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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을 이용하여 흥선대원군 묘를 찾아 갈려고 경춘선 마석역에 왔습니다
경춘선 마석역에서 흥선대원군 묘역까지 거리는 약 1.5km 입니다
마석역에서 이동했던 붉은 실선따라 롯데마트를 지난
삼거리 전신주에
붙여저 있는 이정표에는 삼거리부터 흥선대원군 묘까지 거리는 900m라고 쓰여 있습니다.
1.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 7월 23일 ~ 1917년 3월 22일) 조선26대 고종왕의 형인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다. 초기에는 반일적 성향이었으나, 만년에는 친일적 성향으로 변절했다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둘째아들 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다.
대원군은 기회만 오면 언제나 탐탁지 않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시키고
완은군, 흥친왕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기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더구나 대원군은 이준용에게 기대를 걸고, 그를 왕위에 앉히려 추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1912년 의희 공으로 강등(降等)된 아버지 흥친왕이 죽자, 1913년 9월 20일 이준(李埈)으로 이름을 개명한 뒤 공(公)의
지위를 상속받아 이준 공(公)이 되었다
롯데마트 앞을 지나 삼거리에 이르면
아래와 같이
흥선대원군 묘역으로 가는 길 안내를 받게 됩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
흥선대원군 묘를 찾아 갑니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친부 입니다
남연군은 조선 인조의 후손으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5대손인 진사 이병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능장대군의 7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에서는 멀었으나 그가 영조의 혈통
사도세자의 손자인 은신군에 양자되면서 계동궁의 상속권 및 왕위 계승권에 근접하게 되었다
남연군의 원래 이름은 채중(寀重)이었는데, 순조 때인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이구(李球)로 개명하였고
남연군에 봉해졌다. 그해 121월 9일 순조의 명으로 자녀 없이 죽은 은신군의 양자로 지명되어
남연군의 작위를 받고, 이름을 채중에서 구(球)로 고처졌다
조선 제16대 인조왕(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년 8월 16일 ~ 1636년 1월 16일)의 3남 인평대군 6대손 남연군은
장형세자(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 태어난 은신군 양자로 입적 합니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가계도를 보면
흥선대원군은 사도세자의 핏줄인 것처럼 보이지만, 흥선대원군 부친인 남연군은
인조(조선 제16대 왕)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아들인 남연군을 사도세자 핏줄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에 태어난 강화도령 이용범을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하여 제25대 철종왕으로 즉위 합다
조선 왕조의 대원군 제도
조선 왕조의 대원군 제도는 방계의 시작인 선조 때부터 실시되었다. 선조는 아버지를 덕흥대원군으로, 인조는 아버지를
정원대원군, 철종은 아버지를 전계대원군, 고종은 아버지를 흥선대원군으로 추존했다.
이렇게 조선 왕조에는 대원군이 4명이었으나, 인조의 생부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3명이 되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는 남연군 이구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은 제26대왕 고종이다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는 원래 제16대왕 인조의 혈통으로 4남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이이였으나,
뒤에 영조(21대왕)의 핏줄로 아들 없이 사망한 사도세자의 넷째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조선 제26대왕이자 대한제국 고종항제는
흥성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이명복(재황) 입니다
흥선대원군(이하응) 묘는
조선 왕릉 42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정조가 죽은 후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60년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3년 3개월 세도 정치) 두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이뤄지듯 흥선대원군은 12살된 고종(제26대 왕)을 왕위에 앉혀 놓고 조선 말기 10년동안 섭정을 펼치며 쥐락펴락하였지요
조선시대에는 미성년자(어린 나이)로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될 때까지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국정을 처리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는 임금이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을 보좌하여
정치적 능력을 함양하고 왕실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합니다
기록상으로 한국에서 제일 먼저 수렴청정을 한 것은
53년 고구려 제6대 태조왕이 7세로 즉위하자 태후(太后)가 수렴청정한 경우라 합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1752년 09월 22일 ~ 1800년 06월 28일)가 1800년 6월 28일 승하하자,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정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순조(1790년 06월 18일 ~ 1834년 11월 13일)가
1800년 7월 11살의 어린 나이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영조계비<英祖繼妃 >)가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으로 임금을 보좌하며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순조가 즉위할 당시에는 혼례전이라 왕비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정조(22대 왕)가 생전에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자신의 며느리를 2차 간택까지해 놓은 상태였으며 정조의
유탁(죽은
1802년(순조 2) 10월 김조순(金祖淳)이 그의 딸을 순조의 왕비(王妃: 純元王后)로 가례를 치른 후부터
약 60년에 걸친 안동김씨 가문에 의해 세도정치가 시작되지요
(풍양조씨 외척은 3년 3개월 간 세도정치를 함)
영조(21대 왕, 영조의 계비로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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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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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22대 왕, 후궁으로 수빈 박씨는 <반남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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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23대 왕, 순원왕후는 순조의 정비로 안동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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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신정왕후는 풍양 조씨<조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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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24대 왕, 왕비 효현왕후는 안동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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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25대 왕, 왕비 철인왕후는 안동 김씨)
1834년에 순조가 승하하고 헌종이 왕위에 오른 뒤, 1837년(현종 3)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를
왕비로 맞이한다
(헌종의 어머니는 신정왕후로 풍양조씨<豊壤趙氏, 조대비>)
1890년 헌종에 이어 철종(재위1849~1863)이 왕위에 오르자 이번에는 철종의 왕비가 김문근의 딸이였기 때문에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또 15년간 계속 이어지게 되며
세도 정치로 왕권을 쥔 인동김씨 외척들은 이씨 조선의 대를 이을 영리한 왕손들은 샅샅이 찾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며 모조리 척결할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왕손으로 살아 남기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시중의 무뢰배들과
어울려 다녔고, 정신병자 같은 미친 개노룻 행동을 하며 그들의 눈을 속였다.
안동 김씨들에 의해 수백년 이어갈 듯한 세도정치도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26대 왕으로 즉위 하면서
외척에 의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세력은 몰락하게 됩니다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효명세자(추존 : 익종)의 부인이며 조선 제24대 왕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흥선군과 뜻을 같이하며, 철종이 승하 하면서 1863년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재명)이 12살로 어린 나이에
조선 제26대 왕위에 죽위하였기 때문에 조대비가 잠시 수렴청정을 하다가
흥선대원군에게 모든것을 위임하여 어린 고종이 성년이 될때까지 10년 동안 섭정으로 정권을 휘두르게 되지요
안동김씨의 외척 세도정치에 소름이 끼칠정도로 염증을 느끼며 풍양 조씨의 세도를 두려워한 대원군은
1866년 봄 고종의 왕비인 며느리를 간택할려고 할 때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흥선대원군에게 친가의 숙항(叔行)이 되는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천거하게 되고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빼앗겼던 세력을 되찾아오고자 했던 조대비(풍양 조씨)는
고종의 비를 자신의 친정 일가인 조면호의 딸로 정할 계획을 세웠으나 대원군의 반대로 무산되지요
1866년 2월 15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
왕비로 정해진 때는 3월 6일 삼간택에 뽑힌 민자영은 아버지도 없고 형제나 혈육이 없는 규수로 최종 왕비로 낙점 됩니다.
대원군은 민치록 내외가 이미 고인이 된되다, 처남인 민승호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잇고 있었기 때문에 외척에
대한 세도정치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선 1866년 3월 20일 운현궁 노락당에서 고종과 가례를 올립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동 김씨 김병학의 딸,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파락호
생활을 할적에 비밀 뮥계를 체결했으나, 약속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김병문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왕비가 된 명성황후였는 중전이 됐을 때의 첫인상 그대로 얌전하고 온순한 중전이었으나,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1868년 궁인 이씨가 고종의 첫아들인 완화군을 낳았을 때부터라고 한다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귀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을 낳았을 때 대원군은 도에 넘칠 정도로
몹시 기뻐했고, (이로써 종묘사직이 더욱 튼튼해졌다)고 하며 고종에게
기쁨을 털어놓았는데, 그때 옆에 있던 명성황후를 거의 무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1871년에 명성황후가 첫 아이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아 막히는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는다.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에 산삼을 너무 많이 넣고
달여 먹였기 때문에 어린애가 죽었다고 의심하고 이 무렵부터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싫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0년간의 흥선대원군 섭정이 끝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흥선대원군의 외척 정치의 예상은 빗나가기 시작 합니다
민비(閔妃)를 비롯한
민씨 척족인 외척의 세도 정치로 국가 요직을 완전 장악한 민비 외척이
대원군의 정적으로 발전하여 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게 하는 결과로 정치적 충돌이 이어집니다
1821년 1월 24일 한성부 북부 안국방 소안동계(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안동궁에서 출생한 흥선대원군은 8세에 맏형
흥녕군 이창응의 사망에 이어 12세에 어머니 여흥군부인 어흥 민씨를 여의고, 17세 때에는 아버지 남연군을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아버지가 계실적엔 남연군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인척인 인연으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수학하기도 했다. 후일 그가 난초나, 매화, 대나무 등 사군자 그림,
특히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석파란 등을 그린 것은 모두 김정희에게서 배운 미술로 인한 것이었다.
흥선대원군 묘로 가는 산자락 마을길에서 담아본 고래산 입니다
고래산은 천마지맥 이정표(마루금)라고 표기 한곳에서 400m 떨어저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청년기인 1834(순조 34년)년에 흥선부정(興宣副正)에 봉작되고 자신대부(資信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835년 보신대부(保信大夫)로 승진,
1836년에는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1841년(헌종 7년) 창의대부(彰義大夫)로 승진한 뒤 흥선정(興宣正)에 봉작되고, 흥선도정(興宣都正)을 거쳐
1843년(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효현왕후(孝顯王后)의 국상 때 수릉관(守陵官)으로 참여하여
소의대부(昭義大夫)로 승진한 뒤 다시 중의대부(中義大夫)로 승진하였다.
1844년 (헌종 10) 승헌대부(承憲大夫)와 숭헌대부(崇憲大夫)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다시 가덕대부(嘉德大夫)로 승진했다.
1845년 의덕대부(宜德大夫)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다시 흥록대부(興祿大夫)로 승진했다
1846년 수릉(綏陵)의 이장 때 수릉천정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 수빈관(守殯官)이 된 후 도감(都監)에
참여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으며,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었다가 다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임명되었다. 이후
비변사당상을 거처 1847년(헌종 13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로 선발되었지만 가지 않았고, 같은 해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 그해 청나라에동지사가 파견될 때 주원(厨院) 제조 겸 전의서, 사포서, 전설서, 조지서
제조에 겸임 임명된 뒤 동지사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을 다녀왔다.
그해 다시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
1847년 종친부(宗親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재직할 때, 선파인(璿派人·전주 이씨 중에서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신역 면제를 관장하는 등 종친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하였다.
종친부의 권한확대를 위해 흥선군은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정치적 거래를 시도하였다
종친부 유사당상 재직 중 그는 왕실의 족보 편친을 종친부에서 간행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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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副正) : 조선 시대에, 종친부ㆍ돈령부ㆍ봉상시ㆍ사복시ㆍ군기시와 그 밖의 여러 관아에 둔 종삼품 벼슬. 태종 14년(1414)에 소감(少監)을 고친 것이다.
돈령부(敦
봉상시(奉
시호(諡
사복시(司
소감(小監살필 감) : 1.
3.
자신대부(資信大夫) : 조선 시대에 둔, 종삼품 종친(宗親)의 품계. 보신대부의 아래로, 고종 2년(1865)에 문관 품계인 중훈대부로 통일하였다.
보신대부(
종이품(從二品) : 1. 고려 시대의 18품계 가운데 넷째 등급. 문산계의 금자광록대부 금자광록대부ㆍ광정대부ㆍ정봉대부
통헌대부. 광록대부ㆍ영록대부ㆍ봉익대부ㆍ자덕대부 등과 무산계의 진국대장군 등이 해당한다.
2. 조선 시대의 18품계 가운데 넷째 등급. 종친(宗親)의 중의대부ㆍ정의대부ㆍ소의대부, 의빈(儀賓)의 자의대부
순의대부, 문무(文武)의 가정대부ㆍ가의대부ㆍ가선대부 등이 해당한다.
승헌대부(承憲大夫) : 조선 시대의 정이품 종친(宗親)의 품계. 숭헌대부의 아래로, 고종 2년(1865)에 문관의 품계인 자헌대부로 통합하였다
숭헌대부(崇憲大夫) : 조선 시대에 둔, 정이품 종친(宗親)의 품계. 고종 2년(1865)에 문무관의 품계인 정헌대부로 통합되었다.
가덕대부(嘉德大夫) : 조선시대에 종일품 종친에게 주던 품계. 세종 25년(1443)에 일반 문산계로부터 독립하여
제정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다시 종친에게도 일반 문산계를 적용하였다.
의덕대부(宜德大夫) : 조선 시대에 둔, 종일품 문관의 품계. 종친에게 주던 벼슬로, 정조 9년(1785)에 초기의 유덕대부를
고친 것이다. 고종 2년(1865년)에 숭정대부로 통일되었다.
흥록대부(興祿大夫) : 조선 시대에 둔 정일품 종친의 품계. 현록대부의 아래이며 고종 2년(1865)에 상보국숭록대부로 고침
품계(品階) : 여러 벼슬자리에 대하여 매기던 등급. 제일 높은 정일품에서 제일 낮은 종구품까지 18단계로 나뉘어 있다.
벼슬 :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 또는 그런 일. 구실보다 높은 직이다.
대종관(代尊官) : 귀한 관위. 또는 높은 지위.
관위(官位) : 예전에, 벼슬자리 또는 직위를 이르던 말, 관리나 벼슬의 등급.
수빈관(守殯官) : 조선 시대에, 능묘(陵墓)를 옮길 때 빈소를 지키던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도감(都監) : 조선 시대에 둔 오군영의 하나. 수도 경비와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의 삼수군(三手軍) 양성을
맡아보던 군영으로 선조 때에 설치하여 고종 19년(1882)에 없앴다.
포수(砲手) : 총과 대포를 가진 군사.
살수(殺手) : 칼과 창 따위를 가진 군사.
사수(射手) : 대포
삼수군(三手軍) : 15
가자(加
당상(堂
현록대부(顯
숭록대부(崇
동반(東
비변사당상(備
당상(堂
동지사(冬
유사당(有
충훈부(忠
기로소(耆
주원(廚
사옹방(司=맡을사,
전선사(典
사포서(司
조지서(造
도총관(都
선파인(璿
흥선대원군 묘로 가는 산자락 마을길에서 천마산도 조망되는군요
천마지맥 마루금이 지나는 곳의 봉우리 입니다(오색채운 천마지맥 산행기를 참조 하세요)
경원군 이하전과 흥선군 이하은은 이름으로만 봤은 땐 형제로 혼돈할 수 있다
경원군 이하전의 아버지 완창군 이시인(完昌君 李時仁, 1805년 5월 2일 ~ 1843년 3월 11일)은 생부는 통덕랑(通德郞)
이옥(李𪸛)의 아들인데 1830년(순조 30) 백부(큰아버지) 완성군 이희(完城君 李爔)의 양자로 입양 되었다.
헌종조와 철종조에 왕위 물망에 올랐던 경원군 이하전(李夏銓)의 아버지 완창군 이시인(完昌君 李時仁)은
1862년(철종 13) 아들 이하전이 김순성(金順性) 이긍선(李兢善) 등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어 모반하였다는
오위장 이재두(李載斗)의 무고로 제주도로 유배된 뒤 사사되자, 1862년 그도 아들 이하전의 죄에 연좌되어
종친부(宗親府) 상소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손(祀孫)인 완성군(完城君) 이희(李爔)의 계자(繼子) 이시인을
파기시켜 본종(本宗)으로 되돌려 보내 파양되었다가
1872년(고종 9) 7월 25일 다시 덕흥대원군의 13대 봉사손(奉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처 여흥부대부인은 그의 고종사촌이 되는데, 생조 이옥의 딸 중 한명은
민치구와 혼인하여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정어머니이자 고종의 외조모가 된다
도정궁(都正宮) 역대 주인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1559년), 조선 제14대왕 선조(宣祖)의 사친.
제1대 의헌공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1545년~1597년), 호성원종2등공신.
제2대 종실 당은군 이인령(唐恩君 李引齡, 1562년~1615년)
제3대 종실 응천군 이돈(凝川君 李潡, 1579년~1617년)
제4대 동지돈녕부사 이정한(李挺漢, 1601년~1671년)
제5대 동지돈녕부사 이홍일(李弘逸, 1640년~1718년)
제6대 돈녕도정 증 참판 이세정(李世禎, 1661년~1721년)
제6.5대 진사 이명좌(李明佐, 1681년~1722년), 임인사화 연좌
제7대 돈녕도정 증 이조판서 이명회(李明會, 1685년~1727년), 임인사화 연좌
제8대 돈녕도정 증 좌찬성 이형종(李亨宗, 1706년~1759년)
제9대 판돈녕부사 이풍(이례)(李灃, 1727년~1795년)
제10대 진안군 이언식(晋安君 李彦植, 1752년~1819년)
제11대 완성군 이희(完城君 李爔, 1771년~1830년)
제12대 완창군 이시인(完昌君 李時仁, 1805년~1843년)
제13대 증 경원군 이하전(慶原君 李夏銓, 1842년~1862년), 헌종조, 철종조 왕위 물망.
제14대 창산군 이해창(昌山君 李海昌, 1865년~1945년)
제15대 승지 이덕주(李德柱, 1887년~1962년)
제16대 이우갑(李愚甲, 1918년∼1950년)
제17대 이영기(李英基, 1946년∼)
이하전(李夏銓, 1842년(헌종 8) 2월 15일 ~ 1862년 8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덕흥대원군의 13대 사손으로
도정궁 이하전(都正宮 李夏銓) 사손(嗣
8세이던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유력한 왕위 계승과 철종 사후에도 왕위 계승 후보로 주목받게 되었으며
안동 김씨의 세도로 관직이 임명되는 것에 분개한 그는 철종에게 직언을 고한다
<이 나라 조선이 전주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안동 김씨의 나라입니까?> 하는 항의를 하였다가 이발언이 결국
문제가 되어 1862년 김순성, 이극성 등의 추대를 받았다는 무옥으로서 제주도로
부처(付處 : 벼슬아치에게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 되었고, 끝내 역모로 몰려
1862년 8월 11일 철종이 사약을 내려, 8월 20일 향년 21세로 사사되었다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이자 종친으로서의 자존감과 기세가 한없이 드높았던 이하전은 그렇게 만 스무 살의 나이로 제주도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순조(제23대 왕) 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똑똑하다 싶은 왕족들을 잡아다 누명을 씌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으로 통해 이하전의 고모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큰 충격을 받아 이후 더욱 철저희 몸을 낮추고
야심을 감추며 일부러 미치광이로 가장하여
안동김씨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며
투전에 가담하기도 했고 세도 가문의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걸식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식은 전조각에다가 침을 뱉어 내던지면 그것을 얼른 주워 도포 자락에 닦아 크게 웃으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욕까지도 감수하면서 살아 남기 위해
파락호(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흥선대원군 묘라고 표지석이 있는 것을 보니
흥선대원군의 묘 입구인가봐요
뒤볼아 보고~
알알이 여물가는 깨밭도 지납니다
흥선대원군 묘역이 보이는군요
조선 제26대왕이며 대한제국의 1대 황제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묘 입니다
1.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 7월 23일 ~ 1917년 3월 22일) 조선26대 고종왕의 형인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다. 초기에는 반일적 성향이었으나, 만년에는 친일적 성향으로 변절했다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둘째아들 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다.
대원군은 기회만 오면 언제나 탐탁지 않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시키고
완은군, 흥친왕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기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더구나 대원군은 이준용에게 기대를 걸고, 그를 왕위에 앉히려 추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1912년 의희 공으로 강등(降等)된 아버지 흥친왕이 죽자, 1913년 9월 20일 이준(李埈)으로 이름을 개명한 뒤 공(公)의
지위를 상속받아 이준 공(公)이 되었다
국태공 원소
국태공 : 흥선 대원군 이하응을 높여 이르는 말
원소 : 왕세자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라고 합니다
대원군의 묘는 원래 1898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아소당 뒤뜰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1908년 1월 30일 파주군 운천면 대덕리로 천봉하면서 흥원(興園)로 격상되었다
이후 1966년 6월 16일 남양주군의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문인석과 석마 입니다
장명등과 망주석
망주석이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
국태공 원소와 혼유석 입니다
흥선대원군 묘 우측엔 문인석과 석마 입니다
봉분 좌측의 무인석과 석마 입니다
국태공 원소에서 백봉산이 정면에 조망 됩니다
국태공 원소 곁에는 석양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묘 정면으로 조망되는 백봉산
흥선대원군묘 우측으로 조망되는 천마산과 마치고개 입니다
흥선대원군 묘 뒷쪽으로 산책로가 나 닜습니다
흥선대원군 묘 우측으로 천마산이 조망 됍니다
국태공 원소에서 백봉산과 마치고개 그리고 천마산이 조망되는군요
천마산에서 ▶ 마치고개를 거처 ▶ 백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천마지맥 마루금 입니다
흥선대원군묘 바로 옆에는 납골묘 형태의 운현궁 가족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는
1. 대원군의 증조부 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1720년 ~ 1737년)과 부인 달성 서씨(達城 徐氏)
2.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년 ~ 1771년)과 남양 홍씨(南陽 洪氏)
3.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1845년)~ 1912년)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여주 이씨(驪州 李氏)
4.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 ~ 1917년)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광산 김씨(光山 金氏)
5.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문용(李𪣢鎔, 1882년 ~ 1901년)
6. 흥선대원군의 증손 이우(李鍝, 1912년 ~ 1945년)와 부인 박찬주(朴贊珠)
7. 흥선대원군의 고손 이종(李淙, 1940년 ~ 1966년)이 매장되어 있다
이종, 이청, 이우(李鍝), 이문용, 이준, 흥친왕, 락천..
흥선대원군의 가계도 입니다
흥영군 이우(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 32세)는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의 손자인 이우는 여섯 살 때인 1917년 3월 22일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한 뒤 5월 28일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그때부터 이우는 이준용이 가지고 있던 공(公)의 지위를 물려받아 이우 공으로 불림과 동시에
왕공족에게만 허락된 ‘전하(殿下)’란 경칭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원자폭탄을 얻어맞고 충격에 빠져있던 1945년 8월 14일 해질 무렵,
한 대의 비행기가 김포비행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특임비행이라 명명된 이 특별비행편에는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사망한 흥영군 이우의 유해와 유물을 싣고 있었다.
일본군 장교로 히로시마에서 복무하던 중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사망했다
왕족들 가운데 유난히 민족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강했던 그는 일본인과 결혼한 영친왕 이은과 덕혜옹주를 보면서
자신은 일제의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고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중추원 부의장 박영효의 서손녀로 동경학습원 중기에 재학 중인 19세의 박찬주와의 결혼했다.
흥영군 이은과 박찬주는 1936년에 장남 이청, 1941년에는 차남 이종을 얻었다
운현궁파 가족 납골묘 입니다
1. 영선군 이준용 묘는 흥선대원군 손자 입니다
2. 흥친왕 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적장자(
흥친왕은 1863년 음서로 사용이 되었으며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집권기간 중
도승지, 참의, 직제학, 이조와 형조, 병조판서를 지냈다. 1874년 11월 이후 흥선대원군은
흥친왕의 아들이준용을 고종과 민비를 몰아내고 추대하려고 4회의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 합니다
조선 헌종과 철종이 연이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이재면 역시 유력 왕위계승권자로 지목되었으나 철종이 사망할 무렵
그는 성인이었기에 왕위계승권 서열에서 밀리게 되었다.
운경궁파 가족 납골당에서 바라본 천마산과 마치고개 입니다
흥선대원 묘를 둘러보고 마석역으로 이동 합니다
뒤돌아 보고~
곧 오른쪽밭에 깨가 심겨저 있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대원군 묘에서 마석역으로 갈 때는 무인카메라가 설치된 깨밭에서 왔던 길을 헌고무신짝 버리듯
깨밭 오른쪽 사잇깃기로 진행 합니다
깨밭에서 조망되는 고래산은 천마지맥 마루금에서 0.4km 떨어저 있습니다
깨밭에서 왔던길 한번 뒤돌아 보고선 마석역으로 진행 합니다
깨밭에 붙어있는 산능선을 넘어니 마석역이 바라보이며 천마산도 조망되는군요
아하~
흥선대원군 묘로 갈적에 지나쳤던 롯데마트 입간판도 보이는군요
오른쪽 아래 길따라 마석역으로 가고 있습니다
마석역에 다 왔군요. 이젠 마석역에서 금곡역으로 이동하여
다시 찾게되는 홍유릉으로 갑니다
다시 찾은 홍유릉에서는 많은 자료들을 올려 볼까 합니다
다시 찾은 홍유릉 1부로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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