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가 넓힌 북방700리 공험진까지 연토, 세종은 재위 21년(1439) 3월 6일 공조 참판 최치운崔致雲을 북경에 보내 공험진 남쪽은 조선의 영토라고 통보했다. 명의 태조 주원장이 홍무洪武 21년(고려 우왕 14년, 1388) “공험진 이북은 도로 요동遼東에 부속시키고, 공험진 이남 철령鐵嶺까지는 그대로 본국本國(고려)에 소속하라”는 조서를 내렸다는 사실을 명나라 조정에 국서로 상기시킨 것이다. 고려 우왕 14년 요동정벌군이 북상하려 하자 명 태조가 공험진까지 고려 영토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은 공험진까지는 조선의 영토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였을까? 윤관이 ‘고려지경’이란 비를 세운 공험진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있었다. 함길도의 남쪽 경계는 철령이며 북쪽 경계는 공험진인데 그 거리가 1,700리이다. 조선 초기에 작성한 각종 지도도 공험진까지가 조선의 강역이란 인식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의 〈동국지도東國地圖〉는 세조 9년(1463)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이 제작했는데, 공험진 선춘령을 두만강 북쪽에 있는 속평강速平江(모사본에는 정평강定平江) 유역으로 그리고 있다. 속평강은 현재의 수분하綏芬下 및 목란강牧丹江 상류이다. 세종은 이 일대까지를 조선의 강역으로 확정했던 것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도 마찬가지로 기술하고 있으며 《북로기략北路紀略》 《북여요선北輿要選》 《북새기략北塞記略》 《북관기사北關記事》 《관북읍지關北邑誌》 등도 마찬가지로 공험진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윤관 9성의 위치를 길주 이남에서 함흥평야까지로 축소해 인식하면서 조선의 강역은 두만강 이남이라는 현재의 잘못된 지리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세종은 명나라에 공험진 남쪽은 조선의 강역임을 공식으로 통보한 후 김종서에게 공험진까지 강역을 확장하게 지시했다. 김종서가 세종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종실록》 〈지리지〉를 비롯해 〈동국지도〉 등에 조선의 강역이 공험진까지로 그려진 것은 김종서가 이곳까지 조선의 강역을 확대했음을 말해준다. 두만강에서 선춘령까지 700리 강역은 조선 초기까지도 조선의 강역이었으나 조선 후기인들이 역사 강역에서 지운 것에 불과하다. 김종서는 조선의 강역을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 확장했던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자
김종서는 당대 제일가는 역사가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자도 김종서였다. 그러나 두 역사서에서 김종서의 이름이 삭제되었기에 김종서가 편찬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전하는 《고려사》의 가장 앞부분, 즉 〈고려사를 올리는 전문箋文〉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 겸 성균 대사성인 신臣 ‘정인지’ 등은 삼가 말씀드립니다. ‘신 등이 듣건대, 새 도끼 자루는 헌 도끼 자루를 표준으로 삼으며, 뒤 수레는 앞 수레를 거울삼아 경계한다고 하니 대개 이미 지나간 흥망의 자취는 실로 장래의 교훈이 되기 때문에 이 역사서를 편찬해 올리는 것입니다.’”
《고려사》의 주 편찬자는 정인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편찬 날자는 문종 1년(1451) 8월 25일이다. 그러나 진실을 전해주는 것은 《고려사》 전문이 아니라 같은 날의 《문종실록》기사이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김종서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바치니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 있었다.”
“신 등이 듣건대, 새 도끼 자루는 헌 도끼 자루를 표준으로 삼으며, 뒤 수레는 앞 수레를 거울삼아 경계한다고 하니…”라는 전문은 정인지가 편찬한 것처럼 되어 있는 《고려사》와 같다.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격살당한 후 ‘김종서’를 ‘정인지’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시대의 금기가 된 김종서 김종서는 《노산군일기》와 《세조실록》에 계속 역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긴 자의 시각일 뿐이었다. 김종서의 공은 누구도 지울 수 없었다. 선조 16년(1583) 율곡 이이는 상소문에서 “김종서는 드러나게 탄핵받았으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여 6진을 개척하였습니다”라는 예를 들어 김종서가 6진 개척의 대업을 완수한 사실을 되새겼다. 인조는 재위 10년(1632) 청과의 충돌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자 함경감사 김기종에게 “옛날에 김종서는 아무것도 없는 땅에 창건하였는데, 지금 지키는 것은 이보다 쉽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김종서가 실제 역도였다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가 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는 물론 임금까지 그의 공적을 공공연히 언급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그를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종서의 공식적인 신원은 쉽지 않았다. 수양대군, 즉 세조의 후손들이 계속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세조의 직계인 예종(8대), 성종(9대), 연산군(10대), 중종(11대), 인종(12대), 명종(13대)은 물론 방계인 선조(14대)도 중종의 7남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로서 세조의 핏줄이었다. 광해군(15대)을 내쫓고 집권한 인조(16대)도 선조의 5남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이니 세조의 핏줄이긴 마찬가지였다. 조선 국왕들의 이런 혈통 때문에 김종서의 신원은 두고두고 뜨거운 감자였다. 김종서의 신원은 자칫 세조 집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죄였던 김종서는 결국 영조 22년, 그가 사망한 지 293년 만에 공식적으로 신원되기에 이른다.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밀어내며 수양이 건설한 조선은 공신들의 나라였다. 수양의 후예들이 계속 즉위하는 조정에서 김종서는 시대의 금기였다. 《고려사》 편찬자의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진 것처럼 권력자들은 그의 이름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비정상으로 흘러도 진실은 그 스스로의 목소리로 살아남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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