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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운명
신외숙
항상 죽음을 대비하는 심정으로 살아간다.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길,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항상 죽음에 대한 만반의 태세를 갖춰야 한다. 우왕좌왕할 시간이 없다.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인생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 그것은 바로 영원이라는 지향점이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물을 것이다. 영원이라니? 죽음에 대한 대비와 영원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죽음은 분명 시간의 정지일 텐데 영원이라니 뭔가 엇갈린 느낌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죽음=영원
그것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차이일 것이다.
나의 죽음에 대한 대비책은 후회에서 비롯되었다. IMF 태풍이 온 나라를 휘몰아치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버스가 강남역을 지나 신사동에 이르렀을 때였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차도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다리를 앞으로 쭉 뻗은 그는 차량들의 경적에도 아랑곳없이 앉아 있었다.
차량은 그를 피하기 위해 급히 핸들을 꺾는가 하면 갑자기 끼익! 파열음을 내며 멈춰 섰다.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 길을 가던 행인들도 멈춰 서서 남자를 지켜봤다. 나는 버스 중앙차로에서 내려서서 남자를 향해 손짓하며 소리쳤다.
“아저씨 위험해요, 빨리 나오세요.”
차량의 혼잡한 잡음 속에서 내 소리를 들은 것일까.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맑은 얼굴 피부에 붉게 충혈 된 눈이 나에게 분노의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아저씨 차 와요, 빨리 나오세요.”
나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뛰어가면서 다시 한번 남자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빨리요.”
그때였다.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건너오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이쪽을 보더니 남자에게 다가갔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양쪽에서 남자의 팔짱을 꼈다. 꼼짝 못하도록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고는 차도를 건너갔다. 남자는 순순히 끌려가면서 전혀 저항하는 기세가 없었다. 두 대학생이 남자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남자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뻘 되는 남자들에게 안겨 가면서 남자는 충분히 감동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지켜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는 경제한파와 아랑곳없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빗살무늬처럼 퍼져갔다. 어둠과 추위가 점차 사람들의 마음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취객 하나가 내 곁을 지나며 말했다.
“날씨야 아무리 추워봐라,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그러자 곁을 지나던 또다른 취객 하나가 말했다.
“그래봐야 너만 얼어 죽지 별 수 있냐?”
남자는 왜 하필이면 차로 한 가운데서 자살을 시도하려던 것이었을까.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그 역시 IMF의 피해자였을까. 젊은 두 남자에게 순순히 끌려 나간 걸로 보아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시위용으로? 그렇다고 하기엔 방법이 너무 무모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그의 입에선 어떤 구호도 없었다.
좀 전의 어떤 운전자는 차창 문을 열고서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서 죽으면 보상도 안 나와 개죽음이라구, 남에게 피해 끼치지 말고 썩 꺼져 알았어?”
남자 곁을 지나던 중년 여자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 살고 싶어 사는 줄 아나? 달밤에 쇼하고 있어.”
“저 남자 왜 저래? IMF 때문에 망했나? 아님 마누라가 바람나 가출이라도 했나?”
사람들은 남자의 행동을 두고 퀴즈 풀이하듯 그의 불행을 점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소용없어, 죽는 놈만 불쌍하다구, 어쨌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해,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여 안 그런감.”
“저 사람 저러다 일내지 일내, 아무리 술을 먹었어도 그렇지 하필이면 차도 한가운데서 저럴게 뭐여?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운전자만 불쌍하지.”
“누가 가서 저 사람 좀 끌어내지.”
“아! 냅둬 지 목숨 아까우면 지 발로 나오겄지.”
“어어 저 사람 지금 뭐허는 거여? 아예 자리에 눕네 그래, 저 찻길이 지의 집 안방인 줄 아나? 술을 처먹어도 엄청 먹은 모양이네.”
“허이구 저 사람도 아이엠에픈가 뭔가 땜에 망한 모양이네, 얼마나 속이 상했음 저럴까, 암만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하믄 안 되지,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지.”
사람들은 말만 할뿐 아무도 남자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다만 두 젊은 남자 대학생들 외엔. 사람들에게 남자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한낱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일주일 후, 퇴근하던 나는 그와 비슷한 광경을 또 목격했다. 이번에는 시장 길목으로 통하는 네거리였다.
사람들과 차량이 한꺼번에 지나는 매우 혼잡한 거리였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한가운데 차도에 남자가 누워 있었다. 멋모르고 달려오던 봉고차가 급정거를 하며 멈춰 섰다.
“야이! 아 망할 자식아 죽으려고 환장을 했냐.”
운전자는 차창 밖으로 삿대질을 하며 고함쳤다. 때 맞춰 뒤에 있던 차량들이 빵빵대며 경적을 울렸다. 남자는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얼마나 싸웠는지 머리칼은 온통 헝클어진 데다 옷은 흙투성이에 핏물이 번져 있었다. 운전자들은 차창 문을 열고 남자를 바라만 볼뿐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다만 빨리 비켜나가라고 있는 힘을 다해 클랙슨을 눌러댔다. 바닥에 누워 미동도 않던 남자가 꿈틀하고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남자는 마치 죽기를 작정한 듯 도무지 움직일 태세를 보이지 않았다. 아예 눈을 감고 날 잡아 잡수 하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참다못한 중년남자 하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를 향해 뭔가 큰소리로 외치는가 싶더니 발길로 남자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두 팔로 남자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허사였다. 가까이서 그 모양을 보고 있던 남자 둘이 잽싸게 뛰어왔다. 남자 셋이 그를 일으켜 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드디어 남자는 세 남자의 힘에 이끌려 차도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인도블록 위에 폭 고꾸라졌다. 세명의 남자가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돌아설 때였다. 남자가 돌연 반대편 차도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끼익!
차량은 미끄러지는 파열음을 내며 멈춰 섰다.
퍽! 남자의 몸은 공중으로 한번 솟구쳤다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꽃혔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축 늘어진 남자의 시신을 놓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자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아스팔트를 적시며 천천히 흘러 내려갔다. 길을 가던 여자는 아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시장 쪽으로 마구 뛰어갔다.
언제 연락이 닿았는지 구급차가 달려왔고 요란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구급대원들의 일사분란한 움직임도 잠시였다. 곧이어 철커덕! 하고 문 닫는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사거리 쪽으로 나는 듯이 사라졌다. 갑자기 귀에서 윙! 하고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한 여름도 아닌데 웬 매미? 환청인가? 나는 손가락을 귓속에다 넣고 계속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다음날 이비인후과에 갔는데 이명 현상이라 했다. 치료하면 금방 없어질 줄 알았는데 꽤 오래 갔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 발음이 계속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너의 운명이다. 운명 운명…… 운명 운명.
IMF가 지나고 새 대통령이 등극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대감에 잔뜩 부풀려져 있었다. 그러나 언론 매체는 여전히 경제 난국을 진단했고 IOC회원국 중 자살자 수가 랭킹 1위라는 웃지 못할 신종보도도 들려왔다. 예전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살이란 단어는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살았는데 죽음이 너무 흔해진 세상이다.
그 무렵 나의 사고(思考)는 무언가에 묶여 꼼짝 못하고 있었다. 직장 일이 너무 바빴고 시간에 쫓기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강박증이라고 했다. 분별력이 떨어지고 자꾸 말실수가 났다.
뿐만 아니라 기억이 자주 끊기고 판단력이 흐릿해지더니 생각 속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데 곧 기억이 끊기는 바람에 거짓말쟁이로 오해 받는 일도 발생했다. 이러다 기억상실증 환자 되는 것 아닌가. 순간적으로 공포가 밀려왔다. 생각의 실타래가 뇌 속에서 자꾸 엉켜들고 있었다.
실타래를 풀어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불안정한 기류가 조급증을 부추기고 있었다. 게다가 심심하면 머릿속에서 운명이란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무래도 뇌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퇴근 후 신경정신과에 들러 간단한 진단이라도 받아야지 하고 나왔는데 중간에 또 생각이 끊기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진노랑과 새하양 진분홍의 색채가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건 개나리와 벚꽃 진달래꽃이었다. 그렇지. 지금 때가 봄이니까. 찰랑거리는 물결소리도 들려왔다. 사람들의 왁자한 웃음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멀리 유람선 지나가는 게 보였다. 여기가 어딘가? 직사각형의 높다란 건물이 보였다. 63빌딩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여의도 고수부지였구나. 그런데 이 시간에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 걸까. 가까스로 생각을 더듬어 내려가는데 마음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이미 헤어진 거라구,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자꾸 전화하면 어떡하지? 좀 쿨하게 굴 수 없어?”
“쿨한 게 뭔데?”
“정말 이럴 거야?”
화난 얼굴이 내게 뭔가 자꾸 종용하고 있다.
“아직도 모르겠어? 우린 헤어진 거라구 그것도 이미 오래 전에, 난 아이 아빠가 됐고.”
“아이 아빠?”
“그래, 그러니 다신 전화 하지 마.”
“그럼 난 어떡케 된 거지?”
한심하다는 듯 비틀어진 입 사이로 말이 튀어 나온다.
“넌 버림 받은 거야, 나한테서 그러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쿨하게 떨어져 나가줘.”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다 아스팔트를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 자동차를 보았다. 그의 자동차였다.
“그렇지 그와 난 헤어졌지, 그날 밤.”
그와의 이별은 예정된 거였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운명처럼 직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 헤어지는 것을 감행할 수 없었다. 죽기보다 싫었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다.
운명이란 건 뭔가? 예정된 신(神)의 시나리오인가. 인간 삶을 좌지우지하는 신의 절대권력인가. 아님 흔한 말로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팔자소관인가.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운명에 순응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운명 자체를 거부하고 싶었다.
그 말고도 나는 여러 차례 이별을 경험했다. 숫자로 표시하자면 7- 8번쯤?
이별을 내가 결정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상대 쪽에서 서둘러 이별을 통보해 왔다. 전화나 문자메시지 혹은 이메일로. 한두 번 이별을 경험한 것도 아닌데 나는 매번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고 직장에서도 넋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때마다 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이번에도 또 당한 모양이군.”
언젠가부터 나는 운명과 신을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결국엔 인생의 생사회복은 신의 몫일 테니까. 그럼에도 분노가 속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거듭되는 이별에도 나는 늘 새로운 만남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라. 오기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별이라는 직감을 알면서도. 운명처럼.
버림받는 이유는 매번 달랐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이유를 모를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하나 있었다. 싫어졌다는 것이었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하자면 싫증이 났다는 것이다. 가장 그럴 듯한 이유였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 남자들이 나보다 잘났다거나 집안이 좋다거나 신분이나 학력이 지나치게 높다면 이해가 될 텐데 그게 아니어서 더 아이러니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얼굴에 흉악이라고 써진 남자도 만나 보았고 천박이라고 써진 남자도 만나 보았다. 기껏 봉제공장이나 운영하면서 거창하게 자신이 원하는 여성상에 대해 골백번도 더 설명하는 남자도 만나 보았다. 공고를 나와 공장 근로자로 살아가는 남자도 만나 보았고 소위 3D 업종에 종사하는 남자도 만나 보았다.
동네에서 손바닥 만한 점포 하나 얻어 놓고 장사하는 장사치도 만나 보았다. 그는 8남매의 장남에다 노부모와 조부모까지 모시는 까다로운 결혼 조건을 달고 있었다. 간신히 야간 공고를 졸업한 그는 키가 너무 작아 군대도 못 다녀 온 경력까지 추가하고 있었다. 그 주제에 뭘 믿고 그러는지 집안살림과 맞벌이를 병행할 것을 끝까지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내가 난색을 표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별을 통고해 왔다. 단 한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나보다 학력도 인물도 낮았다.
사람들이 내 약점을 들어 하나같이 나보다 낮은 남자만을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헤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들과 함께 미래를 의논하고 싶었고 어느 순간에는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 헤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 쪽에서 먼저 이별에 대한 의사를 밝힌 적은 한번도 없었다. 헤어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의식 저변에 깔린 헤어짐에 대한 공포는 어린 시절에 있었다. 버림 당할까봐 두려움에 울고 있는 어린 소녀. 부모의 이혼이라는 충격보다 더 두려운 건 양부모로부터 버림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니가 낳았으니까 니가 데려가.”
“내가 왜 니 새끼를 맡아야 하는데? 외국에 입양 보내거나 남 줘버리거나 맘대로 해.”
“설마 자식을 볼모로 내 발목 잡으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누가 니 발목을 잡는다고 그래, 나 니 자식 취미 없으니까 갖다버리던가 니 맘대로 해.”
“그래? 그럼 고아원에 갖다 버려.”
부모는 새 출발을 앞두고 서로 자식을 맡지 않겠다고 외면했다. 심지어 울고 있는 내게 꿀밤을 먹이며 시끄럽다고 타박을 했다.
“공연히 저런 년을 낳아가지고…….”
그 소리에 나는 자지러지듯 울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생. 잉여 인생. 쓰레기 같은 하찮은 인생. 더러운 팔자, 그리고 운명.
나는 양 부모 사이를 오가며 바지 가랭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거의 필사적으로. 그러나 귀찮은 짐짝 내던지듯 부모는 나를 떠나고 말았다. 이후 나는 이리저리 채이면서 살아가는 떠돌이 인생이 되었다. 인척 집에 잠시 머물렀다 쫓겨난 적이 부지기수였다. 하긴 부모도 안 보려는 자식을 어느 누가 맡아 주겠는가. 설움이 북받칠 때면 부모에게 앙갚음 하는 마음으로 자살할까도 여러번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죽는다고 해도 누가 와서 시체 치워 줄 사람 하나 없는 것이다. 그때 희한하게 내 의식 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종족보존이었다. 동식물, 하다못해 미물도 종족보존을 위해 목숨을 건다. 연어는 알을 낳기 위해 수천 킬로를 헤엄쳐 자기가 태어난 본 고장으로 돌아간다. 중간에 천적을 만나 잡아먹히면서도 회귀 본능은 멈추지 않는다. 연어가 강 상류로 가 알을 낳는 이유는 한가지다.
천적이 없는 안전한 곳에서 알을 낳고 부화하기 위해서다. 어디 연어뿐이겠는가. 하루살이 풀벌레와 잡초도 많은 씨앗을 퍼뜨리고 죽는다. 생명체는 자신의 죽음을 씨앗의 번창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맹수인 사자나 호랑이도 새끼를 위해선 목숨을 건다. 적의 침입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고 먹이를 사냥해 와 키우고 사냥기술을 가르쳐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하다못해 하루살이도 그렇다. 종족보존은 생명체의 최대과제인 셈이다. 동시에 자손은 꿈과 희망을 대신해 줄 재목이기 때문이다. 전에 직장에 근무했을 때 키 작고 못난 김영숙도 자녀 교육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날뛰었다.
파출부도 안 쓰고 집안일과 직장 일을 병행하면서도 자식 일이라면 열일을 제쳐두고 나섰다. 월급보다 더 많은 학원비를 지불하면서 몸이 부서져라 자식만 위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목숨 걸고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이고 만족인가. 나에겐 바로 그것이 꿈이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도 분신을 낳아 키우며 내 일생 한을 풀리라. 내가 받지 못한 부모 사랑을 내 자식들에게 맘껏 퍼부어주며 오직 자식들을 위해 살아가리라. 그러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조건을 갖춰야 했다. 우선 몸을 건강하게 다스리며 자녀교육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선 최소한의 경제적 정신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의 전공도 교육학으로 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또다시 물을 것이다. 부모도 없는데 무슨 돈으로 대학을 갔느냐고? 누가 물질적인 후원을 해주었겠느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여고 졸업하고 나서 죽을힘을 다해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고 입학한 뒤로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일부러 낮은 대학을 택했고 그래서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다. 졸업한 뒤로는 결사적으로 직장생활을 했고 결혼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카드는 맨 마지막에 꺼낼 참이었다.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도 교제해 줄 남자는 없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 경험으로 보아 그런 행운은 와 줄 것 같지 않았다.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내 주변엔 악인들이 많았다. 어떡케 알았는지 그들은 내 전력을 알아내 교묘히 나를 골탕 먹이고 망신 주는데 앞장섰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직장생활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칭찬해 주거나 격려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제까짓 게 흥! 하고 콧방귀 뀌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가와 면박주고 악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흥! 뛰어 봐야 벼룩이지, 제 에미 애비도 없는 것이.”
나는 내 자녀에게만큼은 내가 겪은 상처를 결코 물려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니 내가 당한 그 이상으로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아껴줄 작정이었다. 내가 배운 교육학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더 잘 가르치고 성공한 사회인으로 키울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에 걸 맞는 가정환경을 갖춰야겠기에 남편 될 사람의 인격과 능력도 중요했다.
그러나 그런 남자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사회구조가 진실하고 괜찮은 남자를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또 조건이 좋은 남자일수록 여자 보는 눈도 까다롭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가지 빠뜨린 게 있었다. 바로 집안 환경이었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했다.
어쨌든 나는 상처와 설움이 클수록 결혼에 집착했다. 내 자녀가 태어나면 사랑과 정성을 몽땅 쏟아부을 테니 그때는 상처가 치유되리라 믿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고수부지는 낭만 백퍼센트였다. 윤중로까지 이어진 벛꽃행렬은 이제 곧 장관을 이룰 것이다. 강물은 햇살에 부서져 봄 향기를 안고서 천천히 하류로 흘러갔다. 고수부지 굴다리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강바람이 세차게 내 머리칼을 붙잡다 사라졌다. 멀리 여의도 성모병원이 보였다. 병원에 갈까 말까 수십번 망설인 끝에 드디어 병원 문 앞에 당도했다.
눈앞에 3차 의료기관이란 표시가 보였다. 그냥 갔다간 엄청난 진료비를 물게 될 것이다. 나는 발걸음을 뒤로 빼면서 거의 기절할 듯이 놀랐다. 배가 만삭이 된 부인을 안고 들어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이미 산통이 시작되었는지 여자는 죽는 시늉을 하며 손을 내젓고 있었다.
빨리 빨리…….
남자는 아내를 옮기며 여전히 눈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표정으로 보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한손으로 아내를 부축하고 눈은 나를 향하더니 표정이 냉랭하게 굳었다. 여자는 통증을 참기 힘든 듯 허리를 뒤로 제쳤다. 의료진이 달려오면서 여자를 부축하고는 병동 쪽으로 사라졌다.
순간 알 수 없는 충동이 내 가슴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정신이 산만해지면서 이상한 흥분이 다가왔다.
표경민. 그는 내가 만난 남자 중 유일하게 조건이 좋은 사람이었다. 우선 인물이 좋았고 집안과 학력도 좋았다. 또한 인간성도 좋아 내게 상처 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다른 남자들과 다른 점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배려심이 많아 상처난 내 마음을 잘 다독여 주었다.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지?”
그때 내가 당황하며 눈물을 떨구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난날의 모든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라며 위안의 말을 건네주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듣는 가슴 벅찬 말이었다. 온화한 그의 성품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고 힘과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나 말고도 좋아하는 여자가 많다는 소문이었다. 그를 알고 난 후, 처음으로 안정된 기쁨을 느꼈고 행복을 느끼려는 찰나였다.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목숨 걸고 그의 감정에 매달렸다. 그의 아이를 낳아 시대가 원하는 인물로 키우겠다고 내심 얼마나 작정했는지 모른다.
그토록 원하던 내 아이를 낳기 위해 그의 아내가 분만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내 마음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운명이다. 운명. 귓가에서도 들려왔다. 윙! 굉음과 함께 운명. 운명. 이것이 너의 운명이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천사! 천사가 태어난 것이다. 기쁨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분만실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무리가 분만실로 달려갔다. 내 앞서.
“아들이다 아들, 우리 집안의 귀한 종손 아들이 태어났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 이 소리는 무슨 소린가. 그의 목소리였다. 이어 터져 나오는 소리. “얘야 수고했다. 잘했어.”
“축하하네 집안의 경사일세 그려.”
나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돌아서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야 했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도 억지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런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지나던 간호사에 의해 발견된 나는 응급실로 옮겨져 간단한 처치를 받은 뒤 깨어났다.
비참했다.
너무 내 자신이 초라하고 낮아 보여 견딜 수없이 슬펐다. 극과 극의 감정이 순식간에 내 안에 흘러넘쳤다. 너무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간신히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왔다. 눈부신 봄 햇살이 내 몸 위로 부서져 내렸다. 부끄러웠다. 분만실 앞에서 쓰러지다니, 만일 그가 보기라도 했다면 이 무슨 망신인가. 옛 남자의 2세가 태어나는 분만실 앞에서 쓰러진 사실을 알면 사람들은 무어라 할 것인가.
아마도 갖가지 상상을 부풀려 소설을 써댈 것이다. 버림받은 여자의 상처에다 원한까지 추가해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비웃고 말 것이다. 나는 본래 병원을 갔던 목적은 까맣게 잊은 채 부끄러움과 후회감만 뒤집어 쓴 채 나오고 말았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아이를 안고 가는 부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갓난아이를 안은 남자가 아내를 팔을 잡고 택시를 타고 있었다. 아내를 뒷좌석에 먼저 태우고 자신은 아이를 안고 곁에 앉았다. 그 광경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거리는 벚꽃 행렬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봄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죽었던 이파리가 새로 돋고 재색 어둠이 하양과 진분홍 샛노랑으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봄 축제의 서곡을 알리고 있었다. 따스한 가족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는 아기는 기쁨의 통로가 되어 사람들을 즐겁게 할 것이다. 세상은 온통 새생명의 축제로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도로 직장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다 그대로 집으로 갔다.
내 방에는 귀여운 아기들의 사진으로 가득 차있다. 갓난아이로부터 백일 돌 유치원 아이들까지 아기 모델 콘테스트에서 뽑힌 아기들 사진도 있다. 나는 원래 어릴 때부터 아기들을 좋아했다. 누워서 방긋 방긋 웃는 아기들을 보면 온갖 시름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다 눈길이 마주친 아기가 웃어주면 그땐 행복지수 백퍼센트가 되었다.
그래서 친구가 아기 백일잔치 돌잔치를 하면 빠짐없이 참석해 아기를 안아 주었다. 물론 선물과 함께 뽀뽀도 해주었다. 아기를 안으면 행복감이 가슴에 물결쳤다. 분유 냄새 풍기며 다가오는 아기 체취는 병든 마음을 당장이라도 녹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좀 더 자라면 아기는 낯갈이를 했고 내가 안을라 치면 몸을 뻗대고 울어댔다.
좀 더 자라 말을 하게 되면 기쁨과 함께 실망스런 행동도 했다.
“이모 좋아, 이모 미워 빨리 가.”
가슴에 안기는 척했다가 주먹으로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눈을 흘기며 ‘미워! 미워!“를 연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 마음 속에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 아기도 날 무시하는구나‘
평생을 무시당하고 산 나는 스스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고 만다. 사소한 일에도 극도의 긴장을 나타내며 폭풍전야와 같은 불안감에 시달린다. 마음속의 가시가 설움 분노 공포와 함께 강박증세를 나타낸다. 거듭되는 이별을 7-8번 넘게 겪고 나자 비로소 현실감각이 생겼다.
결혼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마음과 의지와 별개로 결혼은 내게 넘지 못할 산처럼 보였다. 세상에는 노력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다.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운명이라 표현한다. 그것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환경도 포함돼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덕이 인덕이라는 말이 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고 화목한 인간관계를 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재물과 힘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가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떠나고 마는…….
자기의 학연과 지연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관계야 말로 가장 치열한 전장터가 아니던가.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진정한 사랑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사랑에 대한 실체조차 파악 못하고 있다.
어릴 때 내 부모는 나를 떠나면서 귀찮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처음부터 부부사이가 나빴는지 그건 잘 알 수가 없다. 어느날인가부터 부부는 각방을 쓰기 시작했고 약속이라도 한 듯 새로운 짝을 만나 제각각 돌아 섰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더 쉽게 갈라 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겐 핏줄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의 정도 없었고 서로 제 갈길 가기에 바빴다. 딸린 혹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재산 분쟁을 놓고도 치열한 분쟁이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재산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것마저 욕심을 냈다.
니 자식 줄 테니 재산만큼은 곱게 포기해라.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니 자식을 내가 왜 맡냐, 난 자식은 포기해도 내 재산만큼은 끝까지 포기 못한다. 결국 법정에 선 두 사람은 재산을 공동분할 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일곱 살 이었다. 한참 응석 주리고 유치원 갈 나이에 부모 있는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소설 같은 내 인생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외할머니 집에 맡겨졌는데 외가 식구가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는 바람에 다시 이모집으로 보내졌다.
이모는 이혼한 후 딸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불량 청소년이었다. 당시 이모는 청계천에서 장사를 하고 있어 매일 밤 집을 비웠다. 밤새 장사를 하고 이른 새벽에 집에 들어오는데 그때마다 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겨우 중학생 나이에 사내 맛을 알아 하루도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다.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이모는 장탄식을 하면서 어린 나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해주고 학교 보내 준다는 명목으로 온갖 집안일을 다 시켰다. 생존이라는 게 내겐 벅찬 지옥훈련과 같았다. 지각(知覺)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몸과 마음이 그렇게 짓눌리면서 성장해 갔다. 명절이 되어 인척들이 모이면 내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팔자도 팔자도 저럴 수가…….”
“불쌍하지, 누가 니 맘을 알겠냐, 그래도 이 다음에 잘 될 것을 바라보고 살거라.”
“쯧쯧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다 지 부모 잘못 만난 죄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이모는 교회에 나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지긋지긋한 팔자 타령을 뒤로 하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동급생 남학생과 눈 맞아 집 나간 딸을 위해 매일같이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어쩌다 새벽기도에서 돌아오면 나를 앉혀 놓고 말했다.
“세상에 믿을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죽는 날까지 맘 편히 사는 게 제일이다. 그러려면 몸 건강하고 돈밖에 없다.”
이모의 삶은 신앙과 별개인 모양이었다. 새벽마다 기도를 빠뜨리지 않으면서 입만 열면 건강 돈이었다.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건만 이모 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모는 또다시 뇌까렸다.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호된 이별 경험을 수차례 겪고 나서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행복을 위해 살지. 누군가 내 곁에서 말했다.
그 행복은 누가 갖다 주지?
그건 스스로 노력해서 얻기도 하지만 전능주의 절대 권한이기도 해.
노력하면 노력한 대로 과연 행복이 찾아와 줄까.
어떤 사람은 부와 명예 건강 자녀손을 복의 축으로 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평안이 우선이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 자녀손의 축복이 먼저야, 왜냐하면 복은 대대로 이어지는 법이니까.
혼자라는 굴레는 언제부터 내게 씌워졌을까. 고립무원 상전벽해와 같은 외로움은 어릴 적부터 내 운명이었을까. 하루하루 살기에도 벅찬 나날 속에 나는 그동안 무엇을 추구하며 산 것일까.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가정을 나의 2세를 왜 소유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나의 독신은 운명인지도 모른다.
내 부모와 이모가 한꺼번에 이혼한 것처럼.
잊고 있던 이명현상이 또 시작되었다. 운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한번은 결혼 직전까지 간 남자가 있었다. 그가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 예외였던 것 같다. 나보다 학력은 떨어졌지만 장점도 있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인내심과 정이 많았다. 흠이 있다면 지나치게 효자라는 점과 마음이 약한 게 약점이었다.
이중식. 그의 부모도 겉으로 보기에 인정도 있고 무엇보다 자식 사랑이 끔찍했다. 결혼 말이 본격적으로 오갈 때도 내 부모의 이혼 말은 입 밖에도 올리지 않았다. 손주가 태어나면 키워줄 테니 안심하고 전공을 살리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바라고 꿈꾸던 일들이 곧 벌어질 상황인데도 마음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하고 폭풍 전야와 같은 두려움으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불길한 예감이 종일 뇌리를 누르는 것이었다. 운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예감이 현실이 되던 아침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핸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핸폰 뚜껑을 열고 받는 순간 예감이 적중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귓가에서 119 구급대 소리가 까마귀 울음소리처럼 들려왔다.
단 한번의 모처럼의 기회였는데. 그 기회가 죽음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비난의 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팔자 더러운 년,
제 부모 호적에 빨간 줄 긋게 하더니.
그의 가족들이 모두 악마로 변해 내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자식을 향한 끔찍한 사랑이 내게 저주로 들려오는 순간이었다.
그의 장례식이 끝나고 양평 강가를 무한질주 하던 날이었다. 나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운명과 죽음을 생각했다..
인생은 천차만별이겠으나 죽음만은 공동적인 운명이 아니던가. 그 간단한 평범한 진리가 이상하게 나를 흥분되게 했다. 강가에서 모터 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하얀 물살을 가르며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외로움과 절망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강줄기를 따라 걷다 차도를 건너는데 울긋불긋한 깃발을 앞세운 채 꽹과리와 나팔을 부는 농악대를 만났다. 명절을 앞두고 무슨 행사를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제서야 들판의 황금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선선한 가을 바람과 함께.
그때 내 마음 속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를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어느날 새벽기도를 다녀오던 이모가 방에서 읽던 성경구절이었다
나는 가던 길을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강 언덕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에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강명자. 내 이름으로 산 처음으로 가진 내 재산 목록 1호인 자동차를 아이들이 발길로 차고 돌조각으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이놈들…….
나는 숨이 턱에 차서 쫓아갔다. 아이들은 나를 보더니 약속이나 한 듯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어디 한군데도 안심할 곳이 없었다. 누가 그랬던가. 동심 천국이라고. 아이들은 쫓겨 가면서도 나에게 용용 죽겠지를 했다. 그동안 아이들을 향해 품었던 나의 상상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그와의 이별 후에도 나는 살기 위해 노력했다. 성실과 인내로 혼자만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며 살았다. 여행도 자주 다녔고 친목단체에도 가입해 나름대로 인간관계도 넓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몸의 이상증세를 발견했다. 생리가 끊긴 것이다. 아직 나이 사십도 안 됐는데.
처음에 산부인과에 갔을 때만 해도 나는 폐경이란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다. 자궁 쪽에 이상이 발생한 것쯤으로 알았었다. 그런데 의사 입에서 청천벽력같이 폐경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 아득한 절망감이 마음을 확 덮쳐오는 것이었다.
병원 문을 나설 때에는 하도 기가 막혀 하늘을 바라보고 웃었다.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한번도 해내지 못한 내 육체가 부끄러움 속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폐경에 따른 징조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미 골다공증이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었다.
폐경 이후에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분비가 중지됨으로 골다공증상이 심화돼 골절 현상이 예상된다고 했다. 의사는 화학요법을 해서라고 생리현상을 진행시켜야 한다고 했다.
화학요법에는 약물요법과 주사 요법이 있다. 일년에 네 번 암 검사를 받는데 한꺼번에 네가지나 받아야 한다. 그만큼 위험빈도가 높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으나 그 또한 자연현상을 역주행하는 것이라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폐경은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다. 중년 여성들의 심장병 발발이 많은 것도 폐경 이후라 했다. 거기에는 또한 비만도 한몫했다. 겨우 내 한입 풀칠하며 사느라 힘든 인생이었는데 이젠 한가닥 희망인 2세는커녕 신병(身病)을 걱정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아직 사십도 안 된 나이인데. 불길한 상상력이 꼬리를 물고 뇌리에서 살아났다.
IMF. 운명. 죽음 자살. 표경민. 죽은 약혼자 이중식 폐경.
또다시 이명 현상이 일었다.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겼는지 세상이 빙그르르 도는 환시현상도 느껴졌다. 땅이 꺼지는 것 같이 몸속에서 가운이 빠져 나갔다. 암흑 가운데 한줄기 빛이 보였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너를 낳은 어미는 너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
문득 어머니의 존재가 그리웠다. 자기 행복을 위해 딸을 버리고 서둘러 이혼 도장을 찍은 내 부모는 또다시 자녀를 낳아 키웠을까. 그들의 사고체계는 어떻게 된 것이기에 한번도 단 한번도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지 못한 걸까.
내 부모의 존재에 대해 이모는 끝까지 함구했다. 제작년에 미국으로 이민 간 고모도 마찬가지였다. 그깟 인간들 부모도 아니다. 너는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네 소신껏 살아라, 세상에 믿을 건 아무것도 없다. 자기 인생 스스로 책임지면서 사는 거다.
고모는 세찬 소리를 했지만 눈물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깟 것들 인간도 아니다. 불쌍한 내 새끼, 누구도 생각할 것 없이 너 자신을 위해 살아라.
고모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떠나갔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 또한 후회 없이 사는 것만이 운명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것만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책임이자 죽음에 대한 준비인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전능주만이 운명의 결정권자다.
언젠가 신사동 차로에 앉아 있던 남자의 모습이 생각났다. 죽음을 작정하고 차도에 뛰어 들었다가 젊은 대학생들에게 붙잡혀 끌려 나오던…….
인파와 차량이 빈번한 차도에 누웠다가 행인들에 의해 끌려 나온 후, 또다시 반대편 차도에 뛰어 들어 죽음을 맞이한 중년 남자도 생각났다. 끔직한 죽음의 반전 앞에 몸서리치던…….
그들의 삶과 죽음은 예정된 운명이었을까. 나는 문득 거리를 지나다 진한 봄 향기를 맡았다. 눈부신 봄 햇살이 생명의 부활을 곳곳에 초록과 꽃향기로 흩뿌려 놓고 있었다. 죽음 뒤의 부활을 소망의 메시지로 전하면서 웃음꽃을 선사하고 있었다. 거리마다 핸드폰 벨소리와 함께 희망의 팡파레가 울려 퍼졌다.
몇 달 후 내 안에서 자각 증상이 일었다. 그동안 들려오던 이명 현상이 사라지면서 끊겼던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전혀 예상 못한 결과였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아마도 운명인가 봅니다.”
“뭐가요?”
“기적이라구요. 분명 폐경 증상 맞았는데.”
의사는 의미도 알 수 없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힘찬 용솟음이 들리는 듯했다. 소망과 미래라는 단어와 함께. 나는 병원을 나와 거리를 뛰어가며 자신에게 외쳤다.
신이시여, 당신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결정권자이시다.
잊었던 꿈타래가 내 마음을 꽉 붙잡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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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운명에 세월이 매달리지는 안나요 // 건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