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독문학과를 간 것은 우연이었다. 원서 쓸 때쯤 친구가 대학 가서 같이 보컬그룹하자며 나를 자신의 원서쓰는 곳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서 산 원서 탓에 지원하게 된 과가 독문과였다. 하지만 지방의 고등학교를 다니며 은연중 내 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은 고시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 환상은 학교의 선생님들뿐 아니라 친척 어르신들의 말씀을 통해 심어졌고, 공부는 고시를 보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지방에 내려가 친척 어르신을 만나면 시험은 언제 보느냐고 묻는 분도 계셨다. 그 시험은 당연히 고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분들에게 고시를 보지 않는 대학은 대학도 아니었다.
당시의 환경은 그랬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독문학 공부를 열심히 했을 리 없다. 1학년 때는 한번도 집에 가서 가방을 제대로 살펴본 기억이 없을 정도다. 딴은 대학의 분위기 자체도 그랬다. 1학년 때는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모르는 선배가 1학년이 무슨 공부냐고 하는 말을 듣고 그냥 집에 돌아간 적도 있다. 정치적 상황도 당시는 공부하기에 적절치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던 76년 당시 전국의 학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던 데모의 한 가운데 있었고 우리 대학도 이미 5월에 서둘러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개학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 ‘학생들’의 데모는 여전히 영문 모를 일이고 낯설었으며 그 안에서 여전히 나는 아직 ‘학생’이 아니었다. 의식의 차원에서도 학생이 아니었고 배우는 사람이라는 본래적 의미에서도 나는 학생이 아니었다. 점수는 거의 D 수준이었고 다만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독일어 선생님의 열정과 능력 때문이었는지 공부를 그리 안했는데도 독일어 점수는 좋았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대학생으로서 나는 입학 당시 학과에 대한 소신도 없었으며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잘 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 들어가기 전의 공부 실력도 좋지 못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으면 독문학과에 갔을 리 없었을 터였다.
1학년 2학기 때 군대를 갔고 군대 3년을 마치고 나서는 좀 달라졌다. 일단 학교생활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컸다. 다른 생각 없이 학교 공부 열심히 하고 학기 시험 준비도 충실히 하려 했다. 결과는 상당히 좋았다. 그렇게 학부를 마치고 나니 시험 없이 대학원을 갈 성적이 된다기에 별 생각 없이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대학원에 진학해 나름 열심히 했고, 한 학기 앞서 유학을 떠난 친구의 조언을 따라 나 역시 독일행을 결심했다. 친구의 조언 중 돈 없어 유학 과정을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 없다는 말이 어떤 면에선 무대책이었던 유학 결행에 힘을 실어주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 결혼을 했다. 결혼은 쉽지 않았다. 여러 번의 중매에서 계속 “차이”다가 문학 공부한 사람과의 결혼을 원했었다는 좀 “별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운 좋게 결혼을 했다. 그리고 함께 유학을 떠났다.
결혼식 때 들어온 부조금은 그대로 유학 자금의 일부가 되었고 가져간 돈은 그야말로 쌈지돈 정도였음에도 상당 기간 “곶감 빼먹듯” 쓰며 살 수 있었다. 일단 학비가 무료라는 게 컸다. 월세로 들어간 집도 좋았으며, 특히 후에 들어간 학생기숙사는 거저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빵 값이며 학생 식당의 음식 값이 질은 높으면서도 매우 저렴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유학생들이 이야기했듯 한 마디로 학생들의 천국이라 할 만 했다.
그래도 어쨌든 돈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 장학금을 알아보았다. 주변의 학생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어쩌면 유학한 도시의 한국 학생 중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한명도 없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그런 판단을 갖게 한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자신감이 없진 않았다. 일단 그때까지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참석한 세미나에서 제출한 레포트에서 2점 하나 없이 모두 1점(1점은 A학점, 2점은 B학점!!!)을 받은 터였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장학재단은 독일 자유민주당에 소속된 나우만 재단으로 문화에 관심이 많은 재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간 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화의 변화를 통한 인간과 사회의 개선’에 관심을 가지게 된 터였기에 나에게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지도 교수께서는 그 재단의 장학금을 받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려하면서 매우 훌륭한 추천서를 써주셨다. 특히 이전에 세미나 리포트를 제출한 적이 있는 다른 교수님은 그야말로 최상의 추천서를 써주시기도 했다.
장학재단에서 서류 통과 통보를 받은 후에는 기차로 반나절을 가야 하는 도시로 인터뷰를 하러 가야 했다. 인터뷰 준비를 소홀히 할 순 없었다. 재단의 설립년도와 목적, 재단의 명칭으로 하는 나우만이라는 인물에 대해서와 자유민주당이 중요시하는 자유의 문제에 대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 인터뷰는 예상한 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공식적 절차로는 일주일 경이 지나 결과가 통보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미 인터뷰 자리에서 합격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상대방이 무엇에 관심이 있으며 나의 무엇에 관심을 가질까에 대해 정확하게 추정하는 것이었다. 재단 자체와 자유의 문제에 대한 준비는 그 과정의 중요한 일부였다. 더불어 인터뷰 진행 과정을 예상하며 세운 나름의 원칙은 그들이 제시하는 주제에 끌려가지 않고 내가 스스로 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그들이 듣고 싶도록 만들까에 대한 일종의 대화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화의 순서를 상상하며 스스로 대화를 주고받는 연습까지 했다.
예상했던 대로 자유라는 문제에 대한 질문은 매우 이르게 나왔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 생각해봤던 문제였지만 그것은 이후 나의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당시 나는 자유가 단순히 정당의 프로그램일 수 없는 삶의 방식이자 인생관이며 세계관과 관계된 것이라고 답했다. 당시에 내가 생각한 자유는 일단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문학, 문화, 예술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연히 내가 교회에서 극본을 쓰고 연출했던 연극 하나를 그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자유의 문제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보다 근본적으로 타인의 자유, 그리고 타인의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갔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루소의 말 “타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그의 인간적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속에, 그리고 독일 헌법 1조 “인간의 존엄성은 신성불가침이다” 속에 요약되어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 그 원칙의 적용이 단순 명료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타인의 자유 속에는 가령 잘못할 자유도 포함되는지, 그것이 아니라 해도 잘못한다는 규정은 누가 어떻게 객관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들이 불거지기 때문이다. 루소는 그에 대한 기준으로 자연법을 제시한다. 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은 굶어 죽어가는 데 배터지도록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자연법에 어긋난다. 누군가가 창가에서 죽어가는 데 우주나 국가를 걱정하며 그 사람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자연법에 어긋난다. 이어 루소는 이렇게도 말한다. 어떤 실정법이라도 그것이 자연법에 어긋나면 거부하라. 맞다. 인간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존엄성의 측면에서 평등해야 한다. 자유는 하늘에서 평등하게 주어진 존엄성의 바탕 위에서 허용되고 향유되어야 한다. 그것이 어려우니 프랑스 혁명의 모토에 자유, 평등과 더불어 형제애가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직책과 직위, 기능, 외모 등 그 어떤 것에 앞서, 또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인정되고 지켜져야 할 것,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천부의 권리이다. 이런 의식은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최소한 어떤 삶을 살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민주에 대한 신념과 독재에의 원칙적 거부였다. 국가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가정적 차원에서도 독재는 허용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늘이 모든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한 자유의 부정이자 인간적 존엄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이다.
독재는 오직 하나의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개개인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시스템들을 자신에게 맞추도록 강요하는 폭력이다. 그런 곳에서 창의성이 숨을 쉴 수 없다. 또한 단일하기에 그 자체로 오류인 독재는 다양하고 스스로 그 중심에서부터 변화해나가는 시스템들에 적웅할 수 없다. 그래서 독일을 알리기 위해 전 세계에 배포한 소책자에서도 민주주의야말로 경제에서도 가장 효율성이 입증된 제도라고 확언한다. 도덕적 차원에서든, 정치적 차원에서든, 국가적 차원에서든, 가정적 차원에서든 아무리 힘들고 때론 불이익이 올지라도 독재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소중한 결론이었다.
첫댓글 아...교수님에게도 이런(?)시절이 있었다는게 정말 재미있어요. ㅋㅋ 근데 이번에도 술술 읽어가는 가운데 마지막에선 숙제를 던져주시네요...독일에선 어떻게 일명 '먹튀'가 될 수 있는 유학생들에게 그런 혜택을 주는지 자국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하투쟁마저 가둬버리는 이나라 국민으로서 참 이해가 되지 않네요.
글고 교수님...글을 올리실 때 엔터키를 누르시고 문단을 좀 끊어주시면 읽기 편하겠습니다. 벌써부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교수님, 정말 묵직한 과제를 던지셨습니다..우리가 학창시절 다 배웠던 것인데, 그냥 외우기만 하고, 깊이 있게 그 의미를 새겨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철학과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할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