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신라하대의 정치·사회적 배경은 아주 혼미하였다. 9세기 초 입당(入唐)한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구법승(求法僧)들에 의해 선(禪)의 전래가 본격화되는데 이들은 본래 화엄학(華嚴學)의 연구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화되는데 그 당시 중국 불교계는 교학시대(敎學時代)에서 선시대(禪時代)로 사상전환을 하고있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선사상(禪思想)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9세기 부터이지만 그 이전에 선(禪)은 이미 전래되기 시작했다. 신라에 최초에 선을 전한 스님은 바로 법랑(法朗)선사이다. 선사는 중국 달마선(達磨禪)이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인 선덕여왕(善德女王:632-647)때 당나라로 들어가 중국선종의 제 4조인 도신(道신)으로부터 선법을 전수받고 귀국하여 선불교를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신라가 선을 수용할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법은 다만 그의 제자 신행(神行)에게만 전해졌다. 당시 중국불교는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이후 13개종으로 분파, 발전하여 있었으며 이때 신라승들은 선종계 중 강서성 홍주 지역에서 선풍을 진작하고 있는 마조도일의 홍주종에 많이 나아가게 된다. 이는 홍주종이 당시의 여러 선종파 중에서 가장 우세한 점도 있겠지만, 표방하는 선사상의 화엄의 성기사상과 가장 가까웠으므로 화엄을 수학한 신라승들이 홍주종에서 구법하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구법, 전래경로가 모두 해로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나·당전쟁후 결렬되었던 당과의 관계가 성덕왕 이후 개선되자 또다시 조공사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구법승·유학생이 당으로 건너가서 머물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상인의 활동도 활기를 띠게 된다. 후에 선문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선사들 역시 입당함에는 사신을 따라 산동으로 가거나 상선을 이용하여 남중국으로 가게 된다. 이는 통일신라의 북방 영역이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육로를 이용치 못하고 해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신라말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선법은 고려에 들어오면서 더욱 종풍을 떨쳐 구산선문의 선파를 성립시켰다. 신라 말에 남종이 전래되어 가지산·실상산·동리산·성주산·사굴산·사자산·봉림산 등 7파가 차례로 산문을 열기에 이르렀으며, 고려대에 들어오면서 진철대사 이엄이 수미산문을 열고, 이어서 정진대사 경양이 희양산문을 이룩하므로써 비로소 구산선문이 이루어져 그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1)迦智山門 가지산문(迦智山門)은 개산조(開山祖)로 도의선사(道義禪師)로 삼고 있다. 선사의 성은 왕씨(王氏)이며, 처음의 법명(法名)은 명적(明寂)이었다. 784년 당나라에 건너가 보단사(寶壇寺)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고, 조계(曹溪)로 내려가 육조(六曹)의 영당(靈堂)에 참배하고 그 뒤 개원사(開元寺)로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법을 물어 모든 의혹을 풀고 선사의 법맥을 잇게 되며, 다시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찾아 법요를 받은 후 중국 전역을 다니며 수행하다가 입당(入唐) 37년만인 헌덕왕(憲德王) 13년(821)에 귀국하여 새로운 남종선법(南宗禪法)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경전(經典) 중심의 교학(敎學)만을 숭상하던 사람들은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선(禪)을 마설(魔說)이라 비방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는 적란(賊亂) 민기(民飢)의 난세(亂世)였고, 이듬해는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어 그의 선사상이 수용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시기가 이르지 않았음을 느낀 선사는 설악산 진전사(陣田寺)로 들어가 40년 동안 은거하게 된다. 그 뒤 선사는 제자 염거(廉居:?-844)에게 남선(南禪)을 전해주고 입적하게 되는데 염거화상은 선사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며, 일념무주(一念無主)의 삶을 살다가 그의 제자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하여 가지산문을 대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문성왕(文聖王)6년(844)에 입적(入寂)한다. 이후 염거를 이은 제3조 체징(體澄)이 도의선사의 법을 전해 받아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짓고 그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펴 일파(一派)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도의선사를 신라에 처음 선을 전한 가지산문의 개산조로 보는 것이다.
가지산문 선맥 도의국사(道義國師) (생몰년대 미상) 우리나라에 최초로 중국의 남종선(南宗禪)을 전한 신라의 고승. 성은 왕(王), 법호는 명적(明寂), 시호는 원적(元寂)이며 도의는 법명이다. 북한군(北漢郡)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임신한 지 39개월 만에 낳았다고 한다. 784년(선덕왕 5)에 배를 타고 당나라 오대산으로 가서 공중으로부터 종소리를 듣는 등 문 수보살(文殊菩薩)의 감응을 얻었다. 그 뒤 광부(廣府) 보단사(寶壇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조계(曹溪)로 가서 혜능(慧能)을 모신 조사당(祖師堂)을 참배하였는데, 이때 조사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한다. 다시 상서의 개원사(開元寺)로 가서 지장(地藏)에게 법을 물어서 의 혹을 풀고 지장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그 뒤 백장산(百丈山)의 회해(懷海)를 찾아가서 법요(法要)를 강의받았는데, 회해는 "강서 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승(東國僧)에게 속하게 되었구나."하고 칭찬하였다. 3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다가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선법(禪法)을 펴고자 하였으나 당시 사람 들이 교학(敎學)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다 가 제자 염거(廉居)에게 남종선을 전하고 열반했다. 염거(廉巨,廉居 ?-844)심라 후기의 승려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 법주(道義:호는 元寂·明寂)의 법을 이름. 주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선법을 펴는 데 주력함. 844년(문성왕 6)9월 29일 입적함.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함. 체징(體澄, 804-880)신라 후기의 승려로, 중국 구법승, 迦智山門의 개조, 선은 김(金)씨.웅진(충남 공주)사람임. 어려서 출가하여 화산(花山)의 권법사(勸法師)에게 의탁했음.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의 염거(廉巨,廉居)에게서 선을 닦고, 837년(희강왕 2)정육(貞育)·허회(虛會)등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5년동안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며 고승을 찾음. 그러나 그의 조사인 道義가 물려준 법 외에 더 구할것이 없다 하여 840년(문성왕2)평로사(平虜使)를 따라 귀국하고, 이어 헌강왕의 초청으로 경주에 가 있다가, 다시 가지산 보림사를 창건하고 도의의ㅣ 종풍을 크게 떨침. 860년 10월 왕이 도속사(道俗使)인 영암군 僧正 연훈(蓮訓)등을 보내 가지산 보림사에 주석해 줄 것을 청해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가지산의 한선파(迦智山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그에게는 8백여 명의 제자가 있었음, 880년(헌강왕 6)4월 23일(비문에는 13일)나이 77세로 입적함. 시호는 보조(普照), 탑호(탑호는 창성(彰聖)임.
2)實相山門 실상산문은 개산조(開山祖) 홍척선사(洪陟禪師)가 실상사(實相寺)를 중심으로 선법을 크게 떨침으로써 성립된 종파(宗派)이다.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창건된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중심도량이다. 홍척선사는 헌덕왕(憲德王:802-826) 때 당나라로 건너가서 마조(馬祖)의 고 제자였던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로부터 선법을 익히고 그 법통을 이었다. 선사는 도의선사보다 5년 늦은 826년에 귀국하였고, 특히 흥덕왕과 선강태자(宣康太子)의 귀의를 받아 실상사를 창건하여 선찰(禪刹) 실상산파를 이루게 된 것이다. 세인들은 홍척선사와 도의선사를 한데 묶어 ‘북산의 남악척(北山義 南岳陟)’이라 일컬었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경북 문경 봉암사(鳳巖寺)의 지증(智證)대사 적조탑비(寂照塔碑)에 의하면 선사가 당나라에 가서 법을 구해온 것은 도의선사보다 뒤지지만 절을 짓고 문파를 이룬 것은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라 한다. 선사는 도의선사와 더불어 당시 대표적인 큰 스님이었으며, 우리나라 선불교의 선구자이다. 홍척선사는 누구보다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 이유는 혜목산(慧目山)에 잇는 현욱(玄昱)화상이 왕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남악의 실상사에 머물러 민앵왕(閔哀王),신문왕(神文王), 문성왕(文聖王), 헌강왕(憲康王)등을 맞게 되었다고 홍척선사와 왕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선종(禪宗)이 왕실의 귀의를 받기에 이르러 정치적 의미까지 지네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것이 아니가 한다. 홍척선사의 문하에는 편운(片雲), 수철(秀澈)등의 천여명이나 되는 제자가 잇어 그의 문풍(門風)을 떨쳐 선종 구산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이루었다.
실상산문 선맥 홍척(洪陟) 신라 후기의 승려로, 중국 구겁승,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조,일명 남한선사(南漢禪師)·실상화상(實相和尙), 호는 홍직(洪直). 헌덕왕 때(809-825) 당나라에 건너가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문하에서 법을 전해 받고, 826년(흥덕왕 1)경에 귀국함. 흥덕왕과 선광(宣光) 태자의 귀의를 받아 실상사(전북 남원군 소재)를 중스하여 근본도량으로 삼고, 지장의 선풍을 크게 떨침. 시호는 증각(證覺), 탑명은 응료(凝廖)임. 문하에는 편운(片雲)·수철(秀徹) 등 제자가 1천여 명이나 있어 그의 문풍을 떨쳐 선종구산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이루었음.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경북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智證大師) 적조(寂照) 탑비에 의하면, 그가 당나라에 가서 법을 전해 온 것은 원적 도의(元寂, 道義:明寂도 호)보다 뒤이지만, 절을 짓고 문파를 이룬 것은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라함.도의와 더불어 당시의 대표적 고승이었으며, 우리나라 선불교의 선구자다. 수철(秀澈) 신라때 스님 홍척 스님의 門人이고, 밀양 형성사의 開祖이며, 실상사의 제2祖. 어려서 綠虛에게 승려되고, 天宗에게 경을 배우고, 동경 복천사의 潤法에게 구족계를 받다.명산을 찾아다니며 禪을 닦고, <華嚴經>을 연구하고, 지리산 지실사로 가서 諸章을 열람하니, 그의 학문을 배우려는 學衆들이 모여들었다. 867년 경에는 신라 경문왕도 스님에게 敎와 禪의 대동소이함을 묻고, 헌강왕은 심원사에 있게 하다. 椊忍道光등 제자를 지리산에 보내 勝地를 찾게하여 실상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되며, 893년 77세를 일기로 입적함.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에, 국보 제46호로 지정된 수철화상능가보월탑과 제 47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가 있다.
3)銅裏山門 가지산문, 실상산문과 함께 호남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선문(禪門)은 동리산문이다. 도의선사와 홍척선사처럼 이 산문의 개산조 혜철(惠哲)선사는 역시 중국 서당 지장의 법을 잇고 있다. 호남의 삼대 선문이 모두 한 스승의 맥을 잇고 있어 주목된다. 동리산문의 초조이자 개창조(開倉祖)인 혜철선사는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에서 동리산문을 열어 선풍을 떨치게 되는데 태안사는 신라 문성왕(文聖王)때에 개산(開山)하여 지금도 현존해 있다. 개산조 혜철선사는 785년 경주에 태어났으며, 자는 체공(體空)이고, 휘(諱)가 혜철(惠哲)이다. 성(姓) 박씨(朴氏)로 16세 되던 해 799년에 부석사에서 출가하여 『화엄경(華嚴經)』을 수학하고 806년에 구족계를 받았다. 선사가 30세 때인 814년에 선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건너가 서당 지장선사를 찾아가 그의 심법(心法)을 전해 받는다. 이후 선사는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가서 3년간 대장경을 공부하고 839년에 귀국하는데 이는 선(禪)이 교(敎)와 융통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고, 선을 찾아 나서 글을 보면 천만언설(千萬言說)을 몰아서 한 마음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혜철선사의 선(禪)이 현실에 관심을 주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귀국후 선사는 무주(武州) 쌍봉사(雙峰寺)에서 여름 안거를 하고, 뒤에 동리산 태안사에서 머무르면서 교화를 폈다. 이 때 문성왕(文聖王)은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설법과 정치의 정도(正道)를 청하여 물었다. 861년에 입적하자 왕은 적인(寂忍)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872년에는 탑을 세워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 명하였다. 문하에는 도선국사,여선사(如禪師)와 광자대사(廣慈大師) 등 수백인이 있어 동리산문의 선풍을 크게 떨쳤다.
혜철(惠哲, 慧徹,785-861) 신라 후기의 승려로, 중국 구법승,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문(銅裏山門)의 개조, 자는 체공(體空)·청보(淸寶), 휘가 혜철, 성은 박(朴)씨, 경주 사람임. 799년(원성왕 15)15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 가서 『화엄경』을 배웠고, 814년(헌덕왕 6) 당나라에 가서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서 법을 받음. 지장이 입적한 뒤 사방으로 다니다가 서주(西州)의 부사사(浮沙寺)에서 3년간 대장경을 읽고, 839년(문성왕 1)귀국함. 뒤에 동리산(전남 곡성군) 태안사(泰安寺)에서 개당(開堂)하여 선풍을 일으키고, 861년(경문왕 1) 나이 77세, 법랍 62년으로 입적함, 문하에 연기 도선(烟起 道詵)·여(如) 등 수백 명의 제자가 있어 동리산파를 이루었음. 경문왕이 적인선사(寂忍禪師)라 시호함.
1)무주 가지산 보림사 시보조선사 영탑비명 보림사는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 위치한 사찰로서 여기에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158호)가 전하고 있다. 보조선사(普照禪師)는 속성이 왕성(王姓)인 김씨이고, 법호(法號)는 체징(體澄)으로 선종 9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사람이다. 804년(애장왕 5)에 태어나 19세에 출가하였으며 설악산 억성사에서 염거(廉居)화상에게서 수학하였다. 후에 중국에 유학하여 선종사상을 공부하고, 신라에 귀국한 다음 고향에서 교화활동을 펴다가 헌안왕의 요청으로 가지산사[보림사]로 옮겨 수행하였다. 859년(헌안왕 3)에 김언경 등의 시주로 보림사에 철조비로자나불(국보 117호)을 만들어 안치하였으며 880년(헌강왕 6)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탑비는 문하제자들의 건의에 의하여 왕명으로 884년(헌강왕 10)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김영(金穎)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무주 곤미현령(전남 영암군 미암면) 김원(金薳)과 전 병부시랑 김언경(金彦卿)이며, 글자를 새긴 사람은 승려 현양(賢陽)이다. 비문을 두 사람이 함께 쓴 것이 특징적이며, 김원(金薳)의 필체는 구양순체의 해서, 김언경(金彦卿)의 필체는 왕희지체의 행서이다. 비문의 내용은 가지산문의 조사(祖師) 계승의식, 그것의 개창과 발전, 그리고 신라 하대 선종사상의 흐름과 성격을 이해할 때 매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新羅國武州迦智山寶林寺諡普照禪師靈塔碑銘幷序 朝請郞守定邊府司馬賜緋魚袋臣金穎奉敎撰 儒林郞守武州昆湄縣令金薳奉敎書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시보조선사 영탑비명과 서
조청랑이며 수정변부 사마 사비어대인 신 김영 교를 받들어 찬하고 유림랑이며 수무주 곤미현령인 김원 교를 받들어 쓰다.
聞夫禪境玄寂正覺希夷難測難知如空如海故龍樹師子之尊者喩芭蕉於西天弘忍惠能之祖師譚醍醐於震旦盖掃因果之跡離色相之鄕登大牛之車入罔象之」 듣건대 무릇 선(禪)의 경지는 그윽하고 고요하며 올바른 깨달음은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알기 어려워 허공과 같고 바다와 같다. 그러므로 용수(龍樹)와 사자(師子) 존자는 인도에서 파초에 비유하였고, 홍인(弘忍)과 혜능(惠能) 조사는 중국에서 제호를 이야기하였다. 대개 인과의 자취를 쓸어 색상(色相)의 땅을 떠나 대승의 수레를 타고 망상(罔象)의 경지에 들어갔다.
域是以智光遠照惠澤遐流灑法雨於昏衢布慈雲於覺路見空者一息而越彼邪山有爲則永劫而滯于黑業矧乎末法之世象敎紛紜罕契眞宗互持偏見如擘水求」 이런 까닭으로 지혜의 빛이 멀리 비추이고 은혜로운 못이 멀리 흘러 혼미한 거리에 법우(法雨)를 뿌리며 깨달음의 길에 자비의 구름을 펼친다. 공(空)을 깨달은 사람은 단숨에 저 사악한 산을 뛰어 넘으나 세상 일에 매어있는 자는 영겁이 지나더라도 악업에 가로 막혀 있다. 하물며 말법 세상에서는 상교(像敎)가 분분하나 부처의 가르침에 맞는 것은 드물고, 서로 편벽된 견해를 가지고 있어 물을 치고 들어가
月若搓繩繫風徒有勞於六情豈可得其至理其於衆生爲舍那舍那爲衆生衆生不知在舍那法界之中縱橫造業舍那亦不知衆生在苞含之內湛然常寂豈非迷耶」 달을 구하는 것과 같고 노끈을 비벼서 바람을 잡아 매려는 것과 같으니, 헛되이 육정(六情)을 수고롭게 한들 어찌 그 지극한 이치를 얻을 수 있으리오. 그것은 중생에게는 로사나불이 되고 로사나불에게는 중생이 되는 것인데 중생은 로사나불의 법계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고 종횡으로 업을 지으며 로사나불 또한 중생을 속에 품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잠연하여 항상 고요하니 어찌 미혹되지 않으랴. 이 미혹함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되지 아니한다.
知此迷者大不迷矣知其迷者惟我禪師乎或謂此說爲濩落之言吁道經云上士聞道崇而奉之中士聞道如存若亡下士聞道撫掌而笑不笑不足以爲」 그 미혹함을 아는 사람은 우리 선사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허황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도덕경(道德經)』에 이르기를 “상사(上士)는 도(道)를 들으면 그것을 숭상하여 받들고 중사(中士)는 도를 들으면 간직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하사(下士)는 도를 들으면 손바닥을 비비고 웃으며 웃지 아니하면 족히 도라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함이다.
道也此之謂矣禪師諱體澄宗姓金熊津人也家承令望門襲仁風是以慶自天鐘德從嶽降孝義旌表於鄕里禮樂冠盖於軒裳者也禪師託體之年尊」 선사의 이름은 체징(體澄)이며 성은 왕성인 김씨로 웅진 사람이다. 가문은 좋은 명망을 이었고 어진 가풍을 익혀 왔다. 이런 까닭으로 경사가 하늘로부터 모이고 덕이 큰 산에서 내려오니 효의(孝義)는 향리에 드날렸고 예악(禮樂)은 고관들 중 으뜸이었다. 선사가 몸을 의탁하던 해에
夫人夢日輪駕空垂光貫腹因之驚寤便覺有懷及逾朞月不之誕生尊夫人追尋瑞夢誓禱良因膳徹腶脩飮斷醪醴胎訓淨戒騭事福田由是克解分蓐之憂允叶弄」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둥근 해가 공중에 떠 있고 빛이 내려와 배를 꿰뚫었다. 그 때문에 놀라 깨어서 문득 임신하였음을 알았다. 1년이 지나도 태어나지 아니하여 어머니는 상서로운 꿈을 돌이켜 생각하고 좋은 인연을 기도하며 음식은 고기를 물리치고 마실 것은 술을 끊어 청정한 계율로 태교하여 복전으로 섬겼다. 이로 말미암아 해산의 걱정을 이겨내고 진실로 아들을 낳는 경사를 맞았다.
璋之慶禪師貌雄岳立氣潤河靈輪齒自然金髮特異閭里聲歎親戚咸驚從襁褓之年宛有出塵之趣登齠齔之歲永懷捨俗之緣二親知其富貴難留財色莫繫許其」 出家遊學策杖尋師投花山勸法師座下聽經爲業摳衣請益夙夜精勤觸目無遺歷耳必記常以陶冶麤鄙藻練僧儀積仁順而煩蠲除習虛靜而神通妙用超然出」 衆卓爾不群後以大和丁未歲至加良峽山普願寺受具戒一入壇場七宵行道俄有異雉忽爾馴飛稽古者曰昔向陳倉用顯覇王之道今來寶地將興法主之徵者」 선사의 용모는 산이 서있는 것처럼 빼어났고 기품은 하천이 신령스러운 것처럼 넉넉하고 고른 치아는 본디부터 있었고 금발이 특이하여 동네에서 탄성이 자자하였고 친척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완연히 세속을 떠날 기미가 있었고 이를 갈 나이가 되자 굳게 세속 인연을 버릴 생각을 품었다. 부모가 그를 부귀로 머물게 하기 어렵고 재색(財色)으로도 붙들 수 없음을 알고 출가하여 공부할 것을 허락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스승을 찾아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 문하에 들어갔다. 경전 배우는 것을 업으로 삼아 (스승의) 옷을 끌어당겨 더하기를 청하였고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정진하여, 눈으로 본 것은 빠트리지 않으며 귀에 들은 것은 반드시 기억하였다. 항상 거칠고 비루함을 도야하여 스님된 법도를 익히고 어질고 착함을 쌓아서 번뇌를 물리치며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여 신통묘용하니 초연히 무리 중에 뛰어나 우뚝함이 따를 사람이 없었다. 후일 태화(太和) 정미년에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는데, 한 번은 계단장(戒壇場)에 들어가 칠일 밤을 도(道)를 행하자 갑자기 이상한 꿩이 나타나 홀연히 순하게 날아 들었다. 옆에 옛일을 잘 아는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진창(陳倉)에서 패왕(覇王)의 도(道)를 드러내었는데 오늘은 절에 날아드니 장차 법을 일으킬 큰 스님이 나타날 징조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焉初道儀大師者受心印於西堂後歸我國說其禪理時人雅尙經敎與習觀存神之法未臻其無爲任運之宗以爲虛誕不之崇重有若達摩不遇梁武也由是知時未」 集隱於山林付法於廉居禪師居雪山億聖寺傳祖心闢師敎我禪師往而事焉淨修一心求出三界以命非命以軀非軀禪師察志氣非偶素槩殊常付玄珠授法印至」 처음에 도의대사(道儀大師)가 서당(西堂)에게 심인을 받은 후 우리 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설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경전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을 숭상하고 있어,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은 아직 이르지 아니하여 허망하게 여기고 존숭하지 않음이 달마가 양(梁)의 무제(武帝)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런 까닭으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하였다. (염거선사는) 설산(雪山)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러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우리 선사가 가서 섬겼다. 일심을 맑게 수양하고 삼계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 몸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염거선사의 뜻과 기품에 짝할 사람이 없고 소양과 기개가 빼어남을 살피고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을 전수하였다.
開成二年丁巳與同學貞育虛懷等路出滄波西入華夏參善知識歷三五州知其法界嗜欲共同性相無異乃曰我祖師所說無以爲加何勞遠適止足意興五年春二」 月隨平盧使歸舊國化故鄕於是檀越傾心釋敎繼踵百川之朝鼇壑群嶺之宗鷲山未足爲喩也遂次武州黃蘭若時大中十三禩龍集于析木之津」 憲安大王卽位之後年也」 大王聆風仰道勞于夢魂願闢禪扉請入京轂夏六月敎遣長沙縣副守金彦卿賷茶藥迎之師以處雲巖之安兼屬結戒之月託淨名之病陳六祖之辭冬十月」 개성(開成) 2년(837) 정사에 동학인 정육(貞育), 허회(虛懷) 등과 함께 길을 떠나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찾아보고 15주를 편력하여 그 세상도 좋아하고 하려고 함이 똑같고 성상(性相)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이에 말하기를 “우리 조사가 설한 바는 덧붙일 것 없으니 어찌 수고로이 멀리 가랴!” 하고 발걸음을 그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 5년(840년) 봄 2월 평로사(平盧使)를 따라 고국에 돌아와 고향을 교화하였다. 이에 단월이 마음을 기울여 불교가 계속 이어짐이, 온 하천은 오산의 골에서 시작되고 뭇 산령은 영취산(靈鷲山)을 마루로 하는 것으로도 비유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무주(武州)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무르니 때는 대중(大中) 13년(859년) 용이 석목(析木)의 나루에 모인 무인년 헌안대왕 즉위 이듬해였다. 대왕은 소문을 듣고 도(道)를 앙모하여 꿈에서도 애를 쓰고 선문(禪門)을 열고자 하여 서울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여름 6월 왕명으로 장사현(長沙縣)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을 파견하여 차와 약을 보내고 맞이하게 하였다. 선사는 구름과 바위를 벗삼아 지내는 것을 편안히 여겼고 또 결계(結戒)의 달이어서 정명(淨名)의 병을 칭하고 육조(六祖)의 고사를 말하였다. 겨울 10월
敎又遣道俗使靈巖郡僧正連訓法師奉宸馮瑄等宣諭綸旨請移居迦智山寺遂飛金錫遷入山門其山則元表大德之舊居也表德以法力施于有政」 是以建元二年特敎植長生標柱至今存焉」 교(敎)로써 도속사(道俗使) 영암군(靈巖郡) 승정(僧正) 연훈법사(連訓法師)와 봉신(奉宸) 풍선(馮瑄) 등을 보내 왕의 뜻을 설명하여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기기를 청하였다. 드디어 석장을 날려 산문에 옮겨 들어가니 그 산은 곧 원표대덕(元表大德)이 옛날 거처하던 곳이었다. 원표대덕은 법력으로 정사에 베풀어 그 때문에 건원(乾元) 2년 특별히 교(敎)를 내려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우게 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다.
宣帝十四年仲春副守金彦卿夙陳弟子之禮嘗爲入室之賓減淸俸出私財市鐵二千五百斤鑄廬舍那佛一軀以莊禪師所居梵宇敎下望水里南等宅其出」金一百六十分租二千斛助充裝食芳功德寺隸宣敎省咸通辛巳歲以十方施資廣其禪宇慶畢功日禪師莅焉虹之與蜺貫徹堂內分輝耀室渥彩燭人此乃堅牢告祥」 娑迦表瑞也廣明元年三月九日告諸依止曰吾今生報業盡就木成汝等當善護持無至隳怠至孟夏仲旬二日雷電一山自酉至戌十三日子夜上房地震及天曉」 당(唐) 선제(宣帝) 14년 2월 부수(副守) 김언경은 일찍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문하의 빈객이 되어 녹봉을 덜고 사재를 내어 철 2,500근(斤)을 사서 로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하였다. 교(敎)를 내려 망수(望水), 이남택(里南宅) 등도 금(金) 160분(分), 조(租) 2,000곡(斛)을 내놓아 공덕을 꾸미는데 도와 충당하고 가지산사는 선교성(宣敎省)에 속하게 하였다. 함통(咸通) 신사년에 십방(十方)에서 물자를 보시하여 그 절을 확장하였는데, 경사로운 낙성일에 선사가 임하니 암수 무지개가 법당을 뚫고 들어와 방을 휘황하게 비추며 반짝이는 빛이 사람을 밝혀 주었다. 이는 곧 견뢰(堅牢)와 사가(娑迦)가 상서로움을 알리고 나타내는 것이라. 광명(廣明) 원년(880) 3월 9일 여러 제자에게 고하기를 “나는 금생의 보업(報業)을 다하여 죽음의 조짐이 있구나. 너희들은 마땅히 법을 잘 지키고 게으름에 빠지지 말라” 하였다. 4월 중순 12일에 이르러 천둥 번개가 유시부터 술시까지 온 산에 울리고 13일 밤 자시에 상방(上房)의 땅이 흔들리더니 하늘이 밝아오자
右脇臥終享齡七十有七僧臘五十二於是弟子英惠淸奐等八百餘人義深考妣情感乾坤追慕攀號聲動溪谷以其月十四日葬於王山松臺壘塔安厝嗚乎禪師名」 留於此魂魄何之生離五濁超十八空樂寂滅而不歸遺法林而永秀豈唯濟生靈於沙界實亦裨」 聖化於三韓禮云別子爲祖康成注云子若始來在此國者後世以爲祖是以達摩爲唐第一祖我國則以儀大師爲第一祖居禪師爲第二祖我師第三祖矣中和三年」
오른 쪽 옆구리로 누워 임종하니 향년 77세요, 승랍 52년이었다. 이에 제자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00여 인은 의리가 어버이를 잃은 듯 깊고 정은 하늘과 땅에 닿아 추모하여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그 달 14일 왕산(王山) 송대(松臺)에 장사지내고 탑을 쌓아 안치하였다. 오호라, 선사의 이름은 여기에 남았으나 혼백은 어디로 갔는고. 생명은 오탁(五濁)을 떠나 18공(空)을 뛰어 넘어 기꺼이 적멸하여 돌아오지 않고 법림(法林)을 남겨 길이 빼어나니, 어찌 사계(沙界)에서 생령을 제도했을 뿐이겠는가? 실로 또한 삼한에서 성조의 교화를 도운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별자(別子)가 조(祖)가 된다” 하였는데, 강성(康成)이 주를 붙이기를 “그대가 만약 처음으로 이 나라에 왔다면 후세에서 조(祖)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달마는 당나라의 제1조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곧 도의대사(道儀大師)를 제1조, 염거선사(廉居禪師)를 제2조로 삼고 우리 스님을 제3조로 한다. 중화(中和) 3년(883)
春三月十五日門人義車等纂輯行狀遠詣王居請建碑銘用光佛道」 聖上慕眞宗之理憫嚴師之心敎所司定諡曰普照塔號彰聖寺額寶林褒其禪宗禮也翌日又詔微臣修撰碑讚垂裕後人臣兢惶承命直筆爲詞」 봄 3월 15일 문인 의거(義車) 등이 행장을 모아 엮어서 멀리 왕궁에 나아가 비명을 세워 불도(佛道)를 빛낼 것을 청하였다. 성상께서는 진종의 이치를 흠모하고 스승을 높이는 마음을 가긍히 여겨 담당 관사에 교를 내려 시호를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보림(寶林)이라고 정하여 그 선종을 포상하기를 예(禮)로써 하였다. 다음 날 또 미천한 신에게 조를 내려 비찬(碑讚)을 지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여 알리게 하시니 신은 황공하옵게도 명을 받들어 사실대로 기록하여 사(詞)를 지었다. 다만 삼가 임금의 뜻을 받들었으나 감히 문사들의 웃음거리를 피하리요. 사(詞)는 이렇다.
但以供奉宸衷敢避文林嗤哂詞曰禪心不定兮至理歸空如活瑠璃兮在有無中神莫通照兮 鬼其敢衝守無不足兮施之無窮劫盡恒沙兮妙用靡終(其一) 선심(禪心)이 정해져 있지 아니함이여! 지극한 이치는 공(空)에 돌아간다. 살아 있음이 유리와 같음이여! 유(有)와 무(無) 가운데 있도다. 신(神)도 통하여 비치지 못함이여! 귀신이 감히 부딪히랴. 지킴에 부족함이 없음이여! 베푸심이 끝이 없어라. 겁은 무수한 항사를 다함이여! 묘용이 그침이 없도다. (1)
廖廓舍那苞育萬物蠢蠢衆生違舍那律二旣同」體復誰是佛迷之又迷道乃斯畢(其二) 한없이 넓은 로사나는 만물을 감싸고 기르나 어리석은 중생은 로사나의 율(律)을 어긴다. 두 몸이 이미 한 몸이거늘 다시 뉘가 부처이랴! 미혹하고 또 미혹함이여! 도(道)는 이에 다함이로다. (2)
大哉禪師生乎海域克鍊菩提精修惠德觀空離空見色非色强稱爲印難名所得(其三) 위대하도다. 선사여! 해역(신라)에 태어나, 끝까지 보리를 익히고 은혜로운 덕을 청정 수행하여, 공(空)을 관(觀)하되 공을 떠나고 색(色)을 보아도 색이 아니니, 억지로 칭한다면 법인이라 할까. 얻은 바를 이름하기 어렵도다. (3)
有爲世界無數因緣境來神動風起波翻須調」義馬勤伏心猿以斯爲寶施于後賢(其四) 유위(有爲) 세계는 수없는 인연이니, 대상이 오면 정신이 움직이고 바람이 일면 물결이 출렁인다. 모름지기 말같은 의식을 조련하고 원숭이같은 마음을 굴복시키니, 이로써 보배삼아 후세의 어진 이에게 베풀었다. (4)
乘波若舟涉愛河水彼岸旣登唯佛是擬牛車已到火宅任燬法相雖存哲人其萎(其五) 반야의 배를 타고 애욕의 강물을 건너 피안에 이미 올랐으니, 부처님만이 헤아릴 수 있으리라. 우거(牛車)가 이미 도착하니 화택(火宅)은 허물어졌다. 법상(法相)은 비록 남아 있으나 철인(哲人)은 이미 떠나셨네. (5)
叢林無主山門若空錫放衆虎鉢遣群龍唯」餘香火追想音容刊此貞石紀法將雄(其六)」 총림에 주인이 없으니 산문이 텅 빈 듯하구나 석장은 호랑이 떼를 내쫓으며 발우는 용의 무리에 던졌다. 오로지 남은 향화(香火)는 음성과 모습을 추모하고 생각할 뿐. 이 정석(貞石)에 새겨 법이 장차 빼어나기를 기린다. (6)
中和四年歲次甲辰季秋九月戊午朔旬有九日丙子建」 從頭第七行禪字已下弟子前兵部侍郞入朝使殿中大監賜紫金魚袋金彦卿書興輪寺僧釋賢暢刻字」 중화 4년(884) 갑진년 가을 9월 무오삭 19일 병자에 세우다. 머리에서 제 7행 선자(禪字) 이하는 제자 전병부시랑 입조사(入朝使) 전중대감(殿中大監)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언경(金彦卿)이 썼다. 흥륜사 승인 석현창(釋賢暢)이 글자를 새겼다.
洪陟이 實相山門을 창설한 연대는 신라 흥덕왕3년(828)이다. 그러나 異次頓의 순교로 말마암아 신라의 불교가 신라의 國敎로 체택된지 꼭 300년만의 일이다. 그동안에 신라는 불교국가로 성장했으며 삼국통일의 사상적 뒷받침을 불교에서 얻고 특히 통일후는 안정된 정치와 찬란한 문화를 불교이념 아래에서 이루었다. 당시 정세는 元聖王의 뒤를 이은 그의 손자 昭聖王이 재위 1년 6개월 만에 죽자 太子는 13세의 어린나이로 哀莊王의 자리에 올랐으며 그를 보살핀 사람은 숙부 金彦昇이다. 김언승은 9년간 攝政으로 잇으면서 哀莊王을 보살피다가 결국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憲德王이다. 憲德王은 재위 17년간 親唐政策에 힘썼으며 즉위 이듬해 왕자로 하여금 唐에 순금불상과 불경을 가져가게 하여 順宗의 명복을 빌고 또 재위 11年에는 山東省에서 일어난 唐의 반란사건 진압에 3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였다. 이후 왕위 계승을 위한 갈등이 많았던 시대다. 그럴 즈음에 實相山門은 母山縣 깊은 산골에서 창설되었다. 母山縣은 지금의 全北 南原郡 雲峯 山內일대이며 山門이 자리잡은 母山縣 立石里는 山內面 立石里에 해당한다. 洪陟의 實相山門 창설은 기존불교 세력의 저항을 회피하여 귀국하면서 바로 母山縣으로 들어간 행적이 요령을 얻었으며 道義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설계가 홍척에 의해 먼저 이루어진 셈이다. 洪陟의 뒤는 秀澈이 이어받았으며 秀澈의 楞伽寶月碑文(實相山)에는 祖西堂 父南岳陟이 명시
曹溪禪脈 ①達磨②慧可③僧璨④道信-牛頭派⑤弘忍-神秀(北京)⑥慧能 法嗣四十三人-懷讓(南嶽)法嗣九人-新羅國本如-道一(馬祖) 法嗣十八人-知藏(西堂)法嗣四人-處徽-鷄林道義-新 羅國洪直(洪陟)-新羅國慧(慧昭)
되어 있다. 南岳陟은 다른 사람 아닌 洪陟이며 그 당시 유행되었던 北山義南丘陟이라 한 속칭을 인용한 글귀다. 그러나 아깝게도 實相寺 경내에 남아 있는 洪陟의 비신이 없어지고 또 그를 기록해놓은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서 洪陟에 관한 행적과 사상을 자세히 전해주는 자료가 없다.
실상사수철화상탑비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의 실상사에 있다. 탑비의 전체높이는 2.9m이고, 비신의 높이 1.67m, 너비 1.12m이다. 보물 34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신라 말기에 세운 탑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 1714년(숙종 10)에 탁본을 가지고 다시 새긴 것만 남아 있다. 비문의 주인공 수철화상은 실상사의 제2조로 알려졌다. 그는 815년(헌덕왕 7)에 태어나 829년에 출가하였고, 836년(희강왕1)에 실상사(實相寺)의 승려 홍척(洪陟)에게서 수학하였다. 경주의 팔각당에서 교종과 선종의 차이점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893년(진성여왕7)에 입적하였다. 아마도 탑비는 그 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수철화상이 주로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렀기 탑비에는 심원사·국사수철화상(深源寺·國師秀澈和尙)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본래의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일부 학자들이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짓고, 김영(金穎)이 글씨를 썼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楞伽寶月塔記」 有唐新羅國良州深源寺故國師秀澈和尙楞伽寶月靈塔碑銘幷序」 入朝奉賀▨駕遷幸東都使檢校右衛將軍司宮臺」 ▨▨▨院使等朝請郞▨▨▨▨同正員▨」 門下弟子比丘飮光」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양주(良州) 심원사(深源寺)의 고(故) 국사(國師) 수철화상(秀澈和尙)의 능가보월령탑(楞伽寶月靈塔) 비명(碑銘)과 서(序)
당(唐)에 입조(入朝)하여 봉하(奉賀)하고 왕을 따라 동도(東都)에 갔던 검교우위장군(檢校右衛將軍)이며 사궁대(司宮臺)의……인 <신(臣) ……가 지음> ……원사(院使)이며 조청랑(朝請郞)……인 동정원(同正員) <신(臣)……가 씀> 문하 제자인 비구 음광(飮光)<이 새김>
語曰圖王不成其心猶覇夫如是衆生得未得其次爲▨偉而能師德耀乎君子因孫隸▨▨法▨▨不其偉歟良足稱也」 務希夷志求無上覺豈志大宇宙勇邁終古者乎昔菩薩帝世大達磨傳有禪法佛▨大▨▨俗▨▨▨▨龜氏所宗正烏從」 知非寒蜩得便萬肅大君有▨難辭弟子何知於是乎命▨求昔椅實從尙恧▨▨跡之何强敍忘▨▨▨▨▨夫大師其」 이르기를 “왕도(王道)를 도모하다 이루지 못한다 하여 도리어 패도(覇道)가 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중생이 얻고 얻지 못함은 그 다음이 ……. 위대하게 능히 스승의 덕을 빛나게 하는 것은 …… 위대하지 아니한가. 진실로 칭찬할 만하도다. 도(道)의 본체를 찾고자 노력하고 위 없는 깨달음을 구하니 어찌 대우주를 지향하여 영원에로 힘써 나아간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 양무제(梁武帝) 때에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선법(禪法)을 전하여 …… 불가(佛家)의 으뜸되는 바른 것으로 삼은 바이니 어찌 잘못을 따르겠는가. 가을 매미는 울지 않는 것이어서 문수대성(文殊大聖)과 같은 보살도 말하기 어려웠거늘 제자들이 어찌 알겠는가. 이에 …… 저 대사가 바로 그런 분이시다.
人德可稱仙曾祖▨位蘇判族峻眞骨慶餘法身祖日新考修靜所欲不仕世傳嘉猷家主全城有避世保全之淸▨▨擧大樹▨」 善其入道也幼亡恃怙旋悟幻夢瞥聞▨龜有緣視佛無滯年餘志學學佛是圖落采於緣虛律師▨經于天宗大德尋以三略」 旬出至東原京福泉寺受具于潤法大德尋得易極▨海▨涯遂▨金言▨▨▨▨賞惑月」 經力福惠二嚴母氏必生天矣自爾希心▨」 鳥如也意掀▨▨飜翅▨▨▨▨雪岳獨▨雲岑詣實相禪庭適我願兮請爲資許之乃問若何處來答曰爾性何」 旣栖神妙門▨▨仙境國師賜▨曰道▨之寄宿緣所追肯搆西堂▨▨▨厼時屬▨▨▨師應召來儀都邑拜下禮也旣釋理之術▨▨居處有繇是禮窣堵波于名山勝地▨▨訶是乎」 淨▨▨▨雅於禪苑揚蕤集以雜花騰馥遂▨復直往私築于知異山知實寺覽諸章疏無有孑遺是生之知義日昇覺者之闡宗」 其力也還化衆生歟其利佛也導衆以寂無言成蹊有若釋門之英正法大德弘▨前▨州僧正順▨宗子禪師▨▨而降悉坐潛」 덕(德)은 선인(仙人)이라 부를 만하니 증조부는 위계가 소판으로 집안이 진골(眞骨)로 빼어나서 경사가 후손에까지 미쳤다. 조부는 일신(日新)이고 부친은 수정(修靜)인데 벼슬하고자 하지 않아 대대로 좋은 법도를 전하여 집안을 온전히 하고 세상을 피하여 보전하고자 하는 맑은 뜻이 있었다. …… 도의 경지로 들어오기를 잘 하셨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허망한 꿈과 같음을 문득 깨달아 잠깐 눈먼 거북이 불법(佛法) 만나기 어려운 인연을 듣고, 불법을 보고는 지체하지 않으셨다. 나이 십오세 남짓에 불법을 배우고자 뜻을 두어 연허(緣虛)율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천종(天宗)대덕에게서 경전을 배우셨다. 얼마 있다가 …… 동원경(東原京) 복천사(福泉寺)에 가서 윤법(潤法)대덕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셨다. …… 이내 불법을 믿어 …… 복덕(福德)과 지혜(智慧)가 모두 엄정하니 어머니는 반드시 하늘에 나실 것이다.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녀 설악(雪岳)에도 들르고 운봉(雲峰)에도 발을 옮겨 실상사(實相寺)에 이르르셨다. 스승이 원하던 바와 들어맞아 대사가 제자되기를 청하니 하락하셨다. 이에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으니 “스님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하고 대답하셨다. 이미 신묘한 경지에 들어 …… 국사(國師)가 이르기를 “도를 붙이는 것은 오랜 인연으로 말미암은 바라. 서당(西堂)의 가풍을 잘 짓는 일은 (너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때 …… 스승이 부름에 응하여 거동하여 서울에 가시니 (왕이) 배례하였다. 이미 이치를 풀어냈으니 거처에 걸림이 있겠는가. 이로부터 명산(名山) 승지(勝地)의 탑에 예배하러 돌아다니시니 …… 참선(參禪)에서 꽃술을 드날리고 화엄(華嚴)에서 향기를 모으셨다. 마침내 다시 곧바로 가서 지리산(知異山) 지실사(知實寺)를 홀로 쌓으시고 여러 장소(章疏)를 남김없이 보시니 이는 나면서부터 뜻을 아는 이로서 날로 부처님이 천명한 가르침을 높여가신 것이다. 그 힘은 중생을 교화하는데 돌리시고 부처를 이롭게 하므로, 고요하게 무리를 이끄시니 말없이 절로 알려져 정법대덕(正法大德)인 홍(弘)▨와 전(前) ▨주(州) 승정(僧正)인 순(順)▨, 종자(宗子)선사 등이 제자가 되어 모두 마음을 닦았다.
天咸通▨年贈太師景文大王以在山別赴降趺急從一日八角堂請敎禪同異對曰深宮自有千迷道▨▨終無」 迺張▨禪階▨如晝王心悅悟爾先雲還踰▨長從出岫相見竝加改時惠成大王爲家德損於克諧謨▨▨益發」 ▨乘▨路自贈太傅獻康大王▨▨鴻國煩飛鵠書欻乃▨▨▨鳳儀之舞以▨▨▨▨▨戎家▨▨法祐能隆下▨不爽」 然來思因貢▨▨外護之使行達辯▨慶順滋焉唯▨相▨▨善▨會▨▨▨如▨膺籙▨▨國師遽撤葷腥因蠲痛惱復」 忘筌斯在是時前國統釋惠威大法師泉▨法大德比丘▨道▨▨▨▨▨愼孚解行雙高道俗俱從無心合契道面盡▨▨王孫」 함통(咸通) ▨년에 대사(太師)를 추증받은 경문대왕(景文大王)께서 산에 있는데 부르시니 걸음을 옮겨 급히 뜻을 좇으셨다. 하루는 팔각당(八角堂)에서 교(敎)와 선(禪)의 같고 다름을 물으매 “깊은 궁궐에는 절로 천개나 되는 미로(迷路)가 있어……끝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셨다. 이에 …… 선(禪)을 펼쳐 그림과 같이 단계지어 설명하시니 왕이 마음 깊이 기뻐하며 깨달으셨다. 이에 구름이 앞서 돌아 넘어 동굴에서 길게 따라 나오듯 서로 만나보고 나서 (법호를) 더해 주셨다. 그때 혜성대왕(惠成大王)이 왕가(王家)를 위해 자신의 덕을 덜어 잘 화합했는데 …… 더욱 잘하여 ……. 태보(太傅)를 추증받은 헌강대왕(憲康大王)께서 왕위를 이어 자주 서신을 보내시므로 거동을 옮겨 ……. 국사는 양념이나 비린 것을 멀리 하고 아픔을 없애며 방편을 잊어버리고자 하셨다. 이때 전국통(前國統)인 혜위(惠威)대법사와 천▨법(泉▨法)대덕과 비구…… 신부(愼孚)가 지해와 실행이 모두 뛰어나 승속이 함께 따라 마음씀이 없이 이치에 들어맞음을 알고는 만나 …… 왕족들도
爲師▨具僚列賀禮無遠▨道益隆焉▨關君民也師叵利則句如無別▨況師高尙者固▨▨步驟之是故」 我太尉讓王倦彼垂衣棄如脫屣仍從剪咎▨抑煩囂▨雖▨▨何陋之鄕本▨▨▨得非染又玄之道終粹淸閑其實大事因緣」 素有師保無疵故太宗文武聖皇帝詔曰可著令置三師之位則▨▨▨我根儒幹釋鎔夏鑄夷其方本仁易以道御於是」 스승으로 모시고 줄을 지어 하례하니 예의는 멀리 …… 이 없고 도는 더욱 높아졌다. 임금과 백성에 대해서 대사는 법칙을 두지 않고 굳이 구별을 않으니 하물며 스님처럼 고상한 분이 ……. 이러한 까닭에 우리 진성왕(眞聖王)께서 정강왕(定康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힘들어 하다가 돌아가자 이에 앞의 허물을 따라 …… 어찌 누추한 곳이라 하겠는가. 본래 …… 물들지 않음을 얻어 그윽한 도리가 끝까지 맑고 한가하니 일평생의 큰 인연이 임금의 스승이 되는데 한점의 흠도 없었다. 그리하여 당(唐) 태종(太宗)이 조칙을 내려 삼사(三師)의 지위를 둠을 분명히 한다 하니 …… 유교를 뿌리로 하고 불교를 줄기로 하며 중국을 거푸집으로 삼고 우리나라를 주물로 하니 우리나라는 본래 어진 동방(東方)이라 도(道)로써 제어하기가 쉬운 바이다.
心已謂鏞難遠擊鍾好近▨欲處師寰內▨唯不逮特敎勅端儀長翁主深源山寺請居禪師廣濟迷津故時人不名稱▨」 瑩其心地豈瑩▨之謂耶居無何以玆密邇都城泉石淸宮塵▨▨▨弟子粹忍義光各居南岳北埜▨野▨源勝地絶倫法雲爲」 이에 마음이 이미 녹았다고 하나 멀리 있는 종은 치기가 힘들어 가까이 모시고자 하여 대사를 도성 안에 거처하게 하였으나 잠시도 머무르지 않으셨다. 그래서 특별히 단의장공주(端儀長公主)께 왕명을 내려 심원산사(深源山寺)에 대사께서 사시도록 요청하여 널리 미혹한 중생을 제도하게 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라 부르지 않으니 심지를 밝혀주는 영원사(瑩原寺)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얼마 안있어 서울과 너무 가깝다 하여 개울과 돌이 있는 맑은 곳으로 가시고자 하여 …… 제자 수인(粹忍)과 의광(義光)이 각기 남악의 북쪽 들에 살았는데 …… 들판으로 빼어나 짝할 만한 곳이 없었는데 법운사(法雲寺)라 이름 붙이시니
心隨境家有以是名撰十地境壓三山者應其感應也▨▨▨乎▨舶不▨自淨刀▨異▨▨錐能除▨弊自餘▨交秘說目擊倚」 是尤加鞭後者大師無言近世心學▨▨無爲亂神之資是無交▨故爾▨稽古▨宜遠有根其滅渡也景福二年蕤賓四日召其徒曰死將至矣吾欲行焉諸子勉旃宜游佛庭其▨風狂雨▨」 마음이 경개를 따랐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십지경(十地境)을 지으시어 세 산을 진압하신 것은 그 감응에 응하신 것이다. …… 비밀한 가르침과 직접 지켜본 도리는 후학들을 더욱 노력하도록 채찍질하는 것이다. 대사는 말이 없이 근세에 마음 공부를 하셨으나 괴력란신(怪力亂神)을 힘쓰지 않으셨으니 …… 그대들은 옛일을 상고하여 마땅히 멀리까지 뿌리삼아야 할 것이다. 돌아가신 것은 경복(景福) 2년(893) 5월 4일이다. 문도들을 불러 이르시기를 “죽음이 이제 이르렀다. 나는 떠나갈 것이니 너희들은 부지런히 힘써 반드시 불법의 뜰에서 노닐어라.
浮雲坐聚散須知朗月行西東言已化去享齡七十九歷夏五十八異矣哉▨▨水積魚歸便至林傾鳥散聞俗緣大歸住瑩原追感遺者灑泣慷慨讓王顧不憗遺哭諸門外以傳東宮官奉食郎王輅飛敎慰問▨承遺訓用報▨」 贈諡曰秀澈塔號楞伽寶月其後齋營八會禮備十旬若茗若香悉從王府其始也▨家▨年其終也▨明夏幷旬於▨」靑蓮寶宅遠颺德馨莫不均濡衆渴尊師之道▨」 비와 바람이 미친듯 날뛰나 뜬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 모름지기 밝은 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이치를 알아라” 하고 말을 마치고는 입적하셨다. 향년이 79요, 법랍이 58이다. 이상하도다. 물이 쌓이고 고기가 되돌아가며 숲이 기울고 새가 흩어지는구나. 대사께서 돌아가심을 듣고 영원사(瑩原寺)에 있던 추모하는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진성왕께서 하늘이 철인(哲人)을 남겨놓지 않음을 돌아보고 문밖에서 울며 동궁관(東宮官)의 봉식랑(奉食郞)인 왕로(王輅)에게 왕명을 전해 위문하도록 하여 남기신 가르침을 따라 은덕에 보답이 되도록 수철(秀澈)이라는 시호와 능가보월(楞伽寶月)이라는 탑호를 내리셨다. 그 후에 여덟차례나 재(齋)를 베풀어 백일(百日)의 예를 갖추었으며 갖가지 향들을 모두 왕실에서 내주었다. 처음 낳을 때는 …… 돌아갈 때는 ……. 아아 푸른 연꽃 피는 절에서 멀리까지 덕의 향기 드날리고 대중의 목마름을 고루 적셔주며 스승의 도를 드높이셨다.
▨四方之瞻仰覬萬壽之遐長而人之云亡吾將安倣今▨▨▨懷矣▨可擇焉▨▨▨▨」 直相出相門門人款休飮光媲芻逐日踰海故能雲▨眼界霞綻毫端狀龍聖龜神示千秋万春臣也跪伏▨銘追▨▨▨詞曰」 東仁所植西敎是則縷褐之飾布衣之極」 一枚幻軀六箇兇賊他或▨▨師能▨得」 謀重慧戈▨用成學德水▨濯妖塵靜▨」 祖西堂藏父南岳陟化衆十方爲師一國」 言沃王心感融佛力克修善逝雅訓扇▨」 致捨大寶賴▨▨衍歷數古今▨▨▨▨」
(陰記)康熙五十三年甲午四月日重建
동방에 어짐을 심어 불교를 법칙으로 하니 누더기 겉치레는 신하의 극치라. 허깨비와 같은 이 한몸에 여섯 흉악한 마구니들 남들은 …… 스님은 능히 …… . 지혜의 날카로움 더욱 세워서 ……배움을 이루며 덕의 물로 씻어서 요망한 번뇌 가라앉혔네. 할아버지는 서당지장(西堂智藏)이요 아버지는 남악홍척(南岳洪陟)이라 시방 대중 교화하여 한 나라의 스승 되셨네. 임금의 마음 말씀으로 적시고 부처님의 힘 감응하여 합치고 불법을 잘 닦아 …… 가르치셨네. 크나큰 보배 버려 두시고 …… 예나 이제나 헤아려 …….
(음기)강희(康熙) 53년 갑오년(1714년) 4월 일에 중건함.
2)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 864(경문왕 4)~945(혜종 2)]의 비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태안사(泰安寺)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 864(경문왕 4)~945(혜종 2)]의 비. 고려초의 문인 손소(孫紹)가 짓고 정간(井間)을 치고 행서체의 글씨를 문민(文旻)이 새겨 대사가 입적한 5년 뒤인 950년(광종 1)에 세웠다. 보물 제 275호로 부근에 보물 제 274호로 지정된 광자대사탑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약 150년 전에 비신이 무너져 큰 조각 2개와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고 비신의 오른쪽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귀부의 머리 부분과 이수의 가운데 부분도 없어졌으며 현재 남은 비신 조각을 곁에 따로 새 대좌를 만들어 세워 놓았다. 비문은 광자대사가 태어나 출가하여 교화 활동을 하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초청하자 궁궐에 있다가 흥왕사에서 머물고 태조의 아들이자 성종의 부친이 되는 대종욱(戴宗旭)이 제자가 되고 동리산 대안사로 돌아와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특히 비문 말미에 복전(福田) 수와 법석을 열거하여 3천석에 이르는 본전식(本傳食), 예식(例食), 500결의 전답과 143결의 시지(柴地), 염전, 23명의 노비를 상세히 기록하여 사원경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有唐高麗國武州故桐裏山大安寺 敎諡廣慈大師碑銘幷序」 太相前守禮賓令元鳳令兼知制 誥上柱國賜紫金魚袋臣孫紹奉 敎撰」 沙粲▨▨▨▨監▨賜緋魚(以下缺)」 유당(有唐) 고려국(高麗國)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 광자대사비문(廣慈大師碑文)과 아울러 서문. 태상(太相) 전수예빈령(前守禮賓令) 원봉령(元鳳令) 겸지제고(兼知制誥) 상주국(上柱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손소(孫紹)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사찬(沙粲) (결락) 監 (결락) 賜緋魚 (결락) 는 비문을 쓰다.
若夫擊虛發響苟應就悟之能取實藏聲豈是處迷之術門縱濶而不可得進岸雖明而難以獲逾至理在中守株者無定見性眞宗非外窺管者莫以傳心曩植曠刧之道芽方鑄」 多生之法器是以運開一千甲子始遇聖明歷周五百星霜再逢賢哲或禀七淨而傑出或蘊十智以挺生自古旣稀至今爲貴兩全雙美者卽我大師也」 대저 허공을 쳐서 메아리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진실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능력에 응하는 진실만은 취하고 소리를 감추려 한 것이니, 어찌 이것이 미혹에 처하는 술문(術門)이 아니겠는가. 비록 넓으나 피안(彼岸)으로 나아갈 수 없고, 비록 밝으나 그 경지를 넘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극한 이치가 그 가운데 있으니 그루터기만 지키게 하는 자는 견성(見性)할 수 없으며, 진종(眞宗)은 마음 밖에 있어서 규관(窺管)하는 사람은 심인(心印)을 전해 받을 수 없다. 여러 생(生) 동안 도아(道芽)를 심었으므로 비로소 다생(多生)의 법기(法器)를 주조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발상한지 약 1천년 후에 비로소 중국으로 전래되었고, 그로부터 약 5백 성상을 지난 뒤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중국으로 유학하러 가서 현철(賢哲)을 만나고 법을 전해 받아 귀국하였다. 그 중에는 칠정(七淨)을 이어 받아 걸출하였으며, 혹은 십지(十智)를 쌓아서 높이 빼어났으니, 옛부터 희유할 뿐 아니라 지금도 존귀한데, 선과 교를 양전(兩全)하여 쌍미(雙美)한 분이 계시니 곧 우리 스님이시다.
大師法諱允多字法信京師人也其祖考等皆族盛簪纓以傳孝義家記而亂來抛墜聲譽而耳口聞言其妣朴氏受性溫和爲人貞潔自幼未甞於俗未長 (以下缺)」 經勤修於佛事迨其岳降分娩等閒由孝感而易爲苦霜菫之出疾是以咸通五年四月五日誕生 大師初放蓬矢之日雙柱絶倫將辭襁褓之秊三亭轉麗遨 (以下缺)」 대사의 법휘는 윤다(允多)요, 자는 법신(法信)으로 경사(京師) 출신이다. 그의 조부모는 귀족으로서 고관(高官)을 역임하였으며, 효도와 의리를 소중히 여겨 충효의 본이 되었다. 이렇게 가문을 지켰지만, 난리가 나서 몰락하였다. 그러나 명성과 칭송은 많은 사람들의 귀와 귀로 들렸고, 입과 입으로 옮겨 자자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성품이 온화하여 사람됨이 정결하였다. 어릴 때부터 속되지 않았으며 未長 (결락) 經. 성심성의로 불사(佛事)를 닦아 산악(山岳)과 같은 정기를 받아 잉태하고 또 어려움 없이 분만하였으니, 효감(孝感)을 말미암아 순산함이 마치 가을에 서리를 맞은 씀바귀가 쉽게 뽑히듯 산고 없이 함통(咸通) 5년 4월 5일에 탄생하였다. 대사가 처음 봉시(蓬矢)를 쏘는 날에 쌍주(雙柱)가 절륜(絶倫)하였다. 장차 강보(襁褓)의 나이를 지나 삼정(三亭)이 전려(轉麗)하여 (결락)
遊而居定有方禮度而顚沛無墜扇枕之令譽早著鄕閭搥灰之捷詞夙馳遐邇春秋纔當八歲有志三歸遽告二親願別蝸門要投禪敎 父母益爲鞠養倍 (以下缺)」 멀리 집 밖에 나가서 놀되, 항상 장소를 일정하게 하였고, 예의와 법도는 아무리 위급한 조차전패(造次顚沛)의 경우라도 예를 그르치지 아니하였다. 지극히 효도를 다하여 선침(扇枕)의 칭송은 어려서부터 고향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며, 추회(搥灰)와 같이 민첩한 변재는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져 갔다. 나이 겨우 7~8세에 이미 불교에 몸을 던져 수도할 뜻을 품었으니, 부모에게 와문(蝸門)을 이별하고 선교(禪敎)에 입문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 부모는 더욱 애절하여 倍 (결락)
前猶是縈紆未能允許 大師潛然曰出家脩道利益不無直饒翁子之錦衣定勝山僧之毳衲哀鳴重沓諮告再三深認盛情固難橫奪登時一諾明日辭膝下 (以下缺)」 前. 더욱 애정에 얽혀 허락하지 못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한 대사(大師)는 잠연(潛然)히 실망하였고, 이를 본 어버이는 설득하되 “출가 수도하는 것도 이익이 없지 않으나 옹자(翁子)인 주매신(朱買臣)의 금의출세(錦衣出世)하는 것이 어찌 산승(山僧)의 취납(毳衲)인 누더기로 고행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하면서, 슬피 울며 거듭 거듭 만류하여 뜻을 바꾸도록 하였으나, 어버이는 마침내 아들의 뜻이 굳고 굳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허락하였다. 대사는 다음날 부모의 슬하를 떠나 (결락)
步而雲遊四海行駐唯伴弧影炎涼倏歷數年自此周迴跋涉於遼東迤邐遠詣於桐裏叅覲和尙頫相面目顧盻形容數日後侍奉上方和尙曰 (以下缺)」 걷고 걸어서 구름처럼 사해(四海)로 행각하였다. 다니거나 머무름에 오직 외로운 자신의 그림자와 벗할 뿐이었다. 이와 같이 어느덧 염량(炎涼)이 바뀌어 수년이 지났다. 이로부터 다시 발걸음을 돌려 요동(遼東)을 거쳐 길을 재촉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태안사가 있는 동리산(桐裏山)으로 가서 상방화상(上方和尙)을 친견하였다. 서로 면목(面目)을 대하고 형용(形容)을 돌아보았으니 며칠 후 상방화상(上方和尙)을 시봉하게 되었다. 화상이 말하기를 “(결락)
古語心專石可穿志切泉俄涌道非身外卽佛在心宿習者覺於刹那蒙昧者滯在萬刧如來說諭爲精鈍則再語爲根利則略言汝身好看心在吾說也 汝自(以下缺)」 옛 사람이 말하되 마음이 오롯하면 돌도 가히 뚫을 수 있고, 뜻이 간절하면 땅에서 갑자기 샘물이 솟아오르게 된다. 도(道)는 몸 밖에 있지 않으며 부처님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숙세(宿世)로부터 익힌 자는 순간인 찰나(刹那)에 깨닫게 되고 몽매한 자는 만겁에도 생사에 윤회하여 벗어나지 못하니, 부처님께서 일러 주시되 ‘정신이 어두운 자는 재삼 여러 번 일러주어야 하지만 근기(根機)가 수승한 사람은 말을 생략한다’ 하였으므로, 너는 스스로를 잘 살펴보고, 나의 말에 걸려 있지 말라”고 하였다. 스스로 (결락)
於伽耶岬新藪受具後但繫心猿無縱意馬戒甁方挈油 不欹不偏志於書宵綱砥心於瞬息不戶不牖見大道不崑不海得神珠芳聲旣震於四法侶遠自於八表」 (以下缺)」 가야갑신수(伽耶岬新藪)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로는 다만 원숭이 같이 단단히 얽어 매였고, 말 같은 의식 또한 놓아두지 아니하였다. 계(戒)를 받은 후로부터 유발(油)을 기울어지지 않게 하였다. 계를 지키려는 굳은 마음은 주야로 한결같고, 수도하려는 강철 같은 마음은 순간에도 쉬지 아니하였다. 대문과 창문을 열고 들어가지 아니하여도 대도(大道)를 보았으며, 곤륜산에 오르거나 여해(驪海)에 들어가지 않고도 쉽게 신주(神珠)를 얻었다. 도덕 또한 고매하여 아름다운 명성은 사방에 떨쳤고, 법을 배우고자 하는 법려(法侶)들이 8표(八表)로부터 모여 들었다. (결락)
法祖 西堂傳於 徹徹傳於 先師如如傳於 吾師卽 西堂曾孫也 大師傳法化於 西堂郤不勞於西學割世緣於東城眞▨實際本空(以下缺)」 법조(法祖). 서당지장(西堂智藏)은 혜철(慧徹)에게 전하였고, 혜철은 여(如)인 도선(道詵)에게 전하였으며, 여(如)인 도선(道詵)은 우리 광자(廣慈)스님에게 전하였으니, 즉 서당의 증손(曾孫)인 셈이다. 대사는 서당(西堂)의 법통을 전해 받았으니, 수고롭게 서학(西學)을 하지 않고도 세상의 인연을 동성(東城)에 베풀었다. 참으로 실제(實際)가 본공(本空)한 줄 깨달았으며 (결락)
善誘於東人學無學之宗終資祇夜師無師之旨必籍修多遂使弄一心者大信一音纏九結者漸海九業多多方便而引導輕輕威力而折摧化緣周於鯷岑蹤(以下缺)」 동인(東人)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무학(無學)의 종지인 선(禪)을 배우되 마침내 지야(祇夜)를 의지하고, 무사(無師)의 취지(趣旨)를 스승으로 하되 반드시 수다라(修多羅)를 가자(假藉)하였다. 드디어 일심(一心)을 닦는 자로 하여금 일음(一音)의 교리를 믿게 하며, 구결(九結)에 얽힌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로 구업(九業)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편으로 인도하였으니, 위력으로 사견(邪見)을 꺾고 교화한 인연이 제잠(鯷岑)에 두루하였으며, (결락)
跡徧於桃野不忘其本卻歸故山纔經兩宵忽有山賊入寺擬刼衣物直到上方 大師遌然而無銎不動禪座被威鋒之辞惡扶慧刄之降魔賊徒無(以下缺)」 심사구도(尋師求道)한 자취가 도야(桃野)에 두루 닿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행각 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본사(本寺)를 잊지 아니하다가 고산(故山)으로 돌아왔다. 이틀째 되던 날 밤에 갑자기 산적이 절에 침입하여 의물(衣物)을 빼앗고자 상방화상(上方和尙)의 방으로 들어왔다. 대사는 우연히 뜻밖의 일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좌(禪座)에서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위봉(威鋒)을 당하여서는 오히려 그들의 악한 마음을 버리게 하여 지혜의 칼로써 마구니들을 항복시켰다. 적도(賊徒)들이 (결락)
衝突 大師自無罪過言訖禮拜走數見此模様不免思惟至夜化夢有一戰將入於殿內見勿它那七軀末座向大師書 (以下缺)」 是量忍兩字而已睡覺驚訝起來盬嗽端坐偶言曰也大奇也大奇白日狐疑了不料淸宵蝶夢成古人有言一忍得長樂者一忍住世久好重忍兩字豈徒然 (以下缺)」 哉 大師因此永獲安禪久居僧寺▨▨▨▨▨▨▨▨ 충돌함이 없었다. 대사는 도적들에게 죄란 본래 없는 것이라 하여 허물을 탓하지 아니하니 스님의 말이 끝나자 도적들은 공손히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 광경을 지켜본 대중들은 감탄하였다. 그날 밤 꿈에 한 전장(戰將)이 법당에 들어가 칠구(七軀)의 물타나(勿陀那)를 보았는데, 맨 끝에 있는 물타나(勿陀那)가 대사를 향하여 (결락) 중인(重忍)이란 두 글자를 적었다. 꿈을 깨고 놀라 일어나 세수한 다음 단정히 앉아 생각하되 “이상하고 이상하다. 백일천하(白日天下)에 의심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밤중에 나비의 꿈을 꾼 것은 고인(古人)이 겪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되, ‘한번 참는 것은 영원한 기꺼움을 얻게 되고, 또 한번 참는 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편안함을 얻게 된다’고 하였으니, 중인(重忍)이란 두 글자가 어찌 비범한 일이겠는가!” (결락)
黃波▨如而洞達禪源超然聖言離聲色裏出是非關衲子盈 (以下缺)」 黃波 (결락) 선의 근본을 통달하였고 성인의 말씀을 초연히 여겼으며, 성색(聲色)의 소굴을 떠나 시비(是非)의 관문을 벗어나게 되었다. 납자(衲子)들은 (결락)
門慕義投仁雲趍霧聚叅禪學道虛届實歸孝宗大王趨向谷風遐飛綸翰願開慧眼以祐國祚于時羅運傾否兵火頻起弓裔亂紀甄萱盗名天命有歸國朝新造」(以下缺)」 스님의 문 앞에 가득하고 의리를 사모하며 인(仁)을 따르는 이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참선학도하는 자들은 빈손으로 와서는 마음 가득 채워 돌아갔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은 대사가 산곡(山谷)에서 드날리는 도풍(道風)을 흠모하여 윤한(綸翰)을 보내어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나라 또한 복되게 해주기를 발원하였다. 이미 이때에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자주 병화(兵火)가 일어났고, 궁예(弓裔)는 어지럽게 난동하고 견훤(甄萱)은 자칭 왕이라 하여 이름을 도용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천명이 왕건에게로 돌아가 고려라는 새 나라를 건립하게 되었다. (결락)
背▨梗狼煙往來辛苦於沙門裨▨終無於王」 神聖大王乘時聖望主閒代 明君富安邦撫俗之宏機通護法契理之神術萬機之暇留心玄門自微時飽聆大師之聲價因遣郎官賷御札入山而請曰仰德日久願接梵儀師已老矣」 恐難行脚何妨騎乘一詣九重 한 때 낭연(狼煙)이 높이 올라 왕래하기가 고통스러웠으므로 스님들은 따로 왕을 도울 길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성대왕(神聖大王)이 때를 타고 성주(聖主)가 되어 한대(閒代)의 명군(明君)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세속을 편하게 하는 굉기(宏機)를 풍부하게 가졌으며, 불법을 보호하고 진리에 계합(契合)하는 신술(神術) 또한 능통하였다. 나라 일을 보는 여가에는 마음을 항상 현문(玄門)에 두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대사의 명성을 널리 들었기에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어찰(御札)을 가지고 스님이 계시는 동리산으로 보내어 청하되 “도덕을 앙모한 지 이미 오래되오니 스님의 거룩한 모습 뵙기를 원합니다”라 하면서 “스님께서는 이미 연로하셔서 보행하시기 힘들 터이오니, 말을 타고 구중(九重)으로 오신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大師曰老僧由來未甞騎馬至於齡年山僧亦是王民何敢方命以錫杖芒鞋步至輦下上大喜令止儀賓寺安頓數日後召入上殿勿趨上下床接之待以賓禮群臣竦然上問曰古師云心」 卽佛是心如何 大師答曰若到槃者不留於佛心問佛有何過卽得必此 答曰佛非有過心自無過 問曰朕受天之佑救亂誅暴何以則生民保乂對曰殿下不忘今日之問」 國家幸甚生民幸甚 問曰大師以何德行化遵衆生對曰 臣僧自救可了何敢解脫他縛此日玉音琅琅不憚雲興之問大師四辯亹亹無碍甁瀉之」 答云六祖意不欲得觸道然師語▨了道▨慧亦▨去也若具載文繁括而略錄伏念▨ 今上」 대사가 말씀하시되 “노승(老僧)이 출가한 이래로 이제 80세에 이르기까지 아직 말을 탄 적이 없습니다. 산승(山僧)도 역시 왕의 국민이니 어찌 감히 왕명을 거역하겠습니까”하고 석장망혜(錫杖芒鞋)한 보행으로 연하(輦下)에 도착하니 임금이 크게 기꺼워하여 의빈시(儀賓寺)에 모시고 며칠 동안 편안히 쉬시게 한 다음, 상전(上殿)으로 영입하였고 임금 스스로 상(床)에서 내려와 공손히 영접하여 빈객(賓客)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군신들이 이를 보고 그윽이 놀랐다. 임금이 묻되 “옛 스님이 말하길 마음이 곧 부처라 하니 이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가 대답하되 “만약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이는 불(佛)과 마음에도 머물지 아니합니다.” 다시 임금이 묻되 “부처님께서 어떤 경지를 지나서야 이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됩니까?” 하였다. 대답하되 “부처님은 지나는 과정이 없으며, 마음도 또한 그대로일 뿐 경과함이 없습니다”하니, 재차 묻되 “짐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란세를 구제하기 위해 흉폭한 무리들을 주살하였으니, 어떻게 하면 생민(生民)을 잘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되 “전하께서 오늘의 묻는 그 마음을 잊지 않으시면 국가가 부강하고, 생민(生民)이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또 임금이 묻되 “대사는 어떠한 덕행으로 중생을 교화하십니까?” 대답하되 “신승(臣僧)은 힘이 없어 자신을 구제함은 가능하지만,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결박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왕은 옥음(玉音)이 낭랑하여 구름이 일어나는 듯한 질문을 꺼리지 아니하였고, 대사는 사변(四辯)이 물이 흘러가듯하여 걸림 없는 것이 마치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답하였으니 육조(六祖)스님의 뜻인 도(道)에 저촉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은 (결락) 三道 (결락)라 하고, 지혜도 또한 (결락) 거지(去也)라 하였으니, 이상과 같이 문답한 것을 자세히 실으려면 글이 너무 번다해지므로 총괄하여 간략하게 기록하는 바이다. 엎드려 생각하노니 (결락) 이제 상(上)께서 (결락)
大王威齊兩曜講沙而道叶乾坤德秀重曈治民而令無邪黨歸依五衍豈異於中印匿王尊仰三禪有用於西天戒日正法興邦之代修文植本之君尊美斯今罕見 振古 大師」 대왕(大王)의 위엄이 양요(兩曜)와 같고 설법하는 소리는 건곤(乾坤)에 미치며, 덕이 빼어나 두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백성을 다스리되 사당(邪黨)이 없게 하고, 오연(五衍)에 귀의하였으니, 어찌 중인도의 파사익왕이 삼보(三寶)를 존중한 것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서천(西天)의 계일왕(戒日王)과 함께 정법(正法)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문(文)을 닦고 근본을 심은 임금이니, 이와 같이 위대한 성군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드물게 볼 수 있다고 하겠다. 대사(大師) (결락)
三禮而退命安置興王寺黃州院王旭郎官遙仰淸風平傳尺牘願爲弟子冀效從師遂寂滅而數年山間而復况內議令皇甫崇太常忠良日監大師之供饋如執侍者之職大師益不安一日」 諗于上曰麋鹿野縱甘伏丘壑猥承御命來住王域恐懼情深軒鶴梁鵜未足喩也伏望許從微情俾雲歸古山魚游深壑爲賜大矣上許之令歸桐裏古山命本道守相畫給田結奴婢以供香積不忘外護」 之風每展八行之禮仍爲壇越久受保持各效陳雷允▨舊分 삼배(三拜)를 하고 물러가면서 흥왕사에 모시도록 명하였다. 그 후 황주원(黃州院) 왕욱(王旭) 낭관(郞官)이 멀리서 스님의 청풍(淸風)을 앙모하고 편지를 보내 제자가 되어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희망한다고 하였다. 드디어 열반을 수년 앞두고 산간(山間)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의령(內議令) 황보숭(皇甫崇)과 태상(太常) 충양일감(忠良日監)이 대사의 공양구(供養具)를 살피되 마치 집시자(執侍者)와 같이 하므로 대사는 더욱 마음이 불안하였다. 어느 날 임금께 고하되 “사슴이 들판에서 자유롭게 놀 듯 산중에서 조용하고 편안하게 있도록 놓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외람되어 어명을 받아 왕성(王城)으로 내왕하니 점차 정에 끌려 부자유함이 헌학(軒鶴)과 양제(梁鵜)로도 비유할 수 없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승(臣僧)의 작은 생각을 가납하시어 구름처럼 고산에 돌아가서 마치 고기가 깊은 물에서 노는 것과 같이 하여 주시면 그 은혜 참으로 크다 하겠나이다”하였다. 이 같은 스님의 간청을 들은 왕은 허락하여 동리산(桐裏山)으로 돌아가게 하고 본도(本道)의 수상(守相)에게 명하여 전결(田結)과 노비를 헌납하여 향적(香積)을 제공토록 하였으며, 외호의 가풍(家風)을 잊지 아니하고 항상 팔연(八行)의 예를 펴서 돈독한 단월이 되어 불교의 보존과 유지의 의무를 받아서 각기 진뢰(陳雷)를 본받았다. 진실로 (결락) 舊分.
大師至開運二年荒落爲辜二月二日召衆有言曰生也有限滅而未定吾今欲行各官珍重佛言波羅提木又是汝大師吾亦以此言囑汝汝等遵行吾不死矣」 令焚香念佛合掌奄然而逝俗秊八十二僧臘六十六於是緇流號慟歎津樑之已摧禪伯咨嗟見法輪之永閉至於飛禽憫然走獸悽愴平日爽耳之(以下缺)」 대사는 개운(開運) 2년전총(旃䝉) 대황락(大荒落) 2월 2일에 대중을 불러 놓고 말씀하되 “생(生)이란 유한한 것이며, 멸(滅) 또한 그 시기가 미정(未定)한 것이다. 내 이제 떠나고자 하니 각기 뜻있게 잘 살도록 하라. 부처님께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곧 너희들의 위대한 스승이라’ 하였으니, 나도 또한 이 말씀으로 너희들에게 당부하노니 너희들이 이를 잘 준수한다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하고 향을 피우고 염불을 하게 하고 합장하고 엄연(奄然)히 입적하니 속년(俗年)은 82세요, 승랍은 66이었다. 이 때 스님들은 통곡하면서 나루터의 다리와 큰 집의 들보가 이미 무너졌다 탄식하였고, 신백(神伯)들은 애통해 하면서 법륜(法輪)의 문이 영원히 닫혔다고 슬퍼하였다. 심지어 새들마저 답답해하고, 짐승들은 슬퍼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소 귀를 시원하게 해주던 (결락) 潺湲㵎水變作哀聲多年悅耳之靉靆山雲皆成慘色感動蠢植毫楮焉周遂以其時事申聞尋蒙」 朝令建塔本山財出官廩役以近民莊嚴周密彫琢甚妙上首門人等復告于朝曰先師臣某幸蒙知遇國恩罔極生死俱榮而塔上之銘闕焉恐先師臣平日樹立之道行漸(以下缺)」 잔잔하게 흐르는 석간수도 애성(哀聲)으로 변하였고, 다년간(多年間) 눈을 즐겁게 하던 산에 덮인 자욱한 구름도 모두 참담한 빛으로 변하였으며, 곤충과 식물들까지도 애통해 한 이 사실을 지필(紙筆)로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리오. 당시의 이러한 기조(奇兆)를 왕에게 보고하였더니 임금이 본산(本山)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役夫)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周密)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碑銘)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道行)이 점차로 (결락)
至淪沒伏乞睿澤 ▨從許樹豐碑者爰命微臣延揚禪化紹才非七步學昧五車直言而否歎朱生斤斧而有禰氏事不獲已抑綴爲文銘曰」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의양(宣揚)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學問)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명(銘)하여 가로되,
偉哉開士了達眞筌法門杳杳至理玄玄化符海外道冠日邊雲歸深洞月落澄淵波瀾意氣平等心田今朝示滅何處談禪雞山岫煩不水逶迤土地有緣棲遲在斯解虎道崚救」 蟻恩垂石臻聽講樹向來儀兩楹忽夢隻履俄遺無法可說有稱廣慈淸淨三業蕩除六塵歸於桐裏際會金人依化提拔彷彿波輪玄談浩瀚大慧精神將登彼岸刼火焚薪介衆安仰哀號蒼旻可久可大萬歲不磷爰述」 不朽聊記貞珉」 光德二年歲次庚戌十月十五日立 鐫字文旻」
위대하신 태안사 광자대사여! 진리의 방편을 요달하시고 깨치신 그 법문(法門) 심오하오며 지극한 그 이치 깊고도 깊네. 그의 덕화(德化) 해동에 널리 전하고 도덕은 해가 뜨는 동국을 덮었네. 자재한 그 행적 구름과 같고 지혜는 달빛이 맑은 물에 비치듯 파란(波瀾)과 이기(理氣)는 하늘을 찌르듯 평등한 그 마음 대원경(大圓鏡) 같아 갑자기 오늘에 열반하시니 어디서 다시 만나 선(禪)을 들으랴! 계족산(鷄足山) 산중에서 열반하시니 운수(雲水)처럼 곳곳으로 행각(行脚)하다가 이곳을 열반지로 정하고 나서 지금까지 이곳서 정진하셨네. 호랑이의 싸움을 그치게 하고 개미를 구제하듯 자비가 깊어 강설(講說)을 할 적에는 돌들도 경청하였고 나무도 그를 항해 점두(點頭)하였다. 어느 날 꿈에 양영간(兩楹間)에 누었다가 신 한 짝만 남겨놓고 홀홀히 갔네. 스님의 분상(分上)엔 설(說)할 만한 법 없건만, 광자(廣慈)란 그 칭호가 있게 되었네. 삼업(三業)은 청정하여 연꽃과 같고 육진(六塵)은 탕제(蕩除)되어 청량과 같아 행각(行脚)을 마치고 동리산(桐裏山)으로 돌아와 모든 대중 한 곳에 모아 놓고서 수발다라 비구가 최후법 듣는 듯 살타파륜이 법을 구함과 같도다. 현묘(玄妙)한 그 말씀은 넓고도 깊어 대혜(大慧)의 지혜라야 헤아릴 수 있네. 내 이제 피안(彼岸)에 오르려 하니 겁화(劫火)가 이내 몸을 태울 것일세. 대중들은 우러러 쳐다보다가 하늘을 부르면서 애통하였네. 이 비석 영원토록 우뚝 솟아서 만세(萬歲)가 지나도록 상하지 않고 영원히 이 비문도 남아 있기를 애오라지 비명(碑銘)을 기록하노라.
광덕(光德) 2년 세차 경술 10월 15일 세우고, 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3)선사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 逈微, 864(경문왕 4)~917(경명왕 원년)]의 비 무위사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 逈微, 864(경문왕 4)~917(경명왕 원년)]의 비.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구양순체의 해서로 써서 김문윤(金文允)과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29년 후인 946년(정종 원년)에 세웠다. 귀부와 비신, 이수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비로서 사실적인 조각 기법을 보여주는데 비문은 풍화로 마멸이 심하다. 비문의 내용은 선각대사가 탄생하여 가지산문의 체징(體澄)에게 출가하고 당(唐)에 유학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전하고 귀국하여 무주의 세력가 요청으로 무위사에 머물다 왕건을 만나 왕건의 요청에 따라 함께 태봉의 서울인 철원에 가서 궁예에게 간언하다 죽음을 당하는 생애와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여 오관산의 산사를 수리하고 탑을 조성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2년 후 시호를 내린 사정을 기술하였다.
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幷序」 太相檢校尙書左僕射兼御史大夫上柱國知元鳳省事臣崔彦撝奉 敎撰」 正朝▨▨評侍郎柱國賜丹金魚袋柳勲律奉 敎書」 고려국(高麗國) 고무위갑사(故無爲岬寺) 선각대사(先覺大師) 편광영탑비명(遍光靈塔碑銘)과 아울러 서문. 태상(太相) 검교상서(檢校尙書) 좌복야(左僕射) 겸어사대부(兼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 신(臣)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정조▨▨평시랑(正朝▨▨評侍郞) 주국(柱國) 단금어대(丹金魚袋)를 하사받은 유훈율(柳勳律)이 교지를 받들어 비문을 쓰다.
盖聞佛陁出世鷲頭開利物之門迦葉乘時雞足闔歸全之路▨越竺軋去聖身毒懷仁傷鶴樹之昇遐竢龍華之▨▨▨悵▨▨▨隱其風漸衰豈謂祖祖傳心當具體而微之侶師師」 接踵有高山仰止之流至於圓覺深仁遠居南海大弘碩德曾栖▨山有待之心諧於郢匠一蓮啓處六葉重光中間徒▨上之▨▨繼在雲居之嗣人能弘道保▨祖宗唯我大師則其」 대개 들으니 부처님께서 취두(鷲頭)에서 출세하시어 인류를 이롭게 하는 교문(敎門)을 열었고, 가섭은 열반할 때가 되어 계족산(鷄足山)에 들어가 중생 교화하는 집을 닫았으니, (결락) 축건(竺乾)에서 성인이 돌아가시자 인도인이 부처님을 흠모하여 학수(鶴樹)에서 열반하셨음을 슬퍼하면서 미륵불이 출현할 용화회상(龍華會上)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였다. 悵 (결락) 隱. 그 교풍이 점점 쇠잔하여졌으니, 어찌 조조(祖祖)가 전심한 것을 마땅히 (결락) 微之. (결락) 사사(師師)가 자취를 상접(相接)하여 높은 산과 같이 숭앙(崇仰)하는 무리가 있어왔다. 그 후 원각(圓覺)조사가 그 깊은 원력으로 중국 남해(南海)에 도착함에 이르러 대홍석덕(大弘碩德)이 숭산에 머물고 있었다. (결락) 대면하여 토론할 자를 구하던 신광(神光)의 마음이 달마의 마음과 부합되어 한 송이 연꽃에 육엽(六葉)이 거듭 빛났다. 그 후로 중간 (결락) 上之. (결락) 법등(法燈)이 상속되어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계승하였는데, 사람만이 능히 도(道)를 홍포(弘布)할 수 있는 것이니, 조종(祖宗)을 보휘(保輝)할 이는 참으로 우리 스님만이 그를 감당할 사람이라 하겠다.
人也 大師法諱逈微俗姓崔氏其先博陵冠盖雄府棟梁奉使雞林流恩兎郡所以栖心雲水寓蹟海壖今爲武州▨▨人▨父樂權早閑莊老所愛琴書松▨▨招隱之篇蕭寺結」 대사의 법휘는 형미(逈微)요, 속성은 최씨니, 그 선조는 박릉(博陵)의 귀족이며 웅부(雄府)의 동량이었으나 계림에 사신으로 왔다가 토군(兎郡)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운수(雲水)에 두고 자취를 해연(海壖)에 멈추어 이제는 무주(武州) (결락)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낙권(樂權)이니, 일찍부터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으며, 거문고, 서예, 적송자(赤松子), 그리고 왕자교(王子喬)의 초은지편(招隱之篇)을 유독 좋아하면서도 항상 절에 가서
空門之友母金氏魂交之夕忽得休徵見胡僧入房擎玉案爲寄欻焉驚覺尋報藁砧答云必生懷寳之兒先告弄璋之慶▨後於▨▨室內每有鐙煇之▨甲子之▨▨證定光之瑞以」 공문(空門)의 스님과 친교(親交)하였다.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 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懷妊)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居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 갑자지년(甲子之年) (결락) 에 등광(燈光)의 상서가 증명(證明)되어
咸通五年四月十日誕生大師生有殊相幼無雜交洎于志學之年潛蘊辭家之念此時忽垂雙淚虔告二親曰切欲去塵投其▨▨父母不▨▨志維諱▨▨▨▨▨爲山莫恒▨▨」 함통(咸通) 5년 4월 10일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날 때부터 수승한 상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고, 배움에 뜻을 둘 나이에 이르러서는 그윽이 집을 떠나 입산할 생각이 간절하였다. 이 때 눈물을 흘리면서 양친에게 고하기를 “세속을 버리고 불문(佛門)에 투신할 마음이 간절합니다”하였으나, (결락) 부모는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유휘(志維諱) (결락) 爲山, 莫恒 (결락)
遂乃斜登歧路直詣寶林謁體澄禪師禪師法胤相承東田孫子也和尙雖云一見便似相知謂曰昔別稍遙今來何暮許令▨室▨▨于玆敬▨禪宗▨▨▨▨▨▨▨▨▨釋子▨▨」 드디어 비스듬히 기로(岐路)를 밟아 장흥 보림사에 가서 보조체징선사(普照體澄禪師)를 친견하였다. 법을 받아 이었으니, 진전사(陳田寺) 도의(道義)선사의 손자에 해당한다. 체징선사가 “처음 보는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전이거늘 어찌 그리 늦었는가”하며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결락) 于玆, 敬 (결락) 禪宗 (결락) 釋子 (결락)
於救蟻沙彌勤苦增勞不離左右至於中和二年受具戒於華嚴寺官壇 大師經陟戒壇▨爲安坐白虹之氣來覆法堂▨是▨▨知有▨人▨爲▨▨之▨▨▨▨▨傾油知▨」 구의사미(救蟻沙彌)보다 더하였다. 그로부터 부지런히 정진하여 항상 스님의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중화(中和) 2년에 이르러 화엄사 관단(官壇)에서 비구계를 받을 때 대사가 계단에 올라가 제자리에 앉는 순간 백색 무지개 기운이 법당을 가득 덮었다. 이때 (결락) 知有 (결락) 人 (결락) 之 (결락) 기름 발우를 기울여 (결락)
人戒珠敢 虧草繫之心尤保尸羅之律及其夏末往度倫山禮見融堅長老▨兮▨▨僧陳問▨▨▨西河之上追思北海之中所以數▨論禪中▨諱長▨▨▨▨▨▨道知在▨人」 인계주(人戒珠)이니 감히 초계비구(草繫比丘)의 마음을 이지러지게 할 수 있으리오. 더욱이 시라(尸羅)인 계율을 보존함에 있어서랴! 그 해 하안거(夏安居)가 끝날 무렵 도륜산(度倫山)에 가서 융견장노(融見長老)를 친견하니 (결락) 어떤 스님이 묻기를 (결락) 서하(西河)의 위에서 북해(北海)의 스님을 추모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날 동안 선(禪)을 논함에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中霄 (결락) 諱長 (결락) 道知在 (결락) 人.
盍雲巘披雲藥山采藥老僧恨不隨他西笑問徑上游禮祖塔於曹溪巡▨▨▨▨地▨▨▨▨利涉莫以因循時不待人曷維其已所屬遠從 罔象▨玄珠於▨▨▨湏龍▨黃之▨法」 鏡於靑丘之畔洎于大順二年春首忽遇入朝使車託足而西達于彼岸維舟鏡水指路鍾陵企聞▨▨道膺大師先佛▨▨▨▨▨▨▨▨▨▨之兆實㳂付囑之心行道遲遲遠經▨▨▨工▨▨▨▨▨▨▨▨」 어찌 구름 덮인 산의 구름을 헤치며, 약산(藥山)에서 약을 캐지 아니 하리오. 노승(老僧)이 서소(西笑)를 따르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길을 물어 6조(六祖)의 탑을 조계(曹溪)에서 참배하고, (결락) 地 (결락) 이섭(利涉)하였다. “그럭저럭 세월을 허송하지 말라.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 어찌 자기의 생각대로 얽혀 있으랴”하고, 멀리 망상(罔象)을 쫓아 (결락) 玄珠於 (결락) 黃龍 (결락) 청구(靑丘)의 언덕을 비추었다. 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 先佛 (결락) 之化. 실로 부촉(付囑)하신 마음을 따라 꾸준히 수행하였다. (결락) 工 (결락)
大師若披皇覺 大師謂曰吾子歸矣早知汝來如欲▨昇堂指其實藏所喜者▨▨室家之美▨傳禪敎之宗由是覩奧幽扃探玄理窟參尋▨▨▨▨▨▨▨▨▨▨▨▨出▨▨▨▨▨▨▨▨▨」 豈惟迦維演法阿難之獨步釋門闕里談經顔子之▨▨▨室而巳矣哉景福三年潭州節帥馬公▨節度副使金公聞風欽仰拂霧敬恭▨▨▨▨▨▨▨▨▨▨▨▨▨▨▨▨請▨」 居其爲時所瞻依皆如此類也迺於天祐二年六月▨ 대사의 출현이 마치 황각(皇覺)이 나타난 것과 같았다. 대사가 이르되 “자네가 돌아왔으니 미리 올 것을 알았노라. 네가 승당(昇堂)하고자 하니 그 보배가 감추어진 곳을 가르쳐 주겠다. 바라는 바는 (결락) 실가(室家)의 아름다움을 보고, 선교(禪敎)의 종지를 전해 받도록 노력하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깊고 깊은 문턱을 보았으며 현리(玄理)의 굴을 탐색하고, 參尋 (결락) 出 (결락) 그 어찌 가유(迦維)에서 연설하신 법에는 아난다가 석문(釋門)의 다문제일(多聞第一)로서 독보적이었으며, 궐리(闕里)에서 유교의 경(經)을 담론(談論)한 것에는 안자(顔子)가 호학(好學)으로 유교의 (결락) 室而已矣哉인지라. 경복(景福) 3년에 담주(潭州) 절수(節帥)인 마공(馬公)과 (결락) 절도부사(節度副使) 김공형(金公夐)이 스님의 도풍(道風)을 흠양하여 안개를 헤치고 찾아와서 지극히 공경하였다. (결락) 請 (결락) 居. 당시의 4부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음이 모두 이와 같은 류(類)들이었다. 천우(天祐) 2년 6월 (결락)
退定武州之會津此時知州蘇判王公池本竊承 大師纔諧捨 已抵平津▨地▨之攀▨▨▨▨▨▨▨▨▨▨▨▨▨慈▨」 每以趍塵如窺慧日常於四事遠假天厨實展▨▨▨▨▨▨仍以▨那山無爲岬寺請以住持 大師唯命是聽徙居靈境此寺也林泉▨意寂▨▨▨▨▨▨▨▨▨▨▨▨於▨」 무주(武州) 회진(會津)으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이때 지주소판왕공(知州蘇判王公)인 지본(池本)이 대사를 친견할 생각이 간절하여 배를 타고 평진(平津)에 이르자마자, (결락) 地 (결락) 慈 (결락) 항상 세간(世間)으로 나아가 부처님의 혜일(慧日)을 비추어 주었다. 그리고 4사공양(四事供養)을 계속 궁중에서 보내왔으니 실로 展
地然則重修基址八換星霜來者如雲納之似海之年亂甚於劉曹之代上無聖主猶鋪猬聚之徒下有庸流莫防鯨鯢之歎物▨▨▨▨▨如▨如」 時 (결락) 6년에 나라가 어지럽기는 유조(劉曹)의 시대보다 심하였고, 위로 성주(聖主)가 없음은 고슴도치들이 모인 것 같았으며, 아래로는 용렬한 무리들만 모여 있어 경예(鯨鯢)의 난(難)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결락)
四海沸騰三韓騷擾至九年八月中 前主永平北▨▨▨▨▨▨▨▨發舳艫親駐車駕此時羅州歸命屯軍於浦嶼之傍武府逆鱗動衆於郊畿之場此時倐」 사해(四海)가 물 끓듯 하며, 삼한(三韓)은 소요하였다. 9년 8월 중에 이르러 전주(前主)가 영평(永平) (결락) 왕건(王建)이 축로선(舳艫船)을 발하여 친히 군졸을 이끌고 대공세를 취하였다. 이때 나주(羅州)가 항복하니, 군대를 포서(浦嶼)의 곁에 주둔시켰고, 무부(武府)는 저항하여 군중을 교기(郊畿)의 광장에 운집하게 하였다. (결락)
大王聞 大師近從吳越新到秦韓匿摩尼於海隅藏美玉於天表所以先飛 丹詔遽屈道竿 大師捧制奔波趍風猛浪親窺虎翼暗縮龍頭僧▨▨ 이 무렵 대왕께서 오월(吳越)로부터 귀국한 대사의 소식을 들었으니 마치 마니주(摩尼珠)를 해우(海隅)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밖에 간직한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먼저 조서(詔書)를 보내어 초빙하여 스님의 도간(道竿)을 굴(屈 )하였다. 대사는 왕명을 받들어 배를 타고 풍랑을 무릅쓰고 왕궁에 도착하여 호익(虎翼)을 친견하니 왕은 좌우에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세워둔 용두(龍頭)를 치우기까지 하였다. (결락)
壽吳王轉明之下▨▨」無以加也其後班師之際特請同歸信宿之間臻于北岸遂於▨▨▨▨拂▨▨供給之資出於內庫所恨群魔難伏衆病莫除唯奉法以栖眞迺▨▨▨▨▨▨今▨禍者遍▨▨▨」 吳王 (결락) 明之下 (결락)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 후 반사(班師)하는 때에 스님과 함께 돌아가자고 특별히 청하여 2~3일만에 북안(北岸)에 이르렀다. 드디어 (결락) (결락) 拂 (결락) 스님에게 올리는 공양물은 모두 내고(內庫)에서 지출되었다. 그러나 한탄스러운 바는 많은 마군들에게는 항복받기 어려웠고, 중병(重病)을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비록 (결락) 法以栖 (결락) 迺 (결락) 今 (결락) 禍者遍 (결락)
枉殺無辜而乃遭艱者塡其雲屯同歸有罪然則澄公道德敢悛胡石之兇慧始仁慈寧止赫連之暴况又永言移國唯唱喫人謂多疑者▨不信以十▨▨▨▨▨▨日」 그러나 무고한 사람이 죽는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였으니 운둔(雲屯)을 모조리 죄인(罪人)으로 처벌하였다. 이러한 즉 “불도징(佛圖澄)의 도덕으로도 감히 호석(胡石)의 흉악을 고칠 수 없으며, 혜소(慧昭)의 인자(仁慈)함으로도 어찌 혁련(赫連)의 포악을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라를 떠나려하였으니 오직 사람들만을 죽게 한다”고 부르짖었다. 可謂 (결락) 不 (결락) 以 (결락) 日.
大王驟飛鳳筆令赴龍庭冀聞絶跡之譚猶認無言之理 大師狼▨▨內 主上鶚立當軒難測端倪失於擧指豈思就日玄高之復▨▨君無▨▨▨▨▨▨▨終遭僞代是▨謂」 대왕은 봉필(鳳筆)을 보내 스님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자취가 끊어진 공사상에 대한 법문을 듣고 무언(無言)의 이치인 선리(禪理)를 알고자 하였다. 대사(大師)가 狼 (결락) 內. 주상이 당상(堂上)에 우뚝 서있는 것을 보고, 그 단예(端倪)를 헤아리기 어려워 거조(擧措)를 잃었으니, 恐 (결락) 玄高之 (결락) 君 (결락) 마침내 거짓 시대를 만났다. 이것은 (결락)
業對將至因綠靡逃兼被崔皓懷姧寇馮▨▨大王謂 大師曰吾師人閒慈父世上導師何有存非不無彼此 大師方知禍急网避危期▨曰▨▨▨▨嬰呂僕之謀仁」者懷恩寧厠商臣之惡然而壹言不納遷▨ 업보의 대응이 장차 다가오니 어찌 인연을 피할 수 있겠는가. 겸하여 최호(崔皓)가 불교를 사견(沙汱)시킬 간계를 품고, 구겸지(寇謙之)가 (결락) 대왕이 대사에게 이르되 “우리 스님은 인간의 자부(慈父)이시고 세상의 도사이시니, 어찌 그릇하심이 있으리요마는 피차(彼此)는 없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바야흐로 화(禍)가 급하여 罔 (결락) 嬰莒僕之 (결락) 者懷恩. 어찌 상신(商臣)과 같은 악당에 참여하겠는가. 그러나 한마디의 말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遷 (결락)
以加捨命之時世▨▨緣俗年五十有四僧臘三十有五于時川池忽竭日月無光道俗呑聲人天變色豈謂秦原▨▨▨▨▨即世之▨」 더욱 목숨을 버리고 열반할 때라고 하였다. 세상에서의 (결락) 연(緣)을 다하였으니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였다. 이 때에 개울과 못의 물이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또한 변색(變色)하였으니, (결락) 請秦 (결락) 卽 (결락)
漢室龍興當」今上居尊之際謂群臣曰竊惟故 大師道高十地德冠諸▨遠出▨方來儀樂土寡人早披瞻仰恭▨歸依願思有得之緣常切亡師之痛仍於雨泣實慟▨▨追▨▨▨俾修▨▨」 한실(漢室)이 용흥(龍興)하였다. 금상(今上)이 용상(龍床)에 있으면서 여러 신하(臣下)들에게 이르되 “고요히 생각해보니 입적(入寂)하신 대사의 도(道)는 십지(十地)를 지났고, 덕(德)은 제방(諸方)을 덮었다. 遠出 (결락) 方 낙토(樂土)에 돌아오셨다. 과인(寡人)이 일찍 첨앙(瞻仰)하며 공경히 귀의하였다.” 원하옵건대 유득(有得)의 인연을 생각하면 항상 스님을 잃은 아픔이 간절하여 눈물을 비오듯 흘렸으니, (결락) 俾修 (결락)
至明年三月日遂召門弟子閑俊化白等曰聞州之▨冠山▨▨之藏昭處此山也山崗勝美地脉平安宜爲置冡之居必致▨▨▨▨尊宗之祐可師等與有司宜速修山寺尋造石塔」 者至其月日先起仁祠便成高塔塔成師等號奉色身遷葬于所建之冡越二年 詔曰式旌禪德宜賜嘉名賜諡爲」 先覺大師塔名爲遍光靈塔乃錫其寺額勑号太安追遠之榮未有如斯之盛者也 다음해 3월에 이르러 드디어 제자인 한준(閑俊)과 화백(化白) 등을 불러놓고 이르되 “개주(開州)의 (결락) 冠山 (결락) 지장태처(之藏胎處)이니, 이 산은 산세가 아름다우며, 지맥(地脈)이 편안하여 마땅히 집을 짓고 살만하며, 반드시 존종(尊宗)을 이룰 만 한 곳이다”고 하였으니, 가사(可師) 등이 유사(有司)와 함께 산사(山寺)를 수축하고 석탑(石塔)을 세우기로 하고 때가 되어 먼저 인사(仁祠)를 짓고 이어서 높은 탑을 조성하였다. 탑이 이루어지니 가사(可師) 등 제자들이 슬퍼하며 색신(色身)을 받들어 건립한 탑몽(塔冢)에 옮겨 봉안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조칙(詔勅)을 내려 “법답게 스님의 선덕(禪德)을 현창하여 마땅히 가명(嘉名)을 하사하리라”하고는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塔名)을 편광영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고, 사액(寺額)을 태안(太安)이라 하였으니, 추모함을 받는 영광이 이와 같이 융성한 적은 없었다.
下臣謬因宦學叨典樞機辭潤色於仙才謝知言於哲匠先是玉室獻賦金牓題名何期降」 紫泥於蓽門銘黃絹於蓮宇所冀强揺柔翰申」 大君崇法之由聊著鮮文慰門下送終之懇銘曰 하신(下臣)은 변변치 못한 학문인데도 외람되게 중책을 맡게 되어 윤색(潤色)을 선재(仙才)에 사양하고 지언(知言)을 철장(哲匠)에게 미루었다. 선대(先代)에는 옥실(玉室)이었고, 과거에 급제하여 금방(金牓)에 올랐으나, 어찌 비문을 짓는 일을 감당할 수 있으랴마는, “자니(紫泥)를 필문(蓽門)에 내려 황견(黃絹)을 연우(蓮宇)에 새기도록 하라”하시기에 억지로 붓을 잡아 대군(大君)께서 불법을 숭상하신 연유를 밝히며, 애오라지 선명한 문장을 지어 스님의 문인(門人)들이 마지막으로 보내는 정성을 위로하는 것이다. 명(銘)하여 이르되, 깊고 깊은 깨달음 신령한 그 경지여! (결락)
奧哉靈境▨▨▨禪▨爲食道情是兵卽色非色惟名假名雖云方便祇爲衆生爰有僧英▨▨禪伯能使魔軍克歸▨▨雨中稻」 麻霜後松栢須拜昌言難欺雅▨動爲佛事翻被人▨眞衰俗盛法弱魔▨身辱名高命終道光無懴遺跡祖師舊芳紀德于玆傳於不杇神足傷心▨▨▨▨塔▨▨▨▨▨▨▨石刧」 頻移天長地久」 開運三年歲次丙午五月庚寅朔二十九日戊午立 ▨▨▨金文允崔奐規」 정력(定力)으로 뭉쳐진 선열(禪悅)로 밥을 삼고, 수도하는 그 마음 강력한 군사일세. 색(色)이지만 색이 아니고 공(空)이지만 공이 아니니 이름 있는 삼라만상 모두가 가명(假名)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을 방편이라 말하지만 모두가 중생을 제도코자 하는 것일 뿐. 여기에 스님의 제자(弟子)인 승승(僧乘)이 있어 (결락) 功 能 (결락) 마군들로 하여금 항복을 하게 하여 모두들 불교에 귀의(歸依)시켜 제도하였네. 문하(門下)에는 우중(雨中)에 도마(稻麻)처럼 모이고 서리 내린 후라야 그 지조(志操) 알 수 있네. 친견한 불자(佛子)들은 모두가 찬탄하네 그토록 우아함을 감출 길 전혀 없고 움직이는 거동마다 불사(佛事)가 아님 없어 일거 일동 그 모두가 중생을 위함이요. 진리(眞理)는 쇠해지고 속(俗)됨은 왕성하며 불법(佛法)은 약해지고 마군(魔軍)은 강해지네. 신체는 욕되지만 이름은 고상하며 목숨은 끝났지만 도덕은 빛이 나네. 생전(生前)을 회고하니 한점도 후회없다. 조사(祖師)의 남겨주신 거룩한 그 업적을. 도덕을 추모하여 비석에 새겨두어 후세에 영원토록 썩지 않고 남아 있어 창자를 베어내 듯 제자(弟子)들의 애도함을 (결락) (결락) (결락) 멀고 긴 반석겁(磐石劫)의 그 시간 다하도록 하늘처럼 영원하고 땅처럼 끝이 없네!
개운(開運) 3년 세차 병오(丙午) 5월 경인삭(庚寅朔) 29일 무오(戊午)에 세우고, 김문윤(金文允)과 최환규(崔奐規)는 글자를 새기다. |
출처: 한국민속종교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민속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