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민 병에 걸려서
2. 먹고 살기가 불안정해서
3. 아이들이 공부를 못해서
4. 아이들이 공부나 다른 재능이 특출 나서
5. 남들이 다 가니까.
6. 골프를 치기위해서
7. 더 나은 인생을 위해서
8. 한국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살 자신이 없어서
9. 인생 역전을 위해서
10. 부모를 모시기 싫어서
등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제 경우는 8번째입니다. 지금은 저작권이 강화되어 한곡만 히트를 치면 큰돈을 법니다. 그러나 제가 히트를 쳤던 1970대 말에는 그런 혜택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좋아서 택한 길이기에 무작정 아무런 조건 없이 작곡가란 직업을 택했던 겁니다.
이민을 간 1991년도에는 그래도 저작권이 많이 강화되어 생활비는 될 정도의 저작료가 나왔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보너스가 나오는것 이었지요. 다행이 제 작품은 저혼자 작사, 작곡을 한 덕에 두 몫을 챙길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식구들을 캐나다에 두고 한국에 나와서 다시 재기를 해보기로 작정을 하고 여러가지 구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후배를 만났는데 KBS 에 이응진 이라는 분이 제가 불렀던 “ 슬픈 노래는 싫어요” 의 왕 팬 이라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그 노래를 좋아했는지 첫 번째 연출 작품으로 자신이 글을 쓰고 연출을하여 그 노래를 주제로 단막극으로 만들어 방송을 했다는 거였어요. 그 후배의 소개로 이응진씨를 만났습니다.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꼭 죽은 사람 살아 돌아오듯이 반기는 것이었지요.
지금 현재 2009년6월20일 이응진씨는 KBS 방송국 드라마 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그 분의 드라마에는 제가 음악을 담당 하였습니다. 미니시리즈 단막극 여러가지를 하여 가요계에 돌아올 기회를 엿봤습니다.
3개월에 한번씩 캐나다에 갔는데 한번가면 한 두달 정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55번 왔다 갔다 했으니 이런 사람들을 보고 왕 기러기 아빠라고 부른답니다.
처음에 정착한 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변두리인 과천 정도인 “써리” 라는 곳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는데 조금 문제가 있어 두 번째 동네로 노인들이 많이 사는 ‘와이트 락’ 이라는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지대에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 였지요. 그 곳에서 사내아이들 둘을 키웠습니다.
저는 한국에 왔다 갔다 하고 제 처는 아이들 키우고... 학비는 전혀 안 들었지요. 정부에서 주는 우유 값으로 가구들을 샀습니다. 학교 앞에 집을 구하니까 아이들이 갈 곳이 집과 학교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맹자 어머니의 교육 방법 이었지요. 한국에서 그나마 생활비가 나와서 기적적으로 살아 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시내에 나갔는데 남미에서 만들었다는 장난감 같은 악기를 파는데 흙으로 만들어 부는 악기였지요. 지금은 흙으로 만든 악기는 다 ‘오카리나’라고 부르는데 그때 참 신기하게 봤습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2개를 골라 집에 와서 어떻게 연주를 하나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배우는 데가 없었으므로 혼자서 음계를 만들고 운지법을 만들어 열심히 연구를 했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이 악기로 작곡을 할 생각으로 복잡하였지요. 그래서 테마를 정하기로 하고 모든 나의 지식을 총동원하였지요.
그 결과는 신라의 승려인 “혜초” 로 대상을 정하고 ‘왕오천축국전’을 테마로 정하게 됩니다. 1910년경에 프랑스 신부가 ‘돈황’ 굴에서 이 일기를 발견하여 전 세계를 흥분시킨 우리의 자랑이지요.
그 당시의 성지 순례인 셈인데 지금의 태국으로 가서 인도를 거쳐 장장 7년의 걸친 여행을 일기로 쓴 것이지요. 그 일기에 보면 첫 번째 나라인 태국에 들어가 보니 모든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고 살더라 임금의 재산은 코끼리가 10마리 사람들의 식생활은 어떻고... 등등 그 당시의 생활상을 자세히 적어놓은 일기였지요.
저는 이것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그만 랭글리 형 오카리나로 구멍은 8구멍 이였는데 그래서 음역이 한 옥타브 밖에는 않나오는 악기였지요. 혜초가 태어나서 돌아갈 때 까지 의 행적을 오카리나 음악에 담은 것이지요. 지금도 가끔 이 음악을 들으면 싱긋이 웃음이 나온답니다. 이 오카리나 음반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카리나 음반’으로 기록이 됩니다. 물론 저를 질시하고 멀리하려는 오카리나 동호회에서는 제외를 시켰지만..... 그러나 아마추어들의 그런 행태를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순수하지 않아서 또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까요.
하여튼 제가 구입한 랭글리 형 오카리나 2개중 한 개로 음반을 내고 제가 지금 보관 하고 있고 나머지 한개는 법정 스님에게 선물로 드렸습니다. 1997년에 이 음반을 발표했는데 마침 혜초 스님의 달을 정부가 지정하는 바람에 국립극장에서 진각종(혜초스님의 종파)과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저는 점점 오카리나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소리가 신비하고 오묘 했으므로 저는 제 인생의 남은 부분을 오카리나에 바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선은 악기가 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분들이 만들어서 조율의 미세함이 많이 결여 되어 있었지요.
저는 문구점에 지점토를 사서 직접 악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의 인생이 험난한 악기제조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비록 ‘새옹’의 말처럼 행복과 불행이 교차를 하더라도 한번 마음먹었으니 끝까지 해보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우선 아이들을 이민을 보내 놓고 보니 학비의 공포에서 해방이 되고 식구들 생활비만 제 때 보내 주면 되었기에 가능했지요. 그러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만약에 무슨 일이라도 나는 날이면 어디에다 애기를 할 곳이 없었으니까요. 또 어릴 적에 있었던 버릇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만 하 거라” 할 때 까지 하는 나의 고질병이 또 나온 것이지요.
제 나름대로 음반을 내고 홍보를 해보니 오카리나 음반도 잘만 만들면 시장이 형성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밤낮없이 연구에 연구를 하였습니다. 흙속에 살았죠.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자료를 모으고... 열심히 흙과 놀았습니다. 악기를 만들고... 흥분하고... 소리가 않나오면 실망해서 비통해하고 이런 일의 반복이었죠.
그러면서 저는 이응진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드라마 음악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감독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 유선생님 제가 이번에 주말드라마 '첫사랑' 을 연출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화를 받는 순간 저에게는 어떠한 감이 잡혔습니다.
이 드라마는 되겠구나 하는 감 말입니다. 아마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과 최고의 배우들을 키워낸 드라마가 이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배용준, 최수종 등등....
저는 이드라마에 음악감독을 맡았습니다.
다음편에 계속...
첫댓글 이민 가는 11번 째 이유 : 토끼기...........오늘 샘님, 그리고 샘님 지인들과 인사동에서 점심했는데 샘님은 정말 다양한 인적 네트웍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았음...오늘 이만 끝
대중 작곡 을 쉬며 극장장을 할때 많은 사람들을 만났죠. 그리고 또 오카리나 작업하면서 다 단절했어요. 워낙 외골수라...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지금은 오카리나를 사랑하시는 회원만가지고도 아주 만족합니다.
그런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죄송해요.
랭글리오카리나로 혜초음악을 하셨다니....>>>> 정말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혜초'음반은 다 좋지만 갠적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녹야원의 밤이 넘 좋습니다.. 그당시 뉴지 음악... 지금도 ...
선생님은 정말 행복한 분이십니다. 하고픈 일에 몰입하고 사시니...존경합니다!
들리는음악이 선생님의 작품이었군요. 제가 이제 신비의 숲속에 들어옴이 무척이나 가슴설레입니다.
이민을 가는 이유.... 부모 모시기 싫어서....정말 재밌습니다. 갈수 없어서... 발자국 찍고 갑니다.
근데 열가지 모두 사실이기도 한가봅니다........
윤색하지 않고 진솔한 선생님의 어투 자체가 참 구수하고 감동을 더합니다.
뒤늦게 발견하여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