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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전경 2:77~2:87절
김낙범, 유한필,
2:77 무신 이월에 종도들을 데리고 어디를 가실 때
보리밭 가로 지나시더니 종도들이 서로 말하되
이 세상에 빈부의 차별로 인하여
곡식 중에 오직 먹기 어려운 보리가 빈민의 양식이 되어
먹을 때에 항상 괴로움을 느끼니 보리를 없이 하여 버려야
먹는데 차별이 없이 일치하리라 하거늘
천사 들으시고 가라사대
너희들의 말이 유리하니 보리를 없이 하여버리자 하셨더니
사월에 크게 가물어서 보리가 다 말라죽으니 농민들이 크게 소동하는지라
종도들이 이 일을 아뢰어 가로대
이제 만일 보리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자가 많으리라 하거늘
천사 꾸짖어 가라사대 전자에 너희들이 보리를 없애 버림이 옳다 하고
이제 다시 보리 흉년을 호소하느냐
나의 일은 비록 농담 한마디라도 도수에 박혀 천지에 울려 나가나니
이 뒤로는 모든일에 실없는 말을 삼가 하라 하시고
전주 용머리 고개에 가사
김낙범을 명하여 거친 보리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사발을 가져오라 하사
가라사대 궁민의 음식이 이러하리라 하시고 된장국에 밥을 말아서 다 잡수시니
문득 검은 구름이 일어나며 비가 내려서 보리가 다시 생기를 얻어 풍작을 이루니라
해석
종도들: 차경석 김보경 김형렬이다.
김낙범: 전생이 순 임금 동생 ‘상(象)’이다.
18사략
순의 아버지 고수는 후처에게 빠져서 막내아들 상(象)을 사랑하여 순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순은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아우를 사랑하여 화목하기를 힘썼으므로
부모와 아우는 차차 선도되어 간악한 길에 빠지지 않았다.
순의 아버지 고수가 순을 죽이려 했을 당시
순의 꿈속에 태호복희, 신농씨, 황제헌원이 나타나
위험한 고비에 처해졌을 때마다 순을 구해 주었다.
전주 용머리 고개; 보리 가뭄에 비가 필요했고
용이 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용머리 고개에서 공사를 보신 것이다.
2:78 공우가 종사함으로부터 천사의 순유에 많이 모시고 다녔는데
어디서든지 머무르시다가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하실 때에는
밤이면 달머리가 나타나고 낮이면 햇머리가 나타나는 것을 징험하였으므로
언제든지 달머리나 햇머리만 나타나면 출입하실 줄알고
신발과 행장을 단속하여 명을 기다리면 반드시 부르사 가자 하시며 떠나셨나니
대저 천사께서는 어디를 가시든지 미리말씀을 아니 하셨더라
해석
박공우는 증산님의 보좌관 같은 사람이었다.
실제 달머리나 햇머리가 나타나는 자연현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공우 인식속에서만 그렇게 인지하고 느껴지도록 만들어 주셨다.
2:79 김보경이 곰개에 작은 집을 두고 본가를 돌보지 아니하거늘
천사 글을 써 주시시며 가라사대 네 작은 집을 면대하여 불사르라
그러면 좋은 일이 있으리라 보경이 그대로 하였더니
뜻밖에 임질을 얻어 본가로 돌아와서 달포를 머물렀더니
그동안에 작은 집이 다른 곳으로 간지라
천사 보경을 불러 경계하여 가라사대
이제는 집 안이 편안하여 좋은 운수가 열리리니
본처를 사랑하여 저버리지 말라 하시고 임질을 낫게 하여 주시니라
해석
김보경이 김형렬과 차경석의 사이에서 간사스러운 행동을 했기 때문에
차경석이 김보경에 화가나고 싫어서 만든 이야기 이다.
김보경은 여자가 따르지 않았던 인물로 79절은 사실무근 이다.
2:80 하루는 여러 종도들을 데리고 솜리를 지나실 때
나룻터에 이르니 사공이 없고 빈 배만 떠 있거늘
천사 몸소 노를 저어 건너신 뒤에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웃으시거늘
모두 우러러보니
구름 같은 이상한 기운이 노를 저어가는 모형을 이루어 천천히 떠가더라
해석
천사 몸소 노를 저어:
하는 일에 있어 윗사람이 먼저 본이 되어
실행하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다.
종도들 간에도 그러하기를 바라셨다.
2:81 이 뒤에 태인 금상리를 지나실 때 마침 날이 가물어서 모심기를 못하더니
동학 신도 유한필이 그 전날 구름이 끼임을 보고
비가 올까 하여 마른 논에 호미로 모를 심었더니
이내 비가 오지 아니하여 모가 마르거늘 극히 초민하여 가로대
가뭄이 이렇게 심하여 비 올 뜻이 없으니
호미심기 한 것을 갈아 엎어서 콩이나 심을 수 밖에 없도다 하며 탄식하거늘
천사 들으시고
가라사대 모심은 것을 갈아 엎어 다른 곡식을 심는 것은 변괴가 아니냐 하시며
한필을 앞세우고 그곳에 가서 참혹한 광경을 보시고
서쪽 하늘을 향하여 만수를 부르시니 문득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며
소나기가 내리거늘 한필은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미리 아는 법이 있는가 하여 이상히 여기더라
해석
유한필: 전생에 후한을 건립한 광무제이다
증산께서는 유한필을 유선영(柳先靈)이라고 지어 부르셨다.
유선영은 박공우와도 돈독히 지냈다.
동한(東漢)을 개국한 황제 (광무제)
출생 - 사망 BC.5년 ~ AD.57년(3월 29일)
재위기간 25년 ~ 57년 이칭: 유수(劉秀)
1. 동한의 개국황제
남양군(南陽郡) 채양현(蔡陽縣) 사람으로
진류군(陳留郡) 제양현(濟陽縣)에서 출생했고, 이름은 유수,
묘호는 세조(世祖),자는 문숙(文叔)이다.
신망1) 말년에 내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병사를 일으켜,
서기 25년 왕망 정권을 붕괴시키고 하북(河北) 호남(鄗南)
천추정(千秋亭)에서 황제로 등극했다.
유(劉)씨를 중흥시켰다는 뜻에서 한(漢)을 국호로 삼았고
역사에선 동한이라고 일컫는다.
2. 정권의 안정과 중흥
유수는 한 고조(高祖) 유방의 9세손으로
그 아버지는 일찍이 남돈령(南頓令)을 지냈다.
황제로 등극한 후 유수는 11년만인
36년에 전국을 평정한 다음 인재를 우대하고 세금을 줄이는 등
다양한 정책으로 정권을 안정시키고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학문을 장려하고, 유교를 국교로 존중하여 예교주의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동한 200여 년의 기틀을 놓았다.
재위하는 동안 여러 차례 노비를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농민들의 세금과 부역을 줄이고, 지방의 병역제를 폐지하는 등
민심과 생업을 안정시키는 정책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아울러 수리사업을 일으키고 생산을 발전시켰다.
관원을 줄이되 사직한 공신을 문관으로 임명하고
정부 부처 중 상서(尙書, 장관)의 권력을 강화시켰으며
삼공(三公, 삼정승)의 권력을 줄여나갔다.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제한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강화시키는 등의 조치로
새로 일어난 동한정권의 안정을 꾀했고,
동한은 신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광무중흥(光武中興)’이란 말로 칭하며
유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한필(광무제)는 현제 3생으로 나왔고 올해 31세이다.
만수: 만수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만수란 특정한 신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만수를 부르시니: 신명을 부를 때 응감하라고 하는 몸짓이다.
2:82 어떤 여인이 간부를 보아 자식을 낳았으나 본부는 모르더니
하루는 천사 그 여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저 아해가 혈통이 바르지 못하니 어찌 모호하게 하여 큰 죄를 짓느냐 하시니
그 여인이 사실을 자백하니라
해석
어떤 여인; 전생이 장비의 처(아내)였다.
간부: 삼국시절의 모사꾼 사마소이다.
사마소-
사마소의 부친인 사마의는 조상을 제거하고 나서 2년 후에 병이 들어 죽었다.
승상 직무는 아들 사마사가 이어받았으며,
위나라의 대권은 사마사와 사마소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가차없이 제거해 버렸다.
소제는 사마사 형제의 전횡을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
방법을 내어 그들의 군권을 해제시키려 했다.
그러나 손을 쓰기 전에 사마사가 황태후를 협박해 조방을 폐위시키고,
문제 조비의 손자인 조모(曹髦)를 황제로 올려놓았다.
위나라의 일부 지방 장령들도 사마사 형제의 전횡을 아니꼽게 여기고 있었는데,
황제까지 자기 멋대로 폐위시키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양주 자사 문흠(文欽)과 진동장군 관구검(毌丘儉)은 사마사를 토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사마사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문흠과 관구검을 격파했다.
그리고 허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이 들어 죽었다.
사마사가 죽자 사마소가 대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사마소는 사마사보다 더욱 사나워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황제인 조모도 이를 참지 못하고,
하루는 상서 왕경을 비롯한 대신 셋을 불러놓고 격분해 이렇게 말했다.
“사마소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길 가는 행인들도 다 알고 있소.
이렇게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야 없지 않소?
오늘 경들과 함께 목숨을 내놓고 싸워 놈을 주살하려고 하는데 동조해 주겠소?”
어린 조모는 용기만 있었지 사마소와 싸워 이길 방법을 몰랐다.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조모는 보검을 손에 쥐고 수레에 오르더니,
궁을 지키던 금위군과 시종들을 이끌고 함성을 지르며 궁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러자 사마소의 심복 가충(賈充)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금위군과 맞붙었다.
조모는 앞으로 나가면서 “나는 황제다.
네놈들이 역모를 하려는 게냐.”하고 소리치며 칼을 휘둘렀다.
가충의 병사들은 황제가 직접 칼을 들고 나서자 두려워서 도망치려고 했다.
가충의 수하에 있는 성제라는 자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자,
가충은 버럭 화를 내면서 고함을 질렀다.
“물을 것이 있느냐? 사마공이 너희들을 뭣하러 길렀겠느냐?”
이 말에 고무된 성제는 창을 꼬나들고 달려들어 조모의 가슴을 있는 힘껏 찔렀다.
창에 가슴이 뚫린 조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신의 수하가 황제를 죽였다는 말을 들은 사마소는 덜컥 겁이 났다.
그는 급히 대신들을 불러 이 일을 의논했다.
그러자 노신 진태가 말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성제를 죽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야 천하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게 됩니다.”
사마소는 이 일을 질질 끌다가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까 봐,
황제를 죽인 대역죄를 성제한테 뒤집어씌우고 그의 가문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다.
그리고 조조의 후대 중에서 열다섯 살인 조환(曹奐)을 황제로 올려놓았는데,
그가 바로 원제(元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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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유월에 김병욱이 사람을 보내어
백남신의 친산에 묘적이 들어서 두골을 도적하여 갔다는 사유를 아뢰거늘
천사 등불을 밝혀 사흘밤을 철야하사 상가와 같이 지내시고
남신에게 말씀을 전하여 가라사대 두골을 찾으려 힘쓰지 말고 조용한 곳에
거처하여 외인 교제를 끊으라
처서절에는 스스로 두골을 가져오게 하리라 하시니라
이 때에 사흘밤 철야 하심을 종도들이 즐겨하지 아니하니
가로대 이 같이 힘을 들이되 당사자는 알지 못하니 무슨 공로를 알리이까
가라사대 두골만 찾게 할 뿐이요
그의 알고 모름은 관계할 바 아니니라 하시니라
남신이 명하신대로 유벽한 백운정에 처하더니
칠월에 그 묘하촌에서 동장이 자발적으로 동회를 열고 의논하되
우리가 이 묘하촌에 살면서 범연히 지낼 수 없으니
온 동리가 나서서 이 근처를 수색하여
만일 두골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묘주에게 말하여 상을 주게 함이 가하다 하고
온 마을 사람을 동원하여 근처 산 기슭을 수색하니
이때에 묘적이 생각하되 묘주가 돈을 들여서 두골을 찾으려 하지 아니하니
차라리 이 기회에 두골을 찾아가면
도적이란 이름도 면하고 상당한 상을 받으리라 하고
두골을 가지고 동장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여러 곳을 수색하여 다행히 찾았노라 하거늘
동장이 그 사람을 데리고 백운정에 오니 이 날이 곧 처서절이러라
해석
백남신의 친산: 백남신 친산에 도굴꾼이 든 것은
백남신 선영 중에서 왕 이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임금으로 인해 부관참시를 당한 원이 그 선영을 보복하기 위해
도적에게 들어가서 벌어지게 된 일이다.
묘적: 전한 시대 여태자와 동시대에 나와 단 15일 동안만 왕 노릇을 했던 인물이다.
이 때에 사흘밤 철야 하심을 종도들이 즐겨하지 아니하니:
다른 사람들의 묘적을 막고 지키기 위해서 하신 일이다.
조선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나라는 혼란스럽고 수탈도 잦았다.
그 당시 외국인들이 능에서 나온 장식품이나 부장품등을 사들이는 시기였으므로
조선인들이 도굴을 많이 하였다.
묘하촌 동장:
어느 한 제후였던 사람으로 이름은 ‘손정’이고 모사꾼이었는데 해원 인물이다.
이치에 밝게 통하면 물건이 없어졌을 때
그 물건이 어디로 갔고 언제 찾게 되는 지도 알 수 있다.
2:84 이튿날 아침에 용머리 고개에 가셨더니
병욱이 와서 두골 찾은 일을 아뢰거늘 가라사대 묘적은 어떻게 하였느뇨
대하여 가로대 경무청으로 보냈나이다
가라사대 잘 설유하여 돌려 보냄이 가하거늘 어찌 그리하였느냐 하시고
검은 옷 한 벌을 지어오라 하사 불사르시며
가라사대 징역에나 처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과연 그 사람이 징역에 처하니라
종도들이 반드시 처서날에 찾게 된 까닭을 물으니
가라사대 매양 사사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 두기만 하면
그 도수에 이르러 공사와 사사가 다 함께 끌리느니라 하시니라
해석
검은 옷 한 벌을 지어오라 하사 불사르시며:
묘적을 해원시키 주시기 위해 하신 일이다.
징역에나 처하게 하리라:
백남신 선영이 또다시 원을 갖게 되므로 그 일을 끊어 주신 것이다.
2:85 김덕찬이 천사께 대하여 항상 거만하더니
하루는 공사를 보실 새 크게 우뢰와 번개를 쓰시니
덕찬이 두려워하여 자리를 옮기거늘
일러 가라사대 네가 죄지은 바 없거늘 어찌 두려워하느냐
덕찬이 더욱 겁내며 어찌 할 바를 모르더니 그 뒤로는 천사께 극히 공경하니라
정정과 해석
김덕찬: 김덕찬이 아니고 차경석에게 있었던 일이다.
증산님께 차경석은 항상 거만하였기 때문에 혼이 나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하였다.
2:86 남신의 일가 용안이 술도가 면허를 얻고
전주 부중에 있는 수백 술집에 술 빚는 것을 금하니
이때에 천사 용머리 고개 김주보의 주막에 계실 때
주보의 아내가 가슴을 치며 가로대 다른 벌이는 없고 다만 술장사로 가권이 살아 왔는데
이제 술을 빚지 못하면 무슨 벌이로 살아가리요 하거늘
천사 불쌍히 여기사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어찌 남장군만 있으리오 마땅히 여장군도 있으리라 하시고
종이에 여장군이라 써서 불사르시니
주보의 아내가 문득 신기를 얻어서
부중을 돌며 호령하여 잠시에 수백 주모를 모아 거느리고
용안의 집을 엄습하여 형세가 불온하거늘 용안이 크게 놀래어
군중에게 사과하고 술도가를 중지하니라
바른 정정과 해석
술도가 면허; 양조장 면허
남신의 일가 용안이 술도가 면허를 얻고 전주 부중에 있는 수백 술집에
술 빚는 것을 금하니:
남신의 일가 용안이 면허 없는 사람들에게 술 빚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라
백남신 자신이 한 일이었다.
김주보: 그 당시 1생을 나왔던 사람이다.
여장군이라 써서 불사르시니 주보의 아내가 문득 신기를 얻어서:
김주보의 아내는 전생이 신농씨의 부인 이었다.
신농씨 당시 매우 명석하고 똑똑했으며 내조나 보좌를 뛰어나게 하였었다.
현재는 일본에서 3생으로 나와 있고
후천에 넘어가며 나이는 48세가 되었으나
한국에 태어나 있는 신농씨와 지금 연이 있지는 않다.
용안의 집을 엄습하여 형세가 불온하거늘 용안이 크게 놀래어 군중에게 사과하고
술도가를 중지하니라: 용안의 집이 아니라 백남신의 집을 엄습하였다.
2:87 용머리 고개에 봉사 한사람이 항상 길 가에 앉아서 피리를 불어 돈을 벌더니
하루는 천사 지나시다가 일러 가라사대
네 돈으로 술 한 잔을 사먹으려 하노니 뜻이 어떠하뇨
대하야 가로대 몇 잔 이던지 잡수시기를 원하나이다 천사 웃으시고
돈 한 돈을 집어서 술 한 잔을 사 잡수시면서
가라사대 불쌍하니 편히 먹게 하리라 하시더니
그 뒤에 얼마 아니 되어 전주 부호 과부가 데려다가 같이 있게 되니라
해석
봉사: 전생이 광무제 형인 ‘유연’이다.
후한 당시에 광무제 보다 더 명석하고 결단력 있는 인재였다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하는 데에도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광무제 유수는 위로 유연(劉縯)과 유중 두 형을 두었다.
큰형 유연은 성격이 호탕하여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반면,
여러 사람들을 이끄는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었다.
전주 부호 과부: 증산님 당시에 2생을 나온 사람이다.
유연은 증산님을 만났을 때 피리를 불며 연명하는 처지 였으나
베품에 있어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전생에도 공덕이 있었으므로 부호 여인과 인연을 맺게 하시어 편히 살게 해 주셨다.
http://www.gwanggyodow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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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석
종도들: 차경석 김보경 김형렬이다.
김낙범: 전생이 순 임금 동생 ‘상(象)’이다.
18사략
순의 아버지 고수는 후처에게 빠져서 막내아들 상(象)을 사랑하여 순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순은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아우를 사랑하여 화목하기를 힘썼으므로
부모와 아우는 차차 선도되어 간악한 길에 빠지지 않았다.
순의 아버지 고수가 순을 죽이려 했을 당시
순의 꿈속에 태호복희, 신농씨, 황제헌원이 나타나
위험한 고비에 처해졌을 때마다 순을 구해 주었다.
해석
박공우는 증산님의 보좌관 같은 사람이었다.
실제 달머리나 햇머리가 나타나는 자연현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공우 인식속에서만 그렇게 인지하고 느껴지도록 만들어 주셨다.
유한필(광무제)는 현제 3생으로 나왔고 올해 31세이다.
만수: 만수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만수란 특정한 신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만수를 부르시니: 신명을 부를 때 응감하라고 하는 몸짓이다.
해석
어떤 여인; 전생이 장비의 처(아내)였다.
간부: 삼국시절의 모사꾼 사마소이다.
김주보의 아내는 전생이 신농씨의 부인 이었다.
신농씨 당시 매우 명석하고 똑똑했으며 내조나 보좌를 뛰어나게 하였었다.
현재는 일본에서 3생으로 나와 있고
후천에 넘어가며 나이는 48세가 되었으나
한국에 태어나 있는 신농씨와 지금 연이 있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