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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시학』이 주목하는 이 계절의 시인 / 대담 임애월 편집주간
‘안다미로’의 우리말과 연애하기
김 미 영 시인
- 유별나게 더웠던 여름의 끝자락
비 내리는 수원의 호수공원에서 김미영 시인을 만났다.
소녀처럼 순수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빗속을 걸어왔다
순간 빗소리마저 경쾌해지고 주변이 환하게 맑아왔다 -
임애월 : 김미영 시인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111년만의 기록적인 무더위라고 하던가요... 무더위도 끝나가고 이제 좀 견딜 만하지요?
김미영 : 네. 주간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지난해 11월 1일 시의 날 행사 때 뵈었으니까 거의 열 달 만이네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지요? 왠지 가슴이 설렙니다. 연인과의 첫 데이트처럼요. 무엇보다도 주간님 모습이 건강해 보여서 좋아요. 무더위랑 사이좋게 지내셨나 봅니다. 저는 정말 이번 무더위 아니 강더위(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고 볕만 내리쬐는 심한 더위)가 무서웠답니다. 하지만 이제 기온이 많이 내려가서 견딜 만하답니다.
임애월 : 아하, 그걸 ‘강더위’라고 하는군요. 올여름은 정말 강더위 때문에 모두들 고생하셨을 겁니다. 저는 무늬만 농부이긴 하지만 밭에서 구슬땀 흘리며 이열치열 했지요. 그랬더니 오히려 여름나기를 개운하게 했답니다. 육체의 노동으로 흘리는 정직한 땀은 정신까지 카타르시스를 시켜주더군요. 정말입니다.
오늘도 ‘작달비’가 자주 내리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부터 좀 들려주세요. 작달비는 시인님의 작품집에서 커닝했어요.(웃음)
김미영 : 참 좋은 커닝을 하셨네요. 이런 커닝이 확산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비의 종류도 참 다양하지요. 굵직하고 거세게 좍좍 쏟아지는 비 작달비를 비롯해서 먼지잼, 잠비, 떡비, 목비, 쌀비 등 수십 가지에 이르니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말은 섬세해서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다섯 번째 우리말 동시집 『땅별』을 탈고해서 출판사에 넘겼어요. 빠르면 다음해 늦으면 그 다음해쯤 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홉 번째 동시집 『너 정말 그러기냐』는 묶어 놓긴 했는데, 좀 더 좋은 작품을 모아서 내려고 합니다.
임애월 : 아, 또 우리말 시집을 탈고해 놓으셨군요. 정말 기대가 됩니다.
호수에 연꽃이 곱게 피었네요. 이렇게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니 마음이 촉촉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줏대가 없어서 그런지... 산에 가면 산이 좋고 물가에 가면 물이 좋거든요.(웃음) 시인님께서는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시는지요?
김미영 : 이렇게 주간님과 함께 곱게 핀 연꽃을 보며 호수를 걸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고, 걷고 싶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지난해 발목 수술을 받은 뒤, 그저 그렇게 지나쳤던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산을 좋아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산보다는 숲하고 친하답니다. 요즘, 숲정이(마을 가까이에 있는 숲)를 날마다 산책해요. 숲을 거닐다보면 발목에 부드럽게 감기는 풀꽃들의 웃음소리도 좋고, 귀를 맑게 가꿔 주는 새들의 노래 소리도 좋고, 나무를 오르내리는 다람쥐는 내 눈을 즐겁게 해 준답니다. 그리고 더위를 잊게 해 주는 푸른 그늘은 더욱 좋지요.
임애월 : 저도 자연과 함께 있을 때 영혼이 가장 맑아지는 것 같답니다.
고향이 경기도 평택이신데, 시인님은 유년기를 어떻게 건너오셨는지 궁금해요.
김미영 : 농사를 짓는 부모님 덕분에 자연과 더불어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산과 들과 시내가 놀이터인 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놀이터엔 즐거운 추억과 더불어 아픈 추억도 있답니다. 유난히 키가 작아서(초등학교 입학할 때 키가 99cm)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곤 했어요. 고무줄놀이 할 땐 키가 작다는 이유로 깍두기도 시켜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오리쯤 되는 하굣길에 극성스런 친구들은 저를 종종 숲속에 혼자 두고 달아나곤 했으니까요. 그러한 아픈 추억 덕분에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흘러나오고, 그 친구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져요.
임애월 : 어린 시절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이나 왕따 등으로 인해 시를 쓰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그 말씀은, 그로인한 상처가 컸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혼자만의 정신세계가 깊어졌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김미영 : 상처 그러니까 결핍이 저를 시의 길로 안내해 주었지요.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세포 하나하나가 시를 향해 가고 있었나 봐요. 학창 시절, 저는 제대로 읽은 책이 한 권도 없었고, 일기도 쓸 줄 몰라서 그런지 백일장에 나가본 기억이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엄마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농부인 엄마는 결혼 전, 아주 낭만적이어서 영화도 자주 보고, 펄벅의 대지, 이광수의 무정, 김소월의 시를 즐겨 읽었다고 하시더군요. 지금도 채소를 가꾸며, 김소월의 시를 종종 낭송하신답니다.
임애월 : 그러시군요. 아무래도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으셨나 봅니다.
불편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동시’와 시인님의 ‘작은 키’가 조화를 이루어서 오히려 시인님께서 더 크게 돋보인다는 느낌입니다.
김미영 : 그런가요! 아주 향기로운 생각입니다. 마음의 키뿐만 아니라, 몸의 키까지 어린이들과 아주 잘 어울리게 빚어주신 신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무엇보다 이 작은 사람을 주간님께서 거인으로 봐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임애월 : 진심입니다. 껍데기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웃음)
유년기를 산과 들... 자연과 함께 건너오셨다고 하셨는데, 자연은 유년기의 배경으로는 아주 좋은 환경이라는 생각입니다. 순수와 순리의 진리를 저절로 습득할 수 있으니까요.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동시를 쓰시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동문학은 미래를 열어나갈 우리 어린이들의 정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분야라 정직한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김미영 : 처음에는 시를 썼어요. 그런데 김우영 선생님께서 제 시를 들여다보시곤 ‘김미영 시 속엔 애들이 있네. 동시 써 봐’라고 하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바로 동시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김우영 선생님은 ‘수원문화원’에서 시 창작을 듣다가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께서 저를 제대로 읽으신 것 같아요. 그때부터 좋은 동시를 찾아 읽고, 베껴 쓰고, 낭송하며 저는 점점 동시의 숲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동시는 문학 중에서 가장 조심스런 장르이지요. 주독자가 어린이이다 보니 그들의 정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시어를 고르는 일도 그렇고 비유도 적절해야 하고 메시지도 은근히 전해야 하니까요. 특히 어린이를 사랑하는 정직한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동시 쓰기인 것 같습니다.
임애월 : 물론입니다. 동시를 쓰시는 시인들은 가장 순수한 영혼의 노래를 불러야 하니까요.
1996년에 《아동문예》 신인상으로 등단하셨는데 등단 무렵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김미영 : 1995년 <수원문학상 신인상> 동시 부문에 당선된 다음해 그러니까 1996년 봄, 임병호 선생님께서 동시 10편 정도를 보내달라고 하시더군요. 까닭도 여쭙지 않고 저는 사흘에 거쳐 열편이 넘는 동시를 써서 우편으로 급하게 부쳤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선생님으로부터 《아동문예》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급하게 사진을 찍고 당선 소감을 써서 선생님께 보내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진이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며 다시 찍으라고 하시더군요. 호호!
그 해 5월, 저의 등단작인 「슬픈 겨울」 외 1편이 수록된 문예지 《아동문예》를 받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시인 때문에 고생하셨을 선생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임애월 : 아무래도 김미영 시인님께선 문인의 운명을 타고나신 것 같네요. 사흘 만에 10편이 넘는 시를 쓰셨다니.....
2001년에 상재한 첫 동시집 『잠자리와 헬리콥터』에서, 잠자리와 헬리콥터가 서로에게 너무 크다거나 너무 작다고 하는 내용이었는데 참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김미영 : 제가 살던 마을 구운동은 비행기 소음 때문에 몹시 시끄러웠어요. 통화를 하지 못할 정도로요. 그러던 어느 날, 집 뒤쪽에 있는 동산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쌔액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비행기를 피해 아래를 내려다보았어요. 마침, 내 둘레를 배회하고 있는 잠자리 한 마리가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곤 이내 나는 잠자리의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잠자리의 눈으로 비행기를 올려다 볼 수 있었지요. 그러고 보니까 비행기는 소음을 내는 시끄러운 존재가 아닌 커다란 잠자리로 내 가슴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시 「잠자리와 헬리콥터」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은하수미디어’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은하수문학상> 추천우수작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우와
저렇게
크 - 은
잠자리도 있구나
잠자리가
헬리콥터를
마냥
올려다봅니다.
에게
저렇게
쪼끄만
헬리콥터도 있구나
헬리콥터가
잠자리를
마냥
내려다봅니다.
- 「잠자리와 헬리콥터」 전문
임애월 : <은하수문학상> 추천우수작이었군요. 그럴 만합니다.
이 시집 해설에서 임병호 시인은 “자연과 문명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묘미가 있어 즐겁다”라고 하셨는데. 가장 자연스러운 잠자리와 가장 문명적인 헬리콥터가 하늘에서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고 서로 즐겁게 교감하게 하는, 자연과 문명이 공존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네요.
김미영 : 공존! 참으로 가슴 따듯한 낱말이지요. 자연과 자연, 사람과 사람, 문명과 문명 등 같은 부류의 것이 공존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이야말로 더욱 의미 있는 일이지요. 가장 자연스런 잠자리와 가장 문명적인 헬리콥터가 서로 즐겁게 교감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이런 교감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내 편 네 편 편을 나누는 세상이 아닌, 끼리끼리 울타리를 만드는 세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임애월 : 어이쿠~ 동시 쓰시는 분께서 예리한 지적을 해 주셨네요.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든 끼리끼리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물론 아주 낮은 울타리들은 괜찮지만요. 서로서로 통 크게 통합적인 사고와 포용으로 아울러야 다 같이 행복해지는 삶이 되겠지요.
두 번째 동시집 『손수건에게』 해설에서 윤수천 아동문학가는 “김미영 시인의 어떤 시를 집어 들어도 놀라움과 앙증스러움을 맛보게 한다... 길이를 최소화 시켜서 속도감을 상승시킨다. 그로인해 여운은 길고 아름답다. 마치 새의 비상을 보는 듯하다”고 평하셨는데, 그 말씀처럼 작품 한편 한편의 직조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그 울림은 길거든요. 혹시 남다른 창작 습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김미영 : 글쎄요. 아주 오래 전, 중부일보에 윤수천 선생님께서 『손수건에게』를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선 짧은 동시 몇 편을 다루시며, 제 작은 키를 닮아 시의 키가 작다고 하셨어요. 그 당시 이 기사를 보곤 주위 분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답니다. 또 어느 선생님께선 제가 성격이 급해서 제 시의 호흡이 짧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 보니, 저는 꽤나 급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반면에 말을 아끼는 성격 덕분에 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표현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주간님께서 남다른 창작 습관을 들려달라고 하셨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실망을 안겨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임애월 : 실망은 하지 않습니다. 사실 남다른 창작의 비밀 하나쯤 캐내고 싶긴 했지만요. 흐흐...
순 우리말 동시집을 묶으셔서 문단의 관심을 많이 받았는데요. 몇 권(몇 번)이나 상재하셨는지요?
김미영 : 2011년부터 모두 네 권을 상재했습니다. 첫 번째 우리말 동시집 『흙탕물총 탕탕』은 ‘나비잠’, ‘손톱달’, ‘먼지잼’ 등 앙증맞은 우리말을 소재로 썼는데, 반응이 좋아서 출판사의 청탁으로 두 번째 우리말 동시집 『마늘각시』를 펴내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 세 번째 우리말 동시집 『궁둥잇바람』을, 그리고 지난해에 네 번째 우리말 동시집 『우산걸음』을 펴냈지요. 머지않아 『땅별』이 나오게 되면 곧 다섯 번째 우리말 동시집을 상재하게 되는 셈이지요.
임애월 : 네, 많이 쓰셨네요. 가장 궁금했던 질문할게요. 순 우리말로 작품을 처음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나요?
김미영 : 그러니까 늦깎이 공부를 시작하던 해 2007년쯤인 것 같습니다. 교재를 펼쳐 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낱말이 있었어요. 아기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을 뜻하는 ‘나비잠’이었는데 한참 동안이나 그 낱말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서예를 하는 후배에게 호를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요. 저는 후배의 모습을 생각하며, 앞으로 좋게 발전할 품질이나 품성이라는 뜻을 가진 ‘늘품’이란 우리말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늘품’이라는 동시를 쓰게 되었지요. 그 시를 ‘오늘의 동시문학’에 발표했는데 호평을 받자, 용기를 얻은 저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문단뿐만이 아니라 우리 어린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작업을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임애월 : 작년에도 순우리말 동시집 『우산걸음』을 상재하셨는데 그 작품집 속의 제목들 중에서 제가 들어보지 못한 우리말들도 많더라고요. 사실 우리말도 다 모르면서 출처도 불분명한 외래어나 외국어를 나도 모르게 생각 없이 쓰는 경우가 많은데, 반성해야겠습니다.
김미영 : 그래요.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반성해야지요. 아니, 반성에서 그쳐선 안 되고 바로 고쳐야겠지요. 언어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바꾸어 가야 합니다. 외래어로 표기된 간판이나 아파트 이름……무엇보다도 SNS상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ㅋㅋ,ㅜㅜ ……’ 이런 머리나 다리가 잘려나간 문자는 더욱 쓰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짧은 시간에 많은 결과물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해도 우리의 선조들이 이룩한 아름다운 언어를 더 이상 훼손하지 않았으면 해요. 이런...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너무 커졌나 봅니다.(웃음)
임애월 : 이크... 저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저도 보기에 좋지 않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냥 무심하게 쓰는 경우가 있거든요. 유행처럼 일시적인 현상이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요.
졸업식 날
우산걸음으로
시상대에 오른 영훈이.
-6년 개근을 하다니!
-참으로 훌륭해!
-자랑스럽네!
사람들이
영훈이 왼발을 칭찬합니다.
절뚝절뚝
영훈이 왼발이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 「우산걸음」 전문
2014년에 상재한 『궁둥잇바람』도 우리말 동시집이잖아요.
작품집을 쓰기 위해서 우리말 공부를 따로 하시나요?
김미영 : 그럼요. 우리말을 제대로 알아야 시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할 수 있으니까요. 처음엔 ‘국립국어원’, ‘우리말 배움터’ 사이트에서 우리말을 공부했어요. 요즘엔 우리말 연구가이신 박남일 선생님이 엮은 ‘우리말 풀이사전’을 틈틈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오는 우리말이 있으면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지요. 스마트폰을 갖기 전에는 일일이 공책에다 적어두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살아 있는 우리말을 찾기 위해 5일장 상인들의 언어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임애월 : 그러시구나. 일부러 공부하면서 고쳐나가는 분이 계신데... 앞으로는 언어생활을 조심조심 해나가야겠습니다.(웃음)
우산걸음(몸을 추켜 올렸다 내렸다하는 걸음), 곰비임비(물건이 가득 쌓이거나 일이 자꾸 계속되는 모양), 목비(모내기할 무렵 한꺼번에 내리는 비) 등 이런 예쁜 말들을 어디에서 찾으시나 궁금했는데...
김미영 : 어쩌면 일상에 대한 애착에서 우리말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목비’는 농사짓는 엄마가 비를 기다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찾게 되었고, ‘우산걸음’은 제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 걸음을 보고 얻게 된 우리말입니다. ‘곰비임비’는 물건을 쌓아놓기 잘하는 남편 덕분에 알게 되었고요.(웃음)
임애월 : 우문입니다만 우리말의 매력은 어떤 부분에서 강렬하게 느끼시는지요?
김미영 : 우문이라니요! 그렇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우리말의 매력은 섬세함에 있습니다. 그 어느 나라의 언어에 비의 이름이, 잠의 이름이 수 십 가지가 있을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빡자빡, 휘뚜루마뚜루, 퉁바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항아리처럼 투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반면, ‘손톱달, 나비잠, 먼지잼, 도래샘 등’ 선명한 이미지가 주는 매력도 있지요.
임애월 : 네, 우리말의 섬세한 어휘장은 타 언어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지요. 거기다 선명한 이미지의 우리말들은 시니피앙이나 시니피에 모두 탁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시를 쓰면 그 어휘 하나하나가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2014년에 출간하신 동시집 『궁둥잇바람』을 읽다보니까 그 책 속의 그림과 인형들이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이고, 또 판타지적인 요소도 있어서 참 재미있고 인상적이었거든요. 어떻게 그림을 받으셨지요? 출판사에서 화가나 작가들을 연결해 주나요?
김미영 : 그림 덕분에 글이 살아 보이지요? 그림 작가는 출판사에서 정했고, 인형 작가는 제가 섭외를 했습니다. 저희 집 가까이에 공방이 있어요. 부부가 운영하는 공방인데, 어느 날 보니, 인형에 동심이 담겨 있더라고요. 제 동시랑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문미경 작가님께 제의를 했더니, 흔쾌히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궁둥잇바람』 이전 동시집 『마늘각시』에도 인형이 들어갔는데, 흑백으로 미미하게 들어가서 아쉬움이 컸거든요. 아무튼 좋은 그림이랑 인형 덕분에 제 시가 산 셈이랍니다. 참, 동시집에 들어간 인형 이미지가 문미경 작가님이랑 아주 똑같아서 한 번 더 놀라기도 했어요.
가시철사 허리띠
확 풀리는 날
내 궁둥잇바람 조심해라.
일본 너희 나라 지도
우주로 날아갈라.
- 「궁둥잇바람-우리나라 지도의 경고」 전문
임애월 : 그러셨군요. 그림, 인형들 덕분에 작품집이 더 환하고 아름다워 보여요.
그 책 속의 작품 제목인 ‘안다미로’ ‘흘레바람’ ‘거적눈’ ‘거지주머니‘ ’도린곁’ 등이 무슨 뜻인지 설명 좀 해 주세요. 분명 우리말인데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아요. 제가 한국사람 맞나요?(웃음)
김미영 : 한국사람 맞지요. 호호...
담은 것이 그릇에 넘치도록 많게, 라는 뜻을 가진 ‘안다미로’는 종이컵에서 많이 보셨을 거예요. ‘흘레바람’은 비를 몰아오는 바람이고요. 위 눈시울이 축 늘어진 눈을 가리켜 ‘거적눈’이라고 하지요. ‘거지주머니’는 과실이 여물지 못하여 주머니처럼 된 헛껍데기를 뜻하고요. 사람이 별로 가지 않는 외진 곳은 ‘도린곁’이라고 합니다. 이젠 확실히 알겠지요? 주간님. 우리말을 공부하는 저도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답니다. 이렇게 헷갈리지 않으려면 우리말을 우리들의 언어 속으로 불러와야겠지요?
밥을 풉니다.
안다미로 풉니다.
그래도
진곤이 밥그릇은
입을 다물 줄 모릅니다.
나는
또
뜨거운 밥통 속으로
손을 집어 넣습니다.
-아, 엄마가 어서 돌아왔으면
- 「안다미로-슬픈 밥주걱」 전문
임애월 : 사실 책 속에 친절하게 해설을 곁들여 놨는데 작가의 육성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여쭤보았네요. ‘안다미로’라는 말은 그 의미가 푸짐해서 좋았는데, 작품 「안다미로」는 가슴이 참 아프네요.
순 우리말 시집이 4권이면 그 속의 우리말 작품들은 총 몇 편이나 되는지요?
김미영 : 186편이 됩니다. 동시집은 성인 시집과 달리, 한 권에 많은 시가 들어가지 않아서 네 권에 비해 적은 편이지요. 아직 200편도 안 되니 앞으로 더욱 열심히 써야겠습니다.
임애월 : 이 질문도 우문입니다만 개인적으로 가장 정감이 가는 우리말, 혹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우리말이 있나요?
김미영 : 처음엔 ‘나비잠’, ‘먼지잼’ 등 고운 우리말에 눈을 빼앗기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투박한 우리말에 정감이 갑니다. 많은 우리말 가운데 저는 ‘늘품’이란 낱말에 더욱 마음이 갑니다. 앞으로 좋게 발전할 품질이나 품성, 이라는 뜻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어린이들이 외우기 쉬우니까요. 그래서 말놀이를 써서 시를 짓기도 했답니다.
아기가
잠만 잔다고요?
아니에요.
팔랑팔랑 ~
꽃을 만나러 가는 거예요.
- 「나비잠」 전문
임애월 : ‘늘품’... 좋네요. ‘나비잠’도 정말 예뻐요. 아기가 나비잠을 자는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면서 기분이 참 편안해지거든요.
제 개인적으로 ‘안다미로’가 의미도 좋고 발음도 부드러워서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아니 앞으로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말 동시집을 계속 묶으실 계획인지요?
김미영 : 계속 묶어야지요. 몸이란 옷을 벗을 때까지요. 서덕출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서덕출 선생님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분이 지켜보고 계실 테니까요. 하지만 가끔, 혼란스러울 때도 있어요. 많은 선배님들께서 매너리즘에 빠진다며, 그만 쓰라고 하시거든요. 물론, 후배를 사랑해서 하시는 말씀인 줄 아는데 그때마다 고민의 늪에 서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임애월 : 독자들은 시인님께서 우리말 동시집 묶기 작업을 계속 해 나가시기를 바랄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니까요.
시인님의 순 우리말 동시집을 각 초등학교에서 부교재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지금 문득 듭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말들이 사장되어버린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또 무분별하게 조어된 외국어나 외래어를 생각 없이 쓰는 것보다, 한국적인 정서가 잘 녹아있는 우리말을 유년기에 바로 쓰게 하면, 당당한 한국인으로 성장해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김미영 : 제가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본 듯합니다. 정말이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고, 부교재로 쓰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유년기부터 아름다운 우리말을 배우고 익혀서 일상 언어로 자리 잡게 되면 더욱 당당한 한국인으로 성장해 나갈 겁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하게 되면 우리의 사회도 더욱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물론, 자연스레 조어와 속어, 외국어도 모습을 감추겠지요. 나아가 당당한 한국인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임애월 : 아까 잠깐 말씀하셨는데, 몇 년 전에 <서덕출문학상>을 받으셨잖아요? 어느 작품집이었죠?
김미영 : 2011년 그러니까 벌써 7년 전 일이네요. 울산신문사에서 서덕출 선생님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인데, 이 작은 사람이 뜻하지 않게 받게 되었지요. 수상 소식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넋을 잃고 허공만 바라보았답니다. 감당이 되지 않더라고요. 한 해 동안에 발표한 동시집, 동화집, 극본집 등 100여 권이 심사 대상으로 올라왔다고 하더군요. 『흙탕물총 탕탕』이 그 주인공인데, 아마도 문단에서 처음으로 우리말 동시집을 낸데 큰 점수를 주었나 봅니다.
임애월 : 그때 상금도 많이 받으셨다고 소문났어요.(웃음)
김미영 : 상금으로 천만 원이나 받았지요. 너무 큰 금액이라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 큰 상금을 좀 더 좋은데 썼어야 했는데, 반성하고 있어요. 앞으로 또 문학상을 타서 큰 상금을 타게 되면(욕심이겠지요)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습니다.
임애월 : 나중에 ‘김미영 우리말 동시’ 전집도 묶으셔야겠네요. 그래야 저 같이 게으른 사람들이 한 번에 쉽게 찾아볼 수 있거든요.(웃음)
김미영 : 전집을 내면 좋은데, 모 출판사에서 우리말 동시 선집을 묶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집을 출간하면 우리말을 많이 알릴 수 있어서 좋고, 선집을 출간하면 좋은 시를 보일 수 있어서 좋지요.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그럴 날이 있겠지요?
임애월 : 물론이지죠. 당연히 그렇게 될 겁니다.
좋은 작품을 열심히 쓰시니까 작년에 <경기시인상>도 받으셨지요. 축하드립니다.
김미영 : 좋은 작품이라니요! 그저 개미처럼 열심히 쓰니까 <경기시인상>을 저에게 주신 것 같아요. 그 상이 저에겐 큰 힘이 되었답니다. 그 즈음, 저는 발목 수술을 받고 많이 힘들어 했던 때였으니까요. 여러 달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시는 내 영혼의 목발이었지요! 시가 없었으면 힘든 시기를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갑작스레 그렇게 좋은 상까지 주시다니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아직도 바위를 얹은 것처럼 어깨가 무겁지만, 더욱 겸손하게 시를 써야겠지요.
임애월 : 시가 아픈 다리를 대신해 주는 ‘목발’이 되었다는 말씀에 백번 공감합니다. 시인들은 힘들고 지친 시기를 시를 쓰면서, 시에 의지해서 건너가거든요. 제가 아는 어떤 시인은 정말로 세상과 하직하고 싶었을 때 그의 팔을 붙들어 준 게 바로 ‘詩’였다고 합니다.
앞으로 동시를 쓰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어떤 도움말을 주고 싶으신지요?
김미영 : 무엇보다 현실 속 어린이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함께 호흡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다양한 동시집들을 꾸준히 읽고, 생각의 숲 깊숙이 들어가 가슴에서 길어 올린 동시를 쓸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임애월 : 어린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 동시를 쓰는 분들에게는 더욱 소중하고 필요한 일이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뵈니 제 정신이 참 맑아집니다. 시인님의 맑은 영혼에 저도 전염이 되었나 봐요.
곧 빛을 보게 될 우리말 동시집 『땅별』도 기대하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바쁘실 텐데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미영 : 저도 오늘 인터뷰를 통해 주간님의 옆모습을 오래도록 보며,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모쪼록 주간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우리말 시를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 연꽃은 진흙 속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지상에서 가장 맑은 꽃을 피운다
순 우리말 동시를 고집하시는 맑고 순수한 영혼의 김미영 시인님~
오늘따라 그 작은 키가 우뚝하게 커 보이는 건 우리말의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고
발전시켜나가려는 의지가 곧고 크기 때문이리라
호수공원 옆 갈대 숲길 따라 저만치서 이제 가을이 오고 있다 -
■□ 자선 동시 5편
목련
어느
크신 분이
이 세상을
떠나시길래
이렇듯
무리 지어
흰옷을 입고 있는가.
김미영 씨
누군가
“김미영 씨.”
하고 부르는 순간
나도
한 알의 씨앗이었다는 걸
깨달았네.
채송화씨, 오이씨, 겨자씨처럼
지구라는 커다란 밭에
뿌려진
씨앗
한
알.
진곤이
-엄마 잃은 집 5
-술고래 아빠랑
함께 안 잘 거야.
-골초 아빠랑
같이 안 잘 거야.
말해 놓고선
아빠를
끌어안고 잔다.
술 냄새도
끌어안고 잔다.
담배 냄새도
끌어안고 잔다.
늘품
늘
하품만 한다고
머리통
쥐어박지 마세요.
늘
품고 있는 게 있다구요,
에디슨처럼.
'꼴통!' 이란 말
정말 듣기 싫어요.
이렇게 불러 주세요, 아빠
'늘품!'
* 늘품 : 앞으로 좋게 발전할 품질이나 품성
어름
돌이 어깨를 움츠린다.
그 옆의 돌도 어깨를 움츠린다.
따스한 틈으로
민들레 씨앗이 들어앉는다.
* 어름 : 틈
■□ 김미영 시인 약력
- 1964년 경기도 평택 출생
- 1995년 <수원문학상 신인상> 동시 부문 당선
- 1996년 <아동문예 문학상> 동시 부문 당선
- 2007년 <아동문학평론 신인문학상> 동화부문 당선
- 동시집 『잠자리와 헬리콥터』, 『손수건에게』, 『불량식품 먹은 버스』 ,『흙탕물총 탕탕』,
『마늘각시』,『궁둥잇바람』, 『우산걸음』 등
- 수원문학상 작품상, 경기시인상, 서덕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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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생하셨어요! 주간님, 어느새 추억이 된 그날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