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룩은 1950년대에 매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브뤼셀, 파리, 런던, 뉴욕에서 연출을 맡았다. 그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첫번째로 연출한 작품은 불어로 공연한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1951년 브뤼셀에서였다: 그 해 그는 런던에 다시 돌아와서 존 휘팅의 , <겨울 이야기>(길거드와 함께)를 무대에 올렸고 역시 그 해에 아누이의 를 공연했다. 영화제작을 위해 1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1953년에 공연이 잘 안되는 토마스 오트웨이의 왕정복고시대의 비극인 (길거드와 스코필드가 주역을 맡았다)를 제작했고 뉴욕에서는 <작은 오두막>을 다른 매체에서 영상화시킨 것만큼 훌륭하게 제작했다. 크리스토퍼 프라이의 는 브룩이 1954년에 올린 첫 작품이었다. 그 한해는 아더 막레이의 으로 장식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트루먼 캐포트와 해럴드 알렌작, 펄 베일리 주연의 특이한 뮤지컬인 를 공연했다. 1955년은 아누이와 셰익스피어의 차례였다. 브룩은 아누이의 <종달새>와 셰익스피어의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를 스트랫포드에서(나중엔 런던에서) 공연했고 <햄릿>(왕자역에 스코필드)은 웨스트 엔드에서 공연했다. 햄릿도 러시아까지 순회공연했다.
1956년에는 그레이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목사 역에 스코필드)을 각색한 작품으로 시작했다. 이후에도 브룩은 엘리엇의 , 아더 밀러의 <다리에서 본 풍경>, 테네시 윌리암스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불어로 번역한 작품을 파리에서 공연하느라 내내 바빴다. 1957년 브룩은 스트랫포드에서 길거드 주연의 <템페스트>를 공연하였는데 이것은 이들 세 고전작품 중 브룩이 시도한 첫번째 작품이 되었다. 이 공연은 런던으로 왔다. 1957년에 그의 다양한 계획 중 하나는 파리의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을 포함한 <티투스 안드로니쿠스>의 유럽순회 공연이었다. 다음 해에 브룩은 파리에서 <다리에서 본 풍경>의 불어공연을 했고 브로드웨이에서는 스위스 작가 뒤렌마트의 <방문>을 알프레드 룬트와 린 폰테인 주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코미디 뮤지컬로 돌아와서는 대중적 프랑스 쇼인 를 다시 런던에서 영어로 공연하였다. 이 10년간 작업은 1959년 브로드웨이에서 아누이 작의 을 렉스 해리슨과 나타샤 패리 주연으로 공연한 것으로 대미가 장식되었다. 패리는 1951년 브룩과 결혼했고 그녀는 어느날 그의 연극작업에서 큰 의지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특기할만한 공연과 제작은 그의 레퍼토리의 중요성에서 그리고 국제적 활동영역의 측면에서 브룩을 세계에서 가장 진지한 연출가 중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많은 업적 중 많은 부분은 디자이너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그의 재능에 힘입은 바 크다.
에서 길거드와 스코필드는 서로 잘 맞는 주역들이었다. 그 작품에서 브룩은 어마어마한 힘의 비극적 강도를 얻기 위해 그의 환상적인 창의력을 억제했었다. 브룩은 주 텍스트를 수술하고 자르고 위치를 뒤바꾸어 놓고 압축시키고 종국에는 배우들에게 인물과 상황의 생생한 감정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가 주연한 현재 널리 알려진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를 공연하기 위해 브룩은 무대세트와 의상을 디자인했을 뿐 아니라 무지끄 콩끄레떼 형식의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 냉랭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작품의 제의적인 핵심을 드러내었고 한층 괴괴한 장면에서는 관객이 소리를 죽이며 웃지 못하게 하기 위해 원작을 수정하면서 압도하는 효과를 주는 작품을 만드려 애썼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그랜드 기뇰 Grand Guignol 연출법에 의지할까 우려하는 것과는 달리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놀래키는 것을 피했다. 이보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방법은 유형의 강을 없애는 것이지 찌르고 죽이는 판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선홍색 리본으로 상처를 형상화한다. 난도질 당한 라비니아도 여전히 봐줄만 했다. 수술을 받아 고생하고 정신적으로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의 비비안 리가 그 역을 연기했기 때문이었다.
<티투스>는 1950년대 셰익스피어의 공연 중 그의 주요한 성과 중 하나였다. 이 작품으로 런던 시즌과 유럽순회 공연 중에 국제적인 갈채를 받았다.
<방문>에서 초기 유럽식의 극단적 연극화를 지양하고 원작에서 요구되어지는 것처럼 완전히 형식화시키지 않고 무대 세트와 연기를 단순하게 함으로써 더 정교하고 더 많은 메시지를 담아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뉴욕타임지의 브룩 엣킨슨은 브룩의 공연에 의해 주목받았다. 특히 마을사람들이 안톤 스킬을 죽이려고 몰려갈 때 도시에서 만나는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그는 다음을 인상깊게 보았다.
그 사람의 무감각한 얼굴에 떠오르는 공동의 결정이 주는 조용한 무게, 상대편의 눈에 안 띄는 붕괴, 그 싸움을 보기 위해 질서있게 모여있는 동네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질질 끌리는 발걸음과 무감각한 범죄광경을 당황스럽게 그려내는 것. 이러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세부묘사 속에서 브룩은 대본을 활용하지 않고도 대본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전달한다. 그의 기호/취미는 그의 기술만큼이나 나무랄 데가 없다.
브룩은 그가 1960년에 파리에서 공연한 장 주네의 <발코니>가 그의 전적에서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그 작품을 1960년에 순수 표현주의적 연극으로 이행하기 전 그의 마지막 "환영주의자"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브룩이 영국 아방가르드 연극의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명성을 얻게 되고 그의 작업에 있어 정점에 도달하게 된 것이 바로 이 10년간이었다. 즉흥적인 공동제작을 선호하는 그의 기호는 이제 그의 작품에서 하나의 원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