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권에 밉보여 한순간 재계 서열 7위 그룹의 공중분해라는 시련을 당한 '비운의 기업인' 양정모(88) 전 국제그룹 회장이 29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양 전 회장은 노환으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다 29일 눈을 감았다.
1921년 부산에서 출생한 양 전 회장은 지난 1940년대 부친과 함께 고무신 공장을 차리며 신발 사업에 뛰어든 뒤, 1950년대 중반 무렵까지 100개가 넘는 생산라인을 갖춘 세계적 신발 공장을 일궈냈다.
양 전 회장이 운영하던 신발 회사 '국제신발'은 지난 1962년 국내 최초로 미국 시장 진출에 성공했으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하던 '수출입국'이라는 국시(國是)에 부응하며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양 전 회장은 직물가공업체 성창섬유,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 등을 잇따라 창업하고 동서증권, 동우산업, 조광무역, 국제토건, 국제종합엔지니어링, 원풍산업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덩치를 키웠다. 이후 양 전 회장의 '국제그룹'은 1980년대 중반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권의 거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승승장구하던 국제그룹은 하지만 지난 1985년 전두환 정권의 뜻에 따라 공중분해되는 시련을 겪었다. 양 전 회장이 정치자금 헌납 등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임에 늦게 나타난 것이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이것이 그룹 해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게 재계의 정설이다. 이에 따라 주력 계열사인 국제종합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에, 나머지 계열사와 국제그룹 사옥은 한일그룹에 각각 넘어갔다.
양 전 회장은 전두환 정권이 끝난 뒤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며 위헌소송을 벌여 승소했지만, 이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자금 유포 사건 등에 휘말리고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결국 그룹 재건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지난 1980년대 말 한 세미나에서 "국제그룹의 경우처럼 기업인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일군 기업군을 일거에 분해시켜 버린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경제 정책가들은 그런 일을 다시는 해서는 안되고, 경제계도 다시 그렇게 당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양희원 ICC대표, 사위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 이현엽 충남대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02-3010-2631 ), 발인은 4월 1일 오전 9시, 장지는 천안공원묘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