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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만든 산 - 주왕산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TV를 켜니, 박태환 선수, 수영시합을 할 거란다. 처가식구들이 놀러와 사흘째 같이 머물고 있는데, 자매들끼리, 사촌들끼리 12시 넘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 하더니 모두 아침 늦게까지 자고 있다. 자고 있는 모든 식구를 응원을 하라고 깨우니, 눈을 비비고, 시큰둥하더니, 막상 시합을 하니, 식구 모두 열이 난다. 옆집이야 어찌되었건, 우리는 박수 치고, 고함을 지르고, “박태환!” “박태환!” “자! 기를 모~아~~, 얍!” 드디어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세계에서 1위를 했다. 학교, 학급에서 1위를 하기도 힘든데, 세계에서 1위를 했다. 자랑스럽다. 아~, 내가 의기양양해진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박태환이 나하고 아주 잘 아는 사이라도 된 듯이 가슴이 뿌듯하고, 즐겁다. 요즘, 광우병이 어떻다, 경제가 어렵다. 독도가 어쩌구 해서 짜증스런 소식들만 들리더니, 어제와 오늘 가슴이 뻥~ 뚤리는 즐거운 소식을 오랜만에 들어본다.
이것이 민족이고 핏줄인 모양이다. 아니, 말이 잘못된 것 같다. 이것이 국가, 즉, 국민 공동체 심리인 모양이다. 북한이 금메달을 딴다 해도 지금만큼 좋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지금 업된 기분은 민족이란 용어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 살아생전, 어디를 가 있어도, 대한민국이라는 조건 하나로 용솟음치는 기쁨이 되고, 가슴 억눌리는 슬픔이 되는 그것, 그것이 국가라는 공동체인 모양이다.
근대에 들어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는 천부인권설에, 사해사상, 지구촌사상이 널리 유포되고, 다국적기업들의 경제적 이익과 맞물려, 국가를 뛰어 넘는 공동체 사상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해도,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국가는 최고의 도덕”이라 갈파했듯이 국가는 아직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한 단위인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지배계급이 하부계급의 자발적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 이데올로기 속에서 나서, 살다, 죽어가게 한다는 철학자의 갈파도 있지만, 또 어느 정도 그런 부분에 대해 동의를 하고 있긴 하지만, 나는 그 이데올로기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식과 감성은 다른 것. 나는 아직 개인이 국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모습에서, 그것이 설사 코스모폴리터니즘에 배치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어리석기 보다는 장하고, 무시하기 어려운 경외감을 느낀다. 국가는 내가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태어나, 자랐기에, 그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고, 그래서 인식이 어찌하지 못하는 그런 감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미국시민으로서 그럴 것이고,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또한 그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러할 것 같다.
주왕산(周王山)은 조선중중 25년 (1530)에 편찬된 이행, 윤은보, 신공제등이 편찬한 (신동국영지승람)의 지도인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동람도, 경상도편]을 들여다보면 주현산(主峴山)으로 표기 되어 있고, 그로부터 200여년의 후인 영조27년(1751)에 편찬된 이긍익의 '팔역지(택리지)'나, 또 비슷한 시기에 신경준이 지은 '산경표'에는 주방산(周房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외 기암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졌다하여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부르지만 정확하게 언제부터 주왕산으로 명명됐는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주왕(周王)이란 이름은 후주(後周)의 천왕(天王)임을 자청하며 반기를 들고 당나라 수도 장안을 쳐들어가 대패했던, 주도(周鍍)라는 자를 지칭하는 말이라는데, 그는 진나라(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에서 복야상서 벼슬을 지낸 주의라는 사람의 9대손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천품이 범상치 않았을 뿐 아니라, 5세 때 이미 글을 배워, 11세 때에는 육도삼략(六韜三略)1)을 통달하였고 천문지리에도 능했다고 한다. 주도는 이때부터 왕후장성을 꿈꾸면서『황하강의 물을 들이마시고 태산을 갈아 업겠다』고 말하며, 진나라의 후손 중에 큰 인물이 없음을 한탄했다 한다. 그는 성인이 되자 장사 1백명을 거느리고 웅이산에 들어가 1만여 명의 군중을 모으고, 남양땅에 웅거하며, 진나라의 후예인 주도(周鍍)가 후주의 천왕(後周天王)임을 자청하며 반기를 들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쳐들어갔지만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가 당나라 덕종15년 (799년, 신라 소성왕1년)이었다. 설화에 따르면, 싸움에 대패한 주도는 숨을 곳을 찾아 요동을 거쳐 신라로 도망을 왔다. 그때 주도를 따르는 군사는 1천여 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후 관동(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거쳐, 진성(지금의 청송군 진보면)에 다다른 주왕(周王)은 석병산(주왕산의 옛이름)이 매우 깊고 험준하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숨어들었다. 그들은 식량이 없었으므로 인근 주민의 식량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게 되었다. 이에 석병산에 많은 산적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온 나라 안에 퍼졌다. 이때 당나라 조정에서 주도가 신라 땅으로 도망갔음을 알고 신라에 주도를 잡아 줄 것을 부탁해 왔다. 당나로부터 주도를 잡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신라왕은 석병산 일대의 산적들이 주도와 그의 군사임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마일성 장군과 그의 5형제들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마일성 장군이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이성(二聲)은 선봉장(先鋒將), 삼성(三聲), 사성(四聲), 오성(五聲)은 후장군(後將軍)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진을 쳤다. 그러나 마장군의 군사들은 선뜻 주왕을 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주왕의 군사들이 기암봉에 이엉을 씌워 노적가리처럼 위장하여 군량미가 많은 듯이 보이게 하니, 마장군 형제들은 주왕의 군사가 많은 것으로 여기고서 감히 공격하지 못한 것이었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장군은 장군봉에 올라 위장해 놓은 노적가리를 향해 활을 쏘아 불 태웠다. 기암을 보면, 중간쯤에 바위가 뚝 떨어져 나간 듯한 흔적이 있는데, 이는 바로 마장군이 화살을 쏘아 바위가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마장군의 군사들이 포위하고 공격하니, 주왕의 군사들이 당하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주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서 주왕굴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고 한다. 주왕굴은 높은 낭떠러지에서 흐르는 폭포수가 굴 입구를 막고 있으므로 숨어 지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주왕의 천명이 다했음인지 천혜의 은신처라 방심하고 있다가 어느날 폭포수에 세수를 하기 위해 굴 입구로 나왔다가 마장군의 군사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로써 주왕은 후주천왕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마장군 형제의 철퇴를 맞고 운명을 다했다고 한다.
주왕산이라는 이름은 1700년대까지 인문지리서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후에 근세의 사람들이 옛 설화를 근간으로 다시 개명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는데 어떤 자료에는 통일신라기에 주왕산으로 불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천년의 바위도 풍우에 깨어지고 부수어질 수 있는데, 산 이름이야 일러무삼하겠는가. 앞으로 천년이 지나면 또 어떤 이름으로 바뀌고, 의미도 바뀌어 있을 줄을...
이름이 갖는 설화가 이렇게 장황한 주왕산(720.6m)은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에서 동남부로 쭉 뻗어 나온 태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수 많은 바위 봉우리와 깊고 수려한 계곡이 빚어낸 풍광으로 찾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산세가 웅장하고 4계절의 경관이 수려하다. 주왕산 일원의 지질은 풍화와 침식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백악기 유천층군2)의 중성 내지 산성 화산암류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3대 암산3) 중의 하나로 청송`영덕 등 2개군, 5개면에 걸쳐 있고 북쪽의 설악산과 오대산, 서쪽의 속리산과 덕유산과 접해 있다.
풍광으로는 청학과 백학이 살았다는 학소대, 앞으로 넘어질 듯 솟아오른 급수대, 주왕과 마장군이 격전을 치렀다는 기암, 주왕의 아들(대전)과 딸(백련)이 달 구경에 빠져들었다는 망월대, 멀리 동해가 보이는 험준한 지형의 왕거암, 주왕이 숨었다가 숨진 전설의 주왕굴 등이 있는데, 꼭 둘러볼만한 곳. 뭐니 뭐니 해도 주왕산의 대표 명소는 학소대 바로 위에 위치한 3개의 폭포로, 병풍바위로 둘러싸여 옥같이 맑은 물을 쏟아내는 제1폭포, 주위 경치가 빼어난 제2폭포, 웅장하고 거대한 2단의 제3폭포는 여름철엔 필수 코스이다.
문화재로는 신라 문무왕12년(672년)에 창건한 대전사는 주왕의 아들 대전(大典)을 위해 이름이 지어졌다하고, 주왕의 딸 백련(百蓮)공주의 이름을 딴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식생은 신갈나무`소나무 군락이 아름다운 경관을 더하며 희귀식물로 알려진 망개나무`노랑무늬붓꽃`둥근잎꿩이 지천이다. 지천계곡으로 봄이 되면 분홍빛 수달래가 만발을 하는데, 수달래는 진달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꽃잎에 새겨진 검붉은 반점과 한층 진한 빛깔이 진달래와 구별되는 모양이다. 이 곳 수달래는 주왕이 신라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흘린 피가 주방천을 물들인 뒤 붉은 꽃망울을 피웠다는 전설 때문에 주왕의 넋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래 저래 주왕산은 이제 주왕의 설화와 땔래야 땔 수 없는 산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창원에서 청송까지 접근이 쉽지 않다. 차로 3시간30분을 달렸다. 아침7시에 창원을 출발하였으니, 오전을 다 보내고 주왕산 입구(청송)에 도착한 샘이다. 청송은 나의 뇌리에 2005년경에 간판을 내린 청송감호소가 첫 번째이다. 신군부인 전두환대통령 시절인 지난 1980년 12월경에 상습 범죄자에 대해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친 뒤 재판 없이 최장 7년까지 보호감호를 할 수 있도록 제정한 사회보호법이란 법률이 있었다. 사회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고, 미래 범죄 가능성에 대해 미리 처단하는 것은 인권침해란 논란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악명은 아무 피해를 입은 적이 없는 나의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우리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다.
청송을 찾아 나서니, 그 사라진 감호소가 어느 쪽에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청송이 나와 세대를 달리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각인되리라. 지금의 청송은 사과와 고추의 주산지로 유명하단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달리는 국도 주변에는 지금이 8월 초인데 올망졸망한 조그만 풋사과들이 과수원에 조랑조랑 열렸다. 풋사과란 어휘에 입안에는 신맛이 돌고 침이 흥건하다.
주왕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 힘든 것은 아니지만, 34-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기라 짧은 코스를 선택했다. 오늘 등산 코스는 [대전사 - 주왕산 - 칼등고개 - 후리메기 - 제3폭포 - 제2폭포 - 제1폭포 - 주왕굴 - 대전사] 로 3시간30분 정도면 가능할 것 같은데, 11시에 대전사를 출발하여 5시간의 여유를 두고 산행을 한다.
오늘 산행인원은 24명이다. 단출하다. 이런 여름에는 집에 있으면 짜증이 날 수도 있기에 등산화 조여매고 땀을 흘리며 그늘진 산길을 찾아 산행을 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을 터인데, 참여인원이 적다. 연수 가신 분도 계시고, 해외를 나가신 분도 있고 하여, 그런 모양이다.
출발지인 대전사 입구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창원전문대에 근무하시는 나선생님이 DSLR 카메라를 들고 오셨다. 내가 가진 디카가 좀 후져서, 사진이 제대로 나올까 걱정도 하는데, 어쨌던 잘 되었다. 그리고 나선생님은 사진기를 다루는 폼에서 사진에 조예가 좀 있는 모양이다. 일단 기분이 업된다. 이번 산행에는 나선생님의 사진으로 우리 산행앨범이 풍요로워질 것 같다.
요즘 디지털 사진기가 보급된 이래, 사진이 아주 풍요로워졌다. 아무리 많이 찍어도, 비용이 들 것도 없고, 구도를 생각할 것도 없고, 그냥 핀트만 맞추어 찍어두면 되는 사진이다. 요즘 디카를 보면 전영록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란 노래가 생각난다. “사랑을 쓰려면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게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그래 지우게 처럼, 디카도 그렇다. 찍어놓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면 되고,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면 되니까...
대전사 앞마당의 연꽃화분이 멋들어지다. 8월의 뜨거운 햇살을 배경으로 단아한 꽃을 피웠다. 누구의 사진 배경이 안 되었을까 마는, 꼭 우리를 맞이하러 그렇게 피어있는 듯하다. 그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산을 오른다. 오늘 주왕산을 찾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외에 등산로를 오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식구끼리 천천히 산을 오른다.
내 앞에 김해봉황초 강선생님이 혼자 올라가신다. 오늘 산행에 강선생님이 주산지를 추천하셔서 산행을 마치고 주산지도 구경을 할 참이다. 나는 주왕산도 처음이고, 주산지도 처음이라 정말 기분이 좋다.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란 영화에 주산지가 배경이었는데, 스크린의 그 영상미는 어렴풋이 내 머리에 남아있다. 처연하리만치 조용하고, 정지되어 있는 영상, 그렇다. 그렇게 그 잔상들이 남아있다. 그런 주산지가 이곳에 있는 줄은 몰랐다. 차선생님 계시면 두 분이서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가시면 되는데, 차선생님이 이번 산행에 빠지셨다. 말동무가 되어드리면 좋겠다란 생각이 든다. 우리 산행에 빠지지 않은 분인데, 앨범에 강선생님의 사진이 몇 안된다. 이번 산행에는 사진도 좀 찍어드려야겠다.
대전사에서 오르는 주왕산 코스는 1시간이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주왕산의 정상은 하단부의 아름다운 경치와는 달리 육봉으로, 지난번 내연산과 마찬가지로 봉 주변의 나무에 둘러싸여 경관이 없고, 쉴 그늘도 넓지가 못하다. 그래서 정상에서 단체사진만 촬영하고, 돌아서 내려가는 길의 그늘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오랜만에 오신 중앙고의 정선생님, 중앙중 이선생님, 야채담당(?) 용남초 전선생님, 무수히 둘러 앉아, 전선생님이 직접 재배해 오신 야채로 점심을 먹는다. 이번에는 대산고 이선생님께서 직접 재배하신 방울토마토를 가지고 오셨다. 오늘 완전히 자연식이다.
점심식사 후 뉘엄 뉘엄 하산을 하니, 어느 듯 계곡이고, 계곡하단부인 후리메기이다. 폭염에 가물어서 그런 것인가? 흐르는 물이 그리 많지 않다. 후리메기에서 제3폭포로 올라가서 폭포와 폭포 옆의 동굴처럼 파져있는 기이한 암을 들여다보고, 돌아내려오니 주왕산의 절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미리 자료를 챙겨 보았건만, 저 바위가 무슨 암인지, 또 저 바위는 무슨 암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 이럴 때는 그냥 눈에 비친 그 모양만 가슴에 담아두는 것이다. 대상이 의미를 가지면 의미에 의해 대상은 변화되고, 그것이 또 상념이 된다. 무엇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혼돈, 그래 혼돈을 그대로 두면 오히려 무심이 될 것도 같다. 마냥 눈앞에 펼쳐지는 암봉의 사열을 받으며 제2폭포, 제1폭포를 거쳐 하산을 한다.
학소대에 이르러 길이 두 갈래이다. 우리는 주왕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주왕굴은 설화에 따르면 주왕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숨어살았던 곳이라 했다. 주왕굴에 이르는 길은 산허리를 가로질거 가는 길로 비탈진 산에 막혀 바람이 없다. 그래, 바람, 바람없는 산길을 따라 걷다가 불어오는 계곡풍은 시원한 얼음맛에 비유할 만한가. 주왕굴에 이르는 길 중간에 있는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발검음을 잠시 멋게한다.
주왕굴은 주왕암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 안을 들여다 보려하다가 경일고 강선생님이 미끌어지셨다. 아이고, 이럴 어쩌나. 입술언저리가 약간 볼거디디하고, 손바닥에 찰과상이 낫다. 이끼가 끼여 있고, 동굴위에서 내려오는 폭포수로 그곳이 그렇게 미끄러운 모양이다.
대전사로 내려오니 관광버스 기사분이 저녁식사를 예약해 두셨단다. 오늘 저녁은 달기약수백숙이다. 식사 중에 백숙은 대산고의 이선생님이 일품으로 만드신단다. 음나무를 뜸뿍 넣어 먼저 달여내고, 닭을 넣고, 마늘 넣고, 대추 넣고, 뭐, 뭐, 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백숙을 만들고 나서 나오는 대추는 먹으면 안된단다. 대추에 나쁜 성질이 다 모이기 때문에 버려야 한단다. (중요, 중요, 중요)
창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들린 주산지는 그렇게 가슴 속에 담겨있던 모습은 아니다. 그 때는 가을이었고, 알록달록 오색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는 늦가을이었고, 그기에 물안개가 피어올라, 그 영상이 실루엣 처리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화면 전체는 촉촉이 젖어 있어, 포근하게 그러면서도 시원하게 다가온 풍경이었다. 속세를 떠나면 저런 곳에 자리 잡아야 할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곳, 그런 주산지가 오늘은 햇볕이 내리 쬐고, 가뭄에 물이 줄어, 150년 되었다는 능수버들이 물에 잠겨있질 않다.
이 주산지는 1720년 8월, 조선조 숙종 46년에 착공하겨 그 이듬해 10월 경종 원년에 준공하였다 하는데, 호수의 규모는 길이 100m, 넓이 50m, 수심8m의 아담한 호수모양으로 지금까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못 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난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호수 속에 자생하는 약 150년생 능수버들과 왕버들 30수는 울창한 수림과 함께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산지 둑 옆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주산지의 축조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에는 축조당시 유공자들의 이름과 공사기간에 관한기록,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일장저수(一障貯水), 류혜만인(流惠萬人), 불망천추(不忘千秋), 유일편갈(惟一片碣) (정성으로 둑을 막아 물을 가두어 만인에게 혜택을 베푸니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한 조각 돌을 세운다.)
그래 다음에, 언제가, 그것도 그믐날 근처의 밤에 출발해서, 별빛이 수면에 비치고, 그러다가 날이 밝아오며, 물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에 단풍들이 다소곳이 얼굴을 붉히는 그런 조용한 주산지를 만나봐야겠다.
창원으로 내려오는 길에 관광버스 TV에서 최민한 선수가 유도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모았다. 너무 황홀했다. 창원도착 9시30분
2008.8.11
산악회 회장 안병철 올림
1) 주나라 태공망이 지은 것으로 전해오는 “육도”와 “삼략”이란 병법서를 육도는 문도, 무도, 용도, 호도, 표도, 견도로 되어있고, 삼략은 상략, 중략, 하락으로 나누어 있다.
2) 지구의 지질시대를 선캄브리아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라 나눌 때, 중생대의 쥬라기(공룡시대) 다음에 위치하는 약 1억 3,500만 년 전부터 약 6,500만 년 전까지의 약 7,000만 년 간의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의 명칭은 유럽에서 이 시대에 해당하는 지층의 특징이 백악(chalk)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명명된 것이다. 유천층은 밀양과 유천지역에 대표적으로 발달된 지질의 특징을 가진 지층으로 주로 화산암층이다.
3) 설악산, 영암 월출산, 청송 주왕산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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