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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항국악사랑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맑은영혼
창작 판소리 '80년 5.18 광주민주항쟁의 노래' 그 날이여 영원하라!
01. 서사 06. 누이를 위하여
글 (편작) : 정철호 창 : 은희진, 안숙선, 박금희, 김수연, 김성애 북, 장 고 : 정철호 아 쟁 : 윤윤석 대 금 : 이생강 거 문 고 : 김무길 해 설 : 최동현(군산대학교 교수) 기 획 : 신나라레코드 녹 음 : 사운텍 스튜디오 표지작품 : 백성조 표지꾸밈 : 무송 제 작 : (주)킹레코드 심의번호 : 9307-S407 판 화 : 홍성담
이 음반을 올리면서 부득이 파일의 용량을 줄였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음질이 떨어지는 점 이해바랍니다. 이 음반의 참여 음악인들 중 이 곡을 만들고 북, 장고를 연주한 정철호 명인만 연주자 소개를 했습니다. 이 곡의 전체 가사(사설)와 최동현 교수의 해설은 누리공간(인터넷)에는 없어서 음반 해설지에 있는 글을 직접 올린 것입니다. 글을 모두 확인을 하였으나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창작 판소리 '그날이여 영원하라' 전곡듣기
▲ 나의 이름은/1993_1994/212 x 248/목판화
5.18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김성애 (해설) : 아, 어찌 잊으랴, 몸서리치던 그 날을, 5월의 영령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 도청궐기대회/1993_1994/537 x 418/목판화
01. 서사 (김수연·박금희·김성애·은희진)
간주
김수연·박금희·김성애 : (무장단) 때는 일천구백팔십년 오월이라 십팔일날, 강산에 꽃이 피고 신록도 울울. 청청하고 인심 좋고 살기 좋은 예향의 도시 인정의 도시 평화스럽던 광주 땅에 아니, 이게 웬일이오?
은희진 : (엇모리) 무등산 광주 땅에 계엄군이 쳐들어왔네. 총을 들고 칼을 들고 청동방망이 들고 최루탄통 둘러메고 우루루루 떼몰려왔네.
(중중모리) 살기 좋고 사람 좋고 꽃구름도 좋고 좋고 땅바닥도 좋고좋은 전라도라 광주땅을 산산조각 풍비박살 사방팔방 종횡무진 금남로 지원동 임동 백운동 화정동 월산동 동동을 짓밟으니, 광주시민들이 분노하여 민주 일정을 밝혀라! 계엄을 철폐하라! 구속 인사 석방하라!
01. 서사
▲ 대동세상 Ⅱ/1993_1994/535 x 409/목판화
02. 승리의 노래
안숙선 : (중모리) 남도의 도시는 아름다웠다. 전사가 나팔을 부는 것도, 날으는 꽃마차 위의 일곱색 나비들이 빨강 파랑 노란색으로 춤을 추던 나비. 물주기 멈추고 향기 없던 조화가 시들던 날 너와 나는 한 걸음씩 다가갔다. 총소리 멈추고 최루탄이 사라지던 날 무진벌의 우리들이 모여들었다. 지식인이면 어떠냐. 농민들이면 어떠냐. 우리는 민주 시민이다.
(중모리) 푸르른 백의민족 깃발 꽂았다. 푸르른 승리의 깃발. 아아,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겠다. 저 갑오년 우금치 산마루에 넘던 갑오 농민군처럼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럼 없이 태어나고 있었더니라. 죽어서 살자, 차라리 죽어서 살자. 광주와 전라도와 이 땅은 살아나고 있었다. 이 땅은 살아나고 있었다. 아, 이 땅은 살아나고 있었더니라. 영산강 낙동강 한강도 살아나며 죽음의 춤을 흔들어 삶의 춤을 추었어라.
(중중모리) 가까이 가면은 벌 받는다고 무서워하던 도청 분수대 가만히 만져보면 풀썩 앉아도 보고 부등켜 안아도 보고. 그대와 나 마주보고 웃는 모냥 얼마나 즐거우며 어느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노래가 있으랴. 모두가 한 입 되어 외쳐 부르던 민주의 노래 부르리라. 민주의 노래를 부르리라. 민주의 노래를 부르리라.
02. 승리의 노래
▲ 대자보/1993_1994/287 x 342/목판화
03.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
김수연 : (해설) 아아, 광주여.
(진양조)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나요?
(중머리) 꽃떼들도 나비들도 흩어져버린 광주여.
(중중모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조국의 아들이여.
(진양조)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김성애 : (중모리) 광주여. 무등산이여.
(자진모리) 아, 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03.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
▲ 암매장/1993_1994/263 x 343/목판화
04. 연정아 내 자식아
안숙선 : (중모리) 죽기 전에 내 자식이 이 어미를 붙들고서 황급히 허는 말이 우리들의 친구들이 죽어간다고 통탄하든 내 자식아. 연정아. 내 자식아. 너의 모습 어데 가고 마당에 놓아둔 평상에 환영으로 나타나고 돌아올 줄을 모르느냐. 너의 육신 환영으로 변신하여 이 어미를 찾아보고 머물다가 돌아가더란 말이냐. 한 줌의 흙이 되어 다시는 올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갔단 말이냐. 울어봐도 통곡을 해도 내 아들은 볼 수가 없으니 이 어미는 너의 혼을 목련화라 불러보자. 면사포를 뒤집어쓴 사랑스런 목련화는 병든 몸을 활짝 웃는디 강남 갔던 제비들도 봄을 활짝 싣고 돌아와서 쓸쓸한 빈 집을 다시 손질허는디 사랑하는 목련화, 목련화. 네가 가는 길은 그 얼마나 험하기에 밤이면 찾아와서 이 가슴을 찢는구나. 자식 잃은 슬픈 마음 무엇이라 표현하리.
04. 연정아 내 자식아
▲ 잃어버린 시체/1993_1994/427 x 305/목판화
05. 오빠를 위하여
박금희 : (중모리) 오빠. 오빠. 오빠는 진정 가셨나요. 다시는 영영 올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가셨나요. 어머니는 길 가는 사람들을 아무나 붙들고서 정신 나간 사람 모냥으로 내 아들 못 보았느냐고 검게 탄 가슴을 안고 숯덩이가 되도록 찾아 헤매일 때, 동사무소 사람이 찾아와 허는 말이 아드님이 총에 맞어 죽어 망월동에 누워 있으니 확인하여 보라허니
(진양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는 듯 넋 나간 사람 모냥 어머니는 그 자리에 못박혀 서 계시다 망월동에 찾아가서 오빠 관이 아니기를 온 가족이 빌었건만 관 뚜껑을 열어보니 비참헌 형상이라. 이십 년을 곱게 키운 아들의 그 모습을 아버지도 어머니도 알아볼 수 전혀 없네.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나지를 못 하였소.
(도섭) 보고 싶은 우리 오빠.
김성애 : (해설) 들꽃을 피우고 들풀을 보다 창창하게 설 수 있게 하기 위해 흙으로 돌아가신 나의 오빠. 오늘은 삼십일. 청하한 하늘에는 피무지개 서려 있고 그날 망월동에서는 오빠의 붕분이 제일 먼저 끝났다오. 묘지 번호 육십구번. 역사의 부름에 불려가서 흙 속에 묻혀 다시는 이승에 오지 못 할 영혼이 된 사랑하는 나의 오빠. 오빠. 우리의 가슴마다 영원히 살아 있으니 고이 고이 잠드소서!
05. 오빠를 위하여
▲ 혈루/1993_1994/목판화
06. 누이를 위하여
은희진 : (해설) 어둠을 찢어 두 손을 잡고 분단 조국 시뻘건 피를 내뿜고 있고, 학살자는 국민의 심판을 팽개치고 줄행랑을 쳐버렸는데,
(중모리) 숙아. 숙아. 사랑하는 내 동생아. 너는 말 없이 누웠느냐. 식민지 조국에서 척박한 남녘 땅에 민주 해방 전사들의 원혼이 원혼이 떠도는 화학산 밑에서 굶주림을 극복허며 가진 것은 없어도 남부럽지 않게 살잤더니, 그런데 누가 너와 나를 철조망 드리워진 한반도처럼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 놓았더란 말이드냐.
(세마치) 일천구백 팔십년 오월 너의 목숨을 앗아가고 이 오빠의 눈을 앗아가고 우리들의 희망과 꿈과 행복도 앗어가고 민주와 통일을 난도질 허고 꼬마마저 난장허여 병신을 만들었고 휠체어를 굴리던 여고생을 윤간허여 자살토록 허였으니 부모 잃어 고아가 되고 남편 잃고 과부 만들고 급기야 온 가족들의 통곡이 가시기 전에 분열을 시키고서 학살 만행을 은폐하기 위하여 망월동 묘지 이장 음모를 획책하니 어찌 분허지 않드란 말이냐? 숙아. 숙아. 내 동생아. 너의 죽음은 원통허나 민족의 고난을 슬퍼하지 말자. 화학산 양지 바른 곳에 버려두고 버려두고 터질 듯한 가슴으로 목이 메어 불러보네.
(진양조) 하얀 눈이 쏟아지더니 오늘도 첫눈이 내리고 목이 메게 너의 이름을 불러봐도 대답이 없네. 사무친 그리움 세월이 흘러가고 못난이 이 오빠는 너의 묘비마저 마련치 못 했으니. 그러나 염려 마라. 묘비 없으면 어떠하냐. 화학산 후미진 곳에 잡목이라도 베어다가 너의 이름을 새겨주고. 꽃이 없으면 어떠허냐. 네가 뛰놀던 갈미봉에 맹감 잎파리 따다 엮어 네의 무덤에 둘러 주마. 숙아. 숙아. 내 동생아. 고이 고이 잠들어라.
06. 누이를 위하여
▲ 무등산하 만고 해원신시민군/1993_1994/560 x 427/목판화
07. 민중의 창이 되어
김수연 : (해설) 죽지 못 해 하는 내가 가기 전에 살지 못 해 죽은 네가 오너라. 갈 수 없는 내가 가기 전에 올 수 없는 네가 오너라.
(중모리) 대숲은 흔들리면서 곱게곱게 우는데 승냥이는 날뛰면서도 날카롭게 우는데 하늘에서만 침묵하기에는 억울하지 않으리오. 피투성이 된다 해도 삶을 원했잖느냐. 주먹 휘두르지 못 하면 사람답게 지낼 수 없으니 올 적에도 손 저으면 몸부림치러 오너라. 때리지 못 하면 맞아야 살지 않겠느냐. 천둥은 사라지면서도 모질게 울어대는데 죽지 못 해 하는 내가 가기 전에 살지 못 해 죽은 네가 오너라.
(중모리) 살아 숨 쉬는 진달래 피는 그 날 그대 다시 와서 다시 와서 조국의 민주화를 이룩하리. 살아서 민중의 방패 죽어서 민중의 창이 되다. 홀로는 불꽃으로 숨 쉬며 어우러져 들불로 타오르다 어둠의 산하를 헤쳐해쳐 새벽의 보람찬 세상으로 함께 가고저 하노라.
07. 민중의 창이 되어
▲ 고풀이/1995/91 x 73/캔버스에 유채
08. 진혼가
안숙선 : (진양조)
(동살푸리)
(진양조)
(아니리)
08. 진혼가
▲ 사시사철 중 '봄'/1993_1994/430 x 570/목판화
09. 부활의 노래
김성애 : (도섭) 파괴된 대지의 별 오월의 사자들이여. 능지처참으로 당신들은 누워 있습니다.
(중모리) 얼굴도 없이 이름도 없이 아, 누명 쓴 폭도로 흙 속에 바람 속에 묻혀 있습니다. 아아, 사람 사는 세상의 자유를 위하여 압제와 불의에 거역허고 치떨림의 분노로 일어섰던 오월의 영웅들이여. 당신들은 결코 죽음의 세계로 간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결코 망각의 저승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풀어헤친 오월의 가슴팍을 아직도 총알에 맞서고 있나니. 치켜든 싸움의 주먹은 아직도 불의에 항거하고 있나니. 쓰러진 당신들의 육체로 부터 수없이 많은 불굴의 생명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박금희 : (중모리) 그들은 다시 태어나서 당신들의 흘린 피의 강물에 입술을 적시고 당신들이 미쳐 (다) 부르지 못 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이 태어나 당신들의 흘린 눈물의 여울에 팔과 다리를 적시고, 주먹을 불끈 쥐고 당신들이 미쳐 (다) 걷지 못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자유를 위하여 사람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이제 당신들의 자식들은 딸들은 죽음까지 불싸허고 있습니다. 사랑과 원수 갚음의 증오로 무장하고 그들은 당신들처럼 전진하고 있습니다.
09. 부활의 노래
▲ 넋 올리기/1995/149 x 202/캔버스에 아크릴릭
10. 진군가
안숙선 : (살풀이) 파괴된 대지의 별. 대지의 별 오월의 영웅들이여. 오월의 영웅들이여. 어둠에 뭍혀 있던 새벽은 열리고 승리의 그 날은 다가오고. 승리의 그 날은 다가오고. 일어나라. 받아다오, 승리의 영예를. 그 때에 가서 새벽은 열리리라.
김수연·박금희·김성애·은희진 : (엇모리) 피할 수 없는 이 길이기에 쓰러져 일어섬이여. 북소리 높이 진군하리라. 진군하리라. 오월에(서) 통일로 진군하리라. 북소리 높이 진군하리라.
10. 진군가
그날이여 영원하라! 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의 노래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해설
최동현(군산대학교 교수)
모든 예술이 항상 그렇듯이, 판소리 또한 조선조 후기라는 특정 시대의 산물로서, 당대의 절박한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고, 항의하고, 비판하는 의식 행위의 소산이었다. <춘향가>에 나타나 있는 신분 상승의 의지나 탐관오리에 대한 저항, <수궁다>나 <적벽가>에 나타나 있는 양반 관료·왕권에 대한 풍자, <홍보가>에서 볼 수 있는 신흥 서민 부농의 반사회적·반윤리적 행태에 대한 비판 등은 판소리가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수용하여 예술화 하였는가를 적나라하게 부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러한 의식도 굴절을 겪게 되고, 또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문제들을 제 때에 수용하지 못 함으로써 판소리는 전반적인 침체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창작 판소리는 판소리가 당대의 문제를 수용하여 본래의 사회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창작 판소리는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판소리인 것이다.
창작 판소리의 역사는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창작 판소리는 <최병두 타령>이다. <최병두 타령>은 원각사 시절(1902 ~ 1906년)에 공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최병두 타령>은 강원도 감사인 정 모라는 자가 아무 죄도 없는 최병두를 잡아다가 때려 죽이고 그 재산을 뺏앗았다는 실화인데, 원각사 시절에 판소리화 되었고, 후에 다시 강용환에 의해 창극으로 공연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최병두 타령>의 내용을 소설화한 것이 이인직이 쓴 신소설 <은세계>이다. 그러나 <최병두 타령>은 당시 한동안 장안의 인기를 끈 뒤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다음에 들수있는 창작 판소리는 1930년대 주로 정정렬에 의해 이루어진 고전의 창극화 작업이다. 정정렬은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의 상무이사를 맡아 전승 다섯 바탕뿐만 아니라,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을 창극화했다. 그중 <숙영낭자전>은 일부가 음반에 녹음되기도 했는데, 상당 기간 동안 유행하여 현재 약 45분 쯤 되는 양이 남아 있다.
창작 판소리로서 가장 성공한 것으로는 해방 후 박동실에 의해 만들어진 <열사가>를 들수 있다. 이 <열사가> 는 이준,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등 열사들의 행적을 노래한 것으로, 해방 후로부터 1950년대 말까지는 판소리 공연의 중요한 레퍼터리가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1960년대 이후 부르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가 최근에 신나라레코드에 의해 복원된 바 있다.
박동진은 1970년대 이후 주로 사라진 일곱 마당의 복원에 힘쓰고, <성서 판소리>, <성웅 이순신> 등의 창작 판소리를 만든 바 있으나, 대체로 보아 박동진의 작업은, 의식이나 지향, 작품성의 면에서 정정렬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판소리를 대사회적 투쟁의 무기로 쓰고자하는 움직임은 1980년대 들어 강하게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임진택의 직업은 뛰어난 것이었다. 임진택은 판소리를 대사회적 투쟁의 무기로 쓰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임진택은 <소리내력>, <똥바다>, <오적> 등 김지하의 일련의 담시를 판소리화하여 부르고 다녔을 뿐 아니라, 80년 광주민주항쟁의 전말을 노래한 <오월 광주> 를 만들어 공연 하였으며, 최근에는 이를 카셋트 테입으로 발매하기도 하였다. 임진택의 작업은 음악성의 측면에서 볼 때는 다소 부족함을 면치 못하는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절실한 문제들을 판소리라는 형식에 담아냄으로써, 판소리가 아직도 현실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할것이다.
이 외에도 국립창극단 등에서 공연한 창작 창극이나, 최근 언론 기관에서 현상 모집을 통해 대본을 공모하여 만든 창극 등의 있으나, 이것들은 판소리보다는 창극에 주안점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특별한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 하였다. 다만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새로운 판소리의 창작 가능성에 대한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이번에 녹음된 <그 날이여 영원하라 - 80년 5.18 광주민주항쟁의 노래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는 전문 소리꾼들이 나서서 이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에 대해 노래하기 시작했다는 데서 우선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그동안 전문 소리꾼들에 의해 불려진 많은 창작 판소리 (창극을 포함해서) 들은 당대의 문제 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고, 그저 고전이나 역사적 사실에서 취한 내용을, 별다른 문제 의식없이 판소리 형식을 빌어 불러본 정도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면이 있었던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다른 예술분야, 예컨대 문학이나 미술, 음악등의 분야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정면으로 대항하면서 이미 많은 성과물들을 내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때늦은 감을 지을수 없는 것이다.
<그 날이여 영원하라>는 독립된 열 개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광주 항쟁 관련 자료집에서 발췌하여 노래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을 일부 고친 것들이다. 본래부터 판소리로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판소리로서 지녀야 할 중요한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판소리는 크게 사설과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설도 판소리적 특성을 지녀야 하며, 음악도 판소리적 음악 어법에 맞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요건을 다 갖추어야 판소리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사설에 관한 지금까지 연구 결과는 판소리가 근본적으로 서사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판소리 사설 속에는 서정적인 부분이 많이 있고, 또 이러한 부분이 판소리의 음악적 감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소리의 중심 골격을 이루고 있는것은 역시 서사적 구조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이여 영원하라>는 이 서사적 구조를 갖추고 있지 못 하다. <그 날이여 영원하라>를 이루고있는 열개의 부분들은 하나의 서사적 구조로 통합 조정되지 못하고, 개별적인 서정의 나열로만 되어 있는 것이다.
음악에 있어서도 몇 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판소리 장단이 아닌 것을 사용 한 부분이나, 합창이 나오는 부분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악기가 동원되는 반주가 사용되고 있는 점도 지적 될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이미 1930년대 부터 창극이나, 입체창으로 녹음된 음반에 자주 도입되어 쓰이던 방법이었다. 또 <그 날이여 영원하라>의 음악 어법 자체는 완전하게 판소리 음악 어법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음악적으로는 판소리라고 규정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리 부분이 거의 없거나, 판소리적 어법으로 되어 있지 않아서 해설로 처리하는 있는 점도 지적될 수는 있겠으나, 여기 실린 노래들이 서너 대목으로 된 짧은 노래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요컨대 이러한 점들은 형식상의 사소한 변이로 처리될 성질의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이 노래의 바탕이 된 사설의 서정적 성격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문장 나고 명창 난다'는 말이 있다. 판소리에서 사설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실제로 판소리에서 좋은 대목으로 알려진 것들은 사설의 문학성도 빼어나다. 판소리 사설을 쓸 수 있는 작가가 전무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훌륭한 창작 판소리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일 수 밖에 없다.<그 날이여 영원하라>를 다소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여기 있다. 하루 아침에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정통 판소리꾼들이 동시대의 문제를 작품화하기 시작했다는 것만도 대단할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날이여 영원하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노래를 판소리로 보려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 노래를 꼭 판소리라는 양식에 비추어 평가해야만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판소리라는 시각을 버린다면, 이 노래는 광주민주항쟁의 다양한 체험을 판소리 음악 어법으로 노래한 훌륭한 작품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노래 속에는 광주민주항쟁을 통하여 체험한 슬픔과 분노, 승리의 감격,그리고 이 소중한 체험들을 역사 속의 실천으로 계속 이어가려는 굳은 다짐이 담겨 있다. 광주민주항쟁의 개별적 체험들이 전문 소리꾼들의 탁월한 음악으로 형성화되어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진한 감동으로 엄습해 오는 것이다.
광주민주항쟁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정리된 대로, 반독재 반외세, 반분단의 민중적 총화의 통합의지의 표출로 인식된다. 요컨대 광주민주항재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모순의 총합적 폭발이며, 이 모순을 뚫고 나아가려는 한반도 민중의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1980년에 일어난 이사건은 그 후 우리 사회 각 부문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13년째 되는 해에 새로 출범한 정부는 , 스스로가 광주민주항쟁의 연장선 상에 있음을 밝히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새로운 문민 정부가 출범한 지도 반 년이 경과하고 있는 지금 13년 전에 일어났던 광주민주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땅에 참다운 개혁과 민주화를 이룩하는 일이, 광주민주항쟁 속에서 산화한 수많은 이름 없는 열사들의 숭고한 뜻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오월은 끝나지 않았다. 이 땅에 민주화와 통일이 이룩 될때까지 우리는 오월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광주민주항쟁이 있은 지 13년만에 <그 날이여 영원하라>는 , 이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전문 판소리꾼들에게까지 오월을 기억하고, 계승하고자 하는 다짐이 확산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뜻 깊은 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으로 믿는다.
정철호 (작곡, 장단, 출생 : 1923 또는 1926년생으로 자료마다 다름)
전통사회의 민속음악가는 누구나 되고 싶다고 하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야 하고 음악에 대한 소질과 음악가로서의 기질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좋은 선생을 만나 열심히 배워야 하고 스스로 공력을 쌓아 자기다운 음악세계 를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 송만갑, 이동백이 그랬고 임방울이 그랬으며 정철호 역시 그랬다.
전남 해남 북평면 서흥리 세습 재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철호는 8세에 어머니, 13세에 아버지를 차례로 여의고 어린시절을 형제 하나없이 떠돌며 보내게 된다. 13세에 천애고아가 되어 그는 암울한 일제시대를 보내게 된다.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두루 기악의 명인이었고 아버지도 이름난 소리꾼이었터라 정철호는 전통예술인들이 일제의 식민지 상황에서 얼마나 핍박을 받으며 활동하는 지를 알고 있다. 전라도 출신의 명창대가들이 삼남지대의 향곡을 순회 공연하면서 국민들에게 독립의 민족혼을 고취시킨다는 이야기가 그에게도 가슴 속에 항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린 정철호는 14세가 되어 1938년. 그의 스승이 될 임방울을 찾아가게 되면서 어렵고 배고픈 길을 시작함과 동시에 고독한 예술가로 들어선다.
당시 천하명창 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임방울 명창이 목포에 공연을 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제자되어 '적벽가', '수궁가', '춘향가'를 사사받으며 오늘날 임방울의 유일한 제자로서 임방울류 적벽가의 맥을 이어 전승, 보급 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 후로 정응민 문화에서 판소리를 사사받고, 김재선문화에 판소리고법을 수학하여 1996년에 중형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또한 한갑득에게 거문고를 사사받기도 했던 정철호는 1940년대에 현재 세인이다 아는 유명한 업적중의 하나인 아쟁산조를 창시했다. 지금은 아쟁이 민속음악에서 없어서는 안될 악기이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아쟁은 정악에서만 사용되던 악기였다. 가야금을 8줄로 개조해 아쟁을 만들어 독공 끝에 아쟁산조를 작곡한 그는 1948년 최초로 "아쟁연구 발표회"를 열어 국악계의 선구자적 길을 개척하며 아쟁산조를 민족음악에 이용, 국악의 대중화에 힘쓴다.
▲ 정철호 1집 - 後廣 김대중 옥중단시 : 옥중단시 / 이제 가면 (2000)
한편 그해 "조선창극단"에 입단하고 2년 그후 "국극사"로 옮겨 창극단 생활을 한다. 그러나 선생님 밑에서 배우기 위해 시작했던 의도와는 달리 창극단의 생활은 유랑생활과 다름없는 생활고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국극사" 마저 경제적 이유로 해산이 되자 아쟁반주자로서 길을 걷는다. 그 속에서 본격적인 작곡에 손을 대면서부터 그에게도 다소 생활에 여유가 찾아오고 나름대로 보람도 갖게된다.
결국 정철호는 천부적인 작곡 실력을 인정받게 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성국극단체의 작창을 거의 도맡아 해내면서 오늘날 작창의 거장 정철호의 예술은 시작된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유입으로 물밀듯이 밀려드는 서구 문물에 의해 국악이 일반대중과 점점 유리되어가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민속악이 외면당하게 된다. 정철호는 국악이 진정 우리 국민의 음악으로 자리잡게 해야한다는 생각에 1956년 그간 모아온 사재를 털어 한국국악연구원을 설립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철호가 우리 전통예술사에 남긴 업적은 참으로 많고도 크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그를 자칭하는 '명창', '명연주가', 명고수', '아쟁창시자', '작창의 거장', '국악계의 거목' 등 으로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 화려한 수식어나 업적에 걸맞는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고 지금도 그런 불행한 예술인의 한 사람인 것 또한 사실이다.
▲ 정철호 4집 - 열사가 / 신민요 : 열사가 / 신민요 (2001)
70 평생을 한길을 걸어온 전통예술인으로써 평생을 국악의 대중화와 보급, 발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그의 작품이 말해주듯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예술을 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적 고집이 그를 평생 고독한 예술인으로 있게 했을 것이다. 암울했던 일제 시대에 홀홀단신으로 핍박받던 예술인이 되고자 임방울 명창을 찾아 나섰던 어린 정철호가 고희를 훨씬 넘긴 오늘날에도 외로운 거목으로 예술의 외길에 서 있는 것이다.
'전통을 진정으로 보존하는 길은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고 발전시켜나갈 때 그 가치가 있다.'는 그의 굳은 믿음이 그 오랜세월 풍파와 역경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이 서있는 전통예술의 거장 정철호를 만나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주요작품
정철호 1집 - 後廣 김대중 옥중단시 : 옥중단시 / 이제 가면 (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