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 달마산[達摩山] 489m 전남 해남군 송지면, 북평면
<산 이름>은 달마가 늘 머물러 있었다고 하여 ‘달마산’으로 이름의 유래를 미황사에서 전한다 달마는 양나라 무제때 중국으로 들어와 소림사에서 면벽 9년 오도한 달마대사다
<산세>달마산은 해남군에서도 남단에 긴 암릉으로 솟은 산이다. 두륜산과 대둔산을 거쳐 완도로 연결되는 닭골재에 이른 산맥은 암릉으로 급격히 모습을 바꾼다, 암능은 수만개의 석순(石筍)이 되어 바위꽃을 이루는 장관이다.
이 암릉은 봉화대가 있는 달마산 정상(불썬봉)을 거쳐 도솔봉(421m)까지 약8㎞에 거쳐 이어진 다음 땅끝 (최남단)에 솟은 사자봉(155m)에 이른다.
한반도 최남단 땅끝 사자봉에 멈춘 듯 하지만 바다로 맥을 끌고 나가 멀리 제주 한라산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명산이다.
<달마산 정상 불썬봉>이름의 유래는 "불을 켠다"를 전라도 사투리로 "불를 썬다"고 하는데 이곳에 봉화대가 있어 불을 켰던 자리이기에 불을 켰던 봉우리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도솔봉 도솔암> 도솔은 육천의 넷째 하늘 미륵보살이 머무는 천상의 세계다 도솔암은 미황사를 창건했다는 의조 화상이 수도를 했다는 곳이다.
최근 도솔암이 복원되어 달마산 정상에 고도의 성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곳 도솔암 정상으로 구름이라도 돌라치면 차라리 도솔천이 따로 없다 한다.
<용담>달마산 정상 한가운데 어느 바위 틈에 숨어 있는 금샘처럼 산의 남쪽끝 정상 도솔암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샘이 용담이다.
도솔암에서 아래로 20여m를 내려가면 바위 틈에 용담(龍潭)이라는 샘이 있다. 용담은 어른 4, 5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굴로 이 굴 속에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달마산 금샘>은 기기묘묘한 산의 모습처럼 신비스러운 것들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누른빛의 금가루가 떠있는 듯한 금샘이다. 마치 금가루가 뿌려져 있는 듯하나 떠보면 물만 떠올라 그 신비함을 더 느끼게 한다
달마산에는 작은금샘은 불선봉 부근 큰금샘은 부도밭쪽에서 올라 능선에서 도솔봉쪽으로 100m 동쪽 사면에 샘터가 있다.
<큰금샘>은 문바위재라 불리는 정상부근에서 동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60m쯤 내려가면 큰 바위틈에 있다.
큰금샘의 신비한 이야기는 옛 기록에도 전하고 있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때 무예라는 스님이 적은 설명이 나온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 세 사람은 앉을 만하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고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이 금샘물은 부근 산아래 사람들에 의하면 피부병이나 여러 질병의 치료에도 쓰여 왔다고 한다.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는 큰 바위산의 정기와 함께 아침 햇살의 정기를 담고 있다는 말처럼 이 유래가 단순한 전설처럼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미황사 美黃寺>
달마산을 병풍 삼아 서록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불교의 해로 유입설을 뒷받침하는 창건설화가 전해내려온다. 미황사는 1692년(숙종 18)에 세운 사적비에 의하면 749년(경덕왕 8)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합니다.
"창건설화는 돌로 된 배가 사자(獅子) 포구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
이 계속되자 의조가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하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보니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고 큰 상자 안에 경전·비로자나불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40성중·53선
지식(五十三善知識)·16나한·불화(佛畵)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 1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인도 국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
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다음날 소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
(通敎寺)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금의인이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고 했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약탈과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다. 1601년(선조 34)에 중창하고, 1660년에 3창했다.
1752년 금고(金鼓)를 만들고, 1754년 대웅전과 나한전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공사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보물 제947호)·응진당(보물 제1183호)·오백나한전·명부전·요사채 등이 있으며, 사적비와 여러
점의 부도가 전한다.
<'3000리 금수강산>해남땅 끝마을에서 서울까지의 1000리. 서울에서 함북 온성까지 2000리를 이르러 '3000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다. 땅 끝마을은 일출과 일몰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장소다.
<달마대사와 달마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달마대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즉, 6세기 인도 파사국의 왕자였던 달마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조사가 되었지만 당시 불교 주류에 의해 배척을 받았고 이를 피해 인도로 돌아가게 되는데, 해남의 전설에 의하면 그 달마대사가 인도로 돌아가는대신 동쪽의 해남으로 왔고, 바로 이곳에서 안거를 하여 산의 명칭이 달마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문답의 대표적인 예로 가장 많이 인용하는 그 구절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역시 위 달마산 설화를 알고 들어보면 예사롭지 않다.
실제로 달마대사가 동쪽, 이곳 한반도의 끝 해남으로 왔기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달마대사 이름을 이용한 지명은 달마산 밖에 없다지 않는가
<고려 동국여지승람 무외스님의 글>1281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이 산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나와서 달마산을 향해 예를 올리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만 듣고도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가 머무를 땅'이라며 그림을 그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