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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의 유래 (전주최씨 유래)
1. 당최설과 토최설
전주 최씨의 기원에 대해선 '당최설(唐崔說)'과 '토최설(土崔說)'로 나뉘었다. 당최설은 전주 최씨의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는 주장이고, 토최설은 최언위를 포함해 최씨 득성조인 소벌도리의 후손 중 일부가 전주로 와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1-1 당최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들
당최설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선 최치원이 쓴 쌍계사 진감선사탑비[31]를 보면 진감선사[32]의 집안에 대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선사의 법휘는 혜소이며, 속성은 최씨다. 그 선조는 한족으로 산동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변방의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당나라가 4군을 차지함에 이르러 지금 전주의 금마 사람이 되었다.
(禪師法諱慧昭 俗姓崔氏 其先漢族 冠蓋山東 隋師征遼 多沒驪貊 有降志而爲遐甿者 爰及聖唐囊括四郡 今爲全州金馬人也)
또 최언위가 썼다고 전하는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를 보면 선각대사[33]의 집안에 대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34]
대사의 법휘는 형미이며, 속성은 최씨다. 그의 선조는 박릉의 고관으로 큰 마을의 인재였으나 계림에 사신으로 왔다가 토군으로 흘러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운수에 두고 자취를 해연에 멈추어 이에 무주(지금의 광주광역시 일대) 사람이 됐다.
(大師法諱逈微 俗姓崔氏 其先博陵冠盖 雄府棟梁 奉使雞林 流恩兎郡 所以栖心雲水寓蹟海壖 今爲武州▩▩人▩)[35]
아울러 문성공계는 족보에 '최씨본원(崔氏本源)'이라는 글을 수록했다. 여기엔 중국 서책 운부군옥(韻府羣玉)과 진감선사탑비를 근거로 전주 최씨가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해당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운부군옥'에 따르면 "강태공의 후손이 나라를 사양하고 최읍(崔邑)에 거주하게 되면서 최씨가 되었고, 그 후손에 청하와 박릉 등에 살면서 모두 저명한 성씨가 됐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이 쓴 '혜소스님의 비문'[36]에서는 대략 "최씨의 선대와 근본은 한나라 벼슬했던 집안이다. 산동지방에 세거하다가 수나라 양제가 동쪽(고구려)을 정벌할 때 왔다가 많은 사람이 죽고, 일부는 고구려와 예맥에서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살았다. 이후 우리나라 백성이 됐고, 후에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4주로 나눌 때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전주와 금마를 관향으로 한 자는 모두 그 후예들이다.
(韻府羣玉有曰 姜太公之孫讓國居崔邑 因爲崔氏 其後居淸河博陵 並爲著姓云 崔孤雲所撰 僧慧昭碑略曰 崔氏之先本 漢之冠盖族也 世居山東 隋煬帝東征時 將士多沒高句麗濊貊之地 爲其遐氓 自後 爲我東之民 至唐囊括四州 沿爲全州金馬之人 今之全州金馬貫者皆其後也云爾)
위의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 최씨본원 등에 따르면 최씨 중엔 소벌도리의 후손인 신라 사량부 출신도 있지만, 고구려와 중국 등 북방계통에서 유래한 최씨도 있었고 이들은 주로 전주와 광주 등 전라도 지역에 모여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2. 토최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들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의 기록을 곧이 곧대로 신뢰하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계에선 혜소나 형미 등 '중국계를 자처한 전라도 출신'들이 실제로는 중국계가 아니라 고구려 유민인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고구려 유민들을 남원경(南原京)으로 집단 이주시켰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남원시 일대다. 고구려가 망한 후 신라에 대항해 부흥운동을 벌였던 보덕국의 근거지는 남원경 인근의 금마였으며, 보덕국은 남원경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을 주축으로 활동했다. 학계에선 신라에 대항했던 고구려 유민들이 상류사회로 진출하는 방법은 승려가 되는 것이었고, 혜소나 형미 등은 고구려 유민으로 받게 될 차별대우를 피하고자 중국인의 후예를 자칭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는 후삼국시대 활동한 승려 현휘(玄暉)와 경유(慶猷) 등이 있다. 현휘는 노자의 후예를, 경유는 한족의 후예를 자처했다.[37]
아울러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의 기록만을 근거로 삼아 '전주 등 전라도에 살았던 기록이 있는 최씨라면 모두 북방계통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김헌창의 난과 관련해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최웅은 경주에서 전주로 파견된 관리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18일에 완산주 장사 최웅과 주조(州助) 아찬(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왕경(王京)으로 도망해 와 그 일(김헌창의 난)을 알렸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級飡)의 관등과 속함군(速含郡) 태수(太守)의 관직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湌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即授崔雄位級湌 速含郡太守 令忠位級湌)
통일신라 시대 장사와 주조란 지방행정 조직인 주(州)를 다스린 도독을 보좌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통일신라에선 도독을 포함해 장사와 주조 등 지방행정을 담당한 외관은 모두 중앙으로부터 임명·파견됐다.[38] 최웅은 전주에서 지방관을 지냈으나, 전주 토착민이 아니라 경주 사람으로 전주에 파견돼 살던 인물인 셈이다.
또 조선 후기 실학을 연구한 서유구는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에 '교인계원필경집서(校印桂苑筆耕集序)'라는 서문을 썼는데, 여기서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가 아니라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 일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유구의 글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이름은 치원이요, 자는 해부이며 고운은 그의 호이다. 호남의 옥구 사람이다.(公名致遠 字海夫 孤雲其號也 湖南之沃溝人)
교인계원필경집서에는 서유구가 최치원의 출생지를 옥구로 상정한 자세한 이유에 대해선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을 내세웠던 서유구가 최치원의 출생지를 옥구로 상정한 것을 보면 1800년대 무렵 전라도 일대엔 경주에서 이주해 온 사량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나 문화재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3. 토최설만 인정한 문열공·사도공계
이상에서처럼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 이야기, 문열공계 및 문성공계의 설명, 삼국사기 최웅의 기록, 서유구의 최치원 출생지 언급, 각종 역사학 논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가 건국되기까지 약 3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전주에는 고구려 유민들, 중국에서 내려온 사람들, 경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섞였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 왕조시대엔 조세의무와 농경, 공역 등을 위해 거주지 이전이 엄격히 제한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대 삼국시대에도 거주지 이전은 가능했다. 관직 부임이나 결혼 등을 이유로 본적지 관청에 신고한 후 적법한 절차를 밟으면 이주가 가능했다. 특히 통일신라 당시에도 지방민이 왕경(王京)인 경주로 옮겨오는 것은 다소 제한적이었으나, 반대로 경주에서 지방으로 옮겨가는 것은 인구분산 차원에서도 장려되는 편이었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다만 현재에 와서 당최설은 '모화사상으로 인해 자신의 선조를 중국에서 왔다는 식으로 지어내려고 했던 의도'라고 풀이되며[40], 현재 문열공계와 사도공계는 족보에서 토최설만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4. 떡밥: 최씨 경주대동기원설
'최씨 경주대동기원설(慶州大同起源說)'은 한국에 있는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사량부(沙梁部, 옛 돌촌 고허촌)를 중심으로 살아온 경주 최씨가 한국 모든 최씨의 중심세력(종가)이고, 다른 본관의 최씨들은 사량부에서 각각 지방으로 흩어져 살면서 분적했다고 설명한다. 조선 말기에는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을 바탕으로 '최씨상계보(崔氏上系譜)'라는 세계표(世系表)까지 만들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당최설과 토최설이 제기된 데서 드러나듯 한국의 최씨 중엔 소벌도리의 후손들이 상당수인 것은 맞지만, 중국에서 동래했거나 고구려 유민 등 북방계통에서 유래한 경우도 존재한다.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에 대한 대표적인 반례는 통일신라 말기 활동한 낭공대사(朗空大師, 832년~916년)다. 그는 신라 출신으로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했고, 왕으로부터 국사(國師)의 예우를 받은 고승이다. 하지만 그의 조상은 소벌도리가 아니고 중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최언위가 경명왕의 명을 받아 찬술한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를 보면 대사의 출생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행적(行寂)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그의 선대는 주나라 조정 상보(尙父: 태공망)의 먼 자손이자 제나라 정공의 먼 후예인데, 그 후손이 현토군(玄兎郡)에 사신으로 나왔다가 계림에 머물러 살아 지금은 경만(京萬) 하남(河南) 사람이 되었다.(大師 法諱行寂 俗姓崔氏 其先周朝之尙父遐苗 齊國之丁公遠裔 其後使乎兎郡 留寓鷄林 今爲京萬河南人也)
특히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의 근거로 쓰이는 최씨상계보는 그 신빙성 자체가 의심스럽다. 따라서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은 현재 정설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4-1 입장: '최씨상계보'를 인정하지 않음
최씨상계보란 최씨가 소벌도리로부터 어떻게 혈연 관계가 이어지는지를 표기하는 문서다. 다른 말로는 '최씨선계보(崔氏先系譜) 또는 '선의계 추록(先疑系 追錄)'이라고도 한다. 이 자료는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의 주요 근거로 쓰인다. '최치원이 소벌도리의 24세손'이라거나 '◇◇ 최씨가 소벌도리 또는 최치원의 00세손'라고 말하는 근거는 모두 최씨상계보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라의 유리 이사금이 소벌도리가 속한 사량부에 최씨 성을 하사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41], 현재 최씨 인구 중에서는 경주 최씨의 숫자가 가장 많다. 때문에 '최씨는 대부분 소벌도리의 후예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최씨상계보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씨상계보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자료는 최치원 사후 900년이나 지나서 작성됐고, 역사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소벌도리로부터 30여대 걸친 계보를 일일이 열거해 소벌도리와 각 최씨들을 무리하게 연결하고 있다.[42][43] 경주 최씨가 대동보를 처음으로 만든 건 1734년 갑인보(甲寅譜)[44]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년 뒤, 기존에는 어떤 사료나 족보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던 내용이 갑자기 개인의 필사의 형태로 출현했다는 건 최씨상계보의 신빙성을 의심케 한다.[45]
최씨상계보가 역사적 사실 또는 각 최씨가 주장하는 세계도와 맞지 않는다는 것은 몇 가지 사실만 확인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본편의 이미지로 첨부된 '최씨상계보-2'를 보면 전주 최씨 문열공계 시조 최순작은 소벌도리의 27세손이며[46], 최치원의 둘째 아들인 도함(道含)의 손자라고 표기되어 있다.[47] 하지만 이는 문열공계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이야기다. 문열공계 족보에서는 "우리 집안은 소벌도리의 후손이지만 선대의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고증이 가능한 최순작부터 시조로 삼는다"라고 되어 있다,
또 '최씨상계보-2'에서는 최순작의 셋째 아들이 해주 최씨의 시조 최온(崔溫)인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48] 즉 최치원의 손자에서 전주 최씨(문열공계)가 갈라져 나왔고, 문열공계 시조의 셋째 아들이 해주 최씨 시조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전주 최씨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다. 해주 최씨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다.
이어 최온의 둘째 아들은 최청(崔淸)이며, 그 손자가 탐진 최씨의 시조 최사전(崔思全)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1920년대 최사전의 묘비명이 발견되면서 탐진 최씨가 해주 최씨로부터 분적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정됐다.
아울러 최치원의 사촌인 최승우의 아들이 동주 최씨 시조 최준옹인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도 동주 최씨에서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최순작의 둘째 아들 공(空)[49]의 손자가 전주 최씨 사도공계의 시조인 최균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상과 같이 최씨상계보에 나오는 내용은 대체로 그 진위를 의심케하는 기록들이다. 최씨상계보의 다른 이름인 선의계 추록이라는 용어도 '윗세대(先)의 의심스러운 계보(疑系)에 대해 추측하여 기록한다(追錄)'는 뜻이다. 명칭 자체가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기록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최씨상계보는 역사적 진실과 정통성 등을 외면한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오히려 이런 문서가 유행하는 현상은 자신의 성씨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문거족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50] 그러므로 실제 한국의 고대사가 최씨상계보의 내용과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할 일이다.[51]
이런 배경에 따라 전주최씨중앙화수회[52]에선 1986년 발행한 '전주최씨화수회보' 제17호를 통해 최씨상계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문정공파(文貞公波)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600년의 역사를 전해오고 있으나 초씨원류대계(崔氏源流大系)에서 말하는 경주최씨상계보는 불과 100년 전후의 것이며, 이경도인 율계 강필동(栗溪 姜必東)이라는 사람은 어느 연대인지도 알 수 없다. 그분이 개인 취미로 성씨를 수집하여 미완된 제성(諸姓) 사보(私譜) 자료 중 경주최씨상계보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는 과신할 바가 못 된다.
또 오문(吾門)의 상계를 최치원의 둘째 손자 첨로의 계통으로 연계시켜 놓은 점은 용납할 수 없다. (최씨상계보)보다 수백년 앞서 족보를 편찬해 온 오문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역사적 차이가 허다하다. 만일 문제의 계보를 인정한다면 오문의 족보 600년사는 도외시되는 중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 문열공계와 문성공계, 문충공계 일부 후손들이 1995년 합동으로 발간한 '전주최씨연원지(全州崔氏淵源誌)'라는 책[53]에서는 최씨상계보를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 참고용'이라고만 밝혔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선의계 추록은 '경주최씨상계보(慶州崔氏上系譜)로써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인 1877년[54]에 함경남도 이원군 동서면 효우리 강성우(姜聖佑)씨 집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성우씨의 6대조인 율계 강필동(栗溪 姜必東)씨가 수집한 여러 성씨들의 족보가 비장되어 오던 것을 함경남도 단천에 사는 최장환(崔章煥)씨가 강성우씨 집을 예방하여 최씨에 관한 부분을 필사하였던 것이다.
그후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최홍연(崔弘淵)씨가 서울의 여러 종친과 상의하고 지난 1937년에 경주최씨상계보라 하여 발간하였다. 이것을 또 1949년에 경상북도 월성군 천북면 손곡리에서 중간(重刊)하여 현재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성씨별로 성자(姓字)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시대인 신라 건국 초부터 성명의 자(字) 또는 계대를 어떻게 고증하였는지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상계보에 본관별 최씨의 계대를 이어 거의 모든 최씨가 경주 최씨 상계의 어딘가에서 분적되었음을 상세히 계도화(系圖化)하여 수록하여 놓았다.
그러나 여기(전주최씨연원지)에서는 상계보를 확실한 고증으로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후예로 하여금 혼돈을 막기 위하여 신라 말기에 해당되는 계대 이하는 삭제키로 하였다.
상계보란 당시 학자이며 야사가(野史家)였던 율계 강필동 선생이 증보(增補)한 자신의 작품이 아닌가 사료되며, 다만 선계에 대한 정통성 문제 이전에 후예로 하여금 참고하기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