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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 田 의 문 화 일 기. | bhjang3![]() | |
![]() 못내정겨운 여인들의 비석 미학 용어에 "以情爲美(이정위미)"라는 어휘가 있다. "정으로서 아름답게 한다"는 말이다. 불가나 도가에서는 情이라는 문자를 정욕과 색욕으로 연관 지어 다소 기피 하는 문자이다. 그러나 유가에서는 칠정이라 하여 기뻐 하는정(喜), 노여워 하는정(怒), 슬퍼 하는정(哀), 즐거워 하는정(樂), 사랑 하는정(愛), 싫어 하는정(惡), 하고자 하는정(欲)등 일곱가지로 분석하여 사람의 본성으로 여겨 왔다. 그래서 예기의 예운에서는 사람이 이 일곱가지의 정을 배우지 않고도 능하다(佛學而能)고 하였다. 옜날에 성인이 예법을 제정하고 음악을 만들때에 사람의 감정을 순화 시키고자 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이고(李 772-841)는 복성서에서 "정감을 없애므로서 본성을 회복 할 수가 있다 (滅情以復性)"고 하였으나,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주자는 주자어류 59권에서 "정을 어찌 없앨수 있겠는가, 이것은 불가의 주장이다"고 다시 유가의 기본 입장을 피력 하였다. 그 이후 근 현대에 이르러 미학사상에서 "정으로서 아름답게 한다"는 미학술어가 생성 되기도 하였다. 어찌 이 세상을 살아 가는 사람에게서 감정을 없애고 살아 가라고 할수 있겠는가.
우리의 역사에서 절개를 기키기 위하여 왕권에 도전한 도미부인 같은 여인네가 있었는가 하면, 인고의 삶 속에서도 시문의 꽃을 피운 허난설헌도 있었다. 간악하고 위협적인 침략군의 탄압에 허덕이며 못이겨 하는 조국과, 도탄에 깊숙이 빠저 헤메고 있는 백성들 사이에서, 분연히 일어난 여성들도 있었으니,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논개가 있었으며, 구 한말에는 여성 의병장 윤희순이요, 삼일운동에 유관순 열사며, 일제치하의 생존권을 죽음으로서 지키려던 제주도의 해녀 항일 투쟁이다.
동방열녀의 최초 표상이 된 <도미(都彌)부인>
의 정열비(貞烈碑).
㉠만고 열녀 도미부인
죽음을 무릅쓰고 지극 정성으로 남편에 대한 절개가 곧은 여인은 열녀라 한다. 뼈속이 아릴만큼 따르는 고통을 느끼고 견디는 것이, 여성의 굳은 절조며, 열절이다. 열녀는 두 남자를 상대 하지 않고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의 <열녀춘향수절가>가 있는가 하면, 수절 과정을 읊은 우리 고전 가요중에 <열녀가>의 한 소절을 간추려 보면, "남 잘 자는 긴긴 밤에 무슨 일로 못 자는고, 슬프고 가련하다 이내 팔자 어이 할고, 흐르나니 눈물이요 짓나니 한숨이라. 애고 애고 설운지고 실날 같은 이내 목슴, 이 간장 둘 데 없어 친구 벗을 찾아가니, 이집도 가장 있고 저집도 남편 있네. 꽃 피는 버들 위에 벗 부르는 황조로다, 다정한 소리 마다 이내 간장 다 썩이네. 무정한 우리낭군 가고 올줄 왜 모르노, 손 꼽아 혜아리니 오실 날이 망연 하다."
우리의 역사 기록에 여성의 정조와 관계되는 가장 오래된 내용은 <삼국사기·열전>에 기록된 도미 부인의 굳은 절조의 실화다. 이러한 내용은 <동사열전>과 <삼강행실도>에도 기록이 전해 오고 있으며, 이름난 소설가 월탄 박종화는 <아랑의 정조>라는 제목으로 도미부인의 실화를 그의 단편 문학 작품에 담아 놓았다. 이 작품은 KBS 2TV 프로의 TV 문학관과, <전설의 고향>에서 다루어 지기도 하였다. 작가 방기환 또한 <호색왕과 열녀>라는 제목으로 문학 작품에 실어 놓았으며, 춘향전을 연구 하는 많은 학자들은 도미 부인의 실화가 "춘향전의 근원 설화"가 되였다고 주장 하여 오고 있다.
ㅠ 도미 부인의 정절은 우리의 역사상 손 꼽히는 여자의 절개와 부인의 덕스러움의 상징이자 귀감으로 84년 5월에 창작 무용극 "도미 부인"으로 꾸며저 로스앤제리스 올림픽 문화 행사의 무대에 울려젔고, 그후 18개국에서 100 여회 이상 공연을 갖인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중의 하나이다.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도미부인 이야기의 대략은 드음과 같다. 백제사람 도미는 변촌의 소민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도 절행이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128-166)이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무릇 부인의 덕은 정결이 제일이지만, 만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고 하자, 도미가 대답하기를 "신의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동이 환해서 개루는 흐벅진 졸음에서 눈을 떠보니 자리 옆에 코를 골고 누운 것은 관음보살 같은 아랑이 아니라, 개기름이 얼굴에 지르르 흐르는 부전이었다. 개루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이미 소용이 없다. 아랑을 찾으니 간 곳이 없다. 건넌방은 덩그렇게 비었다. 화증이 열화같이 일어난 개루는, 모든 것이 목수 도미란 놈이 살아 있는 탓이라 인정했다. 팔분 이상의 도미를 시새는 마음도 섞였으리라.
㉡땅속으로 들어가 버린 도미부인의 貞烈碑.
는 달리 도미 정승에 관하여 구전되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이 무덤을 성주도씨 가문에서 돌보아 왔지만, 이 지방 에서는 누구든지 음력으로 8월 초하룻날에 제일 먼저 벌초를 하면 아들을 나을수 있다 하여 언제나 묘역은 깨끗 하게 단장이 되어 왔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도미 부부의 묘와 비석이 여기에 있었는가에 대하여서는 자세히 아는 사람이나 기록이 없다.
진해시의 토지 개발 계획에 따라 도미 부부의 묘와 비석은 수년전에 경북 포항시 북구 송리면 지경리에 위치한 성주도씨 2 세조의 산소 앞으로 이장 되었다가 2003년 6월 10일에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조서산 자락의 도미부인 사당 옆으로 만년 유택을 정하고 이장 하였다. 그리고 규모를 크게 하여 새로운 비석도 마련하여 동년 11월 4일에 제막하웠다. 그러나 진해시 웅동면에 있던 「配貞烈婦人(배정열부인)」이라 적혀 있던 비석은 도씨종친회의 의견에 따라, 도미가 정승이였다는 고증이 없으므로, 포항의 2 세조 산소 앞에 묻어버리고 말았다고, 당시에 성주도씨 종친회 종무관리위원회 도재철 위원장의 설명이다. ㉢보령에 되살아난 도미부인의 정절.
2003. 11. 5 수요일의 충청도 지방 일간지는 온통 도미 부인의 기사로 장식되였다. 대전일보 14면에는 "백제 열녀 도미부인 묘비 제막", 중도 일보 14면에 백제열녀 "도미 부인" 정신을 기려요, 대전매일 16 면에 열녀 "도미 부인" 정신 잇는다, 충청일보 13면에 백제의 열녀 "도미 부인 경모제", 전국매일 17면에 보령시 "도미 부인 경모제" 개최, 시대일보 3면에 보령시 "도미 부인 경모제" 성황이라는 제 하에, 백제시대 열녀의 표상인 도미부인의 정절을 기리는 경모제 및 묘비와 사적비 제막식이 4 일 오전 11시 고향인 오천면 소성리 소재 도미부인 사당이 모셔진 정절사에서 거행됐다는 기사를 일제히 실었다. 이날의 일간지들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 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도미부인 선양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 이시우 보령시장의 주관으로 거행된 제향에서, 각급 기관단체장 여성단체회원, 도씨문중 종친회, 주민, 학생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의 정절을 추모 하는 행사였다. 이날 경모제에는 대천여상 국악부학생들의 전통 제례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부인의 숭고한 뜻 을 기리기 위한 초헌관을 시작으로 제례의식에 이어 참석자들의 헌화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성주도씨장학회에서 대천 여상 3 학년 한아름학생에 대한 장학금 전달과 도씨문중을 대표 도종희국회의원의 인사 등 성주도씨종친회에서 대거 참석해 부인의 높은 정절을 추모했다.
이날에 <도미부인 사적기념비>도 제막되였다. 이 비문의 끝 부분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 강동구 천호동에 세워진 도미 부인의 동상.
성과 몽촌토성에 비해 강동구 어디에도 도미부인이 살았던 백제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음에도 강동구 에서는 국민 정서 순화의 방편으로 도미 부인의 동상을 천호 4동의 천호동 공원에 건립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2003년 3월 12일 강동구청 공고문 제 420호로 신문에 <도미부인 동상 설계 현상공모>를 공고 하였다. 그 결과 동상 현상공모에는 12점의 작품이 접수 되었고, 작품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처 옥봉환 조각가의 작품이 선정되어,2003년 5월 14일 강동구청 공고문 제428호로 공고 되었다.
(ㅁ). <도미부인 노래>도 출반 되였다. 도미부인동상 건립에 맞추어 도미부인 노래도 출반되었다. 가사는 KBS의 김동찬 음향감독이 짓고, 작곡은 박은표 작곡가가 했다. 노래는 가수 현당씨가 불렀다. 모두 유명한 가요 활동가들이다. 가사의 제 1절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미부인 당신 아름다워요. 한번 맺은 사랑을 위해
혹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한다. 자기의 정조가 목슴보다 귀중하여 왕권에 도전 하였다면, 남의 정조도 귀중하게 여길줄 알아야 하는데, 계집종을 단장 시켜 자기를 대신 하도록 한 처사가 아쉬운 일이다. ㅡ 이 글은 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에서 2004년 10월 간행 <동인>지에 <못내 정경운 여인들의 비석>이란 제목으로 게재된 원고임을 밝힙니다.ㅡ
- 1800여년 전 ‘도미 부인’을 누가 탐했나 -
입력 : 2006.08.29 00:32 03'
“백제 사람 도미는 민간의 작은 백성이지만 그 아내는 용모가 아름답고 절개를 지키기로 이름 높았다. 왕이 그 아내를 취하려 하자, 그녀는 계집종을 단장시켜 대신 왕을 모시게 했다. 노한 왕이 도미의 두 눈을 멀게 하고 작은 배에 태워 강물에 띄워 보냈다. 아내가 강으로 달아나 통곡하고 있을 때 작은 배 한 척이 뭍에 닿았다.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남편을 만나 고구려로 가 궁핍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초기 삼국시대의 사화(史話) 중에서 ‘도미 이야기’처럼 부부 사이의 애틋한 정과 신의를 담은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1937년 월탄 박종화의 단편소설 ‘아랑의 정조’, 2002년 최인호의 소설 ‘몽유도원도’와 이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숱하게 재창조됐던 이 이야기의 원전은 전설집이 아니라 정식 역사서인 ‘삼국사기’ 도미열전(都彌列傳)이다. 소장 고대사학자인 박대재(朴大在) 박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최근 신라사학회 발표문 ‘삼국사기 도미열전의 세계’를 통해 이 ‘실제 이야기’에 담긴 세 가지 미스터리를 분석했다.
도미 이야기의 ‘왕’은 흔히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던 백제 21대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년)으로 여겨졌다. 열전에 잔학무도하게 묘사된 모습이 역사상의 실정(失政)과 들어맞기 때문. 그러나 박 박사는 “원문에 개루왕(蓋婁王)이라고 기록된 것을 뒤집을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백제 제4대 왕인 개루왕(재위 128~166년)은 ‘삼국사기’ 본기에 “성품이 공손하고 행동이 단정했다”고 기록돼 있어 도미열전의 ‘왕’과는 다른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절대 권력자로서의 이성적인 왕’과 ‘한 여자를 얻기 위해 집요함을 보이는 감정적인 왕’은 같은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도미와 그 아내가 배를 타고 달아난 곳은 어디일까? 현재 도미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는 곳은 서울 광진구·강동구, 경기 하남, 충남 보령, 경남 진해 등 전국 여러 지점으로 일부 지역에선 행사까지 열리고 있다. 하지만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의 왕성으로 유력해진 지금, 우선 보령과 진해는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도미 부부가 상봉한 ‘천성도’는 임진강이나 예성강 하류의 섬이라는 것이 정설이니 이들 부부가 탄 배는 한강 하류로 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성을 황급히 빠져나온 도미의 아내가 배를 탄 곳은 풍납토성 서남쪽, 지금의 송파구 잠실 부근 한강변 어느 곳이라 보아야 한다.
과연 도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기록에 ‘호적에 편제된 작은 백성(편호소민·編戶小民)’이라 돼 있어 그 신분은 ‘양인(良人) 농민’ 정도로 생각돼 왔다. 그러나 과연 일반 농민이 계집종(婢子)을 거느릴 수 있었을까? 박 박사는 “신분상으로는 소민(小民)이라 해도 상당한 경제력을 갖춘 계층일 것”이라 말한다. 배를 타고 바다 쪽으로 달아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마한의 하호(下戶)는 중국 군현과의 교역에 종사하던 상인 계층으로 생각되는데 [출처] [본문스크랩] 정조를 지키려고 왕권에 도전한 도미부인. |작성자 구봉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