금고 조용한 새벽산을 깨우는 산까치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맑게 울려 퍼진다. 이 아름다운 '산까치'들의 청량한 노랫소리에 어느 뉘 마음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랴.

온 세상 먼지를 거두어 마시는
설악산 훤한 날개짓이여
-박명자,「설악산」에서

그렇다. 한반도의 허파요, 새벽을 여는 정신의 발원지로서의 강원, 그것은 바로 강원도의 힘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천으로 회귀하는 수많은 연어떼처럼 강원도로 달려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달려가 성스러운 태백의 품에 안긴다.

'강원의 숨소리'란 주제로 시를 모은 특집의 의미는 그럼 점에서 각별하다. 동해 일출의 장엄함, 백담사 훼손에 대한 안타까움, 고향에 대한 향수,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치열함, 설악산의 수려함, 정감 넘치는 춘천의 찻집, 조용히 생을 관조하게 하는 영동선 열차, 대관령 휴양림, 경포대 등 '강원도의 숨결'이 편편마다 출렁인다.

편지통이 비었다
한 웅큼의 어둠을 끄집어내어 읽는다
메시지 하나 없는 그대 가슴이듯
-권정남, '편지통이 비었다'에서

권정남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인간 소외의 문제를 예리하게 짚는다. 따뜻한 마음이 담긴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본 적이 그 언제였던가. 이제 편지통은 고지서와 광고지용으로 변한 지 오래다. 하지만 오늘도 시인은 편지통 앞을 서성인다. '흰 편지지에 촘촘히 써내려간 잉크냄새 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알다가도 모르겠어
저하고 살자고 저토록 찬란한 건 아닐테고
너도 살고 나도 살고 같이 살자고 그토록 향기로운가?
잔뜩 물 오른 채 팝콘처럼 부풀어 터질 것 같아
- 김경미, '그 여름, 아카시아' 전문

김경미의 시는 '잔뜩 물이 올라' 있다. '부풀어 터질 것만 같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가위 연금술사라 할만하다. 좋은 시란 이처럼 설명이 필요 없는 시다.「새처럼 울어봐」도 '그 여름-'과 같이 독백체의 감각적인 시편이다. '어쩌나 / 밀봉된 향기 꺼내려 은빛 투망을 치다가 저도 모르게 솜털 같은 여름 햇살 툭 건드렸나봐'(「새처럼 울어봐」일부) 같은 구절은 마치 새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즐거움에 휩싸인다.

저만큼
꺾인 세월
멀고도 험난한 길
상처 틈새 어루어
서로의
옷자락 붙들고
저녁강 비우고 채우며
선홍빛 꽃을 피운다
-김은숙, '어머니 강에 꽃을 피우는-연어' 둘째 수

김은숙 시조의 장점은 어느새 형식의 구속을 넘어서고 있는 데다, 오십천의 격조 높은 흐름처럼 종장의 굽이침의 빼어남에 있다. 어휘 구사가 능수능란하며 시에 이미지를 덧씌울 줄 아는 재주를 갖고 있다.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된 연어가 간신히 모천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마침내 저녁강에서 장엄한 죽음을 맞는 장면을 '서로 옷자락을 붙잡은' 동적 이미지와 '선홍빛 꽃'의 시각적 이미지로 깊이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 처절한 숙명적 몸부림이 저녁 이미지와 겹치면서 한없는 아름다움을 흩뿌리고 있다.

빈손으로 오일스틱과 물감덩이를 가지고 격동적으로 그리는 놈,
오방색을 가지고 무념무상 유희하듯 즐겁게 그리는 놈,
마치 미장이들이 흙손을 가지고 토담 벽에다가
두텁게 흙을 바르듯 바람결을 일구는 놈
- 박명자, 「잎새들의 그림」에서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잎새들의 속삭임을 알아들을 수 있고, 하찮은 몸짓의 의미도 번역해낼 줄 알아야 한다. 박명자 시인은 그런 눈과 귀를 가졌다. 그러기에 '햇살을 받기 위하여 그들이 몸을 열 때에는 / 풍금소리가 가늘게 들리'는 것이며, '잎새들의 저쪽 세상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자연이 탄주하는 미세한 노랫소리와 은은히 드러내는 표정들까지 읽어 낼 줄 아는 시인은 그러기에 행복한 사람이다.

다음 생을 함께 하지 못한다 해도
그대에게 밀려가는 것이기만 하다면
지금 어둠 속으로 지는 게
뭐 그리 대수이랴
-박소희, '달' 전문

'달'을 소재로 이처럼 아름답게 사랑을 노래한 시를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달리 이 시에 사족을 달기가 두렵다. '지는 것은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 밀려가는 것이다'는 선언적 구절에서는 짐짓 주눅이 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는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흠뻑 젖어 마냥 행복해진다. 이제 내 책상 옆에는 박소희의 이 「달」이 오래 걸려 마음의 어둠을 밝힐 것이다.

어제 남은 사랑이 지루하고
어제 남은 이별이 지루하고
어제 남은 꿈이 지루하고
어제 남은 슬픔이 지루하고
부끄럼 없이 쏟아내는 시들이 지루하고
성에 차지 않는 내 시는 더욱 지루하고
-박영희, '하루는 지루하다' 전문

한마디로 '지루하지 않은' 시다. 도입부분의 '바삐''빨리'의 호흡이 '지루하다'의 이어짐과 충돌하면서 강한 시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지루하다'의 연속에도 대상을 적확하게 묘사해냄으로서 강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그 속에서 만나는 시인의 진실은 시를 더욱 감동으로 이끈다. 이 지루함의 나열을 마지막 연에서 '쓸쓸한 환상'의 이미지로 뒤집는 솜씨도 놀랍다.

대구벌로 들어선 평평한 길
기차는 속도를 낸다
내 평평한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데
-심재교, '영동선 기차를 타고'에서

곧지도 순탄하지도 않은, 레일이 철거덕거리는 '영동선 기차를 타고' 계속되는 길고 짧은 터널을 지나면서 시인은 어느새 자신의 인생을 관조한다. 오르고 내리고, 앞으로 가고 뒤로 물러서는 통리재에 이르러서는 서툴게 살아온 지난날들을 조용히 되돌아본다. 그런 험난한 길을 지나 이제 기차는 '평평한 길에서 속도를 내지만' 정작 자신의 '평평한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생에 대한 깊은 관조의 감동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와 밝게 터진다.

거대한 괴물이
나를 커다란 먹이로 알고
자꾸 물었다 놓았다 한다

이제 반쯤은 먹이었을 게다
이 세상에 나와
아무 것도 공양할 게 없는
나에게,

차라리 잘된 것 같다.

-이영춘, '인생' 전문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이제 반쯤은 먹히었을' 자신을 '차라리 잘된 것 같다'니! 저 광대한 우주의 손놀림을 읽을 줄 아는 시인의 시안(詩眼)이 놀랍기만 하다. 우리들과 한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이 무언가를 움켜쥐려고, 먹으려고 발버둥치는 '아무 것도 공양할 게 없는' 우리 '인생' 앞에 이렇게 좋은 그림을 펼쳐 보여주고 있는데, 생이여 새삼 무엇이 문제랴.

도대체
무엇을 위한 행진인가
머무는 것보다는
앞으로만 가는 것보다는
뒤로도 돌아가 보세
누군가의 덫에
우린 이미 익숙해진 터
-기정순, '페르조나(Persona)'에서

페르조나(persona)란 그리스 시대에 배우가 썼던 가면을 뜻한다. 이 라틴어 '페르조나'에서 '사람'(person)이란 말이 유래되었다. 사람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존재다. 한 남자는 아버지, 남편, 직장에서는 상사, 부모 앞에서는 아들의 페르조나(가면)을 가진다. 그가 쓰는 가면에 따라 행동은 달라진다. '누군가의 덫에 / 우린 이미 익숙해진 터'의 구절이 암시하듯 기정순은 '나를 위한 가면은 / 이제 벗어버리라'고 소리친다.

남의 손이 아니고선 머리 하나 들 수 없는데도
드러내고 싶은 끊임없는 과시욕
미음도 삼키지 못하면서, 의지도 없으면서
나물 넣고 쓱쓱 비벼먹고 싶은 밥 생각

끈·질·김
-지영희, 「또 다른 절망」 전문

살아있다는 것은 '끈질김'이며, '끈질김'은 끝없는 인간의 욕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살아있음'은 '또 다른 절망'에 닿아 있음 아닌가. 하지만 어쩌랴. 그 끈질김으로 오늘을 견뎌야 함을.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끈질김'은 어느새 희망으로 변한다. 희망 없이 어찌 끈질길 수 있으며, 다시 끈질김 없이 어찌 절망엔들 가 닿을 수 있으랴. 지영희의 노래는 한없는 희망에 자신의 발을 담그고 있다.


한 남자를 水葬하러 갔었네
아주 오래 전에
그래 놓고 까마득히 잊었네
어쩌다 홀연히 떠올리곤
잘 있는지 단지 그게 궁금해
- 이충희, '水葬에 관한 보고서' 전문

글쎄, 이리저리 옷자락을 들쳐 보지만 도무지 잡히는 게 없다. 무얼까. 그때 갑자기 '한 남자'가 물컹 만져진다. 오래 전에 몰래 숨겨둔. 그걸 수장이라고 하자. 한 때 변산반도 어디쯤에서 아름다운 노을에 함께 몸을 맡겼던. 그러니 눈물이지 않을 수 있으랴. 속마음은 문 앞에서 늘 덤벙거리듯, '어쩌다''홀연히''단지'로 가려보려 하지만 자꾸만 발길에 채인다. 아, 내게도 이렇게 덤벙거리며 보고할 '까마득히 잊은' 사연 하나 가슴에 품고 있다면….

무성한 푸른 잎사귀로 몸 가린채
목청 높여 몸을 푸는 계곡
콸, 콸, 콸
나도 저토록 시원하게
내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 채재순, '꽃피는 계곡' 전문

'계곡'은 모든 생명의 고향이다. 그 계곡의 생명력으로 씨앗이 움트고 꽃이 핀다. 하지만 그 것이 안개에 가려질 때 우리네 삶은 금방 시들해져 버리고 의욕을 잃게 된다. 그 안개를 말끔히 걷어내 주는 것이 바로 '비'다. 여기서 비는 다시 원초적 생명으로 환치된다. 그 생명을 받아 시들해진 일상을 씻어내고 콸콸콸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내지를 수' 있다면 오늘 이 하루가 얼마나 희망차고 새로우랴. 그 속에서 만나는 행복감이란 또 얼마나 뜨겁기만 하랴.

속 모르게 애끓은 가슴
밭뙈기 째 갈아엎던 수많은 작업을
평생토록 가슴밭에
영양제 한 번 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 홍성화, '가슴밭' 전문

이 시의 매력은 밭과 우리의 가슴이 연결된 '가슴밭'이라는 이미지의 폭넓은 공감에 있다. 여기서 가슴밭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지만, '씨뿌리고 / 열무 솎으며 키웠지만 / 썩을 대로 썩은 밭작물'이나 '바람이거나 비이거나 눈이거나 / 다시 일으켜 세웠던 / 속 모르게 애끓은 가슴'에서 내게는 부모님의 가슴으로 읽힌다. 그 '가슴밭에 영양제 한번 주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은 생에 대한 깊은 반성이 담겨 있다.

3

멀리 산의 이마가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어디를 다녀오는지 강아지를 안은 소녀가 다시 벚나무 밑으로 껑충껑충 뛰어온다. 여전히 형형색색의 빛깔로, 가끔은 파르르 전율지면서, 거기 벚나무 한 그루 조용히 물들고 있다. 철없이 시의 발목을 더듬으며 잠시 수다스러운 사이.


(강원 여류시동인 산까치 15집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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