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techholic
키보드 배열 방식은 쿼티(QWERTY)가 쓰인다. 키보드를 처음 보면 왜 이런 이상한 배열을 선택했을까 의문을 품어본 적이 한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이런 키보드 배열은 타자기에서 비롯됐다. 타자기는 한 명이 발명한 게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발명과 개선을 거듭하며 지금 형태로 발전한 것. 타자기 초기 발명가 가운데 한 명인 영국의 헨리 밀은 1714년 문자를 깨끗하고 정확하게 하나씩 명기하거나 공문서를 작성할 때 유용한 수단으로 타자기 특허를 냈다. 물론 이 장치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당시에는 타자기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 카본지는 발명되지 않은 상태였다.
카본지를 처음 이용한 타자기는 1867년 6월 미국 과학잡지인 사이언티픽아메리칸에 게재된 존 프래트가 발명했다. 이 타자기는 문자판을 누르면 망치가 내려오면서 종이에 한 글자씩 문자를 누르는 형태였다.
프래트가 발명한 타자기는 현재 키보드와 달리 문자가 화면에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키 수는 17개였다. 문자마다 키를 하나씩 배치한 첫 타자기를 개발한 건 덴마크의 라스무스 몰링 한센. 그가 1865년 발명한 타자기는 돔 형태로 이뤄져 있어 여기에 입력용 키를 배치한 모양이었다. 키를 누르면 망치가 내려오면서 종이에 문자를 인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타자기로는 문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자 키 배치도 자주 사용하는 걸 빨리 누를 수 있게 손가락 아래쪽에 배치하는 등 이어 등장하는 다른 타자기 배치에 영향을 줬다. 그는 이 타자기를 들어 필기보다 빠르게 문자를 인쇄할 수 있는 첫 타자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타자기를 개발한 건 크리스토퍼 랜텀 숄스다. 그는 1846년 타자기를 설계했다. 피아노 스타일 키보드를 채택했고 건반에는 어떤 문자인지 나타내는 알파벳을 새겼다. 이 타자기는 특허 7868호를 취득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숄스는 이런 스타일 키 배치를 포기하고 1870년 새로운 타자기를 개발한다. 대문자 2∼9까지 숫자, 하이픈과 쉼표, 마침표, 물음표 키를 배치하는 등 현대 키보드와 비슷한 키 배치를 택했다. 이런 키 배치는 기본적으로 알파벳 순으로 되어 있었지만 모음을 문자열 맨 위에 배치한 게 특징이다. 아메리칸텔레그라프웍스(American Telegraph Works)는 이 타자기를 구입하고 싶다는 제의를 숄스에게 하지만 당시에는 타자기가 아직 생산되지 않아 키 배치 일부는 바꾸게 된다.
쿼티 배열 자판은 여기에서 탄생한다. 쿼티 자판 배열은 모스 부호를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키보드 홈 포지션에 자주 사용ㄷ하는 문자를 배치한 것이다. 하지만 쿼티 키보드가 탄생한 19세기 미국에선 모스 부호는 현재 모스 부호와 다른 쓰임새로 쓰였다. 당시 미국 모스 부호는 현재 국제 기준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개량을 한 키 배열 타자기는 1872년 8월 10일 사이언티픽아메리칸에 게재된다.
키 배열을 보면 횡렬로 QWE.TY 문자가 줄지어 있는 등 현재 키 배열과 매우 가까운 형태였다. 이 타자기가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키 배열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후 숄스를 비롯한 다른 개발자들은 당시 재봉틀 제조로 잘 알려진 레밍턴앤선즈(Remington & Sons)에 타자기 제조를 의뢰했고 레밍턴은 계약에 서명했다. 이를 통해 1873년 첫 타자기인 숄즈앤글리든(Sholes & Glidden Type Writer)을 생산한다.
이 때 숄스는 타자기 특허를 1만 2,000달러에 덴스모어앤요스트(Densmore and Yost)에 팔아버린다. 또 숄스앤글리든 타자기에선 O와 I가 9 키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숄스의 요구에 따라 Y가 T 옆에 오는 형태로 배치를 바꿨다.
1878년에는 바이런 알든 브룩스가 플래튼시프트 머신(platen-shift)을 발명한다. 이 제품은 키 하나로 문자 2종을 입력할 수 있는 것이다. 레밍턴은 이 방식을 채택한 타자기를 1882년 출시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쿼티 자판은 쿼티 브랜드를 위해 만들어진 배열도 아니다. 초기 타자기 사용자였던 모스 부호 운영자를 위해 설계된 것이었던 것. 또 당시에는 속기사가 타자기를 이용하면 분당 100단어 이상을 기록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