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에 걸쳐 제왕이 나올 천하의 명당자리가 있다"
흥선대원군은 어느 날 당대의 풍수가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풍수지리설을 좋아했다.그는 서둘러 그 현장을 방문한다.
그 자리는 빈터가 아니라 사찰이 있었고
명당의 혈(穴)이라 지적해준 자리에는 석탑이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물러설 대원군이 아니다.
묘책을 써서 절간을 불태워버리고 석탑을 부숴버린다.
그는 경기도 연천에 있던 그의 부친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곳이 바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남연군 묘이다.
그로부터 7년 후 대원군은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를 보게된다.
명복이 태여난지 1년쯤 됐을 때이다.
청도에 사는 관상가 박유붕(朴有鵬)이 운현궁으로 흥선군을 찾았다.
"서운관 근처에 서기(瑞氣)가 서려있다."
명복을 보여달라며 거듭 청한다.
그는 벌떡 일어나 명복을 안고 있는 흥선군에게 큰절을 했다.
"도련님께서는 천일(天日)의 기상이 역력하옵니다."
천일의 기상이란 왕을 뜻하는 것이다.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니 감회가 어떠했을까?
대원군은 박유붕을 책사로 고용한다.
박유붕은 경북 청도가 고향이었다.
그는 처가의 영향을 받아 관상에 일가견을 갖게 된다.
그의 처가는 두릉(杜陵)두씨다.두릉두씨의 시조는 두사충(杜師忠)이다.
두사충의 호는 모명(慕明또는 連齋)으로써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
조선에 귀화하여 두릉두씨(杜陵氏) 복야공파(僕射公派)의 시조가 된다.
그는 기주자사(冀州刺史)를 지낸 두교림(杜喬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국에서 상서(尙書) 벼슬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나왔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원군으로 조선에 들어오면서
두사충을 지리참모로 대동하였다.
이여송의 일급참모였기 때문에 조선과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 장군들과도 긴밀한 전략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이여송이 1593년(선조 26) 1월 평양성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지키는 일본군을 격파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그러나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진격한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을 얕잡아 보고 서두르다가 벽제관(碧蹄館)싸움에서 대패를 당한다.
패전의 책임이 진을 잘못 쳤다는 이유로 두사충에게 돌아갔다.
그를 죽이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때 우의정으로 접반사(接伴使)였던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죄를 면해줄 것을 건의하여 목숨을 가까스로 건졌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도독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나와
비장복야문하주부로 활약하면서 공을 세웠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재회하게 된다.
이순신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사람이 수 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 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였다.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지금도 후손들은
사당 모명제(慕明齊)에 충무공 시를 걸어놓고 있다.
박유붕의 처가가 중국 도사 두사충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그는 처가에서 전해오는 두사충의 풍수서와 관상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자 서울 운현궁으로 올라가
앞으로 명복도련님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명복 도련님이 고종으로 등극할 무렵부터 대원군은
박유붕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도록 운현궁에다가 붙들어 놓았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복채(福債)로
서울 '삼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구역을 박유붕에게 떼어 주었다.
그가 살았던 45칸 집은 운현궁 길 건너편에 있었다. 현 '수운회관' 뒤였다.
어느날 대원 군이 명성황후를 며느릿감으로 데려왔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유붕은 반대하였다.
한 번 반대하고 두 번 반대하고 세 번째 반대를 하니까,
"내 며느리를 보는 것이지, 당신 며느리 보나?"
대원군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대원군과 멀어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청도를 빛낸 사람 175명'에는 그의 말년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매천야록 (梅泉野錄) 첫장에 박유붕이야기가 나온다.
청도 (淸道)에 사는 박 유붕(朴有鵬)이란 사람은 관상을 잘 보았는데
자기의 용모를 보고 한 쪽 눈이 애꾸가 되어야 귀하게 된다고 하여 드디어 한 쪽 눈을 질렀다.
어렸을 때 고종 (高宗)을 뵙고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게 하고 말하되
"이분은 왕이 되실 분이니 이러한 말을 누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하고 당부하였다.
그는 갑자년(고종 원년)후에 관직이 남양부사 (南陽府使) 에서 수사에 까지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매천야록에는 그의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궁인 이씨 (宮人 李氏)가 완화군 (完和君)을 출산하자 계씨 (季氏)로 사성 (賜姓) 했다.
이 때 고종은 나이 17세로서 매우 기세하였으며 완화군을 원자(元子)로 삼으라고 하였으나
대원군은 중궁( 中宮) 에게서 경사가 있으면 어찌하려 하느냐고 반대 하면서
조급히 서두르지 말 것을 간 (諫)하였다.
고종은 관상가 박유붕을 불러 물었 지만 그는 생각에 잠겨 머뭇거리다가
조금 늦추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왕은 매우 노여워하면서
그가 대원군의 지주(指嗾)를 받고서 늦추라고 한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박 유붕은 사망했다.
구례 (求禮)사람 유 제관 (柳濟官)이란 사람은 무과(武科 )에 급제하여
서울에 살면서 박 유붕과 내왕을 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하루는 박 유붕의 집을 방문하니
그는 뒹굴면서 죽으려하며 구구(사람몸의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놀라서 물어니 팔을 저으면서 응답하지 못하다가 잠시후 죽었다.
어떤 이는 사약(賜藥)을 내려 죽게 한것이 아닌가 하였다고 유제관 (柳 濟官)이 나에게 말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구구한 말들이 많으나 그 진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아들인 부사 박 풍혁이 친리길을 운상하여 지성으로 지성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