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
응시와 호명, 고독과 고통의 증언
이채민 시집 <동백을 뒤적이다>
이채민 시인이 <기다림은 별보다 반짝인다>에 이어 두 번째 시집 <동백을 뒤적이다>를 냈다. 이채민 시인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4년 <미네르바>로 등단한 중견시인이다. 현재 <미네르바> 작가회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한국시인협회 간사 일도 맡고 있다. 시집을 받자마자 기분이 산뜻하다. 하얀 바탕에 깔끔한 표지디자인부터 마음에 든다. 제목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상식을 뛰어넘는 시적 은유. <동백을 뒤적이다>니...먼저 표제시부터 열어본다.
오동도 힌 눈 속의 붉은 동백이
초인종을 누르며
휴대폰 화면에서 피어난다
설원 속 그의 렌즈에 잡힌 동백꽃은
우리의 불안한 관계를 알고 있는지
3초를 견디지 못하고 이내 사라진다
뜨거운 혈관에서
소금 알갱이보다 빠르게 녹아버린 동백꽃
그와 나의 체온이 다른 것을 어찌 알았을까
노을을 바라보는
남해의 섬이 수심에 잠겨 있다
파도는 수천의 붉은 혀로 나를 달래고 있지만
흔들리는 건 내가 아니라 섬이다
<동백을 뒤적이다> 전문
유성호 평론가(한양대 교수)는 이채민의 신작시집에 대해 “시인 자신의 절실한 경험과 깨달음 그리고 사물을 향한 매혹과 그리움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서정시 본연의 심미적 결실이다”라고 말한다. 유 교수는 “그녀의 시는 구체적 경험과 깨달음, 강열한 매혹과 그리움의 사이에서 발원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원한 물줄기가 타자들을 향한 따뜻한 응시와 호명으로, 삶의 고독과 고통에 대한 선연한 증언으로 확장되어 가는 흐름을 견지하고 있다”고 평한다.
비내리는 오후
창경궁 명정전 꽃살무늬 창 앞에서
비를 피해 들어온 참새와 마주쳤다
녀석은 비에 젖은 내 모습을 강중거리며 살핀다
모든 시작이 그렇듯이
키를 낮추고 눈을 맞추고
서로 죽지를 부비는 사이
늑골 밑에서 맑은 샘물소리가 났다
제 족속이 아닌 나를 받아준 녀석이 고마웠다
잠시, 풍경이 흔들리고
흔들리는 얼굴과 그 이름이 포개지고
그가 키운 깊고 포근했던 묵화가
망국의 아픔을 기억하는
궁궐뜨락에 하르르 떨어진다
인적없는 명정전 긴 회랑을 돌아 나왔을 때
녀석은 가고 없었다
회랑을 감아 도는 빗줄기가 몸을 죄어온다
날개도 우산도 없는 허탈한 슬픔이
목이 메게 깊다는 것을
날아가는 그를 비워내며 알아가는 중이다
<깊은 것은 슬프다> 전문
‘비워낸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채워간다’는 말과 상통하는 뜻인지도 모른다. 자벌레가 새로운 영역을 더듬어가듯 깊이를 가늠하면서 자신을 알아가고 그럴수록 점점 슬픔 속으로 빠져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이채민 시인은 다른 시 <슬픔에 관한 짧은 리뷰>에서 “생의 중심에 고여 있던/너를 비워내는 일이/나무와/돌과/새들이/우는 일과 같다는 것을/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유안진 시인(서울대 명예교수)은 “<깊은 것은 슬프다>에서 깊은 것이 왜 슬픔과 더 밀착되는지를 자연스럽게 전개시켜, 숨겨져 감춰진 슬픔에 더 민감한 시인의 탁월한 시상포착능력에서 그가 이미 오래 전에 들어선 깊이를 느끼게 한다. 일찍이 박재삼 시인은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이다. 슬프지않으면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던 시의 본질을 이 시집에서 환기시켜주는 것만 같다”고 평한다.
누구의 가슴에 뜨겁게 안겨본 적 있던가
누구의 머리에 공손히 꽃혀본 적 있던가
한 아름 꽃다발이 되어
뼈가 시리도록 그리운 창가에 닿아본 적이 있던가
그림자 길어지는 유월의 풀숲에서
초록의 향기로 날아본 적 없지만
허리가 꺾이는 초조와 불안을 알지못하는
평화로운 그들만의 세상
젊어야만 피는 것이 아니라고
예뻐야만 꽃이 아니라고
하늘 향해
옹골지게 주먹질하고 있는 저 꽃
<파꽃> 전문
파꽃은 파의 대롱 끝에 둥근 모양으로 피어나는 힌 꽃이다. 꽃 중에서도 주변적 존재자인 ‘파꽃’은, 누구의 가슴이나 머리에 뜨겁게 안겨보거나 꽃혀본 기억이 도대체 없다. 유성호 평론가는 “이러한 파꽃의 생테를 통해 이채민 시인은 화려한 외관보다는 내적 페이소스를 간직한 주변적 존재자를 새롭게 발견하고 호명한다. 이때 ‘파꽃’의 생태는, 초조와 불안 속에 잊혀져간 우리 삶의 종요로운 가치로 몸을 바꾸게 된다”고 풀이한다.
문효치 시인은 “그는 성능좋은 더듬이로 대상을 관찰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秘意를 캐낸다. 마치 농부의 곡괭이질에 밭이 뒤집어지면서 묻혀 있던 하얀 알감자들이 신선한 흙냄새를 풍기며 튀어나오듯 이 책 속의 시편들은 우리 앞에 나와 싱싱한 몸으로 구르고 있다. 그는 삶을 앓고 있다. 육신과 영혼으로 절여 들어오는 절절한 아픔이 시로 승화되어 있다. 거기에는 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기단을 이루고 그 위에 공든 탑으로 솟아있는 밀도있는 시어들이 久遠의 하늘을 향해 한 층 한 층 오르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이 탑의 층계를 따라 오르면서 푸른 하늘 위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체험이 바탕이 되어 집념과 깊이가 남다르다”고 평한다.(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