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승은 학생을 가르침으로써, 제자는 스승에게 배움으로써 성장한다는 뜻을 지닌 말이지요. 이 말은 원래 중국 오경(五經)의 하나인《예기(禮記)》의 ‘학기(學記)’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좋은 안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먹어 보아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극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왜 좋은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배워 본 이후에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 있으며, 가르친 후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지난주에 개강하여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인 강의가 전개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으니 많은 교수님들이 가르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100% 아는 일, 대상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늘 쉽지 않은 일이어서 처음에는 아주 막연하거나 어렴풋하기만 하다가 어느 날 문득, 때로는 가르치면서 깨닫게 되는 일도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문제는 ‘가르치는 일’과 관련된 우리말 동사 ‘가르치다’가 ‘가르키다’로 잘못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이 그 예입니다.
⑴ㄱ. 이날 찬미 어머니는 머리 감기는 법을 가르키다얼굴이 가까이 있자 “너무 가까이 붙는다. 민망하다.”라며 그를 밀었다.
ㄴ. “학생들에게 역사를 잘가르켜야나라가 바로 섭니다.”처럼 말하는 예도 흔히 보게 되는데, 세상에 ‘가르키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쓰인 ‘가르키다’는 모두 ‘가르치다’를 잘못 쓴 예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가르치다’가 ‘가르키다’로 잘못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미 눈치를 채셨겠지만, ‘가르치다’와 그 형태가 유사한 ‘가리키다’와의 뒤섞임 현상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가르치다’는 “지식이나 기능, 이치 따위를 깨닫게 하거나 익히게 하다.”를, ‘가리키다’는 “손가락 따위로 어떤 방향이나 대상을 집어서 보이거나 말하거나 알리다.”를 주된 의미로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말 동사 목록에는 형태는 비슷하지만 그 의미 영역이 전혀 다른 별개의 단어인 ‘가르치다’와 ‘가리키다’가 포함되어 있겠지요.
인간의 언어 습득 이론을 잠깐 빌리자면 형태나 의미가 유사한 단어들은 머릿속에 저장될 때 서로 가까운 곳에 저장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꺼낼 때, 말하려는 단어를 정확하게 꺼내지 못하고 잘못 꺼내거나 혼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바, 이러한 경향은 발화 실수(slips of tongue)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르키다’는 ‘가르치다’와 ‘가리키다’의 어간, 곧 ‘가르치-’와 ‘가리키-’가 뒤섞여 만들어진 발화 실수에 해당합니다. ‘가르치-’의 일부분인 ‘가르-’에 ‘가리키-’의 ‘-키-’가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르키다’가 ‘가르치다’는 물론 ‘가리키다’를 대신하여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⑵ㄱ. 유민상은 이 빵 저 빵을 가르키다신경질 나 김지민 손을 잡아챘다.
ㄴ. 사람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그를 가르켜현대판 홍길동이라고 했다.
요컨대, 예문 ⑴은 ‘가르치다’를, 예문 ⑵는 ‘가리키다’를 대체하여 ‘가르키다’가 잘못 쓰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세상에 ‘가르키다’라고 하는 말은 없다고 하니,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꺼낼 때 본래 의미에 따라 정확하게 꺼내는 일에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