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監理敎會 - Methodist Church)
1. 감리교회의 역사적 기원
「존 웨슬리의 생애」, 박춘희, 감리교자료, 기독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2005. 11. 14. pp. 3-4
① 신성클럽(holy club)의 지도자 웨슬리 (John Wesely, 1729 - 1735)
웨슬리는 1729년에 동생 챨스를 중심으로 소수의 학생들이 학문과 경건의 훈련을 위하여 신성클럽을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모였는데, 초대교회의 신학을 연구하며 성만찬 예배와 금식기도 등의 경건 훈련에 전념하였다. 또한 이들은 자선사업, 감옥방문, 병자위문 등의 선한 일에 힘쓰는 생활에 전념했다. 이러한 규칙적이고 엄격한 생활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규칙주의자들(Methodists) 당시에 이 별명은 지독한 형식주의자들이란 뜻으로서 비아냥거리는 의미였다.
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감리교회의 명칭이 되었다.
② 선교사 웨슬리 (1735 - 1737)
웨슬리는 신대륙의 조지아(Georgia) 주에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하여 1735년 10월에 런던을 떠났다. 도중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는데, 자신과는 다르게 평안한 가운데 기도와 찬송을 하는 모라비안(Moravian) 당시 독일의 루터파의 한 종파로서 경건주의 생활을 주장하는 교파였다.
교도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또한 연애설에 휘말리는 등 선교에 실패를 하고 1737년에 귀국을 하게 되었다.
③ 웨슬리의 회심(1738)
귀국한 그는 링컨 대학에서 가르치며 신성클럽 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으나 깊은 좌절에 빠진 그에게는 믿음과 구원의 문제가 절박하였다. 그러던 중 1738년 5월 24일 오후 8시 45분쯤 런던 시내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거리에 있는 교회에서 한 예배 사회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도중 웨슬리는 구원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그 길로 동생을 찾아가 “나는 믿는다.”라고 외쳤다.
④ 감리교회의 설립「신학사전」, 개혁주의신행협회, 신학사전 편집위원회, 1988. p. 20
웨슬리는 체험 이후로 국교회와 단절하고 야외집회, 공회당 등 대중 집회에 힘쓰며, 속회를 만들어 기도 및 성경 공부를 시키고 또 경제적 도움이 되게 했다. 1739년에는 동조자들과 함께 감리교 신도회(Methodist United Society)를 설립하였다. 1744년에는 연회(Conference)를 조직하여 감리교회가 정식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감리교의 원리를 실천하는 새로운 기틀이 세워졌다.
2. 발전 과정
「감리교회와 속회(요약본)」, 감리교자료, 통합자료실, 기독교대한감리회, 2005. 11. 14. pp. 4-5
① 영국 감리교회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정적주의(Quietism)”, “영적자만(自慢)의 경향”, 진젠드로프 백작위주로 성장해 가는 개인숭배적 경향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모라비안 교도들과 웨슬레의 신도들 간의 주도권 문제까지 겹쳐 감리교도들만이 분리되었다. 결국 영국 감리교회는 웨슬리가 국교회, 신성클럽, 모라비안의 회원과 지도자로 있으면서 그들의 신앙단체에서 점차 벗어나 감리교회 운동으로 발전 되었던 것이다.
② 미국 감리교회
1766년 영국의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사람들(P.Embury, R. Strawbridge)로부터 시작되었다. 감리교회 운동이 평신도들에 의하여 미국에서 시작되자 웨슬리는 1769년 리드연회(Methodist Conference of Leeds)에서 젊은 교역자 리차드 보드맨(R. Boardman)과 죠셉 필모어(J. Pilmoor)를 미국에 파송하였다. 이들은 미국에 온 최초의 정규 감리교 선교사들로서 필라델피아와 뉴욕 등지(等地)에서 열심히 설교하고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감리회 회원들과 선교사들은 남부와 북부, 그리고 신개척지 서부 등으로 찾아 가면서 “복음을 설교하고 신도회와 속회를 조직하고 설교 장소를 마련하고 순회전도구역(Circuits)들을 확보해 나갔다. 미국의 감리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훌륭한 감독과 또한 순회 전도자(The circuit Rider)의 중요한 역할 덕분 이었다. 그리하여 감리교 신도 수는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3. 한국 감리교회
미 감리교는 스크랜톤(W.B.Scranton)과 아펜젤러(H.G. Appenzller)를 의료와 교육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했다. 이들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 하였다. 아펜젤러는 8월 3일에 학생 2명으로 “배재학당”을 시작 하였고, 스크랜톤의 부인은 1886년 5월 31일, 학생 1명으로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1908년 3월 11일에는 정동교회에서 제 1회 한국 연회(The First Session Korea Annual Conference)가 조직 되었다.
한편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인 윤치호의 요청으로 남감리교회의 선교가 시작이 되어 1895년 10월 13일에 동양 선교 책임자 핸드릭스 감독(E.Hendrix)과 리이드(C.F. Ried)가 내한하였다. 1898년 1월 16일에는 고양읍에서 제 1회 서울 구역회가 개최되고, 1918년 10월 31일에는 개성에서 남감리교회 제 1회 한국 연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0년 12월 2일 서울 감리교 협성 신학교에서 역사적인 기독교 조선감리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게 되어 남북 감리교회는 하나의 감리교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감리교 대부분의 신학교가 전통적 자유주의 신학 및 신정통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사회 복음주의를 강조하며 에큐메니칼(ecumenical - 교회일치) 운동에 힘쓰고 있다.
4. 감리교회의 교리
「기독교 연감」,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1976. p. 279.
신학은 알미니안(Arminian)주의로서 교리적 표준문서는 웨슬리가 1784년 미국감리교회를 위해 마련한 신앙의 25개조 및 웨슬리가 쓴 신약에 대한 설교와 노트 등이다.
① 보편적 구원
구원은 복음을 듣든지 안 듣든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② 자유 구원
인간은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③ 완전한 구원
완전한 교인은 죄를 짓지 않는다. 또한 규칙적인 생활은 교인의 완전에 이르는 필수적인 방법이다.(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
④ 확실한 구원
구원의 확실성은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 있다. 객관적이요 먼저 오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와 성령의 직접적 증거의 결과인 인간 자신의 영의 증거로 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