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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천황 생일·조문 참석 위해 '치욕의 행차'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이 발표된 후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용상은 치워졌다. 대한제국 황제에서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은 1926년 4월 세상을 뜰 때까지 '살아있지만 목숨만 붙어있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창덕궁과 마주하고 있는 일제 식민권력의 심장부인 남산 총독관저를 찾는 일은 순종으로서는 치욕적인 행차였을 것이다. 병합조약 체결 한 해 전인 1909년 10월 암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조문하기 위해 통감관저를 찾은 바 있던 순종은 병합조약 체결 이후에는 일본 천황의 생일을 경축하거나, 천황의 죽음을 조문하거나, 총독의 하례에 답방하는 의전행사를 위해 시시때때로 남산을 찾아야 했다. 민간 문화재연구가 이순우(48)씨는 최근 펴낸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에서 '구 권력'(창덕궁)과 '신 권력'(총독부)을 연결하는 길의 변천사를 주의깊게 들여다봤다. 순종의 행차 경로는 당시 신문기사에 상세히 기술돼 있는데, 보통 창덕궁에서 출발해 종로3가와 보신각을 지나 광교를 건너 충무로를 거쳐 예장동에 도착하거나, 청계2가 부근의 수표교를 이용하는 행로를 따랐다. 창덕궁에서 남산을 연결하는 남북도로가 있긴 했지만 좁고 민가들이 들어차 있어 행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술국치일에 순종의 전권위임장을 들고 창덕궁에서 통감관저로 간 이완용의 행로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이씨는 추정한다. 1927년 '경성도시계획자료조사서'에 따르면 창덕궁과 남산을 잇는 남북간 직통도로인 '돈화문통' 공사는 1913년 시작돼 1921년 완료됐다. 이 도로에서 청계천을 건널 수 있는 다리인 관수교는 1918년 완공됐다. 남산과 창덕궁을 오가야 했던 총독부 관리들로서는 왕래가 훨씬 원활해져 반색했겠으나 망국의 황제가 길 위에서 느낀 굴욕감은 한층 더했을 것이다. 이 도로가 창덕궁, 종로3가역, 을지로3가역, 충무로를 잇는 현재의 돈화문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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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조약은 성립 자체가 안돼 일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과정에서 합법적인 형태를 띠려고 전력을 기울였다. 5년 전 을사늑약을 맺으면서 무력까지 동원해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했지만, 외부대신의 날인을 받는 데 급급한 나머지 공식 명칭마저 써놓지 못한데다 서명자인 한국 외부대신과 일본 공사의 전권위임장뿐만 아니라 황제의 비준서도 없어서 국제법적인 절차와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통감 데라우치는 미리 총리대신 이완용을 관저로 불러 합의적인 '병합' 조약의 형식을 취한다는 명분 아래 그로 하여금 각의를 거친 후 순종으로부터 전권위원 위임장을 받아내도록 요구했다. 어전회의 당일에도 그는 불의의 사태를 막기 위해 시종원경 윤덕영 등에게 사전에 준비한 '전권위임에 관한 칙서안'을 건네주면서 순종과 내각대신들을 설득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겉으로만 동의를 통한 합의를 내세웠을 뿐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10년 8월 22일 순종에게 전권위원 위임장을 받은 이완용이 데라우치와 맺은 '한국병합조약'은 이전 조약들과 달리 전권위임장, 순종의 서명, 대한제국 황실의 공식 국새인 '대한국새(大韓國璽)' 날인 등 형식상 정식 조약의 요건을 갖추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비준 대신 조약을 공포하고 '병합'을 알린 8월 29일자 순종의 칙유문에 전권위원 위임의 칙서에 사용된 대한국새가 아니라 행정 결재에만 사용되는 '칙명지보(勅命之寶)' 어새가 찍혀있을 뿐이며, 황제의 친필 서명이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일제가 그토록 합의와 합법을 가장해 조약의 형식을 갖추려고 애썼지만, 결과적으로 비준서에 해당하는 '병합' 공포 칙유문에 조약상 필수요건의 결격사유가 생기고 말았다. 한마디로, '한국병합조약'은 불법이나 합법을 따지기 전에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은 셈이다. 현재 한일 양국 간에는 병합조약의 불법ㆍ합법 혹은 부당ㆍ합당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과 배상, 그리고 오늘날 일본의 역사인식을 정확히 가늠하는 현실의 문제이다. 을사늑약과 '한국병합조약'의 성격 문제가 1991년 북일 국교 정상화 협상의 진행과정에서 쟁점 사안으로 떠올랐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올해 한국강점 100년을 맞이해서 일본이 진정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확실하게 책임지는 태도를 취해주기를 기대한다. 한철호ㆍ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