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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일 : 2013. 06. 02(일)
◇이덕형『李德馨, 1561년(명종 16)~1613년(광해군 5)』
◇신도비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153.
◇묘소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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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한음 이공 신도비명 병서
(領議政 漢陰 李公 神道碑銘 幷序)
이조판서겸 대제학 용주(龍洲) 조경(趙絅) 찬(撰)
고(故)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사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領經筵事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ㆍ세자사(世子師) 한음(漢陰) 이공(李公)의 묘소(墓所)는 양근(楊根, 양평(楊平)의 용진(龍津) 강가에 있다. 한양(漢陽)의 조경(趙絅)이 그 묘비(墓碑)를 새긴다.
지난날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은 왜란(倭亂)을 평정하고 서울로 환도(還都)하여 중흥(中興)의 대업을 회복하였는데, 뭇 사람들이 칭송하는 말을 들으니 모두들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세 분의 정승(政丞)이 좌우에서 돕고 인도하여 오늘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세 분의 정승이란 곧 이 완평 원익(李 完平 元翼)공과 이 오성 항복(李 鰲城 恒福)공과 한음(漢陰)공이다.
공은 세 분의 정승 가운데 가장 연소(年少)하였지만 재능이 제일 뛰어났으며, 덕을 같이한 이와 협심해서 위아래가 함께 하여 오직 나라만을 위하고 일신(一身)을 바친 분 중에 공이 실은 제일이었다. 공의 휘(諱)는 덕형(德馨)이고, 자(字)는 명보(明甫)인데 한산(漢山)의 북편에 살았다고 하여 ‘한음(漢陰)’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그 선조는 광주(廣州) 사람으로, 이집(李集)이라는 분이 문행(文行)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공민왕(恭愍王) 때를 당하여 적승(賊僧) 신돈(辛旽)이 시기하여 해치려 하므로 그 아버지 이당(李唐)을 업고 영천(永川)에 도망하여 숨어 지내다가 신돈이 처형되자 벼슬길에 나아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니 사적(事蹟)이 수록되어 있다.
정 포은(鄭圃隱)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는데, 세상을 떠나기에 미쳐 포은이 애도의 뜻을 표한 곡 둔촌(哭遁村 : 李集의 號)의 시(詩)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朝鮮)에 와서 이인손(李仁孫)ㆍ이극균(李克均) 부자(父子)가 정승을 지내 이씨(李氏)가 드디어 크게 드러났는데, 그 후 이극균이 연산조(燕山朝)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에 화(禍)를 입었으니, 공에게 5대 조가 된다.
이세준(李世俊)은 부사(府使)를 지냈는데 고조(高祖)가 되고, 이수충(李守忠)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는데 증조(曾祖)가 되고, 이진경(李振慶)은 몹시 어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의정부 찬성에 증직 되었으니 공의 조부이다.
아버지 이민성(李民聖)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문화 유씨(文化柳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현령(縣令)을 지낸 예선(禮善)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신유년(辛酉年, 1561 명종 16)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침착하고 굳세고 순후(醇厚)하며, 조심성이 있어 장난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덟 살에 학당에 들어가 어렵고 의심스러운 점을 논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행동 같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못 되어 탁월하게 일찍 학문을 성취하였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을 따라 산수(山水)간을 유람하면서 함께 시(詩)를 수창(酬唱)하는데 시(詩)를 지을수록 더욱 훌륭해지니 봉래가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그대가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읊은 ‘녹음백연기(綠陰白烟起)’ 등 네 구절의 시를 금수(錦水)의 계석(溪石)에 새겼는데,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스무 살에 대책문(對策文)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을 거쳐 사원(史苑=藝文館의 별칭)에 천거 되었으나 당시 장인(丈人=外舅)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공이 승정원의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여서 공은 피혐(避嫌 : 피함)하여 응강(應講)을 하지 않았다.
또 선조(宣祖)께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강독(講讀)하면서 질문에 대답할 재주 있는 신하 다섯 명을 선발하고 왕실의 책을 내어 그들에게 주라 명하였는데, 공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당시에 모두 영예로 여겼다.
임오년(壬午年, 1582 선조 15)에 조사(詔使)로 온 왕경민(王敬民)이 와서 한강(漢江)에 유람하다가 말하기를, “듣자니 조선에 이모(李某)가 훌륭한 사람이라던데 만나볼 수 있습니까? 하였다. 공(公)이 신하는 사사로운 교분을 가지지 않는다며 사절했는데, 왕공(王公)이 시 한수를 써서 주면서
“그대의 풍도(風度)가 출중하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비록 교분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것을 드려 마음의 사귐을 삼고자 합니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제수되고, 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명을 받았으니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과 함께 최고의 청선(淸選)에 오른 것이다. 이때 율곡(栗谷=李珥)이 문형(文衡=大提學)을 맡고 있어 이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한 재상(宰相)이 밤에 율곡의 처소로 찾아와서 이르기를, “두 이씨[兩李氏]는 과연 인망(人望)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께서 만일 그들의 의향을 알지 못하고 천거한다면 시사(時事)를 그르칠까 걱정입니다.” 하니, 율곡이 이르기를, “사람을 천거함은 인재(人材)를 얻자는 함이 온데, 어찌 의향을 가지고 논 하리요?” 하니, 그 사람은 언쟁을 벌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이듬해에 임금이 서총대(瑞葱臺)에 친림(親臨)하여 무예를 시험할 때, 공이 응제(應製)하여 장원(壯元) 하였는데, 이로부터 무예를 겨룰 적마다 항시 수위(首位)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다분히 남의 윗자리를 바라지 않음이 공의 본 뜻 이었다.
한번은 정시(庭試)에서 동진자(同進者)가 시샘[猜忌]하는 말을 하자 공이 드디어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과장(科場)에 나가지 아니하니, 듣는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어 부수찬(副修撰)에 오르고 정언(正言)ㆍ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무자년(戊子年, 1588 선조 21)에 일본(日本)의 사신(使臣)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가 내방(來訪) 하였는데 공은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서 선위사(宣慰使)의 책임을 맡았다. 두 왜사(倭使)는 공의 의표(儀表=몸가짐이나 예절을 갖춘 태도)를 바라보고는 자신들도 모르게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며, 서울에 들어와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는 현소 등이 보빙(報聘=답례의 뜻으로 외국을 방문함) 해줄 것을 매우 간절히 청하였다.
이에 공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이웃 나라와 외교(外交)로서 우호를 닦는데 있어 신의(信義)를 버리고서는 할 수가 없다. 지난날 너희 나라 봉강신(封疆臣=국경을 지키는 장군)이 우리나라에서 도망친 사화동(沙火同) 망로(亡虜)를 옆에 끼고서 우리나라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포로로 잡아 갔는데도 너의 나라에서는 금하자 않았으니 신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였다.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현소와 평의지는 부하 왜졸(倭卒)를 파견하여서 한달을 넘기지 않고 사로잡은 사화동과 잡혀간 노인과 아이들 백여 명을 데리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특별히 직제학(直提學)에 제수하고 은대(銀帶)를 하사(下賜)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590 선조 23)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고 이어서 우부승지(右副承旨) 부제학(副提學)ㆍ대사간(大司諫)ㆍ국자전의(國子銓議=大司成 이칭).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591 선조 24)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초배(超拜)되어 대제학(大提學)을 겸하니 당시 나이 31세였다.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 이후 문형(文衡)을 맡을 사람으로 모두 오랜 덕망과 품계가 높은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공처럼 어린 나이에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은 없었다. 당시 문학에 노성(老成)하고 학문을 쌓아 출중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문단에 올라 공이 문형을 맡은 우두머리가 되기에 이르자 모두가 이르기를, “이모(李某) 보다 앞설 사람은 없다.” 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에 들어 왜구(倭寇)들이 대거 침입하여 우리나라를 천식(荐食=점차로 먹어 들어감)하면서 이모(李某)를 만나 강화를 논의하겠노라 선언하므로, 선조가 조신(朝臣)들에게 그 대책을 두루 하문(下問)하였으나, 모두가 겁에만 질려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공이 나아가 이르기를,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것이 신하의 직분입니다.”하고 혼자 말을 타고 급히 달려 구성『駒城=용인(龍仁)』에 이르러 보니 벌써 적(賊)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널리 퍼져 있어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돌아서 한강(漢江)에 도착하니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간 뒤였다.
샛길을 따라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는데, 적이 대동강 가까이 까지 접근해 와서 다시 공을 만나기를 청하였다. 공이 다시 가기를 청하여 혼자서 배를 타고 강 가운데에서 만나 회견하니, 먼리서 바라보던 뭇 신하들과 여러 장수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질려 얼굴빛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건만, 공은 적을 만나 태연자약한 기세로 적을 꾸짖기를, “너희들이 아무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오랫동안의 우호(友好)를 무너뜨리는 것은 어째서인가?”하니, 현소 등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명(明)나라로 들어가려 하는데, 조선(朝鮮)의 군대가 지나갈 길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는지라,
공이 준엄한 얼굴로 잘라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의 부모국(父母國)과 같은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니, 설사 우리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없다. 어찌 화의(和議)가 이루어지겠는가?” 하였다. 그 뒤로 현소 등이 끊임없이 공을 칭송하여 이르기를, “전쟁 중에 말하는 태도가 지난날 연회에서 말할 때 하고 전혀 다르지 않으니 참으로 미치기 어려운 인물이다.” 하였다.
공은 밤에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장전(帳殿: 임시로 꾸민 임금 자리)에서 승상을 알현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 오성(鰲城: 이항복)과 합력하여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할 것을 아뢰었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난색을 보였는데, 공이 끊임없이 극력 말하자 마침내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대가(大駕)가 정주(定州)에 머물게 되자 드디어 공을 파견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
공이 출발에 앞서 오성과 작별하는 자리에서 공이 남긴 말은 옛날 신포서(申包胥)가 ‘나는 반듯이 초나라를 일으킬 것이다’라고 한 말과 같았으니 사람들은 모두 공이 반드시 성공을 거두리라고 믿었다. 마침내 요동(遼東)에 이르러서는 그 자리에 움직이지도 않고 우뚝 서서 피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삼키며 순안어사(巡按御使)에게 글을 올린 것이 여섯 차례나 되었다.
이에 순안어사 학걸(郝杰)이 공이 온힘을 다해 진정을 드러낸 것에 탄복하여 조정에 보고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임의(任意)대로 조승훈(祖承訓) 등 세 장수를 출동시켜 먼저 왜적과 접전하여 약간의 패배를 당하였다. 이 소식에 천자(天子)가 몹시 노하여 이여송(李如松)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아 출전시켰다.
여러 장수들이 넘치는 용맹으로 앞 다퉈 권면(勸勉)해서 한 번의 전투로 평양의 적진을 격멸하였다.
이에 두려움에 떨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회복할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듬해, 공이 대사헌으로 나가 도독(都督)을 접빈(接儐)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막의 작전계획에 참여하고 한편으로는 군량의 공급을 주관하였다. 비록 준엄한 도독이라도 중요한 문제를 만나면 반드시 공의 판단을 물었다. 이때를 당하여 산과 들에는 치열한 싸움으로 피가 흐르고 도시와 시골이 텅 비었는데 공이 다만 충의(忠義)로써 다치고 상처 입은 사졸과 백성의 마음을 격려하며 군량을 운송하여 한 번도 부족하거나 떨어진 것이 없었다.
덕분에 병사와 군마가 배부르고 기운차서 결국 명나라 군대가 차례로 삼경『三京: 평양(平壤)ㆍ개성(開城)ㆍ한성(漢城을 말함)』을 손쉽게 회복하게 되었으니, 그 공훈(功勳)을 논하자면 누가 공과 더불어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있겠는가. 상이 훌륭히 여겨 기뻐하여 형조판서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4월에 들어 공이 명군(明軍)을 인도하여 한양(漢陽)에 입성하였다. 공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불타고 남은 재를 말끔히 쓸고 대성통곡하니 남아있던 고로(故老)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공을 부모(父母)와 같이 여겼다. 서울[漢陽]은 이제 막 병화(兵禍)로 폐허가 되어버려 굶주림과 역병이 교대로 극성을 부려서 백성은 부자(父子)간에 서로 뼈를 씹는 고통(苦痛)속에서 울부짖었고 너부러진 시체가 도로에 여기저기 가득하였다.
공은 끼니가 끊어진 사람들을 부지런히 걷어 먹였으니 굶어죽게 생긴 사람을 구휼해 살린 것이 이루다 셀 수 없다. 또 흩어진 서적(書籍)을 모아 강유『講帷=강연(講筵)』에 대비하였다. 얼마 후 오성을 대신하여 병조판서에 제수되어 서애(西厓) 유상(柳相: 柳成龍)과 함께 도성(都城)의 백성을 안무(按撫)하였다.
갑오년(甲午年,1594, 선조 27)에 모친상을 당했다. 임금이 ‘국사(國事)가 한창 어려운 때이니, 나라의 기둥인 이모(李某)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상중이지만 조정에 나올 것을 명하였다.
공이 아홉 차례나 사면(辭免)을 비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준엄한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나는 적(賊)이 물러가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경(卿)이 나오지 않는 것을 가지고 걱정한다.” 하니, 공은 부득이 눈물을 머금고 조정(朝廷)에 나아가자,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시무 팔조(時務八條)를 진달하였는데, 모두 조리에 맞아서 마치 유부『兪跗 : 황제(黃帝) 때의 명의(名醫)』와 편작『扁鵲 : 주(周)나라 때의 명의(名醫)』의 용약법(用藥法)과도 같아 기사회생시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정장(丁壯)을 금군에 충원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라고 칭하고 대저(大抵: 대체로) 과(戈=창)ㆍ순(楯=방패)ㆍ포(砲=大砲)ㆍ피(鈹=큰 바늘) 등의 제조법은 모두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저서(著書)를 본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안팎으로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해서 국가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군량을 충족시키는 것은 조영평(趙營平)의 계책도 이보다 낫지는 않다. 식자들이 중흥의 근본이 사실 이 시무팔조에 있다고 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595 선조 28)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전임하였다.
이듬해인 병신년(丙申年)에 호서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군대를 일으켜 두 고을을 함락했는데, 홍주목사(洪州牧使) 홍가거(洪可巨)가 그를 토벌하여 주살하였다.
잔당들이 체포당하자 공의 이름을 무고(誣告)하게 끌어들였다. 마치 기유년(己酉年,1549, 명종 4)의 변란『變: 이홍윤(李洪胤)의 모반』때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의 이름이 적의 입에서 오르내림과 같은 상황이었다. 공이 석고대죄하고 처벌의 명을 기다렸으나 성상이 여러 차례 온유(溫諭: 온화한 말로 타이름)하고 또 국문(鞫問)에 참여하게 하였다. 공은 열 번이나 상소를 올려 고집스럽게 그치지 않고 간청하자 비로소 병조판서의 직임을 해지해주었다.
정유년(丁酉年,1597, 선조 30)에 왜적(倭賊)이 재차 우리 국경을 침범하자 명(明)나라 황제가 네 사람의 장수(將帥)를 보내면서 병사 10만을 거느리게 하고 어사御使) 양호(楊鎬)를 감군(監軍)으로 삼았다. 양공(楊公)은 나이가 어리고 기세를 부려서 천하의 선비들을 얕보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의 평판을 듣고 마음이 흉흉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 중에서 오직 공만이 예전에 이 제독(李提督=이여송)의 막부(幕府)에 들어가 위아래의 마음을 얻었던 것을 살피고 공에께 가서 접빈(接儐)하도록 명하였다. 양공은 공을 보고 단번에 감복(感服)하므로. 공이 드디어 말하였다.
“지금 왜적(倭賊)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여 순식간에 한강을 건너올 것입니다.
일단 천연의 요새지『要塞地: 한강(漢江)을 가리킴』를 잃는다면 비록 명군(明軍) 같은 위세 일지라도 힘을 쓰기 어려울 것입니다.” 양공(楊公)이 그 말을 듣고 즉시 서울로 들어가 서둘러 책전(責戰)을 하고 유격장(遊擊將) 마귀(麻貴)가 거느린 용감한 기병들이 왜적을 직산(稷山: 충남 천안지역의 옛 지명)의 소사(素沙) 들판에서 크게 무찔렀다. 서울이 다시 안정을 찾게 됨은 공의 공력(功力)이 많았다 하겠다.
양공(楊公)은 승전(勝戰)의 기세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울산(蔚山)에서 포위하고, 그 외진(外陣)을 공격하여 적의 무리를 많이 무찌르자, 가등청정은 토굴(土窟) 속으로 퇴각해 들어가서 기가 죽어 있었는데, 마침 날씨가 눈이 내리고 군마(軍馬)가 굶주리고 매우 두려워하여 명군(明軍)은 할 수 없이 마침내 퇴각하게 되었다.
공은 비록 그러한 위급한 상황에 있었지만 의기(意氣)는 전과 같았다. 양공이 이 모습을 보고 몹시 거룩하게 여기면서, “이모는 명(明)나라 조정에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관복을 차려입고 묘당(廟堂: 행정부의 최고 기관을 말함)에 서서 백료(百僚: 모든 벼슬아치)을 굴복시켰을 것이다. 훌륭하다!”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우상(右相)에 임명하니 나이 38세였는데, 얼마 안 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할 때 선조(宣祖)가 전송(餞送)을 하니 유정이 간절한 말로 이르기를, “이 나라에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가장 훌륭한 자와 함께 동행 하게 한다면 만족히 여기겠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상(右相) 이항복(李恒福)에게, “의중(意中)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하문(下問)하므로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모(李某)일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공을 종행(從行)하게 명하자, 유정은 몹시 기뻐하면서, “내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하였다.
순천(順天)에 이르러 적의 우두머리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궁지에 몰려 다 죽게 되어 섬멸할 날을 손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정의 성품이 교활하여 다른 사람이 공을 나눠 가질까 걱정해서 몰래 소서행장이 도망가도록 해주었다.
공이 그 사실을 알아내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수군제독 진린(陳璘)과 약속하고 요해처인 뱃길을 막고서 그들을 대파하게 하였다. 소서 행장은 겨우 자신의 몸만 죽음을 면했다. 유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성을 내며, “이모가 내 삼십 년 훈호(勳號)를 떨어뜨린단 말인가!”라고 아쉬워하였다.
기해년(己亥年,1599 선조 32)에 홍여순(洪汝諄)이 공을 해치려고 유정(劉綎)과의 관계를 들추어내어 무함(誣陷)하니, 공이 열 차례나 해직(解職)을 바라는 글을 올렸다.
선조(宣祖) 임금은 그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경(卿)의 심사(心事)는 청천(靑天)의 백일(白日)과도 같다. 미친바람 거센 비가 몰아친다 해도 그 체모(體貌) 자약(自若)하니, 경은 마음속으로 반성을 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인데, 유씨(劉氏) 그 사람이 어찌 해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도 공은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 누차 청한 끝에 재상에서 물러나서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 34)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남쪽 지방을 진무(鎭撫)하여 군정(軍政)을 바로 잡고 백성의 괴로움을 해결해주니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지역이 평안해졌다.
특히 공은 적을 살피는 데 뛰어나서 적의 진위(眞僞)를 손꼽듯이 정확하게 알았는데, 왜사(倭使) 귤지정(橘智正)이 문서(文書)를 가지고 와서, 허세를 부려 공갈하며 화친을 요구하자, 공은 ‘이것이 대마도(對馬島)의 속임수이지 일본(日本)의 행위가 아니라’고 여겨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귤지정에게 이르기를, “명조(明朝)에서는 너희 왜국(倭國)이 침략을 반복한 때문으로 본국(本國)에 군사(軍士)를 남겨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너희들이 감히 이러한 때에 거짓말을 해가며 우리를 속이려하는가?” 하고 이어서 남쪽지역에 남아서 돌아가지 않은 명병(明兵)을 모아 대오(隊伍)를 정돈하는 한편 급히 형개(邢玠)의 군문(軍門)에 통고해서 왜적들에게 고시(告示)할 유첩(諭帖)을 만들어 부영(釜營, 부산진(釜山鎭)에 널리 내걸게 하니, 적이 입을 다물고 물러갔다.
임인년(壬寅年,1602 선조 35) 조정에 들어와 영의정이 되었다. 계묘년(癸卯年)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일이 있었는데, 성상이 2품 이상의 관원에게 각자의 생각을 말하게 하였다. 이때 공이 진언(進言)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체직당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당시 선무공신(宣武功臣)과 호성공신(扈聖功臣) 등의 책훈에 관한 개국(開局)이 있었는데, 선조께서 하교하기를,
“이모는 왜구가 온 나라를 가득 메웠던 날에 혼자 말을 몰아 적의 우두머리를 만났으니,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하고, 급히 명을 내려 녹훈하게 하였다.
공이 여덟 차례 차자를 올려 사양하였지만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훈을 논정(論定)할 때, 당시의 재상(宰相) 유영경(柳永慶)이 책훈을 꺼려한 나머지 도리어 공이 올린 차자를 지적하여, “이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기록이다. 한노『漢老, 한음(漢陰)을 지칭함』의 사훈(辭勳)은 당연한 처사이다.” 하고서, 끝내 기록에서 빼버리니 이 때문에 여론이 분분하였다.
무신년(戊申年,1608, 선조 41)에 선조(宣祖)께서 승하(昇遐)하여 재궁(梓宮)이 아직 빈전(殯殿)에 있었는데, 임해군(臨海君)의 반란에 대한 고변이 있자 삼사(三司: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쳐 부르던 칭호)가 곧장 법률에 따라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공과 좌상(左相) 이항복(李恒福)이 한목소리로 의리보다는 은혜를 앞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대사헌으로서 상소를 올려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은전을 베풀기를 주장하였다. 재상 이원익(李元翼)도 차자를 올려 목숨을 부지하도록 은전을 베풀길 주장하였다.
시론(時論)이 시끄럽게 일어나서 목숨을 살려줄 것을 주장한 사람들을 역적을 보호하려 한다고 몰아세웠으나, 척포(尺布)의 요가(謠歌)에 대해 문제(文帝)가 종신토록 괴로워 했던 일을 몰랐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명(明)나라 조정에서는 적장자(嫡長子)를 버리고 서자(庶子)를 세웠다는 이유로 광해군(光海君)의 책봉(冊封)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부사(告訃使) 이호민(李好閔)이 연경(燕京)에 이르자 곧바로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 두 차관(差官)을 보내 임해군(臨海君)의 광포(狂暴: 미친 증세)를 사문(査問=조사)하게 하니 온 조정(朝廷)이 허둥지둥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있을 뿐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공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아우의 일로 형을 사증(査證)하는 행위는 아무리 하국(下國)일지라도 명을 받을 수 없다.” 하니, 차관(差官)들이 이 말을 듣고 다시는 사문(査問=조사)하지 아니하였다. 만력『萬曆: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로(1573년~1620년)』말엽에 천자(天子)의 뒤를 이을 후계자의 옹립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아 아무리 번국(藩國)에서 자국(自國)의 세자 책봉의 허락을 요청하여도 명조(明朝)에서는 그 허락을 자꾸만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광해군(光海君)은 공(公)을 명하여 진주사(陳奏使)로 삼으니, 공은 밤낮 없이 길을 재촉하여 27일 만에 연경(燕京)에 도착하여 5개월 동안 머물면서 백방(百方)으로 주선하여 책봉의 허락을 받아 돌아오자, 광해군이 몹시 기뻐하여 공의 아버지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를 제수하고 그 아들에게는 6품(品) 벼슬을 내렸으며,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내려 갑절 돈독히 대우하였다.
기유년(己酉年,1609, 광해군 1) 봄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신해년(辛亥年,1611 광해군 3) 봄에 정인홍이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이황(李滉)』 두 선생을 터무니없이 헐뜯자, 공이 세 차례 차자를 올려 정인홍의 망녕된 행동을 신랄하게 비평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12 광해군 4) 봄에 해서(海西=황해도) 옥사『獄事: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의 무고사건』가 일어났다. 계축년(癸丑年, 1613 광해군 5)에는 박응서(朴應犀)의 고변『告變: 국구(國舅=왕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을 역모로 고발함』옥사(獄事)가 일어났다.
한 사람을 조사하면 열 사람이 연루되어 무고(無辜)하게 끌어들이는 일이 어지럽게 많았고 심지어 궁내에까지 불길이 번져 임자년(壬子年)에 비해 더욱 참혹하였다. 아첨을 일삼는 신하들이 먼저 광해군의 마음을 틀어잡았고, 광해군은 친국(親鞫)을 한답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범인의 죄상을 살피니 입시(入侍)한 모든 신하들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공은 오직 정의(正義) 만을 지켜 아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반(平反=반복해서 신문하여 죄를 공평히 함)하는 데 힘을 기울여 억울하게 당한 사람을 대부분 풀려나게 하였다. 광해군이 직접 국문하여 죄수의 죄를 따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입시하는 여러 신하는 두려워 떠는데 공은 정도를 지킬 뿐 영합하지 않고 오직 억울한 죄를 풀어주는 일에 힘썼으니, 무고를 받은 자들이 꽤 많이 풀려났다.
이때 군소배(群小輩)들이 제 마음대로 날뛰어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화본(禍本)이라 지목하고서 겨우 여덟 살에 불과한 대군(大君)을 삼사(三司)를 사주하여 목매달아 죽일 것을 청원케 했고, 또 대신(大臣)들을 구사(驅使)하여 정청(庭請)을 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대사헌(大司憲) 송순(宋諄)과 대사간(大司諫) 이충(李冲)은 전상(殿上)에서 큰 소리로, “조정(朝廷)의 여론이 모두 대신『大臣=영상(領相)을 가리키는 말』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합문(閤門) 앞에 부복(俯伏)하여 영창(永昌)의 안율(按律)을 청하지 아니함을 가지고 잘못이라 한다.” 하였고, 바로 이어서 이이첨(李爾瞻)이 직접 나서 대신을 겁주며 말하기를, “조정의 공의(公議)가 모두 영창을 처형코자 하는데, 유독 대신만이 출치(出置=내쫓는 일)할 것을 청하고 있으니, 우리들의 종사(宗社=종묘와 사직)를 위한 뜻과는 다릅니다” 하였다.
여러 소인배(小人輩)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화(禍)의 근원이라고 기꺼이 지목하였는데, 이때 대군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다. 삼사(三司)를 사주하여 대군을 전인(甸人: 王田) 및 공물(供物)을 관장했던 고대 관직의 이름)에게 넘겨 목매달아 죽일 것을 청하고, 또 대신을 대궐 뜰에 몰고 가 청하고자 하였다.
대사헌 송순(宋淳)과 대사헌 이충(李沖)이 전상(殿上)에서 큰 소리로, “조정(朝廷)의 의론이,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청하지 않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이이첨(李爾瞻)이 대신을 직접 겁주며 말하기를, “조정의 의론이 영창대군을 사형에 처하게 하고자 하는데 대신께서는 단지 내쫓자고 청하니,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하는 우리들의 뜻과는 다릅니다.”하였다.
공이 웃으며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이전의 의견을 견지한 채 뜻을 바꾸지 않고 장계(狀啓)를 작성하였다. 이이첨 등은 화가 났지만 어찌하지 못했다. 처음에 공이 오성(鰲城=李恒福)과 이 일을 의논해 결정할 때에 오성이 말하기를, “만일 영창대군을 밖으로 내쫓는 데에서 일이 끝난다면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다툴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공이 뜻을 굽히고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내쫓자고 청한 것도 공의 본래 뜻은 아니었다. 영창대군이 이미 쫓겨난 후에, 개가 겨를 핥으면 반드시 쌀을 먹으려 든다더니 대관 윤인(尹仁), 정조(鄭造), 정호관(丁好寬)등이 시끄럽게 떠들며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내놓았다. 공이 오성(鰲城=이항복)에게 말하기를, “살아서 결국 이러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한순간이라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이 타는 듯합니다.
오늘 그대와 함께 차자를 올려서, 첫머리에 정성과 효도를 다해서 자전『慈殿: 인목대비(仁穆大妃)』을 편안하게 하셔야 함을 반복해서 개진하고, 이어서 소인들의 천리를 무시하고 도리를 지키지 않는 행태를 분명하게 말한 다음 머리를 땅에 찧고 피를 흘려서 성상이 마음을 돌리시길 기약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책임을 거의 다하는 것일 겁니다.”하였다.
오성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우리가 말을 반도 아뢰기 전에, 상이 혹 진노하거나, 대간이 혹 기습 공격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말을 다 마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은 중대한 일이니 반드시 대신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진정하고 조급하게 굴지 말고서 의견을 올릴 때 진정을 다 쏟아낸다면, 앞일을 대비하는 것이 이만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공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오성이 먼저 탄핵을 받고 떠났으니, 공이 혼자서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국구(國舅: 왕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이 무함(誣陷)을 당해 죽자 궁궐 깊은 곳에 계신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에게 해가 닥칠 날이 곧 다가오고 있었다.
조정신료들이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에게 연흥군(延興君=김제남)의 부음을 아뢰는 문제에 관해 한창 의론할 때, 공이 《춘추경(春秋經)》에 자식이 어미를 원수로 여기거나 어미와의 인연을 끊는 법은 없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핵심을 세워 논의를 펴자 여러 소인들이 크게 놀랐다.
이이첨(李爾瞻)과 한찬남(韓纘男)이 이성(李惺)과 박정길(朴鼎吉)을 끌어들여 도움을 받아 험악한 기세로 눈을 부라리며 이모보다 더한 역당『逆黨=역도(逆徒)』은 없다고 말하였다. 삼사(三司)가 죄를 다스기를 청한 지 여러 달이 되었지만 광해군(光海君)은 허락하지 않고 다만 삭탈관직(削奪官職)만을 명하였다.
공은 물러나 용진(龍津: 함경남도 문천지역의 옛 지명)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어서 지붕만 쳐다보고 탄식하며 계속해서 눈물만 흘리면서 음식을 물리쳐 먹지 않으며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해 마침내 병을 얻어 날로 악화되어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이 바로 10월 9일이었으니 공의 누린 춘추(春秋) 쉰세 살(53세)이었다.
부음(訃音)을 전해 듣고 광해군은 몹시 슬퍼하며 원래의 관직으로 회복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에 위로 어진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 이서(吏胥: 하급관리)와 군려(軍旅=군대(軍隊)와 시정(市井: 인가가 모인 곳)의 소민들에 이르기까지 공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은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더러는 철시(撤市: 시장이나 상점의 문을 닫음)를 하고 골목에서 곡을 하는 이도 있고 더러는 서로들 재화(財貨)를 거두어 조의(吊意)를 표하느라 공(公)의 집 문전(門前=문앞)에 줄을 이었다. 이때의 광경이 마치 송(宋)나라 때 경수(京帥)의 백성들이 사마 온공(司馬溫公)의 죽음을 애도함과 같았다고 하니, 도대체 공은 어떻게 해서 이다지도 남에게 마음을 얻었단 말인가?
공의 순수한 충심과 한결같은 덕(德)이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부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적의 칼날이 끝내 제지할 수 없었고, 또 이 백성들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올바른 도리를 행하는 백성들이라 공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사양치 않으려고 하는 터인데, 어찌 수사(收司)의 율법 같은 것을 염려했으리요?.
공은 29년 동안을 한 결 같이 선조(宣祖)를 섬겼는데, 처음에는 시(詩)와 서(書)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려 문치(文治)를 장식하자 세상사람 모두가 감히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 그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임진년(壬辰年,1592 선조 25)의 대란(大亂=임진왜란을 말함)이 홍수가 하늘을 뒤덮듯이 일어나 2백 년 동안 평화만을 누렸던 종사(宗社=종묘사직)와 생영(生靈: 살아있는 백성)이 사나운 경악(鯨鰐=고래와 악어)의 부리 앞에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공은 외로운 몸으로 거듭 발이 부르트도록 왕명(王命)에 분주하여 상하(上下: 임금과 백성)가 급히 여기는 일과 소망(所望)을 척수촌설(隻手寸舌: 한쪽 손은 내밀고 뛰어난 언변)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으니, 이렇듯 이룬 공덕은 비록 옛 사람이라도 짝할 사람 없으련만 공은 오히려 겸손을 지키며 공로를 사양하고 차지하지 않았으니, 군자(君子)가 이 때문에 공을 더욱 훌륭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공은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부터 광해군을 섬겼는데, 이때에 선조(宣祖) 임금께서 승하하신 슬픔을 만나서 걱정스럽고 위급한 일이 만 가지였다. 그런 중에도 공은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훌륭한 선왕『先王: 선조(宣祖)를 말함』을 만나 예우를 받았던 은혜를 미루어 새로운 군주에게 보답하고자 하였으니, 그 마음은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마음이었다.
무신년(戊申年,1608, 선조 41)에 올린 〈새로운 정치를 아뢰는 차자〉를 보면 공을 사직신(社稷臣)이라고 이를 만하다. 계속 이어지는 수천 자의 말은, 제일 먼저 임해군(臨海君)을 살려줄 것을 말하고, 다음으로 천명(天命)을 두려워할 것을 말하고, 중간에 모후(母后)에게 효성을 다할 것을 말하였고, 마지막에 세자를 보도(補導)해 줄 것과 언로를 개방할 것과 충직한 이를 받아들일 것과 궁궐의 기강을 엄히 세울 것과 농업을 걱정할 것과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를 열람하여 전대를 교훈으로 삼을 것을 언급하였다.
만일 광해군이 그 가운데서 열에 한두 가지라도 심혈을 기울였으면 어찌 여련왕(厲憐王: 나환자가 임금을 불쌍하게 여기는 일) 같은 일이야 있었겠는가!?
아! 슬프도다.
오직 공은 혼자의 몸으로 선조(宣祖)를 만나서는 계책(計策)이 시행되고 공(功)도 뒤따라 난국(難局)을 평정하고 국가를 안정시킨 것이 마치 판 위에서 구슬이 달리듯 했고, 광해군(光海君)을 만났을 때는 임금에게 바르게 간(諫)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비방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충성을 다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임금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 부추기는 무리들이 법망을 들어서 위협의 칼날을 번뜩였으니 공이 어찌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먼 훗날의 선비 중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공의 글을 읽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상(鰲相=이항복)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고 오상(梧相=이원익)은 홍주(洪州)로 유배되었다.
대중들이 칭송한 이씨(李氏) 성(姓)의 세(三) 정승이 죽지 않으면 유배를 갔으니 나라가 어찌 병들고 시들어서 끝내는 망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공(公)은 정신이 아름답고 풍도가 심원(深遠: 엄정하고 심오함)하여 약관(弱冠: 20세)이 되기도 전에 공을 본 사람들이 모두 재상감이라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교유한 사람들은 공이 얼굴에 기쁘고 노한 빛을 띤 것을 본 적이 없으며, 동배간(同輩間=나이나 신분이 서로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 사이)과 당형제(堂兄弟: 4촌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항상 겸손함을 지켜 자랑하거나 과장하는 말을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향리(鄕里)의 친족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그들을 구제할 것을 생각하였고, 귀해진 후에는 가까운 친척이건 먼 친척이건 관계없이 내외(內外) 친척들이 자기 집에 드나들 듯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항상 어린아이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천성(天性)이 그러한 것이었다.
백사(白沙) 이상(李相=이항복)이 공과는 속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 사이로 살거나 죽거나 변함이 없었다. 공이 돌아가셨을 때 음해하려는 자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백사는 공의 묘지(墓誌)를 지으면서 한 가지 일도 빼놓지 않았고, 공의 맏아들에게 발설하지 말 것을 경계하며 공의 평생을 단언하기를,
“어진 이를 추대하고 능력 있는 이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피(子皮)와 같고, 빈객을 응대하는 것은 숙향(叔向)과 같았으며, 알고서 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송경(宋璟)과 같고 유자를 존대하고 선을 즐거워 한 것은 유정(留正)과 같으며, 사사로이 당을 만들지 않은 것은 사마광(司馬光)과 같았다.”라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사리(事理)에 합당한 말이라고 하였다.
공의 문장(文章)은 육경(六經)에서 나와 정주(程朱)의 글로 도움을 삼아서 어떤 일을 결정 할 때는 ≪춘추(春秋)≫ 같은 성경(聖經)을 위주로 했고, 옛일을 고찰하는 역량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빌렸으며, 그 밖의 수많은 외가서(外家書)까지도 조예가 한계가 없이 매우 박식하였으므로 평소 글을 지을 때도 즉각 수천자(數千字)의 말을 써 내렸다.
그러므로 병신년(丙申年,1596, 선조 29)과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 사이에 명나라 장수와 주고받은 문서와 편지가 한창 많았는데 공이 쓴 글이 대부분이었다. 운문에 있어서 풍류와 우아한 운치가 그 인격에 어울린다 하겠다.
부인은 성(姓)이 이씨(李氏)인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딸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예로 유순하고 지조가 있어 시부모를 섬기고, 부군(夫君=남편)을 돕는데 예(禮)와 공경을 다하다가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의 난리에 나이 28세로 절사(節死: 절개를 지켜 죽음)하였는데, 정문(旌門)을 세워서 표창(表彰)하고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맏이 이여규(李如圭)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를 지냈고, 둘째 이여벽(李如璧)은 현감(縣監)으로 일찍 죽었고, 셋째 이여황(李如璜)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감사(監司)를 지냈으며, 딸은 부사(府使) 정기숭(鄭基崇)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서 난 세 아들은 이여박(李如璞)ㆍ이여방(李如王+旁)ㆍ이여선(李如璇)이요,
세 딸은 군수(郡守) 이증(李憕)과 의관(醫官) 허목(許楘)에게 출가하고 한명은 일찍 과부(寡婦)가 되었다.
판결사는 네 아들이 있으니, 금부도사(禁府都事) 이상건(李象乾)과 이상곤(李象坤)ㆍ이상겸(李象謙)ㆍ이상정(李象鼎)이요, 판서(判書) 이기조(李基祚)ㆍ사인(士人) 최유석(崔有石)ㆍ홍휘(洪彙)ㆍ이구징(李龜徵)은 그 사위다.
그리고 둘째인 현감 이이벽(李如璧)은 아들이 없어 맏이 판결사의 넷째 아들 이상정(李象鼎)이 뒤를 이었으며, 셋째인 감사에게 한 아들이 있으니 이상진(李象震)이요, 여섯 딸은 진사(進士) 오정규(吳挺奎), 참의(參議) 목행선(睦行善), 현감(縣監) 정담(鄭儋), 사인(士人) 조덕윤(趙德潤), 이현년(李玄年), 진사 서내익(徐來益)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사위 정기숭(鄭基崇)에게 네 아들이 있어 정진(鄭鉁)ㆍ정윤(鄭錀)ㆍ정민(鄭鈱)ㆍ정윤(鄭鈗)인데, 둘째인 정윤은 문과(文科)를 거쳐 부윤(府尹)에 올랐고, 사인(士人) 이명징(李明徵), 정자(正字) 한오상(韓五相) 등은 그 사위다.
그 밖에 많은 내외(內外) 손자와 증손들은 이루 다 기재할 수가 없다. 공이 돌아가신 후 11년 뒤에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종사를 바로잡자 공의 사자(嗣子; 대를 이을 아들) 여규(如圭)가 태학사 정경세(鄭經世) 공에게 시장(諡狀)을 부탁하여 태상시(太常寺)에 올려 아뢰자 문익(文翼)이라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40년 뒤 공의 손자 도사 상정(象鼎)이 오상(鰲相=이항복)이 지은 묘지명(墓誌銘)과 우복당(愚伏堂=鄭經世)이 지은 시장(諡狀)을 받들고 청성산(靑城山: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와 하성북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나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부(祖父)의 묘목(墓木: 무덤가의 나무)이 한 아름이 훨씬 더 됩니다.
법도에 따라 마땅히 비문을 새겨야 하지만 제부(諸父: 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팔촌 이내 친척)와 제형(諸兄; 집안의 여러 동료 간을 높혀 이르는 말)들이 수수(壽)를 다 누리지 못하시고 지금은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지금 세상에 조부님과 같은 세상을 사셨던 분이 한 분도 남아있지 않아서 조부님의 풍모(風貌)와 공적(功蹟))을 들려주는 이가 없고, 또 우러러보며 사모하는 사람도 적습니다.
듣건대 집사(執事)께서는 남의 선행(善行)을 말하기를 즐겨 하시어 어진 대부(大夫)들의 공덕(功德)을 기리는 명문(銘文)를 많이 지어셨다고 들었기에 감히 선조의 비문을 부탁드려 집사께 누를 끼치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사양하기를, “돌아가신 상국(相國=宰相)의 위대한 충훈(忠勳: 충의를 다하여 세운 공훈)과 대업(大業)은 사람들이 모두 입으로 칭송할 뿐만 아니라, 이미 사관(史官)이 대서특기(大書特記)하기에도 부족한데 어찌 늙고 미련하여 천하고 용렬한 천열(賤劣)하고 문견(聞見)없는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물며 나는 시골의 만생(晩生: 학문의 성숙이 늦은 것을 말함)으로서 비록 일찍이 관직에 임명되어 요행히도 문임(文任=大提學)의 자리에 있었지만, 지식이 천박하고 시야가 좁아서 겹겹히 가로막혀 글 짓는 것이 신통치가 않는데 감히 위대한 군자의 사적을 어찌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럼으로 이 일을 가벼이 맡길 수 있겠는가. 그대가 다시 생각해 보시게나.”하였는데, 도사공(都事公)은 읍(揖)하고 물러갔다 다시 오기를 세 번이나 거듭하는지라, 그 기색을 살피건대 보잘 것 없는 내 글을 받지 않고는 그만 두지도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과 무신년(戊申年, 1608 광해군 즉위년)의 일에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이표(耳剽:귀 동량)로 들어 잘못 알고 있는 듯 했으나, 성품이 아첨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까지 강청(强請)을 하니 인정상 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공[李公=이항복(李恒福)]ㆍ정공[鄭公=정경세(鄭經世)] 두공께서 지으신 글로 갈무리 하고 또 조그마한 견문을 약간 보태어 기록하여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광주 이씨 선조 중에 / 維廣李先。
둔촌이 제일 먼저 이름이 났으니 / 遁翁其倡。
효행과 절의 나란히 우뚝하였네 / 孝節竝峙。
후손이 아름다운 자취를 이었으니 / 于后趾美。
충희공 부자는 / 忠僖橋梓。
천명을 보존하기도, 체백을 훼손하기도 하였네 / 天全魄毁。
회수가 끊어지지 않아 / 淮水不絶。
산악에서 신을 내려 / 維嶽降神。
공이 그 뒤를 이어 일어나셨네 / 維公繼起。
공의 광대한 기량은 / 公之器宏。
어려서부터 뛰어나서 / 訖自髫齓。
보는 이들 칭찬이 자자하였네 / 覯者嘖嘖。
천리와 인사를 논한 대책문은 / 天人之對。
조조를 꺾고 동중서를 능가하니 / 拉鼂駕董。
한 발에 과녁을 꿰뚫었네 / 一發破的。
낭서에 오르고 / 翔于郞署。
옥당에서 성대해지니 / 盛之玉堂。
임금의 총애가 날로 두터워졌네 / 天寵日渥。
우뚝한 문형의 자리에 있었던 건 / 峻之文柄。
갓 서른을 넘긴 나이였네 / 才踰而立。
국조에 누가 대적하리오 / 國朝疇敵。
임진년에 이르러 / 逮于壬辰。
큰 파도가 하늘까지 치솟아 / 鯨浪掀天。
국운이 위태로웠네 / 天步跼蹐。
공이 이때에 / 公於是時。
남으로 북으로 명을 받들며 / 南北唯命。
적을 섬멸하리라 하늘에 맹세하였네 / 誓天殲賊。
구변으로 흉포한 적을 치고 / 口伐虺毒。
정성으로 천자의 조정을 움직여 / 誠動帝庭。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왔네 / 師渡鴨綠。
수레바퀴가 들판을 울리고 / 長轂雷野。
대포가 성을 진동하자 / 大礮震堞。
모여 있던 개미 떼의 혼이 달아났네 / 蟻屯褫魄。
삼경을 모두 회복하고 / 三京盡復。
산하가 치욕을 씻어낸 것이 / 山河湔羞。
공의 공로가 아니던가 / 公不有力。
화살과 돌 사이를 출입하면서도 / 出入矢石。
조용하고 두려움 없었으니 / 雍容無怖。
경리 양호(楊鎬)가 탄복하였네 / 經理攸伏。
성상이 그 사실을 알고 / 上籍其實。
삼공의 관직을 내리니 / 錫秩三事。
뭇 백성이 우러러 보았네 / 群黎加額。
잿더미 된 종묘에서 통곡하고 / 哭廟灰燼。
죽을 쑤어 굶주린 백성을 먹여 / 糜粥餓隷。
배불리 먹이고 편안히 살게 하였네 / 若乳于席。
정장을 군적에 올려 기예를 겨루게 하여 / 簽丁較技。
금군의 충원에 대비한 것은 / 庸備禁旅。
서애공과 함께 세운 계획이라네 / 厓相與畫。
정유년의 병란 때 / 火鷄之訌。
누가 장사처럼 경계하였던가 / 孰警長沙。
위태로움을 편안히 해서 중임을 다했네 / 危妥擔釋。
통제사가 진린(陳璘)과 함께하여 / 統制偕璘。
적을 몇이나 베고 배를 몇 척이나 깨뜨렸나 / 幾馘呑舟。
오직 공의 책략이었네 / 惟公之策。
선조와는 더없는 군신 간이었으니 / 魚水穆廟。
남궁에서 물러나 양보하여 / 退讓南宮。
대수장군을 본받았네 / 大樹是則。
무신년 봄에 / 于白猿春。
제단이 밤처럼 캄캄하였는데 / 靈壇夜矣。
대절이 더욱 우뚝하였네 / 大節尤卓。
세 번이나 간절히 간언을 올려서 / 三進及霤。
죽을 줄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았으니 / 知死不回。
형벌은 안중에도 없었네 / 目無鼎鑊。
적들이 이를 갈고 어금니를 깨무니 / 鑿齒磨牙。
상서로운 기린이 자취를 감추고 / 祥麟屛迹。
피를 토하며 천정만 올려다 보았네 / 嘔血仰屋。
하루아침에 부음을 아뢰니 / 一昔訃聞。
금상도 애통해하였네 / 當宁亦恫。
나라를 어이 할고 / 奈何乎國。
계해년에 반정하여 / 癸亥改玉。
하늘 해 다시 밝아져 / 天日重明。
공에게 비로소 시호가 내렸네 / 公名始易。
좋은 무덤 터 용진에 / 好丘龍津。
묘수는 벌써 아름드리 되었건만 / 宰木已拱。
공의 일은 어제와 같네 / 公事如昨。
비석에 시를 새겨 놓으니 / 刻詩牲繫。
다시 공을 보는 듯하네 / 如復見公。
지나는 자는 예를 갖추라 / 庶過者式。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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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 신서(申胥) :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성(姓)은 공손(公孫)이며 신(申)이란 곳에 봉(封)한 때문으로 신서(申胥)라 칭하고, 오(吳)
나라가 침입해 왔을 적에 진(秦)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오군(吳軍)을 무찌르고 초나라를 지켰음.
주2) 예상(翳桑)의 진활(賑活) : 춘추 시대 진(晉)나라 영첩(靈輒)이 예상(翳桑)에서 굶주려 죽으려 할 때 조순(趙盾)이 그를 구휼했다는
고사. 예상(翳桑)이란 뽕나무의 우거진 그늘을 말함.
주3) 조영평(趙營平) :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匈奴)를 격퇴한 공이 있어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진 조충국(趙充國)을 이름.
주4) 척포(尺布)의 요가(謠歌) : 형제간의 불화를 풍자한 노래로서,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동생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모반(謀
反)하다가 촉(蜀) 땅으로 귀양을 가서 굶어죽으니, 백성들이 ‘한 자[尺]의 베도 바늘로 꿰매어 함께 입어야 하고 한 말[斗]의 곡식도
절구로 찧어 함께 먹어야 될 것인데,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네.’라고 불렀다는 고사(故事).
주5) 제갈 무후(諸葛武候) : 삼국(三國) 시대 촉(蜀)나라 사람. 제갈량(諸葛亮)의 봉호(封號). 선주(先主) 유비(劉備)를 섬겨 제위(帝位)
에 나아가게 했고, 선주의 유소(遺詔)를 받들고 후주(后主) 유선(劉禪)을 보필했음.
주6) 여련왕(厲憐王) : 여(厲)는 나병(癩病)을 이름인데, 여련왕(厲憐王)이란 난세(亂世)를 당해서는 왕자(王者)도 그 신하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잘못으로 쫓겨날 수도 있어 항상 걱정을 품고 있다 하여 나환자(癩患者)가 도리어 왕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속언.
주7) 함사 대영(含沙待影) : 물여우[蜮]가 모래를 입에다 머금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쏘아서 병사(病死)하게 한다고 하여,
남을 무함(誣陷)하여 해친자들에게 비유함.
주8) 이표(耳剽) :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 여기서는 겸사(謙辭)로 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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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漢陰李公神道碑銘 幷序
한양 조경 찬(漢陽 趙絅 撰)
故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漢陰李公。葬在楊根之龍津江上。漢陽趙絅刻其墓碑曰。昔我 宣祖大王平夷難還舊都。以恢中興之業。聽輿人之誦。咸曰。姓李三相輔之翼之。左之右之。以有今日云。三相卽李完平,李鼇城,漢陰公也。公於三相中年最少才最雋。協心同德。與俱上下。知有國而不知有身。公實爲最。公諱德馨。字明甫。其居在漢山陰。故自號漢陰。其先廣州人。有諱集。以文行致大名。當恭愍世。賊僧旽惡而欲害之。負其父唐。逃隱永川。旽誅。仕爲判典校寺事。事載麗史。與鄭圃隱相善。及卒。圃隱以詩哭。遁村是也。入我 朝。曰仁孫。曰克均。父子爲相。李氏遂大顯。克均被燕山甲子禍。於公五代祖也。諱世俊。府使。爲公高祖。諱守忠。 贈吏部尙書。爲公曾祖。諱振慶。賢而蚤世。 贈貳公。爲公祖考。考諱民聖。知中樞。 贈領議政。室文化柳氏。縣令禮善之女。公生於嘉靖辛酉。生有異質。沈毅醇謹。不喜嬉戲。八歲入學。刺口難疑。非孺子爲者。未舞象。卓然早成。楊蓬萊士彥携遊山水間。有唱斯和。愈出愈佳。蓬萊嗟賞曰。子我師也。公所吟綠陰白煙等四句。刻之錦水溪石。至今宛然。二十。對策登上第。由槐院薦史苑。時外舅鵝溪公方主中祕書。公嫌不應講。 宣廟將講綱目。 命選備 顧問才臣五人。出 御府冊界之。公與焉。一時榮之。壬午。詔使王敬民來游漢江曰。聞東國李某好人。得見不。公以外臣無私交辭。王公書贈一絶。敍曰。聞君風度出乎類。余雖未獲交贄。贈此以爲神交云。俄拜弘文正字。且 賜暇。與白沙同升。淸選之極。栗谷公方握文衡主是選。有一宰夜抵栗谷所曰。兩李果人望。公如未諳意向薦之。恐壞了時事。栗谷曰。薦人在得人。胡論意向。其人爭之不得。夜深乃去。明年。 上幸瑞蔥臺。公應製居第一。自是戰藝常冠軍。然不欲多上人。公志也。嘗於庭試。同進者出噎媢語。公遂稱疾讓登。聞者偉之。陞副修撰。歷正言,副校理。爲選曹員外。戊子。日本玄蘇,平義智來聘。公以吏曹正郞任宣慰。一倭望公儀觀。不覺起敬。及入京享燕。蘇等請報聘甚力。公正色曰。交隣修好。舍信義無適。日爾國封疆臣。挾我亡虜沙火同。憑陵我邊陲。係虜我人民。爾國莫之禁。信義惡在。語未卒。蘇,智遣卒倭。不踰月。執沙火同及被擄髦倪百餘指以獻。 上嘉之。特拜直提學。 賜銀帶。庚寅。陞同副承旨。歷右副,副提學,諫長,國子,銓議。辛卯。超拜。禮曹參判兼大提學。時年三十一。自春亭以后典之衡者皆用宿德峻秩。未有如公妙齡得之者。當時老於文學及畜銳超乘者不止若而人。至登壇執牛耳。咸曰。莫先李某。壬辰。島夷爲封豕長蛇。荐食我國。宣言要見李某議媾。 宣廟歷問于朝。囁嚅不能對。公進曰。急病。臣職也。請單騎馳至駒城。翟氛散漫。無隙可投。還到漢江則 大駕已西狩矣。從間道及平壤。賊逼浿水。又請見公。公又請往。單舸會江中。群臣諸將望見者。無不變色易容。公見賊。氣自若責之曰。爾等無故興兵。壞百年好何。蘇等曰。吾欲入大明。朝鮮不假軍塗之故。公乃竦顏折之曰。爾欲寇我父母國。我國有亡而已。何以和爲。其後蘇等嘖嘖稱公曰。對壘辭語。無異昔日樽俎間。信難及也。公夜渡大同。上謁 帳殿。與大戎鼇城合力陳乞救 天朝事。大臣難之。公抗言不已。議遂定。 駕次定州。乃遣公行。與鼇城班荊而別。其贈處之言。壹似申胥我能興楚者。人皆知公必能辦此也。及至遼。雀立不轉。沫血飮泣。上巡按書者六。巡按郝杰歎公竭蹶露衷。不暇以聞。便宜發祖承訓等三將。先嘗倭少䘐。 天子於是赫怒。大發兵李如松爲大都督。諸將賈勇競勸。一鼓而熸丸都賊屯。於是東人廩廩。始有恢復之望矣。明年。公以都憲出儐都督。左參幕籌。右主軍餉。雖以都督之嚴。遇事肯䋜則必問公斷。當是之時。血流原野。都鄙赤立。公徒以忠義激瘡痍心。飛輓未嘗乏絶。兵馬賴以飽騰。卒使天兵長弟復三京如指掌焉。論其功懋。孰與高下。 上嘉悅。增秩大司寇。夏四月。公導天兵入漢陽。汛掃 廟社灰燼大臨。故老餘存者無不涕泣。見公如見父母。京城新刳於兵。饑疫交熾。父子齩骨之民。嗷嗷荊棘中。僵殍縱橫道路。公拮据卒食之踦。賑活翳桑。殆不可數。又鳩書籍散逸者。以備講帷。頃公代鼇城授本兵。與西厓柳相撫綏都民。甲午。丁內艱。 上以爲虞危未弭。李某國之楨幹。一日不可無。命起復。公九上章辭不報。下峻 批至曰。予不以賊不退爲憂。以卿不出爲憂。公不得已飮泣赴 朝。拜吏判。陳時務八條。鑿鑿中端。若兪,扁之用藥。皆可以起死回生也。其中穀飢民丁壯充禁旅。號曰訓鍊都監。凡戈楯炮鈹。皆放戚啓光書也。廣設屯田于中外。以贍國用。以足軍餉。趙營平之策。無以過也。識者謂中興之本。實在此擧云。乙未。移兵書。丙申。湖西賊夢鶴稱兵陷二邑。洪州牧洪可巨討誅之。餘黨被逮。誣引公名。若己酉之變李相浚慶名出賊口者。公席藁待 命。 上數下溫諭。且使參鞫。公十上章。堅懇不已。始釋本兵。丁酉。倭再𦧟我郊。 天子遣四大將帥兵十萬。御史楊鎬爲監軍。楊公年少作氣勢。奴視天下士。東人聞聲洶洶。 上察群臣。唯公曾入李提督幕府。得上下心。 命公往擯。楊公一見傾倒。公乃言曰。今賊氛甚惡。渡漢不鼂伊夕。一失天塹。雖天兵之威。難以爲力。楊公聞言。卽投袂入城。責戰益急。麻貴鐵騎縱。鏖賊稷山素沙郊。京都再安。公力居多云。楊公乘勝而南。圍淸正於蔚山。鏟其外壘。賊衆多死。淸正郤入土空。雌聲乞降。會天大雨雪。軍馬餒而股弁。天兵遂左次。公雖在危急中。意氣自如。楊公獨視偉之曰。李某雖在中朝。當端委廊廟。尙屈百僚。異哉。 上聞卽爰立作相。時年三十八。無何。陞左台。劉提督綎引兵南下。 宣廟祖送。劉斤斤言本國文武備具者第一人吾與之俱。足矣。 上顧右相李恒福曰。意有在耶。對曰。必是李某。 上遂命從行。劉喜曰。吾濟矣。至順天。賊酋行長窮蹙死咋。殲可指日。劉性狡獪。恐人分功。陰諭行長遁。公鉤得其狀。令統制使李舜臣約水軍提督陳璘。隘諸要港大破之。行長堇以身免。綎聞之大恚曰。李某墮我三十年勳名耶。己亥。洪汝諄摘此媒孼公。公卜上章乞解。 上批曰。卿之心事如靑天白日。狂風驟雨雖或間發。其體自若。卿旣內省不疚。劉氏之子。焉能害之哉。公猶不自安。累控解相印。授判中樞。辛丑。以都體察使鎭南徼。肅軍政爬民瘼。湖嶺以寧。公長於料敵。敵之情僞。效於指詘。倭使橘知正把書契來。虛喝求和。公以爲此馬島諼。非日本事也。郤而不內。且語橘倭曰。天朝以女倭傾側反覆。留兵本國以備非常。女敢於此時以躛言慢我。仍集天兵之落南不歸者。娖隊馳告郉軍門。博諭帖張諸釜營。賊關口而退。壬寅。入爲領議政。癸卯。白虹貫日。上命二品以上言事。公進言忤 旨。遞拜領中樞。時策宣武扈 聖等勳開局。 宣廟下 敎曰。李某當倭寇充斥日。單騎見賊酋。非忘身徇國者不能。趣命錄勳。公八上箚辭。 上不許。及勘勳。時相柳永夢人指公箚曰。此實錄也。漢老辭勳宜矣。遂不錄。物議譁然。戊申。 宣廟上賓。 梓宮在殯。人告臨海叛。三司直請按律。光海下大臣議。公與左相李恒福。同言恩當掩義。鄭寒岡逑以都憲。陳疏主全恩。李相元翼箚辭亦主全恩。時論鵲起呶呶。目全恩爲護逆。殊不知尺布之謠文帝終身病之也。先是。 天朝以舍長立庶。不許光海封典。至是告訃使李好閔至京。則輒遣嚴萬差査臨海病狂狀。擧朝錯愕。留噤而已。不敢措一辭。公趨而進曰。以弟證兄。雖下國不敢聞命。差官聞是語。不復更問。蓋萬曆末。建儲久未定。雖藩國請封。 皇朝例以靳許。故光海命公爲陳奏使。公兼程疾行。二十七日入京。五閱月。幹事而回。光海大悅。陞公父通政判決事。官其子六品。錫田土臧獲倍敦。己酉春。復拜領議政。辛亥。鄭仁弘誣詆晦,退兩先生。公三上箚。痛卞仁弘之妄。壬子春。海西獄起。癸丑應犀之獄䴢起。考一連十。誣引狼籍。至焄宮禁。比壬子尤慘。讒諂態臣先中君心。光海親鞫慮囚無虛日。入侍諸臣震慴。公守正不阿。務在平反。被誣者頗釋。群宵甘心永昌大君。指爲禍本。大君才八歲矣。嗾三司請甸磬。又欲驅大臣庭請。大司憲宋淳,大司諫李冲揚言殿上曰。廷議皆以大臣不率百官伏閤爲非。居無何。爾曕直怵大臣曰。朝議欲致辟於永昌。大臣只請出置。非吾等爲 宗社意也。公笑而不動。草啓猶持前議不少變。瞻等慍而無奈何。始公與鼇城議斷此事。鼇城曰。若出永昌於外而止。吾等無以死爭理。故公詘意從之。然請出永昌。亦非公之素云。永昌旣詘。猰狗狧穅。必欲及米。臺官尹訒,鄭造,丁好寬等訟。共發廢 母后論。公謂鼇相曰。生乃見此事。何可一刻容忍。我心如焚。今日請與君進一箚。首以盡誠李安 慈殿。反覆開陳。仍切刻言群小無天不道。叩頭流血。期以回天。庶幾哉吾責塞矣。鼇相曰。不可。吾啓辭未半。上或震電馮。或臺諫狙擊。吾何從畢吾說。然茲事體大。終必詢大臣。吾等少安毋躁。瀝盡肝血於獻議中。何磨厲如之。公亦然之。俄鼇相先被參去。公獨奈何哉。國舅金悌男被誣矺死。眈眈 慈殿迫無日也。廷臣方議告延興訃于 慈殿。公引春秋子無讎母絶母等語爲立議頭腦。群宵大愕。爾瞻,纘男拉惺,鼎吉爲助。操戈弩眼。以爲黨逆無過李某。三司竝請按律者浹月。光海不許。秪命削職。公退歸龍津。眷顧王國。仰屋咄咄。繼之以泣。却食不食。夜不能寐。遂得疾日惡。竟不起。卽十月九日也。春秋五十三。訃聞。光海震悼。命復原官。於是上自大夫士之賢者。下至吏胥軍旅闤闠小民。聞公之卒。無不咨嗟涕洟曰。吾其如何。或罷市巷哭。或相率出貨財裞其門。趾相嚙不止。噫。此在宋時。京師之民哭司馬溫公如是云。抑不知公何以得此於人。公之純忠一德。自壬辰浹人心腹。刃莫畢屠。斯民者三代之直道而行者也。其欲爲公死無所辭。奚收司之律足顧。公事 宣廟二十九年。始也左詩右書。賁飾文治。人莫敢望焉。然功用旣興則未也。及至龍蛇大難。洪水滔天。二百年 宗社生靈。呑吐於鯨鰐之喙。公以孤身重趼奔命。凡 上之所急。下之所戴眼顒望者。出隻手掉寸舌。無不得意。此之爲功。雖古誰亢。公猶執謙。避之不居。君子以是尤多公云。公事光海。自戊申始也。當是時。新遭天崩之痛。虞危萬端。公之竭忠盡智。追先后之際遇。欲報新君者。諸葛武侯之心也。觀於戊申新政箚。公可謂社稷臣也。縷縷數千言。上言全臨海。次言畏天命。中言盡孝 母后。下及輔道儲位。開言路。內忠直。嚴宮禁戚畹事。出入詩書易春秋。指前代以爲鑑戒。光海如用其中什一二。安有癘憐王事者。悲夫。唯公一人之身。遇 宣廟則謀行功從。夷亂安邦。如坂上走丸。遇光海則其所匡君者。人以爲誹。其所盡忠者。人以爲訐。逢君從臾之徒。擧文罔而閃鑠之。公安得脫乎。千秋之士。必有讀公文於邑流涕者矣。公歿未幾。鼇相謫北靑。梧相配洪川。輿人所誦姓李三相。不死則遷。邦國安得不殄悴而卒之亡也。公精神秀朗。風度凝遠。未弱冠。人見者咸以公輔歸之。所與遊未嘗見公有喜慍色。處群從間常持卑。克伐嫮誕。一不出諸口。兒時見鄕族之貧無者。必思濟之。及貴。內外親戚無疏遠如歸。至於事親。每懷孺慕之心。天植然也。白沙李相。與公肝膽相照。死生靡間。公捐館時含沙待影者何限。白沙作公誌。不遺一事。戒公胤子勿泄。斷公平生曰。推賢讓能似子皮。應待賓客似叔向。知無不言似宋璟。尊儒樂善似留正。不立私黨似司馬光。世以爲知言。公文章出於六經。佐以洛建諸老書。斷事則主魯史聖經。稽古之力。藉涑水資治。泛濫外家。爲深博無涯涘。凡所述作。立就數千言。故丙丁年間。天將文移書牘旁午。左酬右酢。公筆居多。有韻之文。風流雅致。如其人云。夫人姓李氏。領議政山海之女。牧隱先生穡之後。婉嫕有操。事舅姑佐君子。皆盡禮敬。壬辰亂節死。年二十八。旌其門。 贈貞敬夫人。生三男一女。長如圭。通政判決事。次如璧。縣監。早世。次如璜。嘉善監司。女適府使鄭基崇。廁室男三。如璞,如𤧭,如璇。女三。郡守李憕,醫官許楘。一早寡。判決生四男。象乾禁府都事。象坤,象謙,象鼎。判書李基祚,壬人崔有石,洪彙,李龜徵。壻也。縣監無子。以判決第四子象鼎爲后。監司一子。象震。六女。進士吳挺奎,參議睦行善,縣監鄭儋,壬人趙德潤,李玄年,進士徐來益。鄭基崇生四男。珍,錀,鈱,鈗。錀文科府尹。士人李明徵,正字韓五相。其壻也。內外孫曾凡幾人。公歿後十一年。 仁祖大王正 宗祊。公嗣子如圭始請諡狀于太學士鄭公經世。上太常入奏。諡以文翼。又四十年。公孫都事象鼎。奉鼇相所爲竁銘及愚伏堂所爲諡狀。扣不佞于靑城山。涕泗而言曰。祖父之墓木不翅拱矣。於令式宜有顯刻。而顧諸父諸兄不克永世。今不肖獨存。且念今之世。與大父幷世者不憖遺一人。聞大父風烈。跂而慕之者亦少。竊聞執事樂道人之善。多銘賢大夫功德。敢籍先靈。以樂石顯刻累執事。不佞於是蹴然辭曰。先相國韙忠大業。不獨人口皆碑。太史氏旣已大書特書之不足也。奚待老傖之翦翦冷言。況不佞。委巷晩出也。雖嘗承之。幸忝文任。蓬心蒿目。隔重膜作者蹊徑。何敢形容大君子事蹟。此事之屬惡可輕。願子更思之。都事公揖而退而復進者三。觀其色。不得拙文。不休不去。意者繆謂不佞稍能耳剽壬辰戊申事。性且不喜諛。如是強之歟。義實有不得竟辭者。遂剟李,鄭二公所撰檃括焉。又續以謏聞之萬一。序而銘之。銘曰。
維廣李先。遁翁其倡。孝節竝峙。于后趾美。忠僖橋梓。天全魄毁。淮水不絶。維嶽降神。維公繼起。公之器宏。訖自髫齓。
覯者嘖嘖。天人之對。拉鼂駕董。一發破的。翔于郞署。盛之玉堂。天寵日渥。峻之文柄。才踰而立。國朝疇敵。逮于壬辰。
鯨浪掀天。天步跼蹐。公於是時。南北唯命。誓天殲賊。口伐虺毒。誠動帝庭。師渡鴨綠。長轂雷野。大礮震堞。蟻屯褫魄。
三京盡復。山河湔羞。公不有力。出入矢石。雍容無怖。經理攸伏。上籍其實。錫秩三事。群黎加額。哭廟灰燼。糜粥餓隷。
若乳于席。簽丁較技。庸備禁旅。厓相與畫。火鷄之訌。孰警長沙。危妥擔釋。統制偕璘。幾馘呑舟。惟公之策。魚水穆廟。
退讓南宮。大樹是則。于白猿春。靈壇夜矣。大節尤卓。三進及霤。知死不回。目無鼎鑊。鑿齒磨牙。祥麟屛迹。嘔血仰屋。
一昔訃聞。當宁亦恫。奈何乎國。癸亥改玉。天日重明。公名始易。好丘龍津。宰木已拱。公事如昨。刻詩牲繫。如復見公。
庶過者式。 <끝>
龍洲先生遺稿卷之十八 / 神道碑
본 신도비는 공의 묘역 아래 약 300m 지점에 위치에 있는데 장방형의 화강암 비좌에 비몸을 세우고 이수를
올린 것으로 이수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다. 이덕형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지 40년 후인 1653년(효종 4)에 건
립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