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한중석(주)상동광업소 입사
서울에서 내려와서 마땅한 직업이 없이 보석처럼 귀중한 긴 세월을 백수로 보냈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밖에 나가지 않고 방바닥에 엎드려 친구 집에서 빌려온 잡다한 책을 뒤적이고 날씨가 좋으면 어머니께서 하시던 양봉 일을 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이어야 할 젊은 나날을 안타깝게도 무료하게 지냈다.
그 당시 광업소에서는 텅스텐 증산을 위하여 퇴직자가 생기거나 이직하는 직원이 있으면 결원 인원을 충원하기 위하여 정규 또는 수시로 인력을 채용했다.
정규직 사원은 공채나 특채로 채용했고, 사내직업훈련소 출신 중 성적 우수자는 정규직으로, 나머지는 1년간 준사원인 일고(日雇)기간을 거친 후 정규직으로 임명했다.
입사시험이나 학력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수시로 채용할 때도 있는데 이는 대부분 단기(短期)로 고용하는 단순노무직(흔히 “광산 잡부”라고 함)이 결원이 생겼거나, 채굴 작업장이 증가했을 때 채용하는데 여기에 들어가는데도 경쟁률이 세서 흔히 말하는 빽이 있어야 가능했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서 여러 번 어머니께 이웃 지인들에 부탁해서 광산 잡부라도 좋으니 회사에 취업을 하도록 해 달라고 했으나 어머니는 차마 자식을 위험한 갱내에 잡부로 들여보낼 수 없어서 오랜 기간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셨는데, 세월이 갈수록 집안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할 수 없이 이웃 지인들에게 취업을 부탁하셔서 다행히 단기직 “광산잡부”로 취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선친에 이어 2대째 상동광업소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 취업이 나의 평생직장이 될 줄은 그 당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광부(鑛夫)
발령받은 일터는 태백갱(太白坑)인데 태백갱은 주운반갱(主運搬坑)인 본갱(上東坑)상부에 있는 갱으로 갱도(坑道)와 채굴장은 지표(地表)와 가깝다.
태백갱은 상동갱 아래의 하부갱에 비하여 텅스텐 품위가 좋아서 일본의 강점기부터 채굴을 해서 광량이 충분치 않고 마구 파냄(亂掘)로 인하여 위험이 많은 갱인데 해방이 되어서는 대부분 “덕대” 즉 청부(請負)로 위임 채굴을 하다가 채굴을 중지했었는데 “베트남전쟁” 발발로 텅스텐 수요가 급증하자 재채굴을 시작한 곳이다.
나와 같은 단기직 광부들이 하는 일은 2인1조가 되어 채굴장에서 발파작업으로 채굴한 광석과 채굴장이나 갱도가 함몰된 구혈(舊穴)에 쌓여 있는 광석을 드럼통을 잘라서 만든 삼태기에 홉바로 긁어 모아 광차에 싣고 그 광차를 손으로 밀고 가서 상동갱과 이어지는 운반 과정에 있는 그리즈리(grizzly)라는 곳에 쏟아 붓는 일이다. 상동갱에서는 그리즐리에 저장된 광석을 뽑아서 광차에 싣고 전차(電車)를 이용하여 갱외에 있는 선광장 위에 위치한 파쇄장으로 운반하였다.
(내가 하는 작업 명칭은 갱내에서 “데즈미(手積)”이라고 하는데 “데시미” “데쓰미”로 부르기도 한다.
데즈미”는 참으로 힘든 작업이다. 보통 10광차를 실어서 “그리즐리” 에 넣는데 굴진 막장에서는 15광차의 광석을 실어야 할 때도 있다. 약골인 나에게는 데즈미가 엄청난 중노동이었다.
갱내에는 휴게실 있는데 그곳은 탄광과 달리 인화성 가스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열기를 이용하여 물을 끓여 식사도 하고 작업배치, 작업 도구 보관, 휴식도 한다,
휴게실은 항상 장화에 덕지덕지 붙어 온 광물 부스러기로 지저분했고 누구하나 스스로 청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솔선해서 청소와 식수를 떠오는 것을 맡았다.
그 이후 동료들이 나를 더욱 친절히 대하여 주었고 내가 일하는 작업장을 지나가다가 내가 하는 데즈미도와 주기도 했다.
(동료들은 모두 나보다 연령과 광산 경력이 많았고 품성은 거칠지만 악의가 없고 매우 순수했다.
그분들의 언어에는 욕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욕설에 나쁜 감정이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술과 여자와 싸움에 관한 것이고 모든 이야기를 악의 없이 과장되게 많이 했다.
예를 들면 “내가 젊었을 때 나를 따르는 여자가 많아서 처치 곤란했다느니, 내가 힘을 한창 쓸 때는 쌀 3가마를 지게에 지고 언덕을 넘어 다녔다느니, 혼자서 4명과 싸워서 이겼다는등…….)
갱내에서 일을 하면서 기억이 남는 일은 많지만 그 중에서 잊지 못할 일은 출근하여 마주 보며 인사를 나누던 동료가 채굴장에서 화약 발파와 낙반(落磐)사고로 순직하거나 중상을 입는 재해가 발생한 것과 작업하다가 도굴 자를 만나서 고급 담배를 얻어 피운 일이다.
(베트남전 특수로 텅스텐 가격이 상승하자 도굴 자들이 민 골에 많이 살았다. 그들은 자기 집 부엌 등에서 손수 굴을 파서 지표와 가까운 갱으로 진입한 후, 품위가 높은 텅스텐 원광을 도굴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cap lamp를 쓰지 않고 카바이트등(燈)인 칸델라(candela)를 사용했는데 불빛이 다르기 때문에 불빛만 보면 도굴 자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도굴 자를 잡기 위하여 갱내에 경비실도 있었지만 갱내에서 경비원이 도굴 자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도굴자들과 작업자들이 모두 상동 사람들 이라서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을 뿐 아니라 도굴자들은 고급 담배(청자담배. 양담배)를 가지고 다니며 작업자에게 주기도 하고 광차가 탈선하거나 데즈미를 할 때 일을 도와 주기도 했다. 도굴자와 작업자 사이에는 음성적인 친분이 성형되어 있어서 도굴자를 발견해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 도굴자는 입사하던 해에 두 번 만났고 그 후에는 만나 보지 못했다.)
출근길에 극장 앞에서 동창을 만났는데 그는 포항제철 직업훈련생으로 선발되어 곧 포항으로 간다고 하면서 나에게는 왜 직업훈련소에 응시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포항제철은 대일청구권, 월남파병, 중동 등에서 획득한 외화와 대한중석의 투자 자금을 기반으로 하여 창립된 회사이다. 그 당시 포항제철에서 기술인력 양성을 위하여 사내 직업훈련소를 설립하고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에 한하여 훈련생을 선발했고 상동고등학교 출신은 특별 우대하여 100% 선발했다. 우리 동창들과 선후배도 직업훈련소에 많이 입소했다.
나도 응시하고자 했었지만 1년여 훈련기간 동안의 급여가 현재 내가 받는 급여의 30% 남짓한 것을 확인하고 직업훈련소에 가고 싶은 마음은 하늘에 닿았지만 가정경제 때문에 포기하고 직업훈련소 이야기는 어머님이 신경 쓰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고 부터 집안 살림도 숨통이 트여서 학교에 다니는 여동생과 막내에게 앨범과 수학여행 등 학교에서 하는 모든 행사를 빠짐없이 챙겨줄 수 있었고 나머지 동생들은 모두 졸업하여 서울에 있는 큰 동생에게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큰 동생이 서울로 올라오는 동생들을 잘 챙겨줘서 장남인 내가 하여야 할 역할을 큰 동생이 훌륭히 수행했다.
지금까지 친구들에게 극장표도 얻어 쓰고 음식도 계속 얻어먹기만 했었지만 돈 벌이를 하고 부터 순대를 잘 하는 태백집이나 안주를 맛깔 있게 하는 묵호 집에서 술도 사고 삼일다방과 부림 다방에서 커피를 사고 초등학교 옆 곡서방네 중국집에서는 자장면도 사면서 몇 년 동안 느껴보지 못한 베풂의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세계 최고의 텅스텐 광산인 상동광업소에서 최하위 말단 잡부인 수적공(手工積)으로 6년 7개월 동안 지표와 가깝고 위험한 재채굴갱(坑)인 태백갱,백운갱,장산갱,순경갱 등에서 데즈미를 했고 운전공(運轉工)들이 휴가를 가면 그들이 하던 경사진 채굴장의 광석을 끌어 광차에 적재하는 스레샤(slusher) 작업과 광석을 운반하는 전차(電車 locomotive)운전을 하면서 광부로서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오직 하나님의 보호와 어머님을 비롯한 가족의 염려 덕분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일했다.
그뿐 아니라 운수도 좋아서 근로계약 만료될 시점이 되면 계약이 연장되어 도중에 잘리지 않고 비록 정규직의 신분은 아니지만 임시부(臨時夫) – 만기용인(滿期傭人) – 장기용인(長期傭人) – 시고(時雇)를 거쳐서 정규직 직전 단계인 준사원에 해당되는 일고(日雇)의 단계에 올랐다.
❏ 정규직 경비원(청원경찰)
칠흑 같은 갱내에서 cap lamp를 장착하는 무거운 안전모자와 두터운 장화를 벗어 버리고, 날렵한 경비원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경비초소에서 출입 인원과 물자를 확인하고 화재예방과 시설을 경계하는 경비원으로 발령을 받고 이어서 관할 경찰청으로부터 청원경찰 자격도 부여 받았다.
이러한 과정은 갱내에서 작업하는 나를 그곳에 두지 않고 갱 밖으로 빼어내서 일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평생 잊지 못할 은인과 같은 두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두 분중 한 분은 ”방호계장“ 한 분은 방호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주임이셨다.
그 당시 경비원 한 명이 정년을 앞두고 퇴직금 올려서 퇴직하려고 채광 근무를 신청했는데 그 경비원은 치랭이골에서 무장공비를 잡은 공로로 특별채용이 된 분이라서 회사에서는 그분의 청원을 쾌히 수용하여 채광과와 방호과에서 인력을 맞교환하는 형식으로 조치하기로 하고 방호과에서는 채광과에 내 이름을 명시하고 협의해서 인사발령이 이루어 졌다.
상동광업소는 1950-1960년대는 국가 “보안목표”로 지정되었고 그 이후는 “국가중요시설”로 지정되어 보안 관리를 해왔다.
무기고, 화약고. 유류 저장고, 공장 등에 대한 경비는 청원경찰이 주축이 되어 “카빈소총”을 휴대하고 근무하고 국가보훈대상자나 회사에서 산재로 인하여 신체가 부자유스러운 분들은 경봉(警棒)을 차고 근무했다.
경비인력은 청원경찰 포함 모두 45명으로 1교대 15명씩 근무했는데 오래전부터 근무하고 있는 선배 동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도굴 자들이 많을 때는 경비인력이 7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때는 모교 다리 앞에도 경비실이 있었고 도굴 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대골과 갱내에서도 경비실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한다.
중석 시세가 한창 좋을 때는 경비 팀이 야유회를 가서 한잔하면서 흥이 나면 도굴 자와 경비원 간의 선린우호(?)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이러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노래는 가수 하춘화가 불러서 히트를 친 “잘했군. 잘했어”의 가사를 변형해서 경비실 자체에서 번안곡(飜案曲)으로 만든 곡인데 가사가 재미있다.
“영감 ~ 왜 불러 ~ 영월관 김 마담이 외상값 독촉을 왔었나. 왔었지~ 어쨌나. ~
외상값 갚으려고 신대골 순찰을 갔었지 ~”
위험한 작업장에서 힘에 부치는 일을 매일 하다가 경비실에서 근무를 하니 봉급은 떨어졌어도 몸은 미안할 정도로 편했다. 경비감독은 나를 외곽초소에서 일주일씩 근무하도록 한 후에 정문 초소에서 계속 근무하도록 했다.
정문에서 근무하니 회사 간부사원을 모두 알게 되었고 각 부서의 핵심이 되는 직원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회사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방호과 경비직에서 청원경찰로 일하다가 2년 만에 드디어 정규직 사원 발령을 받았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승진까지 8년 이상 걸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3년 정도 늦었지만 기쁨이 벅 받쳤다. 어머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너무나 좋아하셨다.
그해에는 아들 낳아서 내가 아버지가 되었고 경사가 집안에 겹쳤다.
선친께서 돌아가시고 11년간의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냈는데 이제는 그 굴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것이다.
❏ 행정직
△ 방호과 근무
행정직 근무는 방호과에서 시작했다.
경비직에서 2년 가깝게 근무를 하다 보니 경비직은 전망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비전이 있는 상위 보직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인사규정에 의하면 경비직에서 수십 년을 근무하여도 주임급도 아닌 감독까지 승진하는 것이 한계다. 다른 하나는 훗날 자식들에게 내가 정문초소에서 근무하면서 나보다 연령이 어린 상사에게 경례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호출이 있어서 올라갔더니 과장님께서 행정직으로 방호과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글자 그대로 고소원(固所願)하지만 불감청(不敢請)한 상태였는데 반갑게도 내가 부탁드릴 말씀을 과장님이 먼저 하시니 너무 좋았다.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뜸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가 행정은 전혀 경험이 없어서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급여가 경비직보다 떨어지니 가족들과 상의를 해야 결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과장님께서는 ”행정 그거 별것 아니야 자네 능력이면 충분하다“고 하시며 가족과 상의하고 나서 알려주면 발령을 의뢰하겠다고 하셨다.
사무실에 첫 출근을 하니 사환이 내 책상에 재떨이와 필기구를 챙겨 놓았다.
의자에 앉으니 선친께서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하신 말씀이 기억났다.
”공부를 잘해야 어른이 되면 책상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며 직장생활을 한다“
내가 담당한 업무는 방호(경비), 보안, 소방, 민방위 업무였는데 보안업무는 우리 회사가 ”국가중요시설“이라서 전시(戰時) 또는 비상사태 발생 시 회사에 부여된 텅스텐생산, 생산인력동원, 회사가 적군으로 부터 위험에 직면했을 때 생산설비를 사용하지 못하게 주요 부품을 탈거하는 거부계획 등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 업무는 ”2급 비밀 취급“인가를 받아야 하는데 신원조회 등의 절차를 거쳐서 무리 없이 쉽게 받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사무자동화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수기(手記)로 기안문서 등을 작성하지 않고 타자를 쳐서 작성해야 됨으로 사무실에 지급된 4벌식 타자기로 퇴근 후에 열심히 연습해서 자판을 안 보고 문서를 작성할 정도가 되었다. 소방업무는 책상머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서 행정을 보다가 틈만 있으면 공장과 갱내 그리고 종업원 사택을 순찰, 점검을 하면서 문제점이 있으면 자체에서 수립한 소방계획서를 보완하였고, 소방훈련은 소방계획서에 따라 현장 환경에 맞게 매월 2시간 정도 실시했다. 특히 소방업무는 전임자가 소방계획서를 너무나 잘 수립해 놔서 나는 수시로 변하는 공장 환경에 따라 점검하고 보완만 하면 될 정도였다.
(종업원들은 소방훈련을 통하여 소방차가 화재 현장에 출동하면 외부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소방차에 호스를 연결하여 진화를 하고 화재 현장 주변의 소화전도 연결하여 진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화재가 발생한 일이 세 번 있었다.
목조 건물이 밀집된 ”하칠랑리사택“과 ”텃골사택“ 그리고 ”단양촌사택“ 옆 민가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회사에서 보유한 소방차가 긴급 출동하고 뒤이어 도착한 지역 소방차와 합동으로 초기 진화를 함으로 대형 화재를 모두 방지할 수 있었다. 만약 초기진화에 실패 한다면 밀집된 목조 건물에 화염이 확산되어 사택지역 전체가 전소될 것이 분명했다.
(화재 진화에 참가한 화재 인근에 거주하는 종업원들은 소방차와 소화전을 이용하여 화재를 초기 진압하여 대형 화재를 사전에 방지한 것에 대하여 매우 만족하고 부듯해 했다.
화재 원인은 천정의 안에서 발생한 누전과 콘센트에 플러그를 많이 꼽고 사용하여 전선이 과열된 것과 어린아이가 집안에서 성냥으로 불장난을 하다가 일어난 화재였다)
회사의 사장님은 대한민국 육군 대장 출신으로 원칙론 자며 청렴하고 엄격하다고 소문이 난 ”한신“이라는 분이신 데 종업원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없었다.
회사의 임금이 포항제철 등 대기업에 비하여 월등하게 높으므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4년간 임금을 동결시키고 5년째 되던 해에 일괄적으로 기본급을 5,000원 인상했다.
그뿐 아니라 행정직은 땀 흘려 일하는 동료의 영양분을 빼먹는 ”기생충“이라고 하면서 행정직을 감축하여 운영하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종업원들은 사장님에게 반감이 많았고 현장의 사소한 일도 참견하시는 사장님에게 종업원들은 ”사장“이 아닌 성씨가 ”한“씨 이므로
”한 주임“이라고 불렀다.
(사장님 진목면은 상동광업소 순시하실 때 나타났다.(방호과장의 전언(傳言)에 의함)
원주시에 주둔한 1군사령부에 복무하는 장군(Two Star)이 작은 헬기(MD-500)를 타고 광업소 헬기장에 착륙해서 군대의 대선배이신 사장님께 인사를 하러 왔는데, 사장님께서는 ”장군“이 사적인 일로 국방비를 낭비하고 작전의 공백을 초래 했다“고 혼을 내셨고 혼이 난 장군은 차도 한잔 여유롭게 못 드시고 사령부로 복귀하셨다고 하셨다)
인기도 매력도 없는 사장님께서 희망적인 좋은 기회를 종업원에게 주시기도 하셨다.
그 당시 승진규정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TO(정원, 자리를 의미하는 용어)가 있어야 승진할 수 있고 회사의 오래된 승진 문화는 승진을 하려면 뒤를 돌봐주는 백(back)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이러한 인사제도와 병폐 된 승진 문화로 인하여 평생을 평사원이나 주임 급에 머무르다 정년을 맞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대졸이 되어야 계장급 TO에 보임 되므로 고졸이 계장급이 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사장님께서 종전의 승진시험 제도를 개정하여 학력과 TO를 초월하여 보직과 재급년수 등 기본적인 자격 요건을 갖춘 사원에게 승진시험의 기회를 부여하고 승진시험 합격자에 한하여 계장급까지 승진을 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토록 하셨다.
(이 제도의 시행은 고졸 출신인 종업원들에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에 의해 첫 번째 시험에 응시했던 수백 명의 직원들은 시험문제가 너무 광범위하면서도 어렵고 합격률은 ”고등고시“보다 세니까 이러한 제도는 그림의 떡과 같고 있으나 마나라고 했다.
몇 년 후 행정직으로 근무할 때 재급 연수가 충족되자 나도 시험에 응시했었다.
결과는 불합격 ! 생소한 것이 너무 많아서 시험문제의 30% 정도는 백지로 두었다. 그러나 하나는
건졌다. 그것은 출제범위와 패턴이다)
방호과 사무실에서 3년 가깝게 근무할 즈음 과장님께서 중국에서 가지고 온 좋은 차가 있으니 차를 한잔 하자고 해서 과장실로 들어갔다.
과장님께서 차 한 잔을 타서 주시며 웃으시며 난데없이 ”내가 박주임을 붙잡고 있으면
편하지만 며칠 생각한 끝에 박주임의 장래를 위해서 본관으로 보내는데 동의를 했다“고 하시는 것이다. 전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멍하니 과장님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본관에서 종업원 임금을 담당하는 임금반 주임이 사표를 내서 며칠 후면 출근을 안 하는데 총무과에서 그 자리에 보임할 직원을 사내에서 찾아보니 방호과 박주임이 적격인 것 같으니 보내 달라“고 총무과장이 며칠 전부터 여러 차례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과장님은 방호계장을 비롯해서 사무실 직원과 경비감독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더니
”박주임에게는 좋은 기회이므로 방호과에서 다소 불편하더라도 보내주자“고 의견을 모았다라고 하셨다.
나는 숫자 개념이 워낙 약해서 임금반 주임으로 발령 낸다고 하시기에 그 일을 처리할 자신이 없어서 순간 공포감을 느꼈지만 ”재고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릴 상황이 아니라서 하는 수 없이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과장님과 그 대화 후 며칠 동안 ”숫자 개념이 없는 내가 공포감을 느끼는 숫자를 다루는 업무를 잘 할 수 있을까“를 많이 걱정했다.
(송별회를 하는데 과장님께서 나에게 술을 두 손으로 따라 주시면서 ”박주임은 방호과에서 정규직 사원도 되었고 주임으로 승진도 했으며 이제 본관으로 가게 되었으니 본관에 가서도 친정인 방호과를 잊지 말라고 하시며 본관에서는 계장으로 승진을 하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