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시깽이의 질투와 의로운 형제
할아버지는 나를 머시깽이라 부른다. 나는 2007년 3월28일 황금돼지해에 태어났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소의 해인 2009년5월4일 부지깽이가 태어났다. 겨우 두 살이 되어 막 어린이 집에 다닐 때인데 나를 바라보던 어른들의 눈길은 모두 부지깽이에 모아지고 따스하던 엄마 품에는 부지깽이가 안겨있었다. 나는 둥지를 잃고 아빠의 무르팍도 잃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학교에 나가는 할머니가 데리러 오는 토요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은 우리집 보다 넓고 일주일동안 내 장난감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어린이 집에서도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데려다 주는데 머시깽이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요-’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나 보다. 나는 뒷좌석의 어린이 안전벨트에 묶여 있는데 할머니는 그것이 안쓰러웠나 보다.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성경을 보시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신앙으로서의 종교는 아직 내게 없다’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구약의 첫 구절에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으셨다. ‘머시깽이가 부지깽이를 꼬집었나 봐요-’ 할머니가 고자질 하시면 할아버지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할머니가 미워진다. ‘부지깽이 미워-할머니도 싫어-’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할아버지는 이번에 아동심리학과 어린이심리백과에 무소유까지 여러 권의 책을 뒤적이시지만 성경에서도 심리학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신 듯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부지깽이가 기어다니게 되자 할아버지 집으로 함께 오게 되었다. 전선이 연장되고 그나마 평화롭던 내 주말의 자리가 사라졌다. 나만 안아 주시던 할아버지를 세워놓고 ‘우리 부지깽이 할아버지 한번만 안아드리게 하자-’ 할머니가 집에만 오시면 하는 이야기를 엄마는 이제 할아버지 집에서 다시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만큼 엄마에게 배신을 느낀 때가 없었다. 더구나 아빠도 할머니도 싱글싱글 이벤트의 순간을 기다리는 광대들 같았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할아버지는 덥석 나를 안고 복도로 나와 창밖의 구름을 보여주시며 ‘울고 싶어?’ ‘음-음-머시깽이 오늘은 울고 싶어-’ ‘그럼 울어-울어-’ 할아버지는 웃다가 걱정하시다가 나를 달랬다. ‘할아버지는 머시깽이가 제일 예뻐-’ 나는 그 말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것보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되찾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얼마 뒤 할아버지는 TV[나는 텔레비전을 안 본다. 할아버지는 내가 오면 TV룰 끄니까 TV는 항상 깜깜하다]옆에 액자를 올려놓으셨다. 내가 기어 다닐 때 할머니가 나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저것 봐라- 할머니가 어렸을 때 너를 얼마나 이뻐했는데...부지깽이 사진은 없잖아-’ 그리고 벽에는 내 사진이 한 장 씩 늘어갔다. 다섯-여섯-일곱 장까지 늘어나도[나는 아직 일곱이 지나가면 그 다음 숫자를 잘 헷갈린다.] 부지깽이 사진은 안 부치셨다. 냉장고에도 또 식탁에도 붙어 있다. 내가 어린이집에서 색칠한 종이도 붙어 있다. 나는 적이 안심을 하고 욕심이 생겼다. 아니 욕심을 줄였다. 적어도 이 집에 있는 것은 모두 내꺼다. 부지깽이 것은 아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할아버지는 누구 꺼?’ ‘내꺼!’ ‘할머니는 누구 꺼?’ ‘내꺼!’ ‘아빠는? 엄마는?’ ‘내꺼! -내꺼!’ ‘부지깽이는- ’ ‘.......내....꺼.......-’ ‘그럼 귀여워해야지- 안 그래?!’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내 장남감에 침을 흘리고 나를 건드리다가 툭 치고 멀뚱히 바라본다. 나도 화가 나서 손을 젓다가 한 대 맞으면... ‘으엥! -----’ 그러면 엄마는 또 아기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신다. 나는 마루에 혼자 남는다. 네 살짜리가- 그리고 장난감도 두 개 - 수저는 당연히 두 개 - 자전거도 두 대 - 생활비도 두 배...
할아버지는 책도 덮고 바둑도 안 두시고 한숨만 늘어간다. ‘-차라리 백두대간을 완주하는 게 낫겠구먼-’ 중얼거리신다. ‘건강하고 좋겠네요-’ 할머니가 받으신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어린이집에 부지깽이를 데리고 오셨다. 나를 데리러 오신 것인데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신기 해 하는 부지깽이를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내게 동생이 있다!’는 생각이 자랑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예당저수지에 다녀오시고 한결 편안해 지셨다. 거기서 ‘의로운 형제’를 보셨다는 것이다. 왕할머니 산소가 거기 있는데-나는 제삿날 제기도 닦고 또 큰 절도 한다. 술을 따라 올리기도 한다. 나는 왕할머니를 사진으로만 보고 있다. ‘우리 머시깽이는 인사도 잘 하고-치카치카도 잘 하고-신발도 잘 정돈하고-동생도 귀여워하고-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할아버지의 칭찬이 끝이 없다.
옛날 어느 마을에 의좋은 형과 아우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형은 먼저 장가를 들어 아들도 두었답니다. 그 후 아우도 장가를 가서 새살림을 차렸습니다. 두 형제는 하루는 형 논, 하루는 동생 논을 번갈아 가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마침내 가을이 되어 벼를 베고 낟가리를 쌓았습니다. 형 논에서는 형님네 낟가리를, 아우 논에서는 아우네 낟가리를 쌓았습니다. 어느 날 밤 형은 아우를 생각해서 자기 낟가리에서 볏단을 덜어 동생네 낟가리로 옮겨놓았습니다. 반면 동생도 형을 생각해서 자기 낟가리에서 볏단을 덜어 형님네 낟가리로 옮겼습니다. 이튿날, 형제는 자기네 낟가리가 줄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밤이 되자 형제는 어제보다 더 많은 볏단을 옮겨 놓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또 그대로였습니다. 그날 밤, 형제는 다시 볏단을 나르다 마주칩니다. 형제는 비로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서로 고맙다며 부둥켜안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마을 앞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 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 세종대왕 때 세워진 것으로 예당저수지를 더 크게 만들며 수몰될 처지여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또 두 형제의 조각상이 주민센타 앞에 세워졌다. 국내 최대의 저수지를 바라보는 옛 대흥의 관아와 향교가 잘 보존되어 있고 또 인근에 백제의 한을 품은 임존성이 있다.
이에 더해 '의좋은 형제'가 예산사람으로 밝혀져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예산군에서는 가을에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의좋은 형제의 볏단 나누기, 농경문화 체험, 향토 농산물 직거래 장터, 마당극, 동화책 읽어주기, 각종 민속놀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
의좋은 형제 조각상
의좋은 형제 비각과 은행나무
형제비 해설
비석
높이 18미터의 은행나무
임성아문은 지금 대흥면 예당저수지에 있다.
동헌
형틀
내아
장독대
척화비
관아의 굴뚝과 덕석 두무가 정겹다
대흥면 가는 길 - 옛 모습이 남아있다.
향교의 우물인데 임성아문에서 좀 떨어져 있다.
향교의 은행나무
잘 자라고 있는 벼와 강태공이 한가로운 예당저수지
대흥면의 임성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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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막의 등불 원문보기 글쓴이: 양효성
첫댓글 우울했는데 이글을 보니 주원이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오네요.
우울하기는- 새해인데...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밤이 가먄 해가 뜨고...내일은 아이들이 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