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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청화백자(靑華白磁)는 본래 14세기 초 중국에서부터 생산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세조시기부터 18~19세기까지 만들어진 조선백자의 일종으로 알려졌다. 순도 높은 백자에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투명유약을 입혀 환원염(還元焰)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말한다. 청자와는 전혀 다르니 혼동하지 말 것이다.
2.내용
조선말까지 만들어진 조선백자의 일종이며, 한반도에서 최초의 기록은 세조실록(세조 9년 8월)에 나오기 때문에 조선 세조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봐야 옳다. 왜냐하면 당시 세조는 명나라에서 이따금씩 들어오는 청화백자를 보고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상을 걸고 전국에 포고를 내려 우리나라 내에서도 이를 완벽하게 만들어 구워바치라는 명을 내렸는데 전라도 순천에 사는 구치동(丘致峒)이라는 인물이 1464년에 이를 완수하였다는 기록이 최초의 것이다.
1968년에 이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분청화기 제작 지석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1968.04.03) : 이조(李朝) 청화백자(靑華白磁) 지석(誌石)발견 이후 전라도 경차관이 순천부에서 회회청과 유사한 광물을 채취하여 처음으로 청화를 구웠고, 1467년(세조 13)에는 도자기 제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옹방(司饔房)이 사옹원(司饔院)으로 개칭되어 그 기구가 확대되었다. 1468년에는 경기도 광주에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던 청색 코발트 안료는 페르시아→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전량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매우 비쌌고 국고 낭비도 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때문에 맨 처음 청화백자의 국내제작을 성공시킨 세조는 강진군과 순천에서 코발트광을 발견한 후 토청(土靑)이라고 하는 국내산 청화 안료를 개발하였고 이후 울산지역에서 심중청(深重靑), 삼청(三靑) 등을 발견, 개발하였다. 순백의 도자, 500년 조선역사를 담다, 백자청화연구(2) - 논문1. 청화 안료의 수입과 토청 개발에 관한 문헌 고찰, 하지만 세조가 개발한 국산 코발트 안료인 토청(土靑)은 회청만큼 선명한 파란색이 아니라 검푸른색이 나온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1]
때문에 훌륭한 가성비, 쉬운 조달, 풍부한 양, 국부 해외유출 방지 및 국내경기 향상 등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종 대부터는 국산 안료 개발을 포기하고 그냥 중국으로부터 회회청을 전량 수입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만력년간부터는 수입가격 절감을 위해 중국산 회청을 혼합하면서 색이 점차 나빠졌다.
이후 임진왜란 때 청화백자 제작 기술 및 설비가 큰 타격을 받고 한동안 침체기에 놓이게 된다. 대신 검은색 산화철로 대체한 철화백자가 유행한 것이다. 특히 1754년 영조는 회청의 사용을 사치라며 용항아리외에는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페르시아의 회청보다 훨씬 값이 싸고 품질도 좋은 서양의 청화가 수입되면서 다시금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조선시대 말기까지 유행하였다.
현재 청화백자 생산지의 주요 유적지로는 광주의 번천리, 도마리, 우산리, 무갑리, 학동리 등의 가마터가 현존하고 있다. 대부분 처음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세조 때부터 광주분원을 설립하며 왕실에서 전격적으로 밀어준 곳들이다. 현재 광주에서는 광주분원요지, 광주분원 백자가마터, 광주분원백자관 등의 시설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남은 조선 왕실의 가마터 지역이라는 표지 아래 홍보 중이다.
지금까지 청화백자가 문화재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에서 홀대받았던 이유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도자기 양식이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청화백자를 저평가하는 글에 항상 들어가던 말이 너무 중국스런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고평가받는 고려청자 같은 작품은 양식 자체는 똑같이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것이지만 중국의 용천청자와는 다른 확연하게 구분되는 특징[2]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진짜 우리나라만의 독창적 양식은 신라시대 토우 및 토기나 조선 분장회청사기(보성 덤벙이) 정도다.
고려청자를 고평가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송대 청자 양식을 그대로 받아왔지만 점차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운 청자로 발전시킨 공로가 크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진화과정은 사실 청화백자도 마찬가지다. 일부에서는 한국 백자가 화려함과 기교가 부족하다며 아쉬워하지만, 남겨진 유물과 기록을 보면 화려함을 갖춘 것 역시 많이 존재한다.#
상술된 인식과는 달리 한국의 청화백자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실제로 한중일 삼국의 청화백자 사진을 같이 올려보면 바로 어느나라 것인지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확연히 다르다. 한국 청화백자의 특징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여백의 미(美)이다.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는 갈수록 화려함만을 추구하다보니 후기로 갈수록 아예 이 항아리의 기본 베이스가 백자라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청화안료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반면에 한국은 흰색과 조화를 추구하는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청화안료로 그린 문양과 백자의 바탕을 조화롭게 살리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때문에 한국의 청화백자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백자 자체의 예술성을 전혀 잃지 않으면서도 청화백자 특유의 화려함을 함께 간직할 수 있게 세심히 만들어져 있다. 때문에 해외에서도 한국 청화백자가 언급될 때 조선의 성리학적 철학과 절제미가 언급한다.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백자 특유의 담백한 청백색 유약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런 사람들은 다른 국가의 청화백자보다 한국의 청화백자를 더 고평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제로 서양 유명 고도자 경매 사이트를 가보면 한국의 청화백자가 중국, 일본의 청화백자와 가격 경쟁순위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낙찰가가 억대는 기본이고 수십억을 넘나들 때도 있다. 진짜로 중국 청화백자의 아류 정도로만 취급받는 베트남 및 동남아 청화백자들과는 취급이 다른데 서양의 이런 분위기가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한국 국내에서도 점차 조선 청화백자를 재평가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3.가장 오래된 청화백자 발견
4.기타
2014년 9월, 조선 세조 시기부터 조선말까지 수백여년간 만들어진 한국의 청화백자 중 약 500여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다.
5.청화백자 고미술품 목록
5.1국가 지정 문화재
5.1.1 국보
5.1.2 보물
○보물 제240호 백자 청화투각모란당초문 항아리
○보물 제644호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
○보물 제659호 백자 청화매조죽문 병
○보물 제785호, 보물 제786호 백자 청화운룡문 병
○보물 제788호 백자 청화잉어문 항아리
○보물 제1064호 백자 청화운룡문 항아리
○보물 제1056호 백자 청화철화삼산뇌문 산뢰
○보물 제1057호 백자 청화 ‘망우대’명 초충문 접시
○보물 제1058호 백자 청화칠보난초문 병
○보물 제1059호 백자 청화초화문 필통
○보물 제1329호 백자 청화소상팔경문 팔각연적
○보물 제1390호 백자 청화동정추월문 항아리
○보물 제1448호 백자 청화보상당초문 항아리
○보물 제1768호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
5.2.시도 지정 문화재
5.3.일반 동산 문화재
○보물 제240호 백자 청화투각모란당초문 항아리
○보물 제644호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
○보물 제659호 백자 청화매조죽문 병
○보물 제785호, 보물 제786호 백자 청화운룡문 병
○보물 제788호 백자 청화잉어문 항아리
○보물 제1064호 백자 청화운룡문 항아리
○보물 제1056호 백자 청화철화삼산뇌문 산뢰
○보물 제1057호 백자 청화 ‘망우대’명 초충문 접시
○보물 제1058호 백자 청화칠보난초문 병
○보물 제1059호 백자 청화초화문 필통
○보물 제1329호 백자 청화소상팔경문 팔각연적
○보물 제1390호 백자 청화동정추월문 항아리
○보물 제1448호 백자 청화보상당초문 항아리
○보물 제1768호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
5.2. 시도 지정 문화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4호 백자청화산수문호
5.3.일반 동산 문화재
○백자 청화 산수무늬 항아리
○백자 청화 산수문호형 주전자
○백자 청화 양각 매화 대나무 무늬 각병
○백자 청화 운룡문 대호
○백자 청화 운학문 주전자
○백자 청화 장생 무늬 항아리
○백자 청화 초화칠보문명기 일괄
○백자 청화 투각 구름 용 무늬 연적
○백자 청화 투각 모란 무늬 필통
○백자 투각 구름 용 무늬 필통
○시가 쓰여진 백자 청화 접시
○‘운현’이 쓰여진 영지 넝쿨무늬 병
○운현’이 쓰여진 영지 넝쿨무늬 항아리
○원빈 홍씨 묘 출토 유물
○정식명 청화백자매화문
○청화 백자모란절지문 호
○「함풍년제」가 쓰여진 백자 청화 용 무늬 접시
5.4. 해외 소재 문화재
6.외부 링크
7.같이보기
○백자
○조선
○토청
8.외국의 청화백자
해당 문서에서는 조선의 청화백자에 대해서만 다루었지만 외국의 경우 아예 도자기=청화백자 공식이 생길정도로 대유행이었다. 유럽에서 사간 중국도자기의 절대다수가 청화백자였으며 오스만 제국의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 소장된 황실도자기 컬랙션도 절대다수가 명,청시기 청화백자일 정도. 영국에서도 초기 도자기산업은 청화백자를 모방하기 위해 시작했으며 오늘날에도 영국에서 '할머니의 집'이라고 하면 쳥화백자 식기들이 가득한 장식장이 있는 거실일 정도로 보편적이었다.
[1]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쪽에서는 화학분석 결과 코발트에 비소(As)를 좀 더 함유한 것이 회회청, 철분과 망간을 좀 더 포함하고 있는
것. 이 토청으로 양자간 약간의 회자색 차이가 있긴 하지만 현존하는 유물로는 토청과 회회청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2]다완을 예로들면 마황반과 상감당초문 완을 들 수 있는데 마황반은 두꺼운 유약을 발라 특유의 진한광택이 있고 당초문 완은 화려한 상
감과 얇은 유약으로 유약밑의 의도적인 화려한 균열을 발생시켰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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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목과 동부(胴部)를 모두 육면(六面)으로 깎은 작고 아담한 병(甁)입니다. 따로 접합한 경부(頸部)는 상하(上下) 거의 대칭적(大稱的)인데 구연(口緣)은 도톰하게 처리하였습니다. 동체(胴體)는 전체적(全體的)으로 구형(球形)에 가까운데 견부(肩部)에서 원호(圓弧)를 그리다 거의 직선(直線)으로 좁아지며 굽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양구성(文樣構成)은 경부(頸部)와 동체(胴體)가 동일하게 삼단구성(三段構成)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부에는 파초(芭焦)잎 모양의 독특한 연판문(蓮瓣文)과 사격자문(斜格子文)을 상하(上下)에 두고 넓은 각 면(面)에는 국화절지문(菊花折枝文)을 모서리 부분에는 칠보문(七寶文)을 배치(配置)하였습니다.
청화발색(靑畵發色)은 옅은 편이며 주문양(主文樣)은 특히 세필(細筆)로 간략하게 윤곽선만을 표현하였습니다. 유(釉)는 담청색(淡靑色 )의 분원백자유(分院白磁釉)이며 빙렬(氷裂)은 없고, 굽은 안바닥을 깊게 깎아내었으며 접지면(接地面)에는 유(釉)를 닦아내고 내화토(耐火土)를 받쳐 번조(燔造)하였습니다.
▲백자청화국화당초문각병(白磁靑畵菊花唐草文角甁)
조선(朝鮮)/높이 : 15.3Cm / 입지름 : 3.4Cm / 몸통지름 : 10.3Cm.
동원이홍근수집명품선-도자편 /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백자청화 용문주병.
▲청화백자 인물 문소병(靑畵白磁人物文小甁)
▲청화백자 모단문 각병(靑畵白磁 牡丹文角甁)
▲청화백자 매조문 병(靑華白磁梅鳥文甁)
▲청화백자 모란문 병(靑華白磁牡丹文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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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목이 서서히 벌어져 내려오다가 무게 중심(中心)을 동체(胴體) 하부(下部)에 두고 넓은 굽을 만나는 분원말기(分院末期)의 전형적
(典型的)인 백자병(白磁甁)입니다. 구연부(口緣部)는 뢰문(雷文), 굽도리는 굵은 청화선(靑畵線)의 종속문대(從屬文帶)를 돌렸습니다.
사각(四角)의 격자문대(格子文帶)와 이조(二條)의 청화선(靑畵線)으로 구획(區劃)한 동체(胴體)는 부채꼴 모양(模樣)의 파도문(波濤文)을 배경(背景)으로 잉어, 게, 새우, 조개, 오리 등이 자유롭게 배치(配置)되었으며, 경쾌(輕快)한 필치로 청화안료(靑畵顔料)의 농담(濃淡)을 살려 익살스럽게 표현(表現)하였습니다.
이처럼 대범(大汎)하게 현실적(現實的)인 공간(空間)을 무시(無視)하여 파격적(破格的)이고 자유로운 공간구도(空間構圖)를 연출(演出)하는 시도(試圖)는 19세기(世紀) 청화백자(靑畵白磁)에 현저(顯著)하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담청색(淡靑色)의 백자유(白磁釉)가 고르게 시유(施釉)되었으며 잘 녹아서 은은(隱隱)한 광택(光澤)이 있다. 굽은 안바닥을 깊이 깎아내어 두께가 얇습니다.
접지면(接地面)과 주변(周邊)의 유(釉)를 닦아내고 검은 모래가 섞인 내화토(耐火土)를 받쳐서 번조(燔造)하였습니다.
▲ <1 面> 백자청화파어문병(白磁靑畵波魚文甁) / 19세기 초 작품
높이27.3Cm. 입지름4.6Cm. 바닥지름12.3Cm /국립중앙박물관所藏
▲<2 面>청화백자 파어문 병(靑畵白磁 波魚文甁)
▲청화백자 국화문 병(靑畵白磁 菊花文甁)
▲청화백자 난초문표형병(靑畵白磁 蘭草文瓢形甁)
▲청화백자 동채 장생문 병(靑畵白磁銅彩長生文甁)
▲백자 청화철사진사국화문 병 - 국보294호
▲백자철화승문병, 보물1060호 - 국립중앙 - 01
▲백자동화매국문병(白磁銅畵梅菊文甁)
▲백자상감당초문소병(白磁象嵌唐草文小甁)
▲백자상감수지문병(白磁象嵌樹枝文甁)
▲백자철화조문병(白磁鐵花鳥文甁)
▲태일전(太一殿) 명백자상감탁잔(銘白磁象嵌托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