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교동(官校洞)
⚫ 승기천(承基川)
관교동은 조선 시대 인천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인근 문학동과 함께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府內面)의 일부였던 이곳에는 지금의 시청 격인 인천부관아(仁川府官衙)가 있었다. <지금의 동으로는 문학동에 인천부관아가 있다>
이처럼 부(府)의 중심 동네이기 때문에 면(面)의 이름도 부내면이 됐는데, 사람들은 흔히 ‘읍내(邑內)’라고 불렀다. 또는 지역의 중심 관청(官廳)인 인친부관아가 있어 ‘관청마을’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이 동네 주변에는 승기리, 동촌, 서촌 등의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1900년 대 초에 이들 동네가 읍내리와 동촌승기 리로 나누어졌다가 다시 읍내리가 관청리(官廳里)와 향교리(鄕校里)로, 동촌승기리는 대(大)승기리와 소(小)승기리로 나누어 졌다.
이중 관청리는 이름 그대로 인천부관아라는 관청이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또 향교리는 인천향교가 있어서, 승기리는 ‘승기마을’이라는 동네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모두 새로 정할 때 관청리와 향교리가 합해져서 ‘관교리’가 생겼다. 이때 대승기리와 소승기리는 ‘승기리’로 합해졌다.
이처럼 ‘관교’라는 동네 이름은 관청리의 ‘관(官)’과 향교리의 ‘교(校)’가 합해져 생긴 이름이다. 그때 일제가 이런 식으로 동네 두세 곳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떼어내 붙여 새로 만든 동네 이름이 무척 많다. 그들에게는 아주 편한 방법 이었겠지만, 우리가 볼 때는 정말로 무성 의하고 지역의 정체성(正體性)을 없애버 리는 방식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곳의 인천부관아가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객사를 고치는 과정에서 발견된 기와에 ‘강희 16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뤄 1677년(숙종 3년)에 고쳐지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 이전에 지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 관아에는 왕권(王權)의 상징인 객사(客舍)를 비롯해 부사(府使)가 업무를 보는 동헌(東軒) 등 모두 15~16개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객사와 동헌 일부만 남아 문학초등학교 안에 보존되고 있다. 1899년에 나온 「인천부읍지」에 보면 인천부 관아는 객사가 20칸, 동헌이 15칸, 사령청이 9칸, 옥사(감옥)가 4칸 등으로 전체가 모두 146칸 규모였던 것으로 나와 있다.
지금 자리에 서 있는 관아 건물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화도진도(花島鎭圖)」를 근거로 객사, 동헌 등 7개 동의 건물을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관교리는 그 뒤 원정(元町)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뒤인 1946년에 다시 관교동이 됐다.
승기천
앞에서 구한말에 승기리(承基里)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의 남동공단과 연수지구 사이에 흐르고 있는 승기천은 이 승기리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
승기리는 오늘날 관교동의 북동쪽에 있던 마을로, ‘신비마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신비마을’은 지금 이 주변에 있는 아파트 단지의 이름으로도 쓰이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동네 이름을 갖게 된 것인지, 실제로 그런 이름이 옛날에 쓰인 것인지는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가 없다.
이 마을은 한때 있다가 없어져 폐허가 됐던 것이 다시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문에 ‘다시 이어서〈承〉 생긴 마을〈基〉’이라는 뜻에서 ‘승기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고증되지 않는 내용이며, 너무 막연하고 억지스러운 느낌만 줄 뿐 논리적인 타당성은 없어 보인다.
1800년대에 3차례 나온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 이곳이 모두 ‘升(오를 승)’을 쓴 ‘升基里(승기리)’로 나오는 것만 봐도 ‘다시 이어서 생긴 마을’이라는 해석은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升基里’든 ‘承基里’든 이는 당시 실제로 불리고 있던 어떤 우리말 이름을 적당한 한자로 바꿔 쓴 것임이 틀림없다. 「인천부읍지」처럼 한문으로 쓰인 행정자료에 나와 있는 땅 이름들은 거의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실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국어학적으로는 승기리가 ‘성뒷말(마을)’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앞서 보았듯, 조선시대 인천부(仁川府)의 중심지는 지금의 미추홀구 문학동과 관교동 일대 였다.
인천의 행정 업무를 맡은 관청인 인천도호부 관아가 이곳에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향교(鄕校)와 서원(書院) 등 국가 통치(統治)의 기반이 된 기관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산에는 이들 기관과 인천부를 지키는 문학산성이 있었다.
승기리는 이곳을 중심으로 보면 북쪽에 바로 붙어있는 마을이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남쪽을 ‘앞’으로, 북쪽은 ‘뒤’로 불러왔다. 이는 조선 중종 때 통역관이자 언어학자였던 최세진이 쓴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南: 앞 남’, ‘北: 뒤 복(북)’이라 써놓은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이 마을은 고을의 중심지와 문학산성의 뒤에 있는 마을이 된다.
이에 사람들이 ‘문학산성의 뒤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성뒷마을’ 또는 ‘성뒷말’이라 불렀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성뒷말’은 발음이 조금 바뀐 ‘승뒷말’로도 많이 불렸을 것이다. 요즘도 ‘(사람의) 성질’을 [승질]이나 [승질머리]라고 발음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인천부읍지」를 쓴 아전(衙前)이나 양반들이 이 ‘성뒷말’ 이나 ‘승뒷말’을 한자로 똑같이 쓸 방법이 없으니까 적당한 한자를 붙여 ‘升基里’라 썼을 것이다. ‘里’로 마을(말)을 나타내고, ‘升基’로 앞부분(성뒤〉승뒤)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승기천’은 ‘승기마을(성뒷말)에 흐르는 개천’이라는 뜻이 된다. 우리말 이름으로는 ‘성 뒷내’ 정도로 불렸을 것이다.
승기천은 그다지 크지 않은 하천이기 때문인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문지리서는 물론 「대동여지도」에도 안 나와 있다.
그 대신 1856년에 나온 「여도비지(輿圖備志)」에는 승기천이 ‘동천(東川)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이와 함께 “치소(治所:도호부 관아)에서 동쪽으로 2리(里) 떨어져 있으며, 주안산에서 시작하고,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기록에 나오듯, 승기천은 오늘날 ‘만월산’이라고 불리는 옛 ‘주안산’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승기천을 연구해 온 향토사학자들 가운데는 지금 수봉산의 남서쪽 해발 60여m쯤 되는 기슭이 승기천의 진짜 시작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출발점으로 추정된다는 곳 일대가 모두 주택가로 바뀌었기 때문에 정확한 지점이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처럼 주안산과 수봉산 중 어느 쪽에서 시작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다음은 물길이 지금의 관교동을 거쳐 남촌동과 논현동 지역을 지나 인천앞바다로 흘러들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류(上流) 쪽이 모두 복개(覆蓋)됐고, 하류 쪽은 직선화 작업으로 물길이 바뀌어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어떻든, 옛날에 이 물줄기는 도호부가 있던 문학·관교동 지역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 하천을 ‘동천’이라 부른 것이다.
이 ‘동천’이 언제부텨 승기천이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어 쓰이게 됐는지는 얄 수가 없다. 승기마을을 지나며 흐르는 개천이니까 누군가가 ‘승기천’이라고 했고, 그 이름이 점차 ‘동천’을 대신해 새 이름으로 굳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