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속에서 우리는 자유로웠네”…‘만화당 인생’
[연예오락] 2002년 01월 29일 (화) 11:26
강원도 속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시인 함성호씨(39)는 매일 ‘만화당’(속초에서는 만화가게를 그렇게 불렀다)을 들락거렸다.친구는 차고 넘쳤다.홍길동 덩이 땡이 칠칠이 두통이 짱구박사 등 한국만화 주인공은 물론 우주소년 아톰,황금박쥐,타이거 마스크,요괴 인간,도전자 허리케인,바벨2세 등 일본만화 주인공도 있었다.술만 드시면 “칼싸움하는 만화 좀 빌려와라”고 채근하던 아버지도 만화당 단골이었다.그는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를 보고 랭보를 처음 알았고 말라르메,로트레아몽의 시도 만화에서 처음 접했다.만화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만화의 회화적 요소를 발견한 것도 속초 시절의 성장기였다.
그는 스토리텔링에 역점을 둔 아동만화를 떼고 두어컷짜리 ‘카툰(cartoon)’을 즐기면서 비로소 만화비평가가 됐다.‘카툰’의 묘미는 이야기 바깥에서 이야기가 걸어온다는 점에 있다.‘다르게 말한다’는 뜻의 알레고리 수법이 그것.박수동의 ‘고인돌’에 나오는 성담론은 ‘해학’인 반면 호주 출신 카툰작가 마이클 루닉의 그것은 병적이다.루닉의 카툰에 등장하는 남성은 자신의 신체를 뒤틀어서 여성 신체의 일부분을 만들어보이거나 혹은 여성이 아닌 여성의 물건들을 만지며 희열하기도 한다.루닉은 모체로부터 쫓겨난 남성이 관음증에 시달리는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이우일의 ‘존나깨군’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육두문자와 관련,“욕은 사회적 스트레스와 성적인 스트레스를 나란히 병치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분석한다.욕처럼 평등한 것이 없듯 만화도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얘기다.이렇듯 만인에게 평등한 만화의 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변병준의 만화를 예로 들면서 소설보다 더 뛰어난 리얼리티를 제공한다는데 만화의 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배수아의 창작집 ‘바람인형’에 수록된 단편 ‘프린세스 안나’를 만화화한 변병준은 소설의 내러티브를 버리고 인물의 구도만으로 긴장을 자아냄으로써 소설보다 탁월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그는 ‘프린세스 안나’에서 소설보다 강한 만화의 힘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나아가 만화가 영화보다는 회화에 가깝다는 주장을 슬쩍 끼워넣는다.영화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반면 만화는 회화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는 얘기다.
한편으로 저자는 일본만화가인 사무라 히로아키의 ‘무한의 주인’을 보며 ‘도구화된 신체의 비극’을 읽어낸다.히로아키는 흔히 무협만화의 주인공들이 절명의 위기를 절묘한 무공으로 헤쳐나간다는 뻔한 공식을 가차없이 깨버린다.‘무한의 주인’에 등장하는 주인공 ‘만지’는 혈선충이라는 신비의 벌레를 몸에 심음으로써 불사의 몸이 된다.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벌레 덕분에 아무리 칼에 찔리고 사지가 절단나도 일단 붙여놓기만 하면 원상태로 복구되는 만지의 몸은 히로아키가 스스로 무협만화의 긴장을 놓아버렸음을 증명한다.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히로아키는 죽지 않는 몸의 비애를 무협만화의 긴장과 재빠르게 대치시킨다.생이 유한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허무’를 작가는 죽을 수 없는 ‘불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히로아키는 생과 사를 건 칼싸움의 긴장을 폐기한 대신 인물의 표정과 칼의 움직임 등을 통해 독자를 자신만의 표현기법으로 빨아들인다.그의 만화는 도구화된 신체 이후에 오는 탐미를 보여준다.
이렇듯 무엇을 거부하고 무엇을 취하고 있든 생의 의미는 해독 불가능한 것임을 만화는 말해준다.생의 모호함에 대한 발견,그것이 바로 만화를 보는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