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아마추어 스포츠의 세계적 제전(祭典). 프랑스의 교육가 쿠베르탱(Baron Pierre de Coubertin: 1863∼1937)의 제창과 노력에 의하여 1896년에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쿠베르탱은 1884년경 프랑스의 교육제도 개혁을 위하여 영국에 건너가 공립학교(퍼블릭 스쿨)의 교육법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이때 아놀드(T. Arnold)의 교육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운동 경기가 청소년 교육을 위하여 우수한 교육 방법임을 통감했다. 귀국 후 파리의 중학교에서 운동 경기를 지도하게 했으며, 1889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의 관련 행사로서 경기회를 개최시키는 등 운동경기의 발달을 위하여 진력했다. 그리고 1892년 프랑스 체육협회 창립 5주년 기념에 즈음하여 고대 올림픽 부흥을 제창했다. 그는 스포츠를 통하여 보불전쟁(普佛戰爭; 1870∼1871: 獨佛戰爭)에서의 패전으로 의기 소침해 있던 프랑스 국민과 청소년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세계 각국 청년들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아울러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미국의 슬론과 영국의 허버트 등의 협력을 얻어 1894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① 대회의 정기적 개최를 확보한다. ② 쿠베르탱과 그의 동지들이 대회를 부활시킴에 있어 기개를 진작시킨 빛나는 역사와 고매한 이상에 부합되는 대회로 만든다. ③ 아마추어 스포츠 경기의 개최를 장려한다. ④ 아마추어 스포츠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며 각국 스포츠맨의 우호적 활동을 촉진•강화한다는 것 등을 사명으로 하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리하여 제1회 대회(1896년)가 고대 올림피아 경기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만국 박람회(제2회: 파리), 루이지애나 해방 100주년 기념 박람회(제3회: 세인트루이스) 등의 부대 행사에 불과했으나 회를 거듭함에 따라 참가국과 참가 선수들의 수가 늘어나고 조직•운영도 정비되었다. 초기에는 참가자의 개인 신청이 접수되었는데 제4회(1908년: 런던) 대회부터는 현재와 같이 각국의 국내 올림픽 위원회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선수 선서를 하기 시작한 것은 제7회 대회 부터이며, 올림픽촌은 제8회 대회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올림피아에서 대회장까지의 성화(聖火) 릴레이를 하게 된 것과 올림픽 기록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 것은 제11회 대회부터이다. 제8회 올림픽부터는 동계 대회도 개최되었고, 제1•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3회나 대회가 개최되지 못했으나 오늘날에는 세계 최대의 스포츠 행사가 되었다. 그 동안 제11회 베를린 대회가 나치 독일의 국위를 과시하는 정치색이 짙은 대회가 되어 올림픽 경기의 의의에 대하여 의문이 던져지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동•서 독일 문제, 중국 문제, 팔레스타인 문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 문제 등 정치적 분쟁이 잇달아 올림픽 주변에까지 야기되어 정치적 중립이라는 당초의 이상(理想)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상황으로까지 변질되었었다. 더욱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제22회 모스크바 대회에 미국이 선수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개최국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취해진 이와 같은 보이콧 운동에 동조, 우리 나라를 비롯한 자유 진영의 여러 나라도 불참했다.
이 대회가 공산권에서는 최초로 개최된 대회라는 점에서 일부 자유 진영 국가들의 22회 대회 보이콧은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대회에 소련•동독 등 공산권 15개국의 불참이라는 사태를 빚게 했다. 이 밖에도 선수의 용구(用具)나 실비(實費) 변상을 에워싼 아마추어 자격 문제 등이 대두되어 올림픽 정신의 기조(基調)인 아마추어리즘까지 재고되어야 할 상태였다. 또한 대회의 대규모화에 따른 재정 및 운영상의 곤란한 문제들이 야기되어 올림픽 경기 그 자체가 하나의 전환점에 이른 것 같기도 했다. 오늘날 부강한 나라들은 올림픽 대회를 자기 나라에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도 1988년에 서울에서 대망의 올림픽 경기 대회(제24회)를 개최하여 세계 만방에 국위를 떨쳤다. 우리는 일제하에서 일본 팀의 일원으로 제10회 로스앤젤레스 대회에 권태하(權泰夏), 김은배(金恩培), 두 선수가 마라톤에, 황을수(黃乙秀) 선수가 복싱에 첫 참가를 했으며, 제11회 베를린 대회에서는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금메달, 남승룡(南昇龍)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한 것이 첫 우승 및 3위의 기록이다. 8•15 해방 후에는 1948년 제14회 런던 대회에 독립국으로서 처음 참가했고, 한수안(韓水安; 복싱), 김성집(金晟集; 역도) 두 선수가 첫 동메달을 획득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제21회 몬트리올 대회에서는 양정모(梁正模; 레슬링) 선수가 광복 후 첫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첫댓글 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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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에서올림픽열면지구망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면 우리 공부도 안할텐데ㅠㅠㅠ
아 ... 그렇네 ㅋㅋㅋㅋ
김천에서 열면 올림픽운동장이 김천반을 차지할꺼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짱이당!
올림픽경기조으다
ㅋㅋㅋㅋㅋㅋㅋ올림픽말고축구좋으당
우와 올림픽재밋겟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마자 좁아터져서할때가음슴
ㅋㅋㅋ올림픽경기 실제로 봤으면 좋겠닿ㅎㅎㅎㅎㅎ
또한국에서 올림픽열면좋겠다.ㅋㅋ
올림픽보고싶다 ㅋㅋㅋ
정말놀라워
올림픽 좋은거구나 너란녀석..
짱이다
ㅋㅋㅋ 올림픽이란 ㅋㅋㅋㅋ
신기돋음
와아
오ㅋㅋㅋ
우와
우와ㅋㅋㅋㅋㅋ
워메~올림픽 정의 오늘처음알음ㅇㅅㅇ
우와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우리나라에 다시한번 올림픽 열렷으면 좋겠다 ~~ ㅎㅎㅎㅎ
우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
와우ㅋㅋ
ㅋㅋㅋㅋㅋㅋㅋ올림픽 제대로 본적이 단한번도 음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