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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 종주 등반기
2006. 7. 7(금)
청뫼산악회가족 11명을 포함한 00000클럽 백두산 서파-북파 외륜종주팀 59명은 아침 7시 30분 진주시청앞을 떠나 김해공항으로 향한다. 다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종주라는 벅찬 기분에 마음이 들떠있다. 김해공항에서 11시 30분 중국 심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제 저녁 일기예보에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 소식이 다소 마음에 걸린다. 12시 10분(중국시간, 우리보다 1시간 늦은 시차임)에 심양공항에 도착했다.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공항은 전기를 아끼려는지 어두컴컴해서 마치 우리나라의 지하 차고를 연상하는 분위기다. 우리는 잠시 연길행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내를 관광했다. 청나라 시대에 지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淸昭陵(청소릉)을 둘러보고 버스로 시내에 있는 서탑가를 지나며 우리 조선족들의 상점가를 보았다. 중국안에서 자랑스럽게도 한국간판을 많이 볼수 있어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
오후 5시 30분경 공항으로 돌아와 연길행 비행기 탑승수속을 한다. 술은 1인당 2병 이내만 허용되고 있다. 술꾼들에겐 매우 아쉬운 모양이다. 심양에서 연길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남짓 걸렸다. 비행기 안에서 연길에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인 김0화라는 아가씨와 유학과 중국어 연수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3년간 학원강사로 활동하다 귀국하는 길이란다.
우리들은 공항에서 짐을 찾아 2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백두산을 향해 달린다. 주변의 산골 풍경은 우리나라의 모습과 별로 다를게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차창밖 멀리 산위의 어스럼속 달빛을 바라보니 어릴적 고향생각이 잠시 스쳐간다. 저 달빛, 저 별들은 여기 옛 고구려 땅 북간도에서 그렇게도 서럽게 민족이 처한 아픔을 시로서 노래했던 윤동주 시인이 바라보던 그 달별빛이런가 생각해 본다. 마냥 서럽고 처량했던 별과 달이리라. 중간 휴게소에 들러 과일과 약간의 간식를 사먹었다. 중국에는 산삼과 장뇌삼이 많은지 이곳에서도 진열되고 사달라고 매달린다. 휴게소의 화장실은 문이 없이 훤하게 노출되어있다. 대변을 볼려면 앞쪽이나 뒤쪽 중 한쪽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판이다. 사람들은 차리리 엉덩이를 보여주는 것이 서로가 얼굴이 안보여 마음이 편하겠다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휴게소를 기점으로 남쪽에는 조선족이 살고 북쪽인 백두산 부근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가이드에 의하면 백두산 날씨는 하루에 102번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연변자치주에는 100만명이 넘는 조선족이 살고 있고 자치주장은 반드시 조선족이어야 한단다.
2006. 7. 8(토)
버스로 4시간을 달려 새벽 2시쯤 이도백화장 신달호텔에 도착했다. 이곳은 하늘아래 첫동네란다. 이곳에서 우리는 등반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3시경 우리는 꾸린 짐을 짊어지고 그곳에서 당초 종주를 하지 않기로 된 나이든 분들을 남겨두고 6〜7명씩 7대의 짚차를 나누어 탔다. 마치 전쟁에서 작전을 나가는 기분이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짚차의 불빛에 먼지가 자욱하게 보인다. 먼지로 인하여 창을 열지도 못하니 무덥다. 험한 산행이 예상되어 다소 걱정이 앞섰으나 우리대원11명은 모두가 종주등반에 참가했다. 낮선 지형. 그것도 깜깜한 산길을 달려간다. 울창한 원시림이 양옆을 장승처럼 막아선 길은 가고 가도 끝이 없다. 이놈의 산길이란게 거기가 거기 같고 어쩐지 특별한 곳이 없다. 산행을 위하여 잠을 청하고 싶었으나 작은 짚차에 사람은 가득타니 비좁고 덜컥거리는 것이 잠을 청한다는 건 도저히 무리다. 앞자리에 않은 여대원은 그런 와중에도 조는데 머리가 휘청거리는 것이 매우 불안하다. 그래도 부럽다.
지겹고 엉덩이가 아프도록 털겅거리는 밤길을 달려 3시간만에 장백산(백두산) 매표소에 도착 도시락 2개를 지급받아 그 중 1개를 먹었다. 그곳에는 다른 곳에서 온 등반객들이 다소 있었다.
6시 40분경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산을 올라간다. 이제부터는 백두산 밑자락이다. 엄청나게 광활한 지역이 온통 작은 나무와 풀숲으로 우거져있다. 1시간쯤 차를 달려 올라가니 백두산 서파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변 관경이 너무나 장관이다. ‘과연 백두산이다’라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가파게 설치된 900여개의 계단을 숨가쁘게 올라간다. 간밤에 한잠도 못자고 차에 시달려온 우리는 매우 피곤했다. 그러나 이 웅장한 자태를 보니 다소 힘이 솟는다.
한참을 올라 드디어 서파 5호경계비에 도착했다. 다행이 날씨가 쾌창하여 백두산 천지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모두들 재빨리 가방을 내려놓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여념이 없다. 잠시 후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주차장쪽 산 아래에서부터 짙은 안개가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귀한양 백두산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출당하기 싫어서 인가?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진을 찍기 위해 북적대자 우리는 경계비 옆 작은 철조망너머 북한 경계로 넘어갔다. 사진을 찍기위해 기다리는 사이 언제 왔는지 북한군 병사가 달려와 돌아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잠시 사진만 찍고 가겠노라하여 시간을 잠시 벌었다. 경계를 건너오며 나는 주머니에서 사탕 한줌을 집어 북한 병사에게 주었더니 고맙다는 의사표시를 하였다. 멀리 천지 못 가운데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어 가이드에게 혹시 괴물이 아니냐고 물으니 북한에서 수년전에 산천어를 방류하여 고기를 잡는 보트라고 한다.
5호경계비를 뒤로하고 다시 산을 오른다. 산세가 매우 험하다. 먼저 우리를 먼저 막아서는 건 해발 2,691m인 마천우이다. 마천우를 돌면서 내려다보는 백두산 천지는 더할나위 없이 넓다. 면적 9.13㎡, 둘레 14.4km, 최대수심 384m, 수면고도 2257m인 백두산천지의 이력이다. 백두산은 서파와 북파를 경계로 북한과 중국이 절반씩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중 제일 높은 봉우리인 장군봉(일명 백두봉, 2,749m)은 북한의 관할이다. 우리는 중국쪽 절반의 백두산을 종주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에 의하면 백두산 천지를 찾은 사람들이 천만명이 넘지만 정작 천지 못을 보지못한 사람이 천지라고 한다. 어느 사람은 7번이나 백두산을 찾았지만 한 번도 천지를 못봐서 그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적어 가이드에게 전하더라고 하며 가이드는 그 시를 읊어준다. 천지도 천지지만 천지를 둘러싼 고원지대는 너무나도 넓고 아름답다. 곳곳에는 얼음이 미쳐 녹지않고 띠를 이루고 있어 마차 시멘트로 발라 놓은 듯하다. 중간 중간 우리는 피곤한 몸이지만 그래도 기념촬영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천우를 지나 청석봉으로 진행하고 있다. 2,664m인 청석봉 주변은 매우 아름답다. 기분이야 상쾌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몸은 지친다. 험한 백두산 봉우리를 10시간 산행을 하여야 하는 중압감과 가파르고 위험한 화산지대, 자칫 잘못하면 바위가 굴러 내리고 발을 헛디디면 몇 십, 몇 백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돌무더기에 깔릴판이다. 근래에도 3명의 한국인이 등반도중 사고로 사망하여 등반이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청석봉 정상은 야생화와 작은 식물군들로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건너다 보이는 북한쪽 장군봉과 백두산 천지의 파란 물결로 마음이 상쾌하다. 청석봉을 내려오는 길은 매우 위험하고 힘든다. 화산 지형으로 형성된 작은 바위와 지표면들은 자칫 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조심조심 발길을 옮기는데도 앞서가던 대원이 돌을 굴려 하마터면 인명사고가 날뻔한 아찔한 순간이 발생하였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바쁘고 해서 진행에 매우 신경이 곤두선다. 한참동안 산허리를 타고 내려간다. 천지 수면보다도 더 낮게 내려가는 것 같다. 한참을 내려온 후 백운봉(2,691m)을 오르는 길은 너무 힘들었다.
선두와 말미와는 까마득하게 사이가 벌어졌다. 그래도 선두에서는 빨리 오라고 재촉이다. 나는 선두그룹에 서서 백운봉 정상을 올랐다. 백운봉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백두산 천지 정경 또한 가히 일품이다. 정상을 내려와 멀리 마지막에서 오는 동료들을 기다렸다. 백운봉을 지나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나자 안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길을 재촉해야 하는데 환자가 2〜3명 발생하였다. 선두 그룹은 벌써 까마득하게 멀리 가고 없다. 걱정이 앞선다. 국내에서는 119 구급 헬기라도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럴수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녹명봉(2,603m), 차일봉(2,596m)를 거쳐 가서 선두와 합류했다. 진행방향에 대하여 의견대립이 있었다. 우리는 다시금 소천지로 향하여 산행을 계속했지만 그 발걸음은 매우 더디었다. 2,700m에 이르는 높은 산을 내려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때마침 비가 뿌려댄다.
우의를 둘러쓰고 하산하는데 조금 뒤 비가 그친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온천욕을 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했다. 가이드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이 평소 덕을 많이 쌓아 천지를 하루종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우리들은 1인당 10,000원씩을 거두어서 암소를 한 마리 잡아 실컷 불고기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는 어젯밤 내내 차를 달려 잠 한숨도 못자고도 오늘 험한 백두산 자락을 10시간에 걸친 어려운 산행으로 인한 극도의 피곤함도 잊은채 밤늦게까지 이야기 밤을 새웠다.
2006. 7. 9(일)
버스를 달려 심양을 향해가고 있다. 가는 길에 토종꿀과 진주를 파는 곳을 들러 쇼핑을 했다. 연길시에서 중국식의 점심을 먹고 용정으로 이동한다. 중간에 연변자치주에서 운영하는 반달곰 사육장엘 들렀다. 반달곰이 1,300마리가 사육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오는 움담은 확실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용정시 인구는 30여만 진주시 정도의 인구 규모이다. 이곳이 바로 예전 항일운동의 중심지란다. 가까이 이르지 못하고 일송정을 멀리서 바라보고 해란강을 건너 대성중학교에 들러 우리의 선구자들이 나라를 찾기위해 노력한 역사를 설명 듣고 적으나마 장학금을 개별적으로 기탁하며 비록 중국땅에서나마 우리 동포들이 보다더 발전하며 잘 살기를 기원했다.
다시 1시간여 버스를 달려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대에 이러르니 멀리 건너편 산에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이란 선전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태양은 무슨 놈의 태양인지 백성이 다 굶어 죽을판인데. 반딧불만도 못한 주제에 태양은 무슨 말라빠진 태양... 왠지 씁쓸한 생각이 든다. 지나가는 기차를 보니 원 객차라는게 사람도 없이 빈 차에다 지저분해서 마치 석탄운반 차 같아 보인다.
우리가 차에서 내린곳은 중국 모문시와 북한 남양시의 경계지점. 우리가 TV에서 자주 보던 그곳 경계선 유원지에서 우리는 북한을 건너다보며 안타까운 심정을 달래며 동동주를 마셨다. 몇몇은 모터보트를 즐기기도 하였다. 중국쪽의 산하는 푸르른데 북한쪽은 왜 저리도 황폐해 보이는지? 70〜80도의 경사면 밭을 일구어 놓았으나 농작물은 정작 부실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50〜100여m 간격으로 땅속 경계초소가 있다는 곳에서 이따끔씩 북한 군인들의 모습이 보이나 매우 초라하다. 해방이후에 남북이 갈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일본에 버금가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우리들은 옛날 고구려시절 우리땅이던 만주. 그러나 지금은 남의 나라인 이곳에서 동족이 살고 있는 우리 한반도 땅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차안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합창했다. 이제는 ‘두만강 푸른물’이 아니라 ‘두만강 누런물’이다. 북녘산의 황폐화로 강물이 온통 흙탕물이다. 그래도 눈물젖은 두만강은 맞는 것 같다. 지금도 탈북자들의 애환이 서린 고통과 분노가 뒤 엉킨 눈물이 강에 서려있다. 탈북하다 붙잡힌 북한 주민들에 대하여는 가혹한 처벌을 가하였으나 요즈음 조금씩 처벌이 완화되고 있다고 한다. 요즈음 북한에서 요행하는 노래는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하네’이며, 차인표의 인기가 좋다고 한다. 어쨌든 배고파 굶어죽는 북한 동포들을 팽개치고 미사일이나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김정일 정권의 통치행위가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특산품을 판매하는 곳을 들렀다. 청심원이며, 상황버섯 등은 인기가 좋았다. 부담스러워하는 그 곳 북한 여성들과 사진을 같이 찍었다.
2006. 7. 10(월)
김해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7시경 심양공항으로 향했다. 어젯밤 TV에서 남부지방에 태풍으로 인하여 많은 비가 내려 피해가 속출했다고 하였는데 비행기가 제대로 뜰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공항에서 발매를 하고 짐을 맡기고 나자 비행기가 뜰 수 없다고 한다. 처음부터 정황판단을 잘해야 할 것이지 실컷 수속 밟고나니 못 간다니. 천재지변이라지만 이렇게 상황판단을 못해서야 어디. 다른 항공사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는 아닌지 궁금하였으나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시간은 안가고 바닥에 눕기도 하는 등 시간을 보내다. 11시가 넘어 탑승구쪽에 와보니 다른 여행사에서 온 사람들은 면세점 안에 들여보내주고 도시락을 제공하였다 한다. 그러한 차별에 대하여 항의를 하자 결국 우리에게도 도시락을 가져왔고, 결국에는 심양에서 제일 고급이라는 5성(별 5개)호텔에 숙박을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직장에 사정을 알리고 하는 수 없이 하루를 접어야 했다.
2006. 7. 11(화)
아침에 일어나니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다. 혹시나 비행기가 못뜰가 조바심이 난다. 호텔 건너편 대형 연회장에서 아침밥을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다행이 비가 개이고 9시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오며 이번 산행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튼 사고 없이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는다는데 대하여 모든 서운한 감정을 묻어 버리기로 했다. 힘들지만 매우 기억에 남는 산행이야기가 될 것이다.
*급하게 편집하다보니 사진 배열에 문제가 있네요. 나머지 사진 중 일부는 산마루 사진관에다 보관하였습니다.
(백두산 자료 : 빌려온 글)
민족의 산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한민족으로 태어났다면 생전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산이다. 그가 요행히 평소에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필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산의 뿌리가 백두산에 있고 우리나라의 산으로 백두산과 연결되지 않은 산은 멀리 바다속에 솟은 섬산 정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섬산조차 바다속에서 해저산줄기로 백두대간이나 여타 정맥연결되어있을 것이다. 사실 백두대간과 정간, 정맥에 속한 산들을 다 오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렇더라도 백두대간에 속한 수많은 산들을 오르면서 그 모든 산들의 아버지인 백두산을 오르지 않을 수 있는가. 묵묵히 산을 오르면서도 언젠가는 백두산을 오르겠지 하는 일념은 무의식처럼 가슴 깊숙이 가라앉아 있어 언제건 그 희원(希願)이 충족될 날을 기다릴 것이다. 오직 백두산을 오를 기회가 있거나 없거나의 문제일 따름일 것이다.
단군의 탄강지:
부연해서 말하지만 단순한 산이라기 보다 민족이 탄생한 산, 민족의 시원이 열려지기 시작한 백두산은 산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관계없이 신체적 조건이 적절하든 안하든 가서보고 그 품안에 안겨보고 싶은 산이다. 백두대간의 조종이라는 점에서, 반도의 모든 뫼의 근원으로서 백두산이 우리의 피속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근대의 사학자 육당 최남선의 말대로 이곳이 "단군의 탄강지(誕降地)"요, 조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육당은 백두산의 천평지역이 단순히 단군설화의 배경이 된 땅이 아니라 실제로 사실적 배경을 의심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족이 광대웅려한 거악위의 벌판에 나라의 기틀을 세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고 신국가의 모태를 이만한 적토(적지)에 두려함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천지개념도
하늘에 가깝다는 단순한 의미에서도 산의 정상은 신성한 곳이다. 그러나 백두산은 그 높이와 산정에 이루어진 천지라는 아름다운 호수와 천평이라는 넓디넓은 하늘의 정원으로서 우선 성스러운 빛을 가득히 풍기는 산이다. 중국과의 국교가 트인 이래 연변을 통해서라도 백두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우리민족의 마음에 깊이 담겨있는 백두산으로 향하는 단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백두산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요녕성과 길림성 사이에 솟아있는 산이다. 2749.6m의 백두산은 화산으로 생겨난 화구호에 물이 괴어 호수깊이 300여m에 이르는 자연적 경이를 갖추어 더욱 신성한 감을 더하게 한다. 우리나라사람들은 이 산을 백두산이라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 Changbaishan)으로 불리고 있다. 장백산의 의미는 오랜기간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뜻이고 백두산 역시 정상부근이 흰 눈으로 뒤덮여 있어 신성한 느낌을 준다는 의미이다. 남서-동북 축의 방향을 잡고 길게 뻗어있는 장백산맥 중에서 최고봉이 백두산이다. 산의 골격을 이루는 바탕암석은 노년기의 화강암과 변성암이 주종을 이루고 다수의 산간단층골이 산릉선을 단절하고 있기도 하다. 정상부는 흰색깔로 된 부석에 뒤덮여 있거나 알칼리 조면암으로 되어있다. 유황덩어리가 얹혀 있는 듯한 모습의 바위가 그것이다. 산의 동쪽은 가까운 지질학시대에 있었던 왕성한 화산활동이 일어났던 곳으로서 용암의 분출이 광범하여 사화산의 원뿔과 다수의 화구호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거친 지질로 인해 깊이 균열된 하곡이 이루어져 이리로 천지에서 새어나온 물이 강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강은 처음에는 유속이 빠르고 곳곳에 폭류가 형성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있다. 특히 압록강이 발원하는 천지의 서쪽은 침식협곡을 이루어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 침식곡은 금강대협곡(金剛大峽谷)이라 불리고 있다. 백두산일대의 강수량은 760mm에서 1200mm에 이르고 동쪽 산록에서는 1600mm이상의 많은 비가 내리기도 하는 다우지역을 이루는데 이는 만주지방에서는 물론 북한의 타지방에 비해서도 많은 량이다. 백두산일대의 기후가 산악특유의 국지적 특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백두산과 인근지역은 1년에 2개월이상 깊은 눈에 묻히며 1500미터이상의 고지대에서는 평균 6개월에 이르는 긴 적설기를 보이고 있다. 산록은 활엽수 및 칩엽수의 울창한 수림으로 뒤덮여 있다. 수목 한계를 지나 고원지대는 대략 2000m 이상의 고지대에 형성되어 있다.
위치:
백두산의 정확한 위치는 동경 128도 6분, 북위 42도 7분이다. 백두산의 이름은 "산해경(산(山海經)"등 여러 전적에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있다. 불함산, 단단대령, 개마대산, 태황산, 태백산 등이 그것이다. 모두 백두산의 숭고한 인상과 신비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는 이름들이다. 백두산은 중국쪽의 남북 78.5km, 동서 53.3km에 이르는 20만 헥타가 자연보존지구로 지정돼 있다. 건강한 자연환경과 생태시스템을 보이고 있는 이곳의 명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백두산 호랑이, 검은 담비등이 있다.
천지(天池):
주변의 16개 봉우리에 둘러싸인 천지는 백두산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호수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은 아름다운 호수다. 천지의 물은 항상 일정하게 북쪽 달문을 통하여 이도백하(송화강 상류)로 흘러간다. 천지의 푸른 수면에 백두산의 기암이 어리어 그림같은 풍경을 이루고 있는데 천지의 수면둘레는 13.11평방km, 수면의 해발높이는 2155m이고 수면의 총면적은 21.4평방km이다. 가장 깊은 곳이 383m(북한자료, 중국자료는 373m)이다. 천지의 총수량은 20억톤. 이는 만수직전의 소양강댐의 총저수량에 맞먹는 막대한 수량이다. 산꼭대기에 엄청난 다목적댐만한 저수지가 하나 올라앉아 있는 것이다. 댐의 물은 갈수기에는 적게 흘러내리고 물이 끊어지기도 하는데 천지의 물은 언제나 동일한 수량으로 흐른다고 한다. 천지에 물을 공급하는 지도에 나타날 정도의 개울은 없다. 그런데도 마치 땅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끊이 없이 흘러나와 천지의 수면은 언제나 일정하여 장백폭포같은 대폭포를 만들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물이 스며나온 물이 압록강, 두만강 같은 대하천의 수원이 되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지의 빛깔은 깊은 곳, 가장자리, 중간지점의 물의 색깔이 모두 틀린다. 천지의 물은 송화강, 두만강, 압록강의 발원이 되지만 직접 흘러내려가는 것은 북쪽인 송화강이다. 물의 투명도는 20미터에 이를 정도로 투명하며 수온은 표면 가까운 곳이 7도(여름철 가장 기온이 높을 때)이다.
천지의 내벽에서 온천이 흘러내려 천지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자료는 이 온천수의 9월경 온도가 32도에 이른다고 하고 있다. 광막한 공간의 체험:
단군왕검의 신시가 펼쳐지던 천평의 광활한 경험과 천지의 신비한 체험, 광대한 만주벌판이 내려다보이는 조망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어떤 산보다 웅장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백두산에 와서 1년중 대부분이 흰눈에 묻혔다가 여름에 꽃을 피우는 모든 희귀종야생화 군락이 생명의 바람속에서 나붓기는 모양을 보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산악활동의 한 마무리이자 총정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등산애호가로서 가장 행복한 한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백두산을 찾을 것이다. 백두산의 인상을 "산정 부근의 지형은 백두산지방에서 가장 특이한 것으로, 광대한 용암대지 위의 수해를 벗어나 툭 트인 초원에 대륙의 지붕같이 우뚝 솟아있다"([백두산의 꽃] 이영노편 한길사 간)고 표현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장백폭포:
천지의 물은 천지에서 1250 m 떨어진 북쪽 단애에 도달, 68 m 아래로 떨어진다. 폭 25 m 정도의 승차하라는 개울을 형성한 물이 대충 세 가닥으로 나뉘어 떨어지는데 그 소리는 천지가 진동하듯 크다. 흑풍구 부근에서 장백폭포를 바라보면 함몰한 듯한 대협곡과 눈에 보이는 백두산 사면에는 한그루 나무도 없어 마치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그러나 순식간에 물을 흡수해버릴 것 같은 거대한 쇄석의 사면위로 하얀 포말을 형성하며 승차하를 흘러내려온 물이 68 m 단애에 이르러 거폭으로 협곡위로 떨어져 내린다.
온천지대:
천지의 산록에서도 온천이 발견되었으나 이용하기는 힘들고 실제 온천은 장백폭포에서 900미터쯤 떨어진 아래쪽에 장백온천이 있다. 한 개의 온천이 아니라 1평방킬로미터안에 다수의 온천군이 있다. 이곳 온천의 수온은 82도나 되어 냉수와 섞어야 목욕을 할 수 있다.
온천지대 아래쪽 이도백하옆에는 소천지가 있는데 넓이는 5400평방미터 정도이다.
식물군:
백두산은 식물의 보고이다. 해발 2000m대 이하에는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전나무, 이깔나무 원시림이 울창하여 현재까지도 중국 유수의 목재 생산지대의 성가를 누리고 있다. 백두산은 수목한계선 위쪽은 고산식물이 자라는 초원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야생화류로는 국내에 보기드문 희귀종이 부지기수로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스레 피나무, 만주자작나무는 수피가 백색으로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바라본 자작나무 숲은 성스러운 느낌을 전해줄 정도이다. 이밖에 이곳 잎갈나무는 국내에서 조림되어 숲을 이룬 일본 잎갈나무와는 다른 재래종으로 주목되는데 백두산 동쪽 두만강변 무산 서쪽 산록에 대수해를 이루고 있다. 장백송, 달피나무, 산괴불나, 두메닥나무, 야생화로 국내에 보고된 희귀종은 노랑만병초, 비로용담, 털복주머니란, 나도수영, 너도개미자리, 두메양귀비, 두메자운, 손바닥난초, 오랑캐 장구채, 홀꽃노루발, 풀산딸나무, 쌍잎난초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가는길: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현재까지는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수도 연길에서 용정, 화룡현, 송강진, 이도백하를 거쳐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대종이다. 화룡부터는 비포장도로이지만 대체로 평탄하여 차는 제속도로 달릴 수 있다. 송강까지 오는 동안에서 숲과 재등 볼거리가 많지만 오로지 백두산을 머리에 그리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송강에서 이도백하를 거쳐 백두산의 실제 산행이 시작되는 입구까지는 77km쯤 된다. 매표소를 지나 10여km를 올라가면 소천지로 알려진 자그마한 저수지에 이른다. 부근에 단풍나무, 자작나무 숲이 울창하고 백두산의 봉우리들이 물에 어리어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소천지에 올라가기전 양갈래길이 나뉘는데 오른쪽 길이 온천, 장백폭포를 거쳐 천지로 바로 올라가는 길이고 왼쪽길은 짚차를 타고 천문봉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앞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올라가야:
지금은 거의 연변을 통해 백두산을 오르지만 일제시대에는 삼지연이나 무산을 통해 백두산을 올랐다. 육당(六堂)은 갑산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는데 그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謹參記)"에 삼지연과 천평에 대해 유독 애정을 가지고 자세히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지연의 아름다움을 그리면서 "삼지중에 크기로나 아름다움으로나 으뜸이 되는 자(것)는 가운데 있는 것이니 주회(둘레)가 7.8리에 파란 물이 잠자는 것처럼 고요한데, 동북 양면에는 경석 부스러진 무게없는 모래가 백사장을 이룬 밖으로 나직나직한 이깔숲이 병장처럼 에두르고 .."라고 묘사하는데 육당의 표현력이 감칠맛이 넘쳐 삼지연의 인상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그런데 정작 삼지연은 호수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아름다움보다는 삼지연 주변의 소백산, 남포태산, 장군봉등 험준한 산들이 외곽을 둘러싸고 있어서 삼지연의 아름다움을 더한다고 말하고 있다. 천평에 대한 육당의 해설은 가 사학자이니 만큼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정도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우리조선의 시원, 국조의 탄강과 관련하여 민족사의 뿌리를 이룬 사건(설화)에 대한 보다 진지한 이해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직 이곳 아름다운 삼지연을 통과하여 백두산에 갈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경관:
백두산의 경관은 백두산 자락의 대수해를 경험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수해를 보기전 백두산으로 접근하면서 눈을 뒤집어쓴 장백산맥과 백두산이 지평선위로 높은 스카이라인을 이루면서 길게 이어지며 접근하는 장관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장백산 자연보호구역에 들어오면 대수해라고 할만한 울창한 숲이 찾는 이에게 충격을 준다. 만주자작나무숲과 같은 한대교목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고 일명 장백송이라 불리는 미인송을 볼 수 있다. 함백산 같은 남한의 고산능선에도 꽤 많은 사스레나무숲도 보인다. 일제시대 백두산을 올랐던 사람들은 선택받은 소수의 문화계인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백두산 부근의 울창한 숲이었다. 그들은 숲에서 조국의 미래를 읽으려 했고 조국의 무한한 잠재력을 평가하려 했다. 더구나 이 숲이 단군왕검이 신시를 펼쳤다는 성역임에랴 더 할 말이 있을까? 서춘등 33인이 백두산을 등정한 뒤 내놓은 "아아! 천지다."에 보면 숲에 대한 표현으로 이런 구절이 나온다.(이들은 함경북도 무산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가도가도 밀림이다. 작고 어린 놈은 물박달나무, 크고 허위대좋은 놈은 이깔나무(낙엽송), 연녹색 입사귀에 흰 껍질로 소복 단장을 한 채 이깔나무 못지 않게 희멀쑥하게 뽑아선 자작나무, 이깔나무를 남성적이라면 벚나무는 여성적, 틀에서 뽑아놓은 것 같은 멀쑥한 허위대들이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지리하지를 않다. 이것을 형용해 불러서 수해라고들 부른다. 말하자면 삼림이라고 부르기는 너무도 크고 보니 황송타는 말이 수해가 된 것이다. 사람과 말을 합쳐 백여명 카라반은 가없는 나무바다 속으로,아니 바다 밑으로 잠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물론 땅도 보이지 않는다. 간간이 나뭇가지 틈을 비집고 던져주는 햇발은 이름 모를 꽃떨기에 반사가 되어 지리한 이길에 심심파적을 해줄 뿐, 모두가 침침한 숲속에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말없이 발자국만 옮긴다. "
"아무리 나무 나무가 소물게 붙어서도 우중충한 구석이 없고 아무리 가지 가지가 하늘을 뒤덮어도 흐리터분할 바 없이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면 같이 숲 사이가 탁 터지고 공기는 맑을 대로 맑아 하아! 이것이 신역이로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
"가지는 푸르고 둥치는 검은 나무들을 형용하여 옥수경림(옥(玉樹瓊林)이라 부르는 것을 괴이쩍게 여겼더니 이 자리에서 이 숲을 대하니 다시 더 할말 없이 옥수경림이다. 검고 푸르러도 옥 같아 뵈고 가리고 막혀도 탁 터져 보일뿐. "
그 다음은 천지를 조망하기 전 이도백하 계곡풍경과 이 계곡의 가장 아름다운 경관인 장백폭포가 경관의 중심을 이룬다. 수목한계선이 1800-1900m를 지나 천지가 보이기 전까지는 고원산록은 대체로 밋밋하여 일견 단조로운 초원경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름에 백두산을 찾는 사람들은 이 초원지대를 밤의 별처럼 빛나는 온갖 종류의 휘귀종 야생화가 피어 천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짚차를 타고 정상으로 오르내리는 짧은 시간에 백두산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하기란 힘들다. 더구나 안개라도 끼여 버리면 별다른 경관을 보지 못하게 될 경우도 상정할 수 있으므로 사전에 백두산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백두산에 가려면 노랑만병초, 하늘매발톱, 가슬송, 구름송이풀, 두메양귀비, 두메자운, 나도수영 등 최소한 희귀종 야생화 한 스무가지 정도는 머리속에 기억해두고 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런 꽃이 아름답다는 마음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야생화의 미에 익숙해지려면 국내고산의 산행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니 평소 산에 잘 가지 않은 사람들이 덜렁 백두산에 갔다와서는 국내산은 아무 것도 아니라느니 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백두산의 경치는 뭐니뭐니해도 천지를 낀 16개 봉우리가 보여주는 산세, 산록, 호수주변의 단애와 평지등 천지와 관련된 경관들이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평소에 적선하는 일이 적은 사람은 백두산에 가면 안개가 가로막기 일쑤여서 맑은 경치를 즐길 수 없다는 허튼 소리가 유행하기도 한다. 아주 맑은 날 광각으로 천문봉에서 서남쪽으로 보며 천지를 찍으면 천지라는 호수의 푸른물이 마치 거대한 용기에 가득 담겨 쏟아져 나올듯 물이 남실거리는 사진들이 많이 촬영되어 소개되었다. 그리고 국민학교 교장실에 가면 이런 사진은 으례 크게 확대되어 태극기와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함께 붙어있곤 하였다. 전체조망으로서의 천지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봉우리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천지는 푸른 물과 단애처럼 깎아지른 벼랑 아래에서 신비스럽게 펼쳐지고 있어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천지의 수면높이는 2155m(일부자료는 2194m로 보는 것도 있다)이므로 가장 높은 병사봉이 천지수면에서 594m위에 솟아있는 셈이다. 천지에 발을 담그듯 벼랑이 천지수면 바로 옆까지 다가서서 솟아있는 곳도 있으나 대부분은경사도 45내외의 급경사 너덜지대를 이루어 천지의 푸른 물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너덜지대가 아닌 흙이 많은 곳은 경사진 채로 푸른 풀밭으로 뒤덮여 있어서 천지의 푸른 물빛과 함께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톱니처럼 거친 산의 스카이라인과 물살이 이는 수면 그리고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맴돌거나 하면 가장 볼만한 가경이 된다.
봉우리가 우락부락 험상궂은 진한 회색 바위로 이루어진 암봉과 그 아래 대형 너덜지대, 그리고 짙푸른 푸른 물이 어울리면 더욱 그렇다.
일제시대에 올랐던 사람들의 백두산 기행문을 보면 그 표현이 생동하고 사실적이면서도 감동을 자아내는 미문들이어서 백두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도록 만드는데 손색이 없다. 최근에 백두산에 갔다온 사람들도 산행기를 썼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인문학에 정통한 육당이나 서춘씨 같은 사학자나 기자들이 쓸 때와 지금은 다른 것 같다. 왜 그럴까? 식물학자, 야생화탐구가등은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백두산의 아름다운 식물과 꽃들 그리고 아름다운 경관을 우리에게 소개시켜 주었다.하지만 감동의 백두산기행문은 나오지 않았다. 일제시대와는 달리 인문학에 바탕한 감성의 소유자가 백두산에 가는 일이 적기 때문이 아닌가? 테크노크래트들이 백두산을 찾았을 때의 백두산 표현과 묘사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테크노크래트, 그리고 단지 여유가 있다는 점에서 구경삼아 갔다온 이들은 민족의 감수성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대신 보신관광이니 천지주변에 오염물 투기니 하는 부작용만 들려오고 있다. 백두산을 아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쯤 생각하고 백두산산행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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