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을의 큰 농사인 춘천마라톤을 끝마치고 내려온 다음날,
아침부터 마음이 부산하다.
올해 가장 큰 일을 치루었는데 며칠간 푹 쉬고 마음도 가다듬고 해야되건만
오히려 더 큰 마음의 부담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
본의 아니게 신청된 돌아올 토요일의 도민체전 때문이었다.
1,500미터 경기에 전주시 출전자로 명단이 올라가 있는 것인데...
아침에 서둘러서 그간 밀린 일을 보고
서강정형외과를 찾았다.
왼쪽 무릅에서 두군데 물(삐져나온 활액)을 빼내고 나니
다시 걱정이 앞선다.
토요일까지는 불과 닷세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다리가 얼마나 회복이 되어줄까?
회복이 그럭저럭 된다고 하여도
천하의 자웅을 다툰다는 엘리트선수들과 함께 뛰려면
적어도 기본적인 기량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제와서 발뺌을 할 수도 없고
날자는 코앞에 다가오고
남들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마음의 부담만 날로 늘어가는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보형님이 나보다 더 땅이 꺼지도록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
며느리 심정은 며느리만 안다고
똑같이 출전하게 되니 그맘이야 진즉 알만했다.
더구나 나는 꼴찌그룹만 면하면 체면 치례는 하는데
엘리트출신인 이보형님은 순위안에 들어야만 하는
부담이 더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요일날(23일) 전주시 선수단 창단식을 하고 육상부문 감독님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지난번 전주시체육회 관계자와 같이 6위 이내에 들어야만 한다고
잘라 말한다.
'무슨 수로 이 마당에 순위안에 들겠냐고요?'
이렇게 마음을 먹어봐도
정말이지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들정도로 외롭고 부담스러웠다.
이기기 위한 운동에 적응이 되어있지 않아서일까?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일까?
하지만 현실은 어김없이 아금 야금 나를 조여오는데...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저녁때 신발가게로 찾아갔다.
무려 17만원이나 된다는 스파이크를 주문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놈의 신발이 금요일날이나 돼야 나온다니 참!
다음날 오후 어제 받은 유니폼을 전해드리기 위해 황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에 나갔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황선생님에게 하소연을 하고 위로를 좀 받아볼까
하는 어리석은 마음에서 1500미터 출전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엘리트, 그것도 현역엘리트선수와 자네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니
마음을 비우고 좋은 경험을 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길 바라네!"
이런 식의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승부는 이겨야 하는 것이다!"
"상대가 누가 되었건 그들도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자! 먼저 경기운영을 잘해야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
"첫째로는 스타트인데, 바깥쪽 레인을 잡아서 출발해라
그 다음은 출발 직후에 최대한 빨리 1번레인을 확보해라! ... ...."
"... ..."
이제까지 마라톤을 하면서 조금 더 빨라지고자 나름대로 열심히는 해왔지만
상대는 언제나 나 자신이었지
누구를 이겨서 빛을 본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었는데
클럽에서 누구 누구가 남 이기려는 욕심이 많다고
걱정을 하고 다녔었는데...
그것이 정도를 걷기 위한 올바른 사고였을까?
아님,
적당히 자기만족에 머므르려는 안이한 생각이었을까?
황선생님의 수준높은 조언을 한시간 이상 듣고
돌아서는 어깨는 더욱 무거워만 진다.
다음날, 금요일
드디어 체전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점심무렵 익산에서 넘어오는 도중에 신발대리점에 들러
주문해 놓은 스파이크를 찾아왔다.
하지만 계약건 등 업무가 한꺼번에 폭주해서 해가 저물고서야
간신히 경기장에 가볼 수가 있었다.
"자! 지금부터 세상에 태어나서 첨으로 스파이크화를 신어보고 적응을 한다!"
춘천에서 내려온 뒤에 첨으로 하는 달리기이기도 하고
내일의 결전을 위한 마지막 적응훈련이기도 하다.
상노형님이 옆에서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시는데 많은 위안이 된다.
하지만 중장거리를 달리기에는 교정해야할 것 들이 너무도 많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첨은 신어보는 스파이크화가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잘 적응된다는 점.
날이 밝았다.
아침에 운동장에 나가서 가볍게 몸을 풀고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 입고 약속장소를 나갔다.
함께 봉고차를 탄 사람들은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100미터 선수
지난번 전주시체전때 그리피스 조이너 처럼 펄펄 날던 미모의 단거리 여주자들
목욕가방에 포환을 넣어가지고 온 여 투포환선수 등
나를 포함해서 7명이었는데
나를 제외한 모두가 백전노장 답게 전혀 긴장하거나 부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난봄에 뛰는 것을 봐서 실력은 익히 알지만
그래도 큰물에 가는 것인데 저렇게들 태평할 수가 있을까?'
남원공설운동장에 도착하자마자 임박한 경기 시간 땜에 분주히들 움직였다.
단거리 예선전이 벌어지는 동안 운동장 이쪽 저쪽을 오가며 몸을 풀고 다니는데
인성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년마라톤에 출전하는 일행들은 이백면 소재지에 답사차 들렀다 온다는 것이었다.
이 전화를 받은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서 허리춤을 더듬어 보니
아뿔사!
핸드폰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누군가 주웠으면 돌려주겠지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순서를 기다리며
단거리 예선전을 지켜보는데
100미터는 예선에서도 벌써 11초5정도가 대세를 이룬다.
'내가 제일 빨랐을 때가 12초 00이었는데
그것을 평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 알고 살아왔었는데...'
하여간 저사람들은 차원이 다른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11시 40분이 되어 드디어 1500미터 결승전이 소집되었다.
각 시군에서 2명씩의 주자를 내보내 모두 28명이 출전하게 되어있는데
출전을 포기하는 사람이 몇명이 있고
전주시에서도 덜렁 혼자만 뛰게 되어 부담이 더해진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열심히 뛰는 것 밖엔 없구나!
오직 뛰는 것 밖엔~
바깥쪽에 자리를 잡으라는 황선생님의 말씀대로 6번레인에 자리를 잡았다.
출발 총성과 함께 1번레인을 잡으려고 안쪽으로 뛰어드는데
더빨리 움직이는 사람이 벌써 앞에 너댓명이나 된다.
첫 곡선주로에서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진다.
뒤에서 나를 추월하던 한사람이 몸을 밀치고 나가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스파이크 엉키면 그냥 넘어지고 부상도 클텐데...
처음 한바퀴를 6위로 돌았다.
뛸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출발지점에서 감독이 주문을 한다.
그 페이스를 유지하라는
두번째 바퀴는 평행선을 그리듯 탄력이 붙은 주자들이 등속에 가까운
미세한 가속을 내며 달리는데 선두그룹과는 조금씩 간격이 벌어지는 느낌이다.
이보형님이 언제 뒤에 있었는지 앞으로 치고 나간다.
세번째 바퀴를 돌면서 800인터벌에만 적응된 몸이 증상을 나타내는지
급격히 호흡이 가빠오는 것 같다.
곡주로를 돌면서 문득 처음에 머릿속에 그리던 주법이며 곡주로를 치고 나가는 방법 등
한가지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라톤이 제일 쉽다!'
'앞으로 이거 뛸일이 정말 아니네!'
네번째 바퀴는 마지막 바퀴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게 마지막인지 한바퀴를 더 돌아야하는지
이상하기만 하다.
마지막 바퀴 때는 종을 쳐 줄텐데 난 분명히 못들은 것 같은데....
이상한 생각을 가지며 마지막 직선주로에 접어드는데 선두가 골인하는 것을 보니
정말 마지막 바퀴가 맞다.
여기서 전력질주를 하면 한사람은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겠는데
모든게 귀찮아 진다.
한사람을 잡아도 7위인데 ...
그러던 순간 뒤에서 한사람이 마지막 스퍼트를 하며 치고 나간다.
"이런 *발 이건 안돼지"
죽어라고 만회하고 보니 골인지점이 코앞이다.
이보형님 바로 뒤에 골인~
8위인것 같기도 하고 9위인 것 같기도 한데
숨가쁜 레이스가 5분여만에 끝났다.
다시는 1500을 안뛰다고 했던 옛날 주자들의 말이 실감난다.
마라톤이건 중장거리건 뛰고나면 아쉬움이 남기는 마찬가지인것 같다.
풀코스대회가 없었고 다리가 성했더라면
그리고 진즉에 스파이크를 신고 중장거리 연습을 해볼 기회가 있었더라면
순위내에 드는 것이 꿈같은 얘기는 결코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황선생님 말씀대로 그들도 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나름대로 망신살 만은 면한 수준에서 경기가 끝났지만
평생에 얻기 힘든 좋은 경험을 얻은 것 같다.
지나치게 자신감이 없이 소심한 마음으로 임한 것이 무었보다도 제일 아쉽다.
질때 지더라고 누구에게든 쌈빡하게 붙어 본다는 "무대포 정신"이 있었다면 결과가 어떻든 간에 속이 좀 더 후련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하여간 이번에 얻은 실전감각은 앞으로 마라톤을 하는데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