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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기 (2003.5.25.)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잠에서 깼다. 밖에는 여전히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해서 창문부터 열어보았다. 토요일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늘 금정구민의 날, 달리기 행사에 차질이 있겠는데․․․.'
혹시 대민봉사정신이 투철한, 발 빠른 공무원이 있어 홈페이지에 우천으로 인한 행사 안내라도 올려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컴퓨터를 켜 보았으나․․․.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금정구청, 행사 진행팀에 전화를 해보니, 우천불구하고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며, 달리기행사도 마찬가지란다. 서둘러 마눌님을 독촉하여 아침밥을 짓게 하고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두 아들놈들을 깨웠다.
달리기 출전 날에는 늘 그러하듯 마눌님께서 정성껏 준비한 찰밥을 먹고 서둘러 금정체육공원으로 향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바람마저 불었다. 주차 후 달리기행사장으로 찾아가서 식구 수대로 기념티셔츠를 받았다.
'이제 기념품도 받았고, 비도 많이 오니 그냥 집으로 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으나, 왠지 비겁한 행동 같았다. '그래 비겁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지. 더구나 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보고 있는데․․․. 아빠의 용감무쌍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마라톤클럽 '막달리자'는 단체 출전을 한 듯 제법 많은 인원이 수기(手旗)와 플래카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비록 B급 수준일지라도 부산교사마라톤의 명예를 걸고 한판 겨뤄보고 싶은 戰意(전의)가 나도 몰래 불타올랐다. 시간을 보니, 9시 40분. '이크, 출발 이십분 전이구나! 늦었는데․․․.'
우선 스트레칭에 들어갔다. 스트레칭 하는 것만 봐도 벌써 고수와 하수는 구별되는 법. 그간 우리 동호회에서 수없이 갈고 닦은 다양한 종류의 스트레칭을 물 흐르듯 유연한 동작으로 하고 있자니 벌써 주위의 시선이 나에게로 온통 집중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고난도의 스트레칭까지 가볍게 끝내었다.
이제는 웜업(warm-up)이었다. 충분히 몸을 데워놓아야 힘도 덜 들고 스피드도 낼 수 있다. 더구나 지금 내 주위에서 날 고수로 알고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경쾌한 몸놀림으로 서서히 그리고 빠르게 달리기․․․. 마무리를 겸해 짧은 전력질주를 서너 차례 정도 했을까․․․. 아까부터 흠모하는 눈초리로(나는 분명 그렇게 느꼈음) 나의 동작 하나 하나를 예의 주시하던 한 젊은이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저어․․․. 혹시, 오늘 달리기행사 참가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씩씩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까 방송하는 거 못 들으셨나보지요?"
"네? 무슨 방송?"
"비로 인해 달리기 행사 취소한다고 방송했는데요. 저는 행사담당 직원입니다만․․․."
"네? 뭐라고요? 띠웅․․․ @#$%^&*#@^%$!!!
그렇다면 아까 흠모하는 듯한 눈초리들은 모두 다․․․.
그야말로 달밤에․․․. 그것도 비 오는 달밤에 체조한 격이었다.
주말 연습후기 (2005.11.15.)
지난 토요일 성지곡 호수 주변의 나무들은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 그리도 무성했던 푸른 잎사귀들은 세월의 흐름을 쫓아 그 빛깔을 바꾸더니 이제는 한 잎 두 잎 땅으로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나무들이 겨울이 오기 전에 잎들을 죄다 떨구어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은 혹독한 긴 겨울을 넘기 위해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려는 그들의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듯하지만, 자연의 섭리에 순응할 줄 아는 슬기로운 이 나무들은 내년에는 더욱 크게 자란 모습으로 우리들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토요연습에는 이진구, 허해원, 조성일, 서성수, 노재준, 천상오, 김명주, 김미선, 김외련 선생님과 저가 막바지에 이른 성지곡의 가을 서정을 함께 했습니다. 신해봉·최은희 선생님 부부께서도 뒤에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사정이 있어 먼저 가신 몇 분외에 함께 목욕하고 저녁식사도 같이 했습니다. 이번 경주동아마라톤에서 칠천팔기 끝에 sub-3, 대기록을 달성한 천상오 님께서 자축의 의미와 우리 회원들의 축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많은 지출을 했습니다.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골인을 앞두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상오 님,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일요일 아침연습에는 임상태, 서성수, 천상오, 유영례, 김미선 선생님과 저가 참여했습니다. 오랜만에 일요연습에 나왔는데, 얼굴에 와 닿는 맑고 찹찹한 새벽공기는 언제나 상쾌하고 기분 좋습니다. 웬만해선 토·일요연습에 빠지지 않는 서성수 선생님의 달리기에 대한 열정이 상록수 같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춘천마라톤에서의 완주 감동을 아직도 갖고 계신 임상태 선생님께서 아침 해장국을 사주셨습니다. 아마 일요연습에서는 처음 뵌 게 아닌가 싶은데, 우리 회원들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일부러 나오셨다니 송구스럽고 고맙습니다. 역시 일요연습에 처음으로 나오신 유영례 교감선생님께서는 어떤 느낌을 가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월동(越冬)을 준비하는 나무들의 모습에서 우리들도 이 해를 잘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2월 17일로 예정되어 있는 우리 동호회의 가장 뜻있는 행사인 송년릴레이전과 내년 초의 창립기념행사를 준비해야겠습니다.
몸을 놀리면 마음이 즐겁다(토요연습후기)(2006.7.8.)
새벽 달리기가 계획되어 있는 날에는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야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더구나 누구와 같이 가기로 약속이라도 되어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정확히 새벽 네 시 알람(alarm) 소리에 기상하여 간단히 세수를 하고 채비를 갖추어 이웃인 봉쥬리 님과 뮤즈 님을 픽업하여 약속된 장소로 향했습니다. 이른 시각이라 몸의 피곤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지만, 한적한 여명(黎明)의 새벽길을 질주하는 느낌이 꽤 상쾌합니다.
기장테마임도 입구에 도착하니, 일부의 회원들은 이미 도착하여 출발 준비를 하고 있고, 나머지 회원들도 속속 도착하여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자주 만나고, 더러는 이 삼 일에 한번 씩 보는 얼굴들이지만 늘 반가운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서로 출발을 알리고 달림질의 시동을 걸었습니다. 긴 오르막으로 시작하여 서너 개의 오르내리막이 있는 이 가장테마임도는 결코 녹녹한 코스가 아닙니다. 오랜만에 산길을 뛰는 탓인지 천천히 달리는데도, 다리 놀림이 가볍지 않고 호흡도 가빠집니다.
그렇게 이십 분을 달리니 비로소 오르막이 끝나고 완만한 내리막과 평지가 이어집니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주변 경관을 살펴보는 여유를 갖습니다. 멀리 동해 쪽으로 눈을 돌리니 겹겹이 포개진 산들의 실루엣이 그림 같습니다. 더 없이 싱싱한 푸른 여름산들로 눈을 씻기우고, 맑은 새벽 공기를 호흡하니 다리놀림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왕복 17킬로미터의 반환점은 생각보다는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참을 더 달려가니 드디어 반환점을 돌아오는 우리 회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항상 씩씩한 달리마 님을 선두로 하여, 오늘따라 사뭇 진지한 모습의 처음처럼 님과 나무꾼 님, 그리고 요즘 달리는 속도가 장난이 아닌 아베베 님이 뒤따릅니다.
돌아오는 길은 훨씬 수월한 길입니다. 이젠 몸도 풀려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먼 곳으로 눈길을 주니 운무(雲霧)인지 물보라인지 한 가닥 하얀 띠가 짙은 초록의 산등성을 절묘하게 휘감아 돕니다. 양쪽으로 늘어선 동백, 떡갈나무, 참나무 등의 잎사귀들은 씻은 듯 더없이 맑고 푸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올라올 때 힘들었던 그 오르막길이 이제는 내리막길이 되어 오늘 연습의 멋진 피날레를 마련해줍니다. 기분 좋은 막판 스퍼트로 골인하니 먼저 도착한 회원들이 환한 얼굴과 박수로 맞이해줍니다. 뒤이어 하루 님, 봉쥬리 님, 기브리 님이 밝은 모습으로 들어오면서 약 두 시간에 걸친 다리놀림은 끝났습니다.
운동과 노동은 그 뒤끝의 느낌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둘 다 힘든 육체적 움직임에도, 노동은 그 피곤함이 오래도록 남는 반면에, 운동은 그 피곤이 나른한 개운함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 피곤속의 행복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목욕탕이 아닌가 싶습니다. 몸을 씻고 새털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기장의 유명한 맛터 ‘베틀정’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베틀정‘의 음식은 익히 소문이 나있는지라․․․. 본디 점심때가 되어야 문을 여는 곳임에도, 매향 님의 특별한 섭외와 부탁으로 오늘은 우리들을 위해 일찍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 집 특유의 맛있는 반찬들과 막걸리 등으로 한담(閑談)을 즐기고 늦은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아침 운동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것은 힘든 일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맑고 깨끗한 새벽 공기를 호흡하며 한바탕 땀을 쏟아내고 나면 오늘 하루를 길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유혹해 오는 나태이즘(?), 자신과의 타협을 뿌리쳤다는 뿌듯함으로 마음이 가볍고 하루의 출발이 상쾌한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습니다.
연습에 참여하신 분들 : 허해원, 이진구, 김재우, 임정택, 서성수, 최원홍, 조성일, 천상오, 박윤실, 오미숙, 이선영, 유영례, 이경환
금정체육공원 토요훈련기(2007.7.28.)
한 달 여의 긴 장마의 끝을 반가워할 새도 없이 뜨거운 폭염이 다시 우리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새벽녘의 기온은 움직일만하고, 더러 선선한 바람도 불어와 열대야로 인한 피곤을 잊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런 한여름 날의 달리기에는 오늘 같은 새벽운동이 필요와 충분의 양 조건을 모두 갖춘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금정체육공원에서 있은 토요훈련에는 저를 비롯하여 최원홍, 조성일, 이진구 선생님 이렇게 네 명이 선동수원지 주변 금정,기장군 경계구역까지 다녀왔습니다. 장마기간 동안 그럭저럭 비가 좀 내렸었나봅니다. 바닥이 훤히 보이던 선동수원지에 물이 제법 많이 차서 주변의 녹음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선동 마을 주변의 주로에서 늘 만나서 아베베님과 일합(一合)을 겨루곤 하던 견공(犬公)들이 지난 초복(初伏)에 대거 희생을 당했는지, 아니면 날이 너무 더워 전의(戰意)를 상실했는지 오늘따라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베베 님이 달리기가 좀 수월했는지, 그 반대로 영 재미가 없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달리면 힘이 덜 덜고 시간도 훨씬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너무 골똘히 했는지 달리는 도중에 옆길로 새다가 두어 번 제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천천히 달렸기에 힘들지는 않았으나, 그 새 해가 떠올라, 돌아오는 길이 갈 때 만큼 수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마음으로, 한바탕 땀을 쏟아낸 후의 상쾌함을 생각하면 힘내어 끝까지 달릴 수가 있습니다.
한여름에는 목욕탕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늘 자주 가던 목욕탕이 한 달간 쉰다고 방(榜)을 붙여 놓았기에 우리 동네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근처 해장국집에서 늦은 아침을 해결했습니다. 일인다역(一人多役)으로 늘 바쁜 달하니 님께서는 집안 일로 인해 운동은 함께하지 못하고 운동 후 행사에 합류하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저녁 무렵에 온천천에 가면, 오늘 아침 훈련의 불참을 보충하기 위해 혼자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오늘 토요훈련에도 소수의 인원만이 참여했습니다. 우리 지역구 행사에 그나마 금정구민 대표로 참여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막상 방학을 맞으면, 자기연찬(自己硏鑽)을 비롯하여 할 일은 더욱 많아지고, 따라서 시간 내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 우리들 삶입니다.
우연히 한문공부를 하면서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란 구절을 보았습니다. 주희의 싯귀에 나오는 말로,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보내지 말라’는 뜻이랍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방학이라서 ‘스스로 느슨해지지는 않는지’, 자신을 경계해야겠다는 나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생각을 해보면서 오늘의 훈련후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슬픈 짜장면(2005.5.16.)
이 세상에 짜장면에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또 그에 얽힌 사연 하나쯤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만은 나에게 있어서 짜장면의 의미는 특히 남다르다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한 때 짜장면만 양껏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박한 소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국민학교 6학년 시절은 가히 고통의 세월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성함을 잊어버린 당시 우리 담임선생님은 얼굴이 시커멓고 덩치가 매우 큰, 그래서 첫 눈에도 엄청나게 무서워 보이는 선생님이셨는데, 실제로도 매우 무서우셨다. 그 선생님은 덩치에 걸맞게 어마어마하게 큰 대나무 몽둥이를 ‘사랑의 매’로 소지하고 계셨는데, 그 대나무 몽둥이는 우리에게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선생님이 화가 나서 한 번씩 그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실 때는 그 모습이 마치 저승사자나 망나니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럴 때면 우리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맞으면 머리통이 박살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책상에 최대한 바짝 엎드려서 이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러다가 그 대나무 몽둥이가 바람 소리를 가르며 내 머리 위로 지나갈 즈음에는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찔끔거릴 정도로 무서움에 떨었었다.
그러나 그 대나무 흉기(?)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선생님이 짜장면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거의 매일 일정한 시간이면 짜장면을 시켜서 드셨는데 선생님의 짜장면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고통 그 자체였다.
그 시간이 되었다 싶으면 우리들의 신경은 온통 문에 집중되었다. 드디어 문이 드르륵 열리고 늘 보는 중국집 배달원의 모습이 나타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짜장면 곱빼기와 노오란 단무지 접시가 책상 위에 놓이면 우리들은 그 기막힌 냄새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입이 아주 크고 입술이 두꺼워서 별명이 하마였는데 그 큰 입으로 맛있게 비벼진 짜장면이 들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침이 꿀꺽 삼켜지고․․․. 나는 안 보려고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그 향기로운 짜장면 냄새만큼은 또 어쩔 것인가!
선생님이 짜장면을 드실 시간에 우리들은 산수 문제를 풀어야 했는데, 산수 문제지의 숫자들이 모두 꼬불꼬불한 짜장면으로 보였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이 당신의 짜장면 드시는 모습을 보는 것을 몹시 싫어하셔서, 짜장면 드시는 중에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앞으로 불려나가 문제 풀기를 게을리 한다는 이유로 그 대나무 몽둥이로 머리통이 얼얼하도록 맞았고, 맞는 고통보다 짜장면에 배고픈 설움이 복받쳐 속으로 엄청나게 울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위험을 무릅쓰며 선생님의 짜장면 드시는 장면을 몰래 훔쳐보고 침을 삼키곤 했었다.
선생님께서 음식을 다 드시고 누구더러 그릇을 치우라고 하실 때 얼핏 보면, 접시에 보기에도 먹음직한 단무지 두 세 쪽이 남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심부름꾼으로 내 이름이 불리어지지 않은 불운을 몹시 원망하곤 했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속으로 자신에게 맹세했다. '그래, 나도 어서 어른이 되어야지. 그래서 원 없이 짜장면을 먹어야지.'
어찌 어찌 하여 나는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짜장면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한 번씩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앞장서서 주위의 선생님들과 함께 짜장면을 시켜먹기도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의 담임선생님이 드셨을 그 기막힌 맛은 안 느껴진다. 어쩌면 옆에서 쳐다보는 모습만 맛있어 보였지, 선생님도 별 맛 없이 짜장면을 드셨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짜장면을 시킬 때마다 그 시절을, 그 담임선생님과 짜장면을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에 대한 기대를 키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그 기막힌 짜장면의 맛은 아직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나에게 있어서 그 당시의 짜장면은 항상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鄕愁)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아쉬움(2005.6.22.)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해보고 싶되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 아쉬움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초조함으로 또는 애틋함으로 늘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나에게 있어서 그 중의 하나는 여태껏 뜨거운(?)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 못지않게 여자문제로 고민 한 번 해보는 것이 나의 급박하고 절실한 소원인 까닭에 마지막 청춘을 불살라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벼른 지가 몇 년이나 되었건만, 워낙에 용기가 없는 데다 결정적으로 간(肝)마저 생기다 만 탓에, 잔뜩 벼르기만 할뿐 나의 소박한 꿈은 도저히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스럽다 할 수 있는 것은 꿈속에서나마 한 번씩 화려한 일탈을 경험하는 것인데, 이마저도 주변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여의치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라 하겠다.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을 갔다. '중년들의 천국', '부킹 150% 보장'이라는 간판이 있는 곳이었다. 이른바 '부킹'을 통하여 우리는 비교적 괜찮은 한 무리의 여성들을 만났다. 한 바탕의 춤잔치가 끝나고 2차는 각자 파트너를 정하여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대학 미팅 때의 방법으로 각자 소지품을 꺼내 확인하는 것으로 서로의 파트너를 정했는데, '저 여자만은 피해야 할 텐데' 하는 소박한 바람마저 물거품이 되고 마는 대학 때의 불운이 그대로 이어졌다. 내 파트너가 된 여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들을 골고루 갖춘, 머리통이 매우 크고 꼬불꼬불한 라면머리 파마를 한 땅빵녀(키가 땅딸막하고 몸집이 빵빵한 여자)였는데, 힘이 아주 세고 성격도 상당히 터프하였다.
적당히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여자의 페이스에 말려서 'OO러브모텔'이라는 곳까지 가게 되었다. 그 여자가 샤워장으로 들어가는 틈을 타서 재빨리 도망을 나왔으나 속옷차림으로 달려 나온 그녀에게 바로 잡히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모텔 문 앞에서 승강이를 벌이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났다.
꿈이었다. 온 몸이 식은땀에 젖었다. 밖으로 나와 맑은 새벽 공기를 쐬며 찬물도 한 잔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자기, 어디 갔다 왔어?"
"흡!"
참으로 돌아버릴 일이었다.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이번에는 도저히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몸부림을 쳤으나 험악한 분위기와 완력에 밀려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드디어 그 여자의 육중한 몸과 두꺼운 입술이 내 눈에 크게 클로즈업되고 나는 소름에 전율하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누군가가 나를 심하게 흔들었다. 아내였다.
"왜 그래? 꿈 꿨어요?"
"응, 아주 무서운 꿈․․․."
아내가 그렇게 고맙고 예쁠 수가 없었다. 조강지처(糟糠之妻)의 의미를 되새기며 결심했다.
'앞으로는 꿈속에서라도 절대 한 눈 팔지 않을 테야.'
이번에는 친구들과 이른바 '묻지마 관광'을 갔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났다. 기막히게 멋있는 여인과 파트너가 된 것이었다. 얼굴도 잘 생겼지만 구석구석 기품이 서려있고 세련미가 넘쳐났다. 그냥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감격스러웠다. 그 동안의 불운을 한 번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무수히 원망했던 하느님에 대해 용서를 빌고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녀가 먼저 제안을 했다. 일행으로부터 빠져나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갖자고. 트랜치코트 깃을 세운 그녀와 낙엽 깔린 오솔길을 걸었다. 그녀가 살며시 팔짱을 껴왔다. 너무나 황홀하였다.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상큼한 머리칼 냄새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저녁이 되었다. 평화롭고 조용한 호숫가 근처의 한 호텔에 방을 잡은 우리는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행복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밤이 깊어가고 시간 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즈음, 그녀의 눈이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촉촉이 젖은 입술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나도 모르게 비명 비슷한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으으으으으읏∼"
누군가가 나를 심하게 흔들었다. 이번에도 아내였다.
"또, 꿈꿨어요?"
"응."
"정말 무서운 꿈 꿨나보네. 이번에는 별 괴상한 소리를 지르데․․․. 저번하고는 또 다르게."
'․․․․․․'
'헐, 참말로!'
마누라가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죽지 않을 만큼 때려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꺼내보는 추억 한 편(2005.10.11.)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거의 같은 느낌을 갖고 있겠지만, 그 당시 고등학교의 특징은 '학교의 군대화' 내지는 '군대식 학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학생회는 '학도호국단'이란 이름으로, 학생회 간부 명칭도 연대장, 대대장 등의 군대식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학교 마당은 운동장이라기보다는 연병장(練兵場)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군사훈련장이었고, 일주일에 두 번씩 있는 '교련' 과목은 꽤 강도 높은 군사훈련이었습니다.
그 때 내가 다녔던 울산의 H고등학교는 그 곳 출신의 한 유력한 권력자가 세운 초현대적 시설을 갖춘 신설학교로 완벽한 군대식 학교였습니다. 운동장 곳곳에 각종 유격훈련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매주 두 번 있는, 월요일과 토요일의 운동장 모임 때에는 36인조 밴드의 음악과 학생 연대장의 구령에 맞추어 분열, 열병식을 행하였습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입니다만, 이런 학교 분위기로 해서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즐거운 추억 한 편을 갖게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날 다른 학교보다 월등한 군사훈련시설을 갖춘 우리학교가 경상남도 교련시범학교로 선정이 되어서 앞으로 두 달 동안 오전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교련연습만 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소리 없는 난리가 났습니다. 오후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인근에 있는 'U여고'와 합동연습을 한다는 쇼킹한 뉴스가 뒤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만 되면 남자반, 여자반을 따로 둘 정도로 이른바 ‘남녀칠세부동석’을 최고의 선(善)으로 여기던 그 시절, 겉으로는 나타내지 못하고 속 가슴앓이를 하면서 사회분위기에 억눌려 지내던 혈기방장한(?) 우리 고등학생들에게 남녀가 어울려 두 달간 합동연습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슴 설레는 핫뉴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U여고와의 합동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날, 오전 수업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지루한 점심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련된(?) 교련복을 입은 U여고생들이 줄을 지어 우리 학교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우리들 모두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반가웠던지․․․.
우리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록 교련복일망정 옷차림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형편이 되는 아이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나팔바지 형태로 교련복을 새로 맞추기도 하였습니다. 남녀학생들이 매식(買食)을 핑계로 자연스레 만날 수 있는 학교식당은 일종의 해방구(解放區)로서 때 아닌 성시를 맞았습니다. 그래봐야 서로 말 한마디 쉽게 붙여보지 못했지만․․․. 식당에서 국수를 사먹는 학생들이 사라지고 빵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국수를 먹는 모습은 왠지 저급스러워 보이고, 빵은 그나마 좀 세련되어 보일 거라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가소로운 생각이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러 용감한 여학생들은 남학생들도 힘든 '그네 타고 물 건너기'와 같은 유격장애물 넘기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주변에는 학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십중팔구 황토흙물에 빠져 옷을 다 버린 그 여학생은 요즘 시쳇말로 쪽을 다 팔게 되지만․․․. 그래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다음날 또 다른 여학생이 도전하고․․․. 우리들은 이래저래 속으로 좋아서 신이 났습니다. 일요일에도 학교를 가고 싶을 정도로 학교 다닐 맛이 났습니다.
우리반은 '삼각건 매기 시범반'이었습니다. '총검술 시범반'이 되어 여학생들 앞에서 용감무쌍한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처음에는 좀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우리 '삼각건 시범반'은 여고생들과 합동시범을 보이는 관계로 여고생 바로 옆줄에서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햐! 참말로!
두 달간의 밀월(蜜月)과도 같은 합동연습과 시범발표가 끝나고 U여고생들은 다시 자기학교로 돌아갔습니다. 학교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지만, 우리들은 까닭 모를 허탈감으로 심한 몸살을 앓았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 해 가을은 더없이 외롭고 스산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산업과학고에서 있은 가을들판 달리기를 마치고 김재우 선생님, 유영례 교감 선생님과 동승해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후배인 김재우 선생님과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옆에서 이를 듣던 뮤즈 유영례 선생님께서 갑자기 반색을 하길래․․․. 알고 보니 아! 글쎄, 뮤즈 님이 그 'U여고' 출신이라는! 더구나 그 교련합동훈련의 추억을 고스란히 같이 갖고 있는 게 아니었겠습니까․․․. 서로 모처럼 옛 추억을 꺼내 보느라 교통체증으로 인한 짜증도 잊어버렸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는 느낌입니다. 우리 동호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인지, 뮤즈 님이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에 허물없는 옛 친구를 만난 듯한 친근함이 들었습니다. 그 날 밤 2차 문화행사(?)에서 더 가까워진 우리는 사는 곳도 이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늦은 시각에 함께 집으로 올 때 우리는 이미 몇 십 년 된 친구가 되어있었습니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옛 시절의 아련한 추억 속에서, 그 합동교련에서 우리 옆줄에 섰던, 수줍음을 많이 타는 탓에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지만, 눈동자가 유달리 새까맣던 그 여학생이 뮤즈 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