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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삶과 그에 수반된 상황들을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특히 알 수 없는 미래를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 분석에서 다룬 인생의 중대사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삶을 다루는 책입니다. 세상에서 닥치는 모든 일을 어떻게 직면할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오직 자신만 그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의 생각, 즉 성경은 삶과 동떨어진 책이요 실제적인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책이며 오늘날과 맞지 않는 케케묵은 책이라는 생각만큼 어리석고 우스운 것은 없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책으로 느끼거나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좋아하거나 아름다운 생각과 사상을 제공해 주는 책으로는 여겨도 실제 삶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각박한 실제 현실을 직면하려면 성경 읽기에 시간을 쓰기보다 현대 소설가와 철학자와 이론가들의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어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삶의 전투에 임할 준비를 갖추었다는 어리석고도 허황된 착각을 합니다.
이것은 심히 우스운 관점으로서, 성경보다 더 실제적이며 오늘날에 부합되는 책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말하게 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릅니다. 성경이 자기 방식으로 자기 메시지를 전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가르침만 주는 것이 아니라 역사도 알려 주는데, 이 두 가지가 다 귀하고 중요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단순한 가르침이라면 "이론적으로는 괜찮은데 현실에 어떻게 실현되지?"라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성경은 즉시 역사를 제시하며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여줌으로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이론이나 학문적 논의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 우리와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 이 가르침을 적용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다루는 특정 주제가 이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수의 인물들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요컨대 "여기 특별하게 살았던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유대 역사, 히브리인의 역사에 우뚝 서 있는 위대한 영웅들이다"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비결을 설명해 줍니다. 그가 믿음의 위대한 영웅들 내지 성도들의 전시장같은 11장을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편지를 받을 많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삶에서 곤경과 난관에 부딪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침체와 절망에 빠진 나머지 '그리스도인이 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을까?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10장에 나오듯 많은 곤경과 시련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집과 재산까지 강탈당하면서 우리가 믿는 메시지가 과연 참된 걸까?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는 아닐까? 우리는 현실에 사는 사람들로서 믿음의 결국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기독교가 과연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맞는 걸까? 우리는 옛 이야기와 고대 역사를 아는데, 그때 사람들은 땅과 재산과 소유와 짐승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빈털터리인 것만 같다. 구약의 가르침과 기독교는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걸까?"라고 묻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다루는 주제로서, 그가 말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 문제는 삶의 기본이 되는 중심 원리를 모르는 데 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원리에 따라 자기 백성을 대해 오셨다. 이 점에서 볼 때 기독교는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구약 시대에 백성을 대하신 방식이나 신약 시대에 백성을 대하시는 방식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의 원리에 따라 자기 백성을 대해 오셨다." 그는 1절에서 그 명제 ㅡ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를 제시한 다음, 위대한 구약의 인물들을 한 사람씩 예로 들며 "이들을 보라. 이들의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매번 "믿음"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이런 사람들이 된 것은 믿음의 원리에 근거하여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야말로 이런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예로, 이 주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인 아브라함을 살펴봅시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자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신분을 떠받치는 절대적 토대입니다. 그로부터 유대 민족 전체가 형성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의 인상적인 사례를 다루며 다른 인물들보다 더 많은 분량과 관심을 할애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맨 먼저 일어난 큰 사건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입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이방 사회에서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그를 불러, 큰 유업을 줄 테니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갈 곳도 알려 주지 않은 채 모든 소유를 챙겨 아내와 함께 믿음으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신의 말을 믿고 과거와 결별하도록 하나도 알지 못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그를 부르셨습니다. "네게 줄 곳이 있다"라고는 하셨지만, 그곳이 어디이며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것이 그의 큰 비결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하나님의 벗으로 알려지게 됩니다(약 2:23). 구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삶을 정복한 인물로, 위대한 영웅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는 어떻게 이처럼 승리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8은 그 비결, 알지 못하는 미래를 직면할 수 있는 열쇠를 알려 줍니다. 아브라함은 그 원리에 따라 살았고, 11장의 다른 인물들도 그 원리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 삶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미래를 전혀 알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갈 곳이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말하자면 미리 확보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장차 어찌될지 모르면서도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전에 읽은 책이 있는데, 그 첫 문장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책의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첫 문장에는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 원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용기다."
*휴월폴 Hugh Walpole, 『불굴』 Fortitude
이것이 첫 번째 원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이나 삶에서 일어나는 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직면하는 방식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더 이상 장래일을 염려치 않게 됩니다. 갈 곳을 몰라도 나아가게 되며 무슨 일이 생기든 개의치 않게 됩니다.
이 원리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사실상 세상 모든 사람이 이원리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장차 무엇을 얻을까, 무슨 일이 닥칠까,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관점에서만 삶과 미래를 생각하며, 그것을 토대로 움직이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가진 것과 내가 겪는 일만 내내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따른 원리와 정확히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이런 의도로 출발하면 장차 일어날 일을 정확히 알려는 욕망이 과도히 커지면서 미래를 훔쳐보려 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언과 예측과 예견과 장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중요한 것은 삶 자체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용기이며 삶을 직면하는 방식입니다. 삶 자체와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겪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이미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장래일을 알고자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그처럼 잘못된 태도는 초조함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갈 곳을 모르면서도 나아갔습니다.
인생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젊었을 때는 다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해 안달합니다. 시간이 너무 맥없이 느리게 흐른다고 느낍니다. 당장의 삶은 생각지 않고 장래 일과 미래의 행복에만 골몰합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불안해 하며 내내 앞만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그 모든 일에 지치는 단계, 다 환상이었다고 느끼며 일종의 냉소에 빠지는 단계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이 성큼성큼 흐르며 모든 것이 급하게 스쳐 지나가는 단계, 미래가 너무 빨리 들이닥쳐 현재를 붙잡기도 급급한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다 삶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초래되는 결과입니다. 갈 곳과 만날 사람과 가질 것에 너무 집착하다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곳을 몰랐지만 개의치 않고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그의 비결이었습니다. 자기가 어디 있든,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염려치 않았습니다. 그가 염려한 문제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브라함이 따랐던 원리와 삶의 방식을 발견하지 못한 탓에 거짓 희망과 불필요한 불안 및 실망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면 금세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불안은 현재 다른 어떤 질병보다 확연히 나타나는 질병입니다. 오늘날에는 신체나 장기의 질병보다 장래 일에 대한 과도한 불안과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인한 질병이 훨씬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언제 두려운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불안과 스트레스와 긴장 없이 살아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반대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미래를 전혀 염려치 않았지만, 우리는 장차 생길 일과 그 대비책을 정확히 알려 듭니다. 그래서 바로 긴장해 버립니다. 미래를 대비하면서도 두려움과 불길한 예감에 휩싸입니다. 어떻게 보면 삶 전체가 벌써 망가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종일관 다른 원리를 가르칩니다. 그런 태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삶에서 중요한 문제는 장차 생길 일을 미리 알아내고 추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상관없는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기독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의 생각, 즉 '장차 생길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애쓰며, 미래를 예측하여 사람들을 대비시키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는 생각보다 더 성경의 가르침에 심히 위배되는 것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그런 의미의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저의 책무는 미래를 추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에게 긴장 완화 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조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 메시지는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메시지,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똑바로 붙잡아 줄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아브라함은 갈 곳을 모르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나아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나아갔을까요? 일종의 철학적인 평정심 내지 스토아 정신, 체념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저 아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모든 가능성과 만일의 사태를 예측하며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미래는 달라지지 않는다'라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이 또한 괜찮은 추론이요 어떤 점에서는 합당한 추론이지만, 기독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단순히 일어날 법한 일을 예측하느라 기력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극적 체념은 기독교의 방식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일종의 철학적 초연함이나 평정심 내지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난다. 세상 걱정을 다 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다"라는 운명론이 아닙니다. 이 또한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일까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어떻게 나아갔습니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점을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 놓은 옛사람의 말이 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누구와 가는지 알고 나아갔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비결이었습니다. 갈 곳이 어디냐는 염려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느냐만 염려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중대한 원리입니다!
하나님만 함께 가시면 어디로 가든 상관없습니다. 산을 넘든, 깊은 골짜기를 지나든, 늪에서 씨름하든, 평탄한 길을 걷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가십니까? 오직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힘차게 길을 떠난 것은 누가 자기와 함께 가시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직면할 때 중요한 것은 이 한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맞는다면 무슨 일이 생기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나눈 교제의 성격을 잠시 생각해 보고,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전부 그런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는 단순히 여러 가지 원리나 개념을 고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창 5:22). 우주의 창조자,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사귀며 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입니까! 이런 분이 함께 가신다면 장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강한 능력을 깨닫는 특권이여! 이런 하나님, 여러분에게 관심을 쏟으시며 염려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을 찾아와 말씀하셨듯이 여러분을 찾아와 말씀하시는 하나님, 무에서 만물을 창조해 내셨고 아이가 구슬을 가지고 놀듯 별들을 운행하시면서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시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안녕을 크게 염려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이런 분이 함께하시며 동행하심만 안다면 무슨 일이 생긴들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큰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항상 선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알기에 신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의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 곳은 알려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당신이 저와 함께 가시나요?" 하나님은 "내가 가마. 내가 널 인도해 주마.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와 함께 떠나기만 하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기에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갈 곳을 몰랐지만 하나님이 함께 가시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고후 6:10).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성격도 살펴보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네게 줄 곳이 있고 유업이 있으니 나와 함께 가자"라고 하셨습니다.
길을 떠나 유업으로 주실 땅에 도착할 때까지 생길 일들에 대해서는 세세히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삶의 절대적 기초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올해 무슨 일이 생기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영원히 지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정이 아닌 목적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찾아와 "널 데려가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데려가겠다고 하셨습니까? "유업으로 받을 땅"입니다. 거기 도착할 때까지 생길 일들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이 아니라 유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중요치 않다는 말입니까?"라고 묻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제 말은 세상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일종의 예비학교와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외국인과 나그네"입니다(히 11:13). 우리가 받을 유업은 따로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위대한 서신 앞장에서 밝힌 그대로입니다.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많은 아들들에게 주시는 영광이야말로 우리의 유업입니다. 그 영광을 얻을 때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두 장차 임할"영광"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침내 시간 너머 저 영원한 영광 가운데 펼쳐진 바닷가에 서게 될 때, 세상은 그저 작게 보일 것입니다. 세상에 명멸했던 모든 일, 그 모든 인터뷰와 회의와 신문 머리기사들이 일고의 가치조차 없이 하찮게 보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한없이 작고 미미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일에 참여하는 것, 오직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들었기에 갈 곳을 모르면서도 나아갔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이 확신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영광으로 데려가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무슨 일들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아는 사실은 하나님이 절대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장차 무슨 일이 생기든 변함없이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상황은 바뀌고 많은 일들이 명멸하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또 무슨 일이 생길까 궁금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로 계신다는 것입니다(약 1:17). 우리는 아주 가변적인 존재입니다. 서로 의지하거나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시간은 영원의 이마에 어떤 주름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복되신 아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이제껏 베푸신 사랑
돌아볼 때
나 결국 곤란에 빠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아네.
-존 뉴턴John Newton
당연히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변할 수 없으십니다. 그는 불변하시고 영원하시며 영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출 3:14).
영원히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생각입니까!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그 거룩하심과 공평하심과 의로우심과 불변하심과 영원하심 때문에 그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언제나 확실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함께 길을 떠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결코!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확신해도 좋습니다. 그는 "햇살이 비치는 날에도 너와 함께하고 폭풍이 부는 날에도 너와 함께하겠다. 건강하게 빛날 때든 병들어 아플 때든 사고를 당할 때든 죽음을 맞이할 때든 상관없이 너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겠다"라고 확언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겪든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신 하나님, 여러분에 대해 크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가 함께하시면 무슨 일이 생기든 상관없습니다.
가까이 계신 주 축복하시니
가까이 있는 적 두렵지 않나이다
.불행도 무겁지 않고
눈물도 쓰리지 않나이다.
헨리 라이트 Henry Lyte
주의 손바닥에 새기신 내 이름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라.
지울 수 없는 은혜의 표시로
주의 가슴에 박혀 있도다.
장래 일이나 현재 일이나
위에 있는 것이나 아래 있는 것이나
어떤 것도 주의 목적 폐할 수 없고
내 영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도다.
-오거스터스 탑레이디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그의 약속은 언제나 확실합니다.
또 한 가지 위로를 주는 생각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폭탄의 위력이나 인간의 능력을 많이 고려하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는 전능하시기에 인생길에서 만나는 어떤 일도 그보다 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어떤 이는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데도 병에 걸리고 건강을 잃고 사랑하는 이를 잃잖아요! 그건 어찌 된 겁니까?" 그런 일들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내 최고의 보호자,
보이지 않으나 영원히 곁에서
변치 않는 신실함으로 구원하시도다.
전능함으로 다스리시며 명령하시도다.
그 미소에 내 위로 넘치고,
그의 은혜 이슬처럼 내리도다.
그가 기쁘게 지키시는 영혼,
구원의 성벽으로 두르시도다.
- 오거스터스 탑레이디
무슨 일을 만나든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다는 사실, 여러분을 그의 능력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확신해도 좋습니다.
올 한 해가 어떤 이들에게는 무서운 역경의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아무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롬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곤경이나 시련이나 환난은 확실히 예외일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
는 줄 앎이로다"(롬 5:1-4). 하나님과 이 관계만 유지되면 무슨 일이 생겨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련과 환난이 닥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시련 때문에 오히려 더 사랑하는 분의 품으로 달려갈 것이며, 전에 몰랐던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역경을 겪어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심한 곤궁을 겪어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인생을 돌아보며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 그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히브리서 13:6도 보십시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나님의 성품을 살펴보면 무슨 일이 생기든 "주는 나를 돕는 이시라"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누구와 가는지 알고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는 고향과 조상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모든 소유를 챙겨 아내와 함께 떠났습니다.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이런 믿음과 승리와 기쁨의 삶, 하나님과 함께하기에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삶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을 지켜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죄를짓고 어두운 삶을 살았어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안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용서와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이제껏 살아온 죄 많은 세상에서 떠나십시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가 기뻐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그의 인도와 지도에 복종하며 성령의 인도에 복종하십시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아뢰십시오.
내 인생 주의 손에 있나이다.
내 하나님이여, 주의 손에 드리길 원하나이다.
내 삶, 내 친구, 내 영혼 전부
주의 돌보심에 맡기나이다.
-윌리엄 로이드 William F. Lloyd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염려를 주저 없이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러면 어떤 시련이 닥쳐도 상관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그를 알고 그와 함께 한걸음 한 걸음 걷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