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30일. 오전 11시. 인제 신남 선착장. 아직 4월이고 지난 월초에만 해도 눈이 꽤나 쌓여 있었는데, 지금은 그늘과 산들바람, 차가운 쮸쮸바가 그립습니다. 이 더위 속에 노를 젓는다니 참, 이거 땀깨나 흘리게 생겼습니다. 어제 경북 영덕의 낮 기온은 34도였다고 합니다. 올해 백 년만의 더위가 예상된다는데, 강에서 사는 우리 같은 종족은 그나마도 시원하게 보내겠지만 어쨌거나 큰 일입니다.
일본 후지타(Fujita)사의 카누와 카약을 우리 나라에 공급하고 있는 조구룡 사장이 도착할 때 즈음에는 기온이 더 올라간 듯이 느껴집니다. 프레지오 승합차의 트렁크 문을 열어서 그늘을 만들어 놓고는 그 아래로 기어들어가 더위를 피합니다. 아직 4월인 것이 정말입니까?
오늘의 주제는 폴딩 카약(Folding Kayak)입니다. 폴딩이라는 것이 접는다는 뜻이니, 말 그대로 접어서 운반할 수 있는 조립식의 보트입니다. 폴보트(Folboat)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자기가 스스로 디자인하고 제작한 폴딩 카약에 대해 자료를 올려 놓은 곳들도 적지가 않군요. DIY(do it yourself) 폴보트를 의기양양하게 자랑하고 있는 친구들 얘기인 것입니다.
박영석 교장, 조구룡 사장,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이 후지타의 폴딩 카약 3대를 조립하는데는 약 35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익숙해지면 혼자서 20분이면 조립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서는 두릅을 넣은 된장찌개 한 그릇 때리고 배에 올라탑니다. 수온은 한여름처럼 따스합니다. 지난 가을 바로 눈 높이에서 지났던 표지판이 저 위의 산허리로 보입니다. 수위가 많이 낮아졌다는 뜻이니, 그 탓에 파란 풀들이 돋아난 나지막한 강변이 상쾌한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그 옆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는 느낌이 아주 좋습니다.
푸른 산천초목, 그 사이로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카약의 붉은 색 데크가 멋집니다. 지난 가을 아쿠아테라(Aquaterra)의 스펙트럼 카약으로 이 물길을 따라 노를 저어 갔었습니다만, 그때의 보트가 보통의 승용차라면, 이번 폴딩 카약은 스포츠카 정도로 날렵합니다. 물론 무게도 훨씬 가볍고, 물에서의 저항감도 낮은 까닭에 가볍게 나아가는 감각도 부드럽습니다. 또 선측 양쪽을 따라 공기 튜브가 구성되어 있으니 안정감도 좋군요. 다만 제가 사용한 모델인 400 Superior는 콕핏(cock-pit) 부분이 조금 넓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관대리, 신월리를 거쳐 양구대교로 이어지는 길은 지난 가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겠죠? 가을과 봄의 대비라면 쉽게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꼭 같은 물길, 산과 호수 기슭이지만, 색과 모양, 냄새가 다릅니다. 우선 수위와 수온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 가을 투어 때보다 한 10미터 이상 낮은 수위이니 호수의 폭도 많이 좁고, 느낌도 크게 다릅니다. 색감은 가을이 되어 짙은 초록과 갈색, 붉은 색이 섞여 있던 것과 달리, 연한 초록과 연두색의 다양한 층을 이룹니다. 연두색이라도 진하기가 서로 달라 아주 아름답고 풍요롭고, 특히나 생동감이 넘칩니다. 냄새라, 글쎄 어떤 차이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지난 가을의 느낌은 조금 건조하고, 이른 겨울의 전조를 느꼈다면 이번에는 뜨겁고, 여기 저기서 마구 튕겨져 나오는 풀 내음 같은 것들이 콧구멍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양구대교가 저 앞에 보일 즈음에는 정말 더위가 느껴졌습니다. 오후 2시경이니 안 그렇겠습니까? 분명 오늘도 저기 남부 지방은 30도를 훌쩍 뛰어넘었을 것입니다. 다리 아래의 그늘을 찾아 한숨 돌리며, 물도 마시고 한가롭게 얘기를 나눕니다. 다리 위로는 문명와 산업을 여기 저기로 실어 나르는 버스와 트럭, 승용차들이 상당한 양의 배기 가스와 순간적인 굉음을 끊임없이 날립니다. 저들은 다리 아래의 우리를 발견하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배기 가스 제로의 친환경 교통 수단을 통해 선진 조국 건설을 추구하는 전위적인 인간들!
저는 사실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오는 일을 아주 싫어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실 가는 길에 보는 경치를 돌아서 오며 볼 때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길을 아까 지났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전혀 다른 곳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지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양구대교에서 신월리 방면으로 길게 이어진 협곡은 거의 직선의 수로인데, 양쪽이 가파른 산기슭입니다. 오른쪽, 그러니까 동쪽 기슭은 특히나 푸석한 암질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인데, 작게 가지를 친 지계곡을 지날 때마다 카약의 물 소리에 놀란 백로가 황급히 날아 오릅니다. 후미진 기슭에는 또 오리의 작은 무리들이 보입니다. 나무나 풀들이 꽃을 피워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즈음의 계절은 날짐승이나 들짐승 할 것 없이 부지런히 새끼를 낳아 살 찌우고, 다음 세대를 이어가도록 하는 각축장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같은 컬러풀한 이방인들이 어찌 반갑겠습니까? 그저 너스레 떨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는 것이 상책인 것입니다.
다시 관대리에 이르러 배를 세우고서 한참 쉬어 갑니다. 물론 시원한 물로 한판 뛰어드는 것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동안 부지런히 팔과 다리를 휘둘러 나아가다 보면, 호수의 깊은 곳으로부터 시원한 기운이 몸에 닿습니다. 거꾸로 누워 수영하면서 하늘을 보니, 가파른 산 사면의 진달래와 하늘의 파란색이 아름답습니다. 양구대교에서 신남선착장에 이르는 물길은 무인지경인 상수내리의 산을 크게 휘돌아 감는 것인데, 이 산의 높이는 6백미터를 조금 넘는 정도입니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우리가 수영을 즐기고 있는 호수의 수면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더위도 훨씬 가벼우니, 견딜 만 한 것입니다. 관대리를 지나니 북쪽의 완만한 기슭은 온통 짙은 파란색의 마초가 자랍니다. 이제 조금 지나면 마을 사람들은 이 마초, 그러니까 꼴을 베어내, 소를 먹일 건초로 저장해 둡니다. 그리고 곧 큰 비가 오면서 수위가 불어나 풀밭은 물론이거니와, 저 위쪽의 기슭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마치 북구의 피요르드 협곡 처럼 모습이 바뀌는 것입니다.
저 앞으로 나지막히, 뜨거운 햇살에 바랜 신남 선착장이 보입니다. 오늘은 한 사십리 되는 물길을 헤쳐왔나 봅니다. 새로운 배, 새로운 사람과 말입니다. 지난 가을 이후 한 반년 만에 조우한 소양호 물길도 새롭습니다. 기슭의 풀밭에서 서둘러 카약을 해체하여 가방에 집어 넣고는 차에 오릅니다.
물론 이 즈음이면 머리 속을 온통 채우는 것이 있으니, 차가운 맥주의 거품, 거품, 거품이어라!
글 이지호, 사진 박영석 | |
첫댓글 송강카누학교의 이지호선생님이 써 주신 글입니다. 역시 서울대에서 스페인문학을 전공하신 저력이 느껴집니다. 저는 조선대학교 스페인어학과 졸업인데 서로 공통점은 있는데 아직은 제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지호선생님은 아웃도어라이프의 전문가이시며 아웃도어라이프에 대한 강의도 하십니다.
그림이 다르네요, 전문가가 보는 눈과 아직 아마추어인 제가 보는 눈이 많이 다릅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고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하찮은 자연도 배워서 보면 더 많은 세계가 펼쳐집니다. 자기의 세계관이 보다 넓어지고 알차게 깊어질 것입니다. 브룩실즈가 너무 풍부하게 살아서 자살시도를 했다는데 말이 충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