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단지에서 경주 시가지 쪽으로 가면, 포항으로 빠지는 사거리 너머 왼쪽에 넓은 들판이 있고 그 들판의 초입에는 숲이 덩그러니 있다. 그 숲은 분황사지. 무턱대고 밭 사이의 길을 따라 들어갔다. 넓은 잔디밭이 나오고 일정하게 배치된 큰 주춧돌이 보이니 어김없이 황룡사지!
오늘날 교회가 도심지에 있듯이 초기에는 절도 ‘평지 가람’이 많았다. 대찰이 산에만 남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수도를 목적으로 하는 ‘선종’이 도입되자, 절이 산에 지어졌다. 외적이 침입하면 평지에 있는 절을 불태우고 약탈당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 정책으로 눈에 잘 띄는 절은 폐사되고 말았다. 한편 늘어나는 인구로 도시화가 장기간 지속되자 평지 절은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황룡사 터는 원래 신궁을 짓던 자리였다. 민간의 사당 신사와 왕실 사당인 신궁이 일본 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사와 신궁은 명칭이 ‘xx당’ 또는 ‘xx단’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신사와 신궁이란 용어는 이를 배워간 일본인들이 잘 보존하고 있다. 원래 문화는 받는 쪽에서 원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미국인들이 버리는 자동차 번호판이 우리 나라 카페에 얼마나 잘 모셔져 있는가. 모자라니까 모조품까지 만드는 판국이다.
황룡사는 한쪽 건물 길이만 300미터 가까이 되는 장방형 회랑을 갖고 있던 대찰이었다. 면적은 약 2만평이고 황룡사의 상징 9층 목탑은 높이가 80미터로 25층 아파트보다도 높았다.
그렇게 높은 목탑을 만드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현대 건축 기술에서조차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릴지도 모른다. 아마 1밀리, 그 이하의 오차만 있어도 좁은 공간에 80미터나 되는 목탑을 쌓을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거기다가 상부의 엄청난 무게가 작용하면 아래에 있는 기둥에 변형이 오지 않을 수 없다. 황룡사 목탑은 7~13세기, 600년 동안 버티고 있었다. 당연히 세계적인 불가사의 중 하나!
8,9 세기는 중세에 속한다. 경주의 인구와 규모는 그 시절 세계 4대 도시였다. 중세의 개척자 아랍사람들에게 신라는 황금의 나라요, 경주는 평생 그리던 유토피아였다. 당시 경주의 인구는 10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사기에 기록된 경주의 가구 수가 16만 이상이고, 각종 자료를 보면 옛날에는 가구 당 평균 인구가 6~7명 이상이었으니 간단한 산수다. 고대 인구를 추정하는데는 이견이 워낙 많긴 하지만 어쨌든 경주는 세계적 도시였다.
어찌 사람만 많다고 해서 그런 ‘메이저 타이틀’을 보유하겠는가. 황룡사가 있기 때문에 세계 4대 도시란 칭호가 잘 어울리지 않나 생각해 본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천지개벽이래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므로 100만이란 숫자는 전혀 황당한 추리가 아니다. 경주 시가지에서 한참 떨어진 논밭에서 신라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라.
‘에이! 옛날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분은 우리 역사를 축소, 왜곡하는 ‘식민사관’의 잔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굳이 한단고기류의 극우적 역사책을 인용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왕명에 의해 전문 집필진이 만든 정사 ‘삼국사기’에 적힌 것이 그렇다.
황룡사는 6세기 정복군주 진흥왕 시절에 신궁을 짓다가 절로 바꾸어 1차로 완공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증축하다가 선덕여왕대에 9층 목탑을 세움으로써 100년 가까이 걸린 초대형 프로젝트에 마침표를 찍는다. 거대한 장육존상과 에밀레종보다 4배 더 큰 동종도 있었다. 새가 진짜 나무인줄 알고 앉으려던 솔거의 벽화도 있었고. 몽고 징기스칸의 군대가 태우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날까지 건재했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아무튼.
삼국유사에는 장육존상의 원료 황동 57,000근과 황금 3만푼은 석가가 탄생한 인도에서 ‘기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세의 개척자 아랍 상인들에게 신라가 황금의 나라로 비치는데 기여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옛날에 어떻게...’라는 생각을 가진 분은 ‘오만에 가득 찬 현대인의 시건방진 생각’을 고쳐야 한다. 그런 편견을 갖게 되면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면의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눈뜬장님’이 된다. 돌도끼 휘두르던 구석기 시대의 시각을 어디다가!
죽은 자의 집이 무덤일진대 무덤 앞에 있는 석상은 생전에 그런 사람의 호위를 받은 것을 뜻한다. 경주 괘릉에 서있는 석상은 영락없이 페르시아인의 모습이다. 세계4대 도시란 의미는 인구, 제도, 문물, 무역, 인종 등 다각적인 면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괘릉 석상이나 처용무에 등장하는 얼굴은 틀림없이 아랍 계열이다. 김수로 왕비 허황옥은 인도사람이며 학자들은 허황옥이 가야까지 온 루트까지 추정하고 있는 판국이다. 신라 석탈해 전기에서도 남방계 이주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원전후에 이미 소승불교가 들어온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벼문화로 간주되는 고인돌은 남방계 문화이며 우리나라 고인돌에서 인도인의 유골이 출토된 바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본적인 언어, 즉 쌀, 아버지, 어머니, 다리 등 수백 개의 언어가 드라비다 계열의 인도 종족과 같이 사용하는 것은 뭐를 뜻하는가? 물론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도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고대의 국제 교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논지가 빗나가지만 신궁을 절로 바꾸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교가 실질적으로 국가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는 뜻이고, 토착 신앙이 불교에 용해된 것이다. 절에는 삼성각이 있다.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비는 칠성각, 자신을 돌아보는 독성각, 셋을 합친 것이 삼성각인데 한국 불교의 특징은 삼성각의 존재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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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의 주춧돌을 살폈다. 어림잡은 목측으로는 한 변이 20미터 정도였다. 그 주위에는 여러 건물의 주춧돌이 놓여 있으니 황룡사의 전체 규모를 느끼게 한다. 황룡사 금당의 크기를 짐작케 하는 유물이 남아 있으니 치미다. 치미란 건물의 지붕 꼭대기 용마루 양쪽에 얹는 장식 기와로 건물의 크기를 고려해서 크기를 정한다. 건물의 비례감을 중시한 우리 선조들이 1.8 미터의 치미를 올렸다면 그 건물의 크기는 중국, 일본의 어느 건축물보다 크다는 것이다.
내가 실권 있는 당국자라면 황룡사 복원을 당장 추진하겠다. 약간의 졸속 공사를 감행하면 10년이면 지을 수 있지 않겠나? 처음에는 100년이나 걸렸지만. 그 탑 꼭대기에서 북경 자금성을 내려보는 거다.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을 성냥곽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목조 건물의 형식을 모두 동원하면 그리 어려운 일만도 아닐 것이다. 임해전, 이견대... 주춧돌만 보고 복원한 건물은 얼마든지 있다.
“자, 와서들 봐! 1400년 전에 우린 이런 거 있었어!”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톱으로 켜고 정으로 쪼아 만들었는데, 기계톱과 밀링머신을 사용하는데 왜!
눈을 가까이 가져간다. 시야가 흐려질 때까지 멍하게 주시한다. 서서히 윤곽이 잡히면서 입체 그림이 떠오른다. 매직 아이에서 그림을 보듯이, 그렇게 황룡사의 모습을 그려본다. 맑은 초여름 저녁 시간. 기울어 가는 태양 아래서 700년전 불탔던 황룡사가 재현된다. 성곽처럼 둘러싼 회랑 가운데는 목탑이 치솟아 있다. 금빛 찬란한 장육존상도 보이고 웅장한 종소리도 퍼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