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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16.08.26. (시간: AM10 ~ PM5)
장 소: 전라북도의회 2층 의원총회의실
주 관: 전라북도. 정읍시
주 최: 정읍시 역사문화연구소(소장 김재영)
1. 인사말
존경하는 전북도민 여러분!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이후 전라북도와 정읍을 중심으로 출현한 민족종교들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과 보천교의 독립운동 연구 관련 학술대회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참석하여 주신 연구자, 기자, 공무원, 관련 종교인 등 참석자 여러분!
저는 정읍시가 지역구인, 전라북도의회 문화건설 안전위원회 소속 장학수의원입니다. 먼저 오늘의 이 학술대회가 성대하게 열릴 수 있게끔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신 송하진 전라북도지사님과 김생기 정읍시장님을 비롯한 관계 공무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많은 학술적 연구를 토대로 숨겨진 진실들을 밝혀내기 위하여 30여 년 동안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 연구에 전념하여 주신 안후상 선생님을 비롯한 김재영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님, 김방룡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님, 남창희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님, 김철수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님 등 발표자 여러 분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권동우 박사님, 원영상 교수님, 강효숙 교수님, 전혜송 교수님, 박창호 교수님 등 토론자 선생님들께도 날카로운 분석과 질문으로 오늘의 이 학술대회가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고 성공한 학술대회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많은 역할과 수고를 해주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2. 학술대회의 배경
존경하는 전북도민여러분! 그리고 학술대회 참석자 여러분! 저에겐 오늘 이 자리가 그 누구보다도 감회가 깊고 가슴 벅찬, 의미 있는 자리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이 학술대회가 개최되기까지 저는 2006년부터 만 10년이라는 시간을 “일제강점기의 보천교는 연구할 가치도 없는 토테미즘을 근간으로 한 유사종교(類似宗敎)이자 사이비종교(似而非宗敎)다” 라는 편견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유사종교란 일제강점기에 탄생한 민족종교들이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한 사교(邪敎), 즉 그릇된 교리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종교라는 뜻으로 이는 조선총독부가 우리의 민족정신과 민족종교를 통제하고 말살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홍보하고 만든 정책 용어, 즉 식민지시대의 통치용어입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 이후, 반외세(反外勢)를 주창한 동학정신을 계승한 민족종교 보천교(普天敎)는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어 기댈 곳 없는 백성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나갔습니다. ‘시국(時國)’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새로 만든 정부의 요직을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국권 회복을 위한 이런 노력과 움직임들은 당시 우리 민족에겐 당연한 시대적 소명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전라도는 곡창지대로서 조선의 경제적 토대이며 곡식창고였기에 일제의 수탈현장이면서도 자금이 필요한 독립투사들에게도 목마른 우물가의 샘물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전라도의 많은 단체와 인사들은 일제와 협력의 모습을 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독립자금의 창구역할을 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민족종교를 구심점으로 뭉치면서 독립운동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는데 당시 일제가 전략적으로 유사종교, 사이비종교라고 매도하면서 탄압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우왕좌왕 하는 민중들을 새로운 종교인 천도교나 보천교를 구심점으로 뭉쳐나갔습니다. 천도교(天道敎)는 동학에서 개명된 다른 이름입니다. 1900년 초반까지 동학운동(東學運動)을 같이 하던 손병희(孫秉熙)와 차월곡(車月谷)은 종교적 형제지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05년을 기점으로 두 분은 각각 천도교와 보천교를 각각 조직하였던 것입니다.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는 3·1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반면에 차월곡의 보천교는 식민지 민중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고, 국권 회복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하였습니다. 비밀 결사적 조직운동을 펼쳤고,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는 이런 민족종교들을 철저하게 유사종교 행위로 매도하고 탄압했던 것입니다.
저는 정읍시의원의 임기가 시작된 2006년부터 일제강점기의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들이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다”는 사실들을 각종 관련 서적과 지역 어르신들의 구술로서 확인하였습니다. 이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안후상 선생을 비롯한 역사학자들께서 밝혀낸 ‘보천교의 독립운동’ 관련 논문들을 정리하여 이를 널리 알렸던 것입니다.
연구 할 가치가 없다는 “유사종교” 라는 편견과 싸워가며, 민족종교의 독립운동 조명을 위해서 권한을 가진 많은 공무원들과 지도자들을 접촉하였고, 설득을 하면서 10년을 보냈고 그리고 결국 오늘의 이 학술대회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그 누구보다도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씀드립니다.
3. 학술대회의 취지
저는 민족종교들을 “종교적 색체”에서 조명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고장에서 “반외세”라는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민족종교들이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활동사항들을 규명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왜곡되어 밝혀지지 않은 민족정신과 역사적 사실들을 자료 검증 등을 통해서 재조명하고 재평가 받아 이빨이 빠진 것처럼 잃어버린 우리의 민족운동사와 독립운동사를 정당하게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한일병합 이전인 1894년 7월 23일부터 일본군대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일제는 1945년까지 51년 동안 한국을 실제적으로 지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족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말합니다. 국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일제의 철저한 민족혼 말살 기도로 당시의 자료들이 턱 없이 부족하고, 많은 사실들이 왜곡돼 있다고 말입니다. 그나마 안후상 선생께서 보천교 연구를 위해 30여 년 동안을 각종 자료 수집과 구술 녹취 등에 힘써왔습니다. 또한 안 선생께서는 일제강점기의 법원, 검찰, 경찰, 언론 등 각종 기관에서 기록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였지만 수집된 자료(일어로 된 속기록)들을 자비로 번역하는데 한계를 느낀 안 선생께서는 당시 정읍시의원인 저를 통해 수집한 자료들을 정읍시 행정에서 번역해 자료집으로 발간하여 주기를 희망하였습니다.
2008년부터 사료 번역 자료집을 발간하기 위한 저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천교가 사이비종교 라는 일부 지도자들과 공무원들의 편견때문에 한계를 넘지 못하고 벽에 부딪혔습니다. 2013년까지 자료집 발간을 하지 못하게 되자 저와 안후상 선생은 방법을 달리하였습니다.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자료집 발간보다는 국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 먼저 “정읍의 신종교와 민족운동사 규명”이라는 학술용역 사업을 선행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3,000만원의 정읍시 예산을 지원받아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에 용역을 의뢰하여, 2014년 1월 26일에 관련 보고서를 발간하였습니다. 이 보고서를 통해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들의 독립운동 사실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학계와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후, 2014년 7월부터 전라북도 문화건설안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저는 전라북도 문화체육 관광국장을 비롯한 문화유산 관련 학예연구관 및 관계 공무원들께 “정읍의 신종교와 민족운동사 규명”의 학술용역 보고서를 소개하면서 민족종교들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사 사실 규명에 앞장서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전라북도와 정읍시가 공동으로 관련 예산 3,000만원을 확보하여 민의의 전당인 전라북도의회 의원 총회의실에서 사단법인 정읍시 역사문화연구소의 주최로 오늘 뜻 깊은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4. 학술용역 보고서 및 금번 학술대회의 성과
그간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들의 독립운동 연구가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연구에 어려움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읍의 신종교와 민족운동사 규명”의 학술용역 결과 보고서(2014)를 통해서 일제의 정보기관이 기록한 “보천교일반(普天敎一般)”과 “양촌 및 외인사정일람(洋村及外人事情一覽)” 등을 발굴(일본 학습원대학 및 국가기록원 소장)하여, 일부를 번역하게 됨으로 보천교 연구의 기본적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금번 학술대회를 통해서 발표되는 연구논문 중에는 동학사상과 증산사상을 이어받은 보천교가 독립운동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는 새로운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안후상선생의 연구논문을 보면 ‘국가기록원’과 ‘국가보훈처’에서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들의 ‘독립운동판결문’을 발굴하여 번역 공개한 내용들을 연도별로 재구성해, 보천교의 독립운동 상황을 상세하게 피력해 놓았습니다.(<표3>에서 <표6>까지)
안후상 선생은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에서 분류해 놓은 ‘독립운동판결문’ 301건을 가지고서 보천교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상세하게 논증하였습니다. 그리고 3.1만세운동 직후인 1920년에 경상북도 지역에서 222명의 보천교도가 기소된 사건인 ‘청송사건’을 들어, 당시 수백 명의 기소자를 낸 독립운동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드물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안후상 선생께서 많은 논문을 통해서 보천교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사회와 학계는 안성생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지금도 계속 판독해서 올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현재까지만 해도 국가기록원에서 ‘독립운동판결문’이라고 분류한 판결문 가운데 보천교 관련 건만 해도 301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금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들이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한 사실들이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들의 독립운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안후상 선생의 발표논문을 참고하여 주십시오.
<보천교의 대표적 독립운동 사례>
1. 1918년 10월 제주법정사 항일항쟁 주도. 국가보훈처로부터 관련 인사 70여 분이 국가유공자로 추서됨
2. 192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자 최팔용, 장덕수, 김철수 등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함.
3. 임규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돈 5만원을 지원함.
4. 1921년 워싱턴회의를 앞두고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후원하는 대 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에 보천교 대표 2명이 서명함.
5. 1921년에 경상북도 청송, 안동 등지에서 보천교인 800여 명을 체포함. 이들 중 기소된 자가 222명. 이를 ‘청송사건(靑松事件)’이라 함.
6. 1922년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에게 독립자금 지원을 함.
7.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민족회의(상하이)에 보천교 대표 2명(강일, 배치문)이 참석함. 이들은 직후에 의열단에 가입하여 국내에 잠입함.
8.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 『산업계(産業界)』 발간하는 등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보천교 교단 차원에서 참여함.
9. 독립운동가 주익, 고용환, 임규, 배치문, 조만식, 박자혜(단재 신채호부인) 등이 보천교 교도로 활동함.
10.1921년 9월 24일(음) 함양의 황석산에서 고천제를 통해 국호를 “時國”이라고 명하고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함.
5. 학계와 행정의 역할분담과 나아갈 방향
금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들이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들을 밝혀냈지만, 아직도 밝혀져야 할 부분들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금번 학술대회에서도 밝혀진 사실이지만 1919년 3·1만세운동을 전·후해서 1920년대까지 국내에서는 민족종교들이 역동성 있게 세력을 확장하면서 왕성한 민족운동과 독립운동들을 하였는데 1930년대 들어서부터는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핍박을 받게 되면서 규모 있는 민족종교들은 뿌리가 뽑히거나 근간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외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단체들의 활동역시 시기적으로 민족종교들과 동시에 흥망성쇠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1920년대 만주와 러시아지역에서 왕성한 무장독립운동을 한 단체들이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는데 이는 일제의 대대적인 소탕작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국내 민족종교들이 국외 독립운동단체들의 자금 창구 역할을 하다가 민족종교들이 일제의 핍박과 탄압을 받으면서 자금을 원활하게 지원하지 못하게 되자 국외의 무장독립운동 역시 쇠퇴기를 맞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면서 국내 민족종교들의 독립운동 활동 전개과정과 국외의 무장독립운동 활동들의 상관관계를 학계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국가와 지방정부는 학계와 학자들이 많은 관심과 연구가 진행 될 수 있게끔 각종 사료의 발굴과 자료집 발간에 적극성을 띄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아무리 유능하고 열정이 많은 학자라 하더라도 사실적 관련 사료가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접근하고 연구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8․15광복 이후인 71년 만에 독립운동과 관련한 판결문을 국가보훈처와 국가기록원에 공개하였습니다. 아직도 밝혀야 할 진실이 많다고 판단됩니다. 친일세력의 득세로 일제강점기의 왜곡된 많은 사실들을 뒤늦게라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기에,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행정 지원이 절실할 때입니다.
6. 전라북도와 정읍시의 절대적 사명과 과제
전라북도와 정읍은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일반인들은 모르는 놀라운 사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6년 6월 3일에 정읍을 방문하여 정치인 가운데 처음으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창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읍발언’입니다. 그리고 보천교의 최고위 간부였던 김홍규의 아들 택성, 즉 조계종의 대종사 탄허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백범 김구 선생은 광복 직후 정읍을 방문해 며칠 간 머물면서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승만 전 대통령은 어떤 연유로 서울이 아닌 조그마한 도시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중대한 발언을 하였으며, 백범 김구 선생은 왜 정읍에 많은 빛을 졌다고 했을까요?
이 질문의 대답이 바로 우리 전라북도와 정읍시가 풀어야 할 절대적 사명이자 과제입니다. 이 절대적 사명의 과제가 풀리는 날이 온다면 분명히! 반드시! 전라북도와 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의 성지에 이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의 중심지” 로 우뚝 솟아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6. 08. 26
전라북도의회 문화건설안전위원회 장학수
학술대회 발표 논문
1. 강증산과 차월곡의 개벽사상(김방룡) 토론(권동우).hwp
2. 동학이후 증산계열의민족운동(김재영) 토론(원영상).hwp
3.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안후상) 토론(강효숙).hwp
4. 보천교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영향(남창희) 토론(전혜송).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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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제 기록으로 본 보천교민족주의성격(김철수) 토론문(박창호).hwp
2015.06.10일 새전북신문에 보천교 독립운동 관련 기고한 글입니다.
조명되지 않은 놀라운 사실! 한국의 독립운동 중심지 정읍!
http://cafe.daum.net/janghaksoo/DG9i/6
보천교 독립운동관련 학술대회 동영상 및 사진과 뉴스 및 신문 보도자료 2016.08.26
관련싸이트 http://cafe.daum.net/janghaksoo/D9Fy/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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