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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현충일, 영동수필회 문학기행을 통해 십 수년 만에 통일 전망대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예전의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통분했던 마음은 아니었지만, 유월의 북녁을 건너다보며 표현키 어려운 착잡함에 종일 우울했었습니다. 내 나이 즈음에 바라보는 유월은 지금도 오리무중입니다.
내 나이 즈음의 유월 / 이문자
산하가 푸르다. 수려하지만 짙은 푸름만큼 아린 기억으로 살아나는 유월. 오월이 우리에게 베풀었던 화사함도, 뭇 사람들의 그 빛나던 기쁨도 무색할 만큼 깊은 시름이 흐른다. 이날이라고 그 악몽이 비켜 가겠는가. 마을 뒷산 붉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왔던 그 처연했던 울음소리가 차창 밖의 바람결에 진폭을 더해가며 환청처럼 흔들리다가 사라지고 있다. 여섯 살에 겪은 전쟁으로, 비행기 떠가는 소리에도 자지러질 듯 놀랐던 난, 성인이 되면서 차츰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지만, 이 무렵이면 불청객처럼 찾아드는 그날은 여태까지 뇌리에 박혀 있다가 무시로 덮쳐오곤 한다.
우리 집 디딜방앗간에서 비상 양식(백설기)을 위해 떡쌀을 빻던 어른들 틈에서 내가 들은 얘긴, 아무게 집 아들이 한밤중 피난길에서 큰물에 떠내려갔다는 거였다. 애간장 녹여내는 통곡소리를 들으며 그때 여섯 살짜리 여아가 생각했던 건, 잠결에 업혀가며 들었던 아비규환 같았던 아우성, 물소리, 그리고, 뒤에 오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축축한 바람을 타고 마을로 퍼지던 곡성이 통풍환자의 통증마냥 시리게 건드리고 지나간다. 60년 세월을 훨씬 넘어섰는데도……. 어느새 버스는 명파 마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마을 이정표를 보면서부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긴장감이 엄습해 왔어야 하는데, 두방망이질 가슴대신, 아무렇게나 방치된 상가와 실종된 상 경기를 지켜보는 내방객 마음이 심란하기만 하다. 북과 대치하며 오로지 ‘평화통일’만을 갈구해왔던 접적지구 사람들의 염원은, 호경기를 누렸던 시간으로 돌아가고픈 기대에 밀려 조금씩 그 진의가 퇴색되었을 거란 생각에 미치자, 내 어이없는 몰이해에 흠칫 놀라 쓴 웃음이 나온다. 늘 긴장감 속에서 살았지만 정갈함이 묻어나던 예의 마을 모습이 아니란 판단 때문일지도 모른다. 통일전망대에 오르니 망원렌즈로 북녘을 코앞에 당겨놓고 긴장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대견스럽고 반갑다. 이 아이들 부모에게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건 조국을 가르치려는 충정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날만은 그냥 육안으로 바라보리라 작정하고 손에 잡힐듯한 거리와 마주하니 북녘 산하가 곱절의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감호를 에워싸고 모래사장으로 이어가다 10여리 거리에 점점으로 나뉘어 꿈꾸듯 졸고 있는 해금강을 이렇게 건너다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지, 충혼의 넋이 실려 분단 선상의 산, 바다, 파도는 미동조차 없다. 이날이 되도록 소통을 트지 못하는 현실을 임들 영전에 어떻게 설명해야 옳으며, 옷자락 훌훌 벗어던지고 철철이 잘도 변신하며 교태를 부리는 저 금강산에 대고 무어라고 소리쳐야 하는 걸까. 억장이 무너지듯 서글퍼지다가 그렇게 허허롭다. 591고지 전투 기념비에 국화를 바치고 내려섰다. 근원 모를 우수가 가슴에 찬다. 아이들을 인솔하고 목에 힘줄을 불끈 세워가며 ‘평화통일’을 역설하던 예전의 울분이 아니라 표현키 어려운 착잡함이었다. ‘전쟁체험전시관’에 들어섰다. 아이 둘을 거느린 부부 뒤를 따르며 주문을 외웠다. ‘오늘 이 가족에게 보람을 선물하소서!’ 그런데, 정작 그 순간은 내게 온 것이었다. 두 참전 용사와의 조우, 분명 극적인 만남이었고 전율이었다. ‘군번 1136270 이이우 용사’와 태극기에 고이 수습된 무명용사의 유해 앞이었다. ‘군번 1136270’ 을 유품으로 남기고 산화한 이 일병과 조국의 태극기에 싸인 채 영면에 들지 못하고 있는 용사의 유골은 백 마디 천 마디보다 많은 말을 던지고 있었다. 군번과 용사의 유해 옆을 스쳐갔을 수십 수백만의 군중들은 과연 무엇을 염원하며 두 용사를 가슴에 품고 갔던 걸까. 군번을 적고 있는 내 곁으로 아들 손목을 이끌고 한 엄마가 다가와 진열 케이스 앞에 멈추었다. “군번이 뭐야?” 어린 아들의 질문에 그처럼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모자를 본 적이 없었던 난, “이분이 나라를 지켜주신 거야.” 로 설명을 끝내는 젊은 엄마를 뜨겁게, 정말 뜨겁게 포옹하고 싶었다. 전쟁을 체험했던 내가 감복을 했으니 건강하게 잘생긴 그 엄마의 아들에게 더해 줄 말이 뭐가 있었겠는가. 놀이공원을 숱하게 두고도 구태여 통일안보 현장을 택해 달려왔던 그날 현충일의 관람객들! 불편한 보행에도 노구를 이끌고 북녘을 응시하던 연민에 찼던 시선들과 혈기 왕성해 보였던 몇몇 젊은이들, 특집을 찍느라 분주하던 한 방송사의 부산함도 ‘분단’이란 공통의 아픔 때문에 그날 우린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십 수 년 만에 서게 된 통일전망대에서 내가 보고자 했던 건 ‘분단의 현실’이 아니라 ‘통일된 조국을 바라보는 눈과 가슴’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정을 끝내고 귀가하니, 북에서 ‘남북 당국간 회담’을 제의해 왔다고 보도 채널마다 흥분이 고조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저의에선가 싶어 몇 번 건너본 다리지만, 이번엔 더 신중히 두드려보고 건너자고도 했고, 그래서 더욱 반가움을 감출 수 없는지 여기저기서 기대가 만발하기도 했었다. 그러기를 이레 째, 회담 무산 이유와 무산 책임공방이 까칠하게 날을 세우면서 유월이 다시 오리무중에 빠져들었다. 전쟁의 비애를 품은 채 시퍼런 멍울을 풀지 못하고 앞서간 이들의 유월은 분명 비극으로 점철되고 있다. 하지만, 조국을 반석위에 올려놓아야 할 명제는 어느 때보다 분명해졌고, 함께 행진해야 할 길을 하나로 닦아야 함을 한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할 때도 바로 지금이라고 본다. 유년의 기억을 뇌리에 달고 살면서도 이 나이 즈음의 나는 눈물겹도록 내 조국이 자랑스럽다. 이는 우리의 산하에 더 이상 슬픔이 서려선 안 된다는 확신이며, 간절한 기도이기도 한 것이다.
201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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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께에서 가장 불행나라. 6월이 갔다준 악몽. 우리는스스로 위로하면서 통일의 그날을 기도 마음.
흔히 6:25를 잊혀진 전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전쟁을 생생하게 체험한 세대에게는 영원히 경토 잊혀질 수 없는 전쟁입니다. 종북을 주창하는 젊은 세대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지요. 그들이 전쟁을 체험하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그날, 문학기행을 함께 하면서 인민군을 피해 피난 갔던 이야기 등 6.25를 기억하고 있는 사건들을 공유할 수 있을 텐데요.
손녀를 대리고 DMZ박물관 견학을 했을 때 육이오의 참상을 실감했지요. 북침을 주장하는 어이없는 세력이 이땅에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독소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박물관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애국을 다짐하는 장소가 되면 좋겠어요.
가슴 절절이 스미는 글에 감동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세계 유례없는 대참극을 떠올리는 불행을 지녔지만
그래도 우리 세대들이 아직 건재하기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전쟁을 모르고 자란 후대들에겐 진부한 얘길진 모르지만, 제 주위의 피붙이들에게라도
저들의 진의를 꽤뚫어봐야 한다고 열을 올리곤 합니다.
그 유월도 이제 일주일을 남겨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