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사의 우물, 우리가 처한 실존적 상황
- 기형도 「봄날은 간다」
붓다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괴로움의 바다에 있다고 합니다.
다음은 이런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놀다가 사나운 코끼리에게 쫓겨 달아나는데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우물을 발견했는데 우물 옆에 큰 나무가 있고, 우물 속으로 뿌리가 하나 나 있었습니다. 그는 곧 나무뿌리를 타고 내려가 우물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 우물 사방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있어서 그를 물려고 하였고, 나무뿌리는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물 밑에는 독한 용[毒龍]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용이 몹시 두려웠고 나무뿌리가 끊어질까 걱정이었습니다.
나무에는 벌통이 달려있어서 벌꿀이 다섯 방울씩 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흔들리면 벌들이 흩어져 내려와 그 사람을 쏘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들에서 불이 일어나 그 나무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마치고 부처님께서는 왕에게 물었습니다.
“대왕이여, 이 사람이 벌꿀의 맛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대답했습니다.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어떻게 그 조그마한 맛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
이중표님은 이 이야기를 다음처럼 설명합니다.
“우리는 무상의 코끼리에 쫓기어 생사의 우물 속에 빠져 있습니다. 나무뿌리와 같은 수명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으나 세월이라는 쥐가 하루하루씩 갉아먹고 있어서 수명이 다하면 네 마리의 독사에게 먹히고 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괴로움은 바로 이와 같은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것을 괴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물 속의 사람이 입에 떨어지는 꿀방울을 즐기듯이 오욕락(五欲樂), 즉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즐기면서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우물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꿀방울을 많이 얻을 생각만 합니다. 중생들에게 행복은 꿀과 같은 오욕락을 많이 얻는 것이고 불행은 오욕락이 적은 것입니다. 이런 중생의 생각은 바른 생각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중생의 생각을 그릇된 생각[邪見]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릇된 생각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고통이 가득한 우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이중표 『불교란 무엇인가』 15쪽-16쪽)
다음 시를 읽겠습니다.
봄날은 간다
-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대며
2시착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 새 없어져 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장면들이 생생하게 켜졌다가 꺼지며 마치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의 슬라이드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마치 알 수 없는 생이라는 어두운 심연 위에 한 컷씩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는 무(無) 혹은 어둠이 압도적이어서 모든 것들이 덧없다는 느낌입니다. 어느 것 하나 제 의미로의 안정성을 가지지 못하고 피었다가 어둠 속으로 묻혀버립니다. 그 풍경들이 딛고 있는 확실한 토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설유경의 비유처럼 무상의 코끼리에 쫓기어 빠진 생사의 우물 속입니다. 세월이라는 쥐가 하루하루씩 갉아먹는 수명을 붙잡고 있지만 삶의 의미라고는 없습니다. 생사의 괴로움은 바로 이와 같은 괴로움입니다.
삶의 의미나 목적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봄날은 흘러간다는 사실뿐입니다. 죽음에 먹히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물 속의 사람은 입에 떨어지는 꿀방울을 즐기듯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五欲樂]’을 즐깁니다. 이 무의미의 우물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꿀방울을 많이 얻을까 생각만 합니다.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 갑니다. 어떤 인연에 의해 그렇게들 모여들었을 것이지만 알 수 없고 또 어떤 인연으로 흩어졌을 것이지만 알 수 없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어느 것도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붙들어 맨들 순간일 뿐일 것입니다. 추억조차도 그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사라집니다. 그처럼 소읍의 봄날, 우물 속의 삶은 갑니다. 니체의 표현처럼 이 세계라는 “음악상자 전체는 결코 멜로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을 영원히 반복”(『즐거운 학문』109에서)하고 있고, 그처럼 우리의 생도 모였다가는 흩어지고 흘러갑니다. 봄꽃들처럼 피었다가 지는 것입니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참 황량한 세상이고 생입니다. 정처 없음과 의미 없음!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많은 분이 우울해질 것입니다. 특히 삶에 지쳐 커다란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의 경우는 ‘삶이여, 이제 그만!’이라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하여도 그가 달리 갈 곳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더라도 우물 속의 삶은 변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우울해지고, 시인도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라고 말합니다. 정처 없음이 “굳은 땅속으로”로 들어서 해결될 길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럼 이런 생사의 우물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