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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하게 산 자는 땅이 거부한다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덕을 많이 베풀면 명당을 얻어 쓰게 된다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이번 소재의 주제의 조선 4대사화 하나인 명종때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가담, 정적을 처참하게 내치고 정권을 장악했던 관료중의 한 사람인 정순붕의 산소를 비롯,
그 아들 형제인 정염 및 그 동생 광겸의 묘소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실마리는 주인공 정순붕의 5형제 중 장남인 북창 정염에서 시작된다.
정염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릴만큼 총명함이 뛰어났다고 한다. 13세에 동양 6개국어를 자습으로 익혀 통달했으며 20세에 이르러 음률과 의약을 비롯 역술과 천문지리에 도를 통할 만큼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연구가 깊어 그의 숙부가 타계하자 조카인 정염이 직접 그 장지를 찾아 소점, 묘소를 정해놓고 관이 묻힐 자리를 천광하고 보니 물이 나와 고여다 한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놀라서 의아해 했으나 개의치 않고 큰 바위를 천광했던 자리에 넣고 안장했다.
그 묘를 쓰고 난 뒤 문중에서 그 음덕을 받은 후손들이 가장 번성했고 ‘山이 山을 불러서(명당 쓴 집안은 그 음덕에 의해 또다시 명당길지를 얻어쓴다는 뜻)’ 근세사에서도 걸출한 인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자유당 정권시에는 농림부장관이 그 후손에서 배출될 정도였다고 하니 북창 선생의 길지명당을 심룡, 심혈하는 능력의 탁월함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이를 필자의 경험과 견해를 토대로 재론해 보면 ‘용진혈적(龍眞穴的)’의 요건이 확실하게 갖춰졌다면 천광해 물이 나와 고인다고 해도 당황하지 말고 그 물이 광천수에 이어진 생수가 아니고 건지수(빗물이 스며들어 고인물)임이 틀림없으니 고인 물을 제거하고 혈토가 나올 때까지 천광(관이 묻힐자리를 파내는 작업)해서 체백을 안장하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북창 정염의 역술학(관상 포함)에 관한 심오한 연구와 뛰어난 경지를 가늠하는 사례 중에서, 선조 때 영상이었던 윤두수를 보고 “그 대는 40을 넘기기가 어려운 운명을 타고 났으니 참으로 애석하도다” 하고 한탄했다.
이에 윤두수는 “내 운명을 내다보는 형안이라면 수명 연장의 연수 방법도 알 것이니 부디 일러 달라”고 채근하자 정염은 몇 개월 후에 그 방법을 일러줬다고 한다.
이로 인해 윤두수는 73세(1535~1604)까지 살고, 점염은 오히려 43세에 요절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윤두수가 북두칠성신에게 백일주를 곁들여 마른 사슴고기를 헌사했다고 한다.
정염은 삼형제를 뒀는데 모두 장성해 급사했다는 것이다. 정염은 천문과 의술에도 정통, 관상감, 혜민서 교수 등을 지냈고, 도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
이 렇듯 도인의 경지에 오른 정염이 어떻게 부친 정순붕이 작고하자 샘내(경기도 양주시 덕계동 도락산 아래 샘내)의 북쪽 산 일우의 혈처가 아닌 가국에 안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늘이 그의 혜안을 가린 것일까. 아니면 순천지도(順天之道)를 아는 정염의 양심에 따라 행해진 것일까.
북창의 부친 정순붕은 조선 명종 때 우의정 자리에 있었다.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사화 중의 하나다.
1545년에 명종이 등극하자 왕실의 외척인 大尹의 尹壬과 小尹의 尹元衡의 반목으로 대립상태가 극치에 달한다.
이 정란의 불씨는 결국 小尹이 大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피비린내나는 乙巳年의 큰 환란으로 치닫게 된다.
소윤파의 핵심이자 힘을 가진 윤원형과 정순붕 등이 공모, “대윤파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한다.
이에 따라 윤임, 유관, 유인숙, 김명윤, 이덕웅, 이휘, 나숙, 나식, 정희동, 박광우, 곽순, 이중렬, 이문건 등 사림세력이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다.
이렇듯 악독하게 인명을 살상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소윤파는 대윤 세력을 뿌래채 없애기 위해 마침내 ‘양재역 벽서’사건을 꾸민다.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 2년 후 일어난 이른바 고의적으로 정치쟁점화했던 ‘정적숙청 사건’ 이다.
1547년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들이 권력을 휘드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 일당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 생긴 사건이라 주장하며 그 잔당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다. 이 간언을 받아들여 또다시 정미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후 소윤파는 문정왕후가 죽은 1565년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면서 온갖 학정을 자행했다. 이는 역사의 기록으로 확연히 드러난다. 오죽했으면선조 원년에 사후임에도 정순붕의 우상(右相) 벼슬이 삭직 당하는 또 다른 재앙을 불러왔을까.
이렇듯 악을 행한 사람에게 길지가 다가올리 만무하다.
친산을 샘내의 산봉아래 문중산 한 곳의 매우 좁은 땅에 안장하고, 그 계하에 자기 묘는 물론 동생까지 3기를 쓰게 한 정염 선생의 깊은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곳은 ‘좁은 곳에 3기라. 약마중타(약체의 말이 벅찬 짐을 진 형세)요.
무기맥인데다 무순전(용맥이 끝마무리 되어 혈의 증거로 나타난 턱과 같은 지세가 없다)으로 명당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풍수연구가들의 중론이기도 하다.
묘역으로 부터 4㎞ 내외에 결지에 오른 명당대지만도 여러 곳이 있다.
소요산 아래의 비봉귀소형, 도락산하에는 옥대형(玉帶形)과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버드나무에 지어진 앵무새의 집 형국), 상패리엔 백마계주형, 왕방산 아래는 무공단좌형 등이 적덕군자를 기다리다리고 있거나 주인을 만나기도 했다.
악을 일삼은 사람은 반드시 하늘의 벌이 내린다고 했다.
따라서 선·덕을 쌓아 주위사람들의 칭송을 받은 사람만이 죽어서도 좋은 땅을 차지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된다.
다음회는 비천한 몸이지만 변함없는 인정과 온후한 덕성으로 인해 우연하게 명당을 얻어 친산을 길지에 모신 사례를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