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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말 울산의 교회에 대하여(성탄절을 맞이 하여)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자료를 모으게 되어 우리 회원님들께서 참고 해 보시기바랍니다.
언양성당
울산 문화유산 답사기 1. 언양성당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도시가 그러하듯이 울산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역사의 유적들이 지도에서 하나씩 지워지고 있다. 특히, 고대의 유물들은 시멘트로라도 복원하고 있지만 근대 유적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파괴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울산의 중심이었을 성남동과 북정동을 잇는 역사의 공간에는 그 시대를 기억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몇 년 전 문화부에서는 구상북면사무소, 언양성당, 구삼호교, 남창역사, 울기등대 등 울산의 근대유적 5곳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앞으로 울산의 근대유적 5곳을 둘러보면서 유적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찾아가보고자 한다.
언양성당은 그리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다. 시골에 오래된 교회 같은 느낌이다. 아니 실제 그런 교회이다. 멋진 근대 건축물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약간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내가 아는 근대 건축물은 대개 TV나 책에서 봤던 덕수궁의 석조전, 명동성당 등 이름난 것들뿐이니 외관을 중시하는 나 같은 속물적 인간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언양성당이 품고 있던 200여년의 역사와 본당건물이 가지고 있는 근대의 기록을 알게 되면서 종교를 떠나서 인간적인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언양성당 본당은 부산교구 90개 본당 중에서 두 번째로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 언양이란 고장이 지금보다야 크겠지만 부산진 본당이 관할하는 여타의 지역보다 큰 고장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언양에 본당이 이렇게 빨리 건립되었을까? 이는 언양지역이 가지고 있는 천주교 신앙의 역사를 알아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언양지역 천주교의 역사는 1790년경 오한우(베드로)와 그의 육촌 매제인 김교희(프란치스꼬)가 영세 입교하여 영남의 첫신자가 되면서 출발하게 된다. 오한우는 서울에서 친척을 통해 정약용 형제에게서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 오한우와 김교희의 가족 등이 탄압을 피해 간월산으로 피신해 교우촌을 형성해서 생활하였다. 이후 을해박해와 기해박해를 거치면서 탄압을 피해 충청과 영남지역의 신자들이 언양으로 피난하면서 간월공소와 죽림공소를 비롯한 여러 곳에 교우촌이 생겨나게 된다.(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예배당이다)
전국에서 탄압을 피해 깊은 산속을 찾아 언양으로 신자들이 들어오면서 언양지역은 자연스럽게 영남의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가 된다. 죽림공소 같은 경우 죽림굴에서 수십명이 불도 못피우면서 생활하였다고 하니 당시의 생활이 미뤄 짐작이 간다. 이후 병인박해(1868년)때 신자들이 체포되면서 간월산의 신앙공동체들은 파괴되고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언양지역의 신자들은 9명의 순교자(문헌상으로 9명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를 내면서도 험한 산세를 의지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초기엔 신자들 중에 양반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많았다면 박해가 심해질 쯤에는 여성이나 노비 등 하층민들로 확대되었다. 초기의 지식인들이 서양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학이라하여 접근하였다가 제 살길을 위해 발을 뺐다면 후기의 민중들은 현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기독교의 내세신앙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으로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고통 받는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에서 평안을 찾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영남 알프스라는 훼괴한 지명으로 불리게 된 이곳은 우리역사에서 소외받고 세상에 저항하는 이들이 숨어들기에 매우 적당한 곳이었던 것 같다. 훗날 빨치산이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성당 전경, 오랜된 고목들이 성당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성당내부의 모습, 제의공간이 다른 성당에 비해 적은데 이는 초기 공사비용이 부족하여 이후 증축을 염두해 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언양성당의 초대신부이며 본당 건립을 주도한 에밀 보드뱅 신부 현재의 언양성당은 1926년 당시 공소로 사용하고 있던 집과 그 뒤편의 기와집을 매입하고 1927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에밀 보드뱅 신부가 부임하면서 출발하게 된다. 현 본당 건물은 이때 준비하여 1928년 5월에 기공식을 가진다. 1932년 8월에 성당이 먼저 완공되고 1936년 10월 사제관이 완공되었다. 성당 건축비용은 신도의 모금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원으로 부담하였고 공사에는 서울 명동성당 보수공사의 경험이 있는 중국인 기술자들에 의해 진행되었고 건축에 사용된 화강암은 주변 언덕의 화강암을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가장 근대적인 건물이 울산시내가 아니라 언양 골짜기에 세워지는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 생긴 것이다. 늘 그렇듯 이 건물은 종교적 관점과는 무관하게 일대의 명물이 되어서 많은 이들이 구경을 왔다고 전해진다.
언양성당에 도착하면 주차장에서 먼저 성당을 바라보게 된다. 낮은 언덕에 앉아 있는 성당이 원 모습보다 웅장하게 보인다. 주차장에서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성당 마당이 나오는데 성당마당에는 예배를 알렸을 종과 언양성당의 초대 신부인 에밀 보드뱅 신부의 동상이 있다. 성당 뒤편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로 올라가면 성모동굴이 나온다
그리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본당과 유물관으로 사용되는 사제관이 나오는데 사제관은 성당 사무실에 이야기를 해야 관람을 할 수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안타깝게도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성당에서 40여분이나 있었는데 계속 사무실에 아무도 오지 않아 사제관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사제관에는 박해시절 공소에서 사용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본당 건축 양식은 고딕양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에 고딕양식이 도입되었지만 유럽 같은 경우 고딕은 중세의 건축양식이다. 언양성당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성당들이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고딕양식이 중세 신학사상과 신념체계를 잘 반영한 건축양식이며 성당건축을 주도한 파리외방전교회가 선호하는 건축양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파리외방전교회는 근본적인 신앙을 가지고 공격적인 선교를 하였다. 주로 아시아 포교에 종사하였는데 선교 3세기 동안 4천여명의 사제를 파견하였고 그 중 160여명이 순교하였다. 또한 이들은 문화적 우월주위와 근대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피선교지의 건축양식이나 근대의 건축양식보다는 중세의 신학적 건축양식을 선호했다. 이는 기와집 모양의 예배당이 있는 성공회 교회와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 같다.
언양성당의 뒷산에는 성모동굴과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마지막 시간을 기억하며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로 14곳의 묵상처가 있다. 보통 사순절에 하는 기도이다. 언양성당에서는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하지만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묵상처 한곳 한곳을 지나면서 이 언덕을 올라가게 되면 저절로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 같다. 성모동굴까지는 10분정도 올라가면 되는데 높이는 800미터정도이다. 올라가는 언덕길에는 순교자 오씨의 무덤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성모동산에서 바라본 전경, 언양성당의 종탑이 보이고 주변의 아파트 공사장이 보인다. 언양성당은 언양시내의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데 이제는 이곳까지 개발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다. 성당주변에 고층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이런 고층 아파트가 생기는데 그 아파트에는 누가 다 사는지 모르겠다. 선조들의 조용한 기도처가 이제 후손들의 개발열기에 포위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1850년 경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지방 전교 중 설립한 공소
선필 신자촌은 간월 교우촌과 함께 언양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교우촌이며 상선필·중선필·하선필 등 자연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다. 공소 설립 이전은 탑곡 공소 소속이었고, 경북 외남면과 경계를 이루며 고헌산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교우촌이다. 《벽위편》에 의하면 “1801년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강이문(세례명 미상)이 언양으로 귀양감”이라고 나오는데 그 귀양지가 탑곡인 것으로 추측되므로 그 이후에 신자들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강이문으로부터 전교를 받은 경주인 예씨(芮氏, 본명 미상)가 친족 5세대를 이끌고 이곳 선필로 옮겨 와서 1805년부터 예씨 일가의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한때는 예씨네 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1815년 을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충청도와 경북 지방에서 피난 온 김씨, 이씨, 최씨 등이 예씨네 일가와 합세하여 큰 선필 교우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울주의 최 시몬 가정은 강원도로 피난을 갔다가 결혼 후 다시 고향 근처인 선필 교우촌으로 와서 대대로 한의원을 하면서 공소 회장을 맡아 봉사하고, 1891년에는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1866~1904, 레오) 신부를 3개월간 집에 모셨다.
한편 상선필의 공소는 원래 경주 내남면에 살던 경주 이씨가 치명을 당하자 그 후손들이 내와리의 탑곡으로 왔다가 다시 이곳 상선필에 들어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1850년 5월 주일 첨례를 봄으로써 공소가 처음 설립되었다고 한다. 처음의 공소 건물은 뒤테르트르 신부가 거처하던 집이었다. 이곳은 공소 설립 초기부터 많은 전교 신부들이 거쳐 갔다. 이미 공소 설립 이전인 1839년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1차와 2차로 전교를 하였고, 그후 1845~1849년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가 이곳 상선필에 들러 성사를 주었다. 그러다가 1850년경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방으로 전교를 시작하면서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실질적인 공소가 되었다.
1893년도 당시 상선필 공소의 회장은 최 시몬의 사위인 한광호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청주 한씨 집안으로 대대로 관직에 나아간 양반이었는데 그 선대 한용식 요셉 때부터 천주교를 믿고 몰락 양반으로서 계속 피난하며 다니다가 상선필로 들어온 집안이다. 자손들이 상선필(한광호 베르나르도), 하선필(광호의 큰 아들 한문필 베드로), 탑곡(광호의 조카 한경삼 시몬), 언양읍(광호의 둘째아들 한운필 타대오)으로 흩어져 살며 이주해 간 지역에서 교우촌을 이루었다. 초기 선조 신앙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상선필 공소도 도시화의 물결 속에 휩쓸려 많은 교우들이 새 삶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 버리고 지금은 4세대 약 7명의 신자들이 옛날에 번창하였던 상선필 공소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 뒤테르트르(Dutertre)
뒤테르트르(1866~1904) 신부는 1891년 한국에 들어와 이천 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청일 전쟁과 동학 농민 운동을 겪으며 전교에 힘썼다. 강원도 이천과 원주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교안(敎案) 사건에 휘말려 곤경을 겪었다. 그 하나가 1900년 11월에 이천군 귀당(龜塘)에 사는 김순식과 김응섭 등이 성당을 파괴하고 뒤테르트르 신부를 폭행한 사건으로, 이른바 ‘뒤테르트르 신부 사건’이라고 하는 교안이다.
다른 하나의 교안은 1901년 원주에서 발생한 것으로, 뒤테르트르 신부가 강원도 관찰부에 함부로 들어가 관에 압력을 가했다는 오해를 받은 사건이다. 이러한 불행한 일들을 겪고도 계속해서 이천 성당의 사목을 담당하여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공소 순방 중에 성홍열(또는 홍역)에 감염되어 1904년 3월 11일 평강(平康) 근처의 거릿말에서 세상을 떠났다.유 해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자치봉 언덕에 안장되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전교시절 형성된 교우촌
하선필은 상선필에서 갈라져 나온 공동체다. 공소 설립 이전은 상선필 공소 소속이었으며 원래 경주 외남면 지역으로 조선 고종 광무 10년(1906년)에 울산군 두서면에 편입되었다.
상선필, 살티에서 살던 신자들이 혼인으로 하선필로 옮기게 되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는데 상선필, 살티보다 더 큰 공소가 되었다. 하선필 공소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전교 시절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1852년 5월). 그 후 1893년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 일행이 상선필 공소 방문 중 하선필에 살던 최 시몬(당시 78세)의 집에 방문하면서 그의 집이 공소로 사용되었다. 하선필 교우촌은 부산, 경주, 양산 등지에서 피난 온 집안들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구성원은 한의사, 몰락 양반, 향반으로 기억되는 계층들로 상선필, 살티에 피난 와 정착했던 다음 세대들로 이루어졌다. 이중에서 청주 한씨, 경주 김씨, 경주 최씨는 서로 인척 관계다. 이들이 하선필의 산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며 교우촌을 이루어 갔다. 한의사인 최세형(1816~1895, 시몬)은 동래부에서 하선필로 이주해 왔다. 청년기에 불교에 심취하여 인도에서 3년간 불교를 연구하고 돌아오던 중 청국에서 선교사를 만나 2년간 천주교를 배워 시몬으로 영세하였다.
박해 때 단신으로 강원도 평해로 피난하고 그곳에서 김 로사와 혼인하여 하선필에 정착하였다. 하선필 공소 회장을 역임하며 자식들에게 신앙 교육은 물론 한의를 전승시켰다.
하선필로 이주해 온 한문필(베드로)은 상선필 회장 한광호의 큰아들이다. 하선필에 언제 이주해 왔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하선필의 경주 최씨 집안과 혼배 후 옮겨 왔으리라 추정된다. 김문익은 살티로 피난 온 김경두의 손자로 1884년 페낭으로 유학가서 신부가 된 김문옥(金紋玉 , 1873~1941, 요셉)과 형제간으로 선필의 청주 한씨 집안과의 혼인으로 인해 1893년 이후 선필로 이사하여 하선필에 정착하였다. 그 후 김문익 공소 회장을 비롯한 초기 역대 공소 회장들의 노력으로 뮈텔 주교를 비롯,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8, 플로리아노) 주교 등 많은 성직자들이 거쳐 갔으며 한때는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1866~1904, 레오) 신부가 3개월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간월, 대재, 살티를 비롯 초기 선조 신앙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하선필 공소도 다른 공소와 다름없이 많은 신자들이 도시화의 물결 속에 하나, 둘씩 고향을 떠나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고 현재는 9세대 15명 내외가 공소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경신박해 때 순교자를 낸 박해시대 교우촌
언양 순정 공소
순정 교우촌도 간월과 선필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박해 시대 때의 교우촌이다. 이 공소의 위치는 언양 본당과 살티 공소 중간 지점이며, 얼마 떨어진 동쪽으로 뒤편에는 간월산(1053m)이 우뚝 솟아 있다. 순정 공소 관할 구역은 1860년경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 순교자 김 베드로 때인 듯하다.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순교자 김 베드로는 청도 김씨로 조부 때에 이곳 순정으로 이사를 왔고, 그리하여 그의 가정은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공소 첫 신자인 김규홉의 아들 순교자 김 베드로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860년 경신박해 때 대구 약령시에 한약 재료를 구입하려고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했다고 한다. 한편 그때 그의 몸종도 함께 따라갔다가 베드로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것을 보고서 그분의 십자가를 유품으로 받아서 본가에 전한 후에, 다시 순교자를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에도 김 베드로의 가족들은 계속 이곳에서 살면서 대를 이어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으며 주위에 외교인들이 많이 입교해서 현재는 1958년도에 분가해서 나간 길천 공소의 신자들과 합해서 100여 명의 신자들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1913년 12월 16일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8, 플로리아노) 주교에 의해 축성된 공소 건물은 언양 본당 설립 전까지는 남방 지역 선교사들의 휴양지로서 오랫동안 미사를 드린 곳이며, 부산진 본당 소속 공소 회장들의 피정과 회의장으로도 사용되었다. 길천 공소와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으며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순교자 김 베드로의 후손 중 장손자 김영은 야고보는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님의 복사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교회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차손 김영제(金永濟,1896~1966, 요한) 신부도 언양 본당의 9대 신부로 봉직했었다. 또한 마산교구의 김두호 몬시뇰과 김달호 교수(경북대), 언양 본당의 김경희 전 회장은 그분의 증손자이다. 현재 신자는 5가구에 불과하고 현재 공소 회장은 순교자의 후손 김태호 씨가 맡고 있다.
길천 공소는 1958년 8월 25일 김영제 신부에 의해 순정 공소에서 분리되었다. 그후 이농 현상으로 교세가 약화되자 1980년에 다시 순정 공소와 통합되었다.
▒ 길천 공소
길천 공소는 1958년 8월 25일 김영제 신부에 의해 순정 공소에서 분리 되었다. 그 후 농민들의 이농 현상으로 교세가 약화되자 1980년에 다시 순정 공소와 통합되었다. 약 700평 대지에 약 30평의 공소 건물이 있어 신심단체 회합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1960년대 까지는 교세가 가장 큰 공소이기도 했다.
건물과 경내를 단장하여 산간학교나 피정장소로 사용하기위해 2001년 보수공사를 하여 많은 성지순례 방문객들이 방문하였다. 특히 학생들의 산간학교와 레지오 단원들의 피정 장소로 많이 활용되었다. 본당에서 약6km 지점에 있으며 상북면 자동차 면허 시험장에서 고려개발 알루미늄을 지나 후리동네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순정 공소와는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1. 초기 교회설립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초기 교회 설립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서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 상권(1928년 간)과 장로교회사 전휘집(典彙集)(곽안련편, 1935년 간)이다. 이 책은 초기 교회설립에 대한 여러 정보를 주고 있으나 약간의 오류도 있다. 초기에 설립된 교회들은 다음과 같다.
1883(1884?)년 솔내(松川)교회
1885년 인천 내리교회(아펜셀라, 기감)
1887년 서울 새문안교회(언더우드, 통합)
서울 정동교회(아펜젤러, 기감)
충북 부여 옥곡교회(방극기, 이재훈, 합동)
1890년 서울 남대문교회(알렌, 통합)
1891년 부산 부산진교회(호주선...
[한국의 역사교회―(15) 울산 병영교회] 최현배,교회 야간학숙서 한글 배우며 꿈키워
120년 전의 이야기다. 1889년 10월2일 호주의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 남매는 정든 땅 시드니를 떠나 40여 일간의 항해 끝에 생면부지의 조선 땅 부산항에 닿았다. 항구는 아름답게 보였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희망이 없어 보였다. 남매는 이곳에 복음의 씨앗을 함께 심자는 약속을 하고 서울로 향했다. 이듬해 데이비스는 동생을 남겨두고 부산으로 왔다. 하지만 그는 천연두에 걸려 채 꿈도 펴지 못한 채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1891년 호주장로회 메케이 목사 부부가 여선교사 멘지스, 포세트, 페리와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그해 12월부터 5명의 선교사는 꿈꿨던 부산과 경남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군사 요충지 병영에도 복음의 씨앗이=울산의 군사 요충지 병영 일대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부산진교회를 세운 호주 선교사들은 울산 등 경남지방으로 복음의 지경을 넓혔다. 당시 이희대씨는 병영 서리 372 자신의 집으로 호주 선교사들을 초청했다. 그의 어머니, 숙모, 그리고 동네 사람들 3, 4명이 함께 감사예배를 드리고 자신의 가옥을 교회 설립을 위해 헌납했다. 마침내 1895년 1월8일 병영교회가 설립됐다.
병영교회 초대 선교사는 호주장로회 애덤슨(A. Adamson)이 맡았다. 이어 왕길지 목사가 애덤슨 목사 후임으로 순회 선교사를 맡는다. 1906년 2월에는 교인 박민윤 이유택 등이 울산읍내 교인들을 위해 분교하여 강정교회(江亭敎會·현 울산제일교회)를 세웠다. 1910년 병영교회 교인 박정하 박종호 형제가 송정 교인들을 위해 분교하여 지당교회(芝塘敎會·현 송정교회)를 설립했다.
나라를 잃은 일제시대에는 교회도 생기를 잃었다. 일부 교인은 신앙 자유와 새로운 생활터전을 찾기 위해 만주 등지로 떠났다. 광복이 된 이듬해 봄 만물의 소생과 함께 교회에는 차츰 생동의 움이 트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일본과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병영교회 청장년들이 차차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신앙의 터전을 닦았다. 50년대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 때는 군인들의 안식처가 됐으며, 60년대 산업화시대 이후에는 도시가 공업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전국에서 모여든 산업역군들이 병영교회에 출석해 신앙의 전통을 이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의 꿈을 키운 교회=병영교회가 설립되기 1년 전인 1894년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이 태어났다. 최 선생은 어릴 때부터 병영교회에서 국문을 가르치는 야간학숙에 다녔다. 최 선생은 청소년 시절 병영교회 교회학교에서 신앙의 기초를 다졌으며 국어국문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최 선생의 생가는 병영교회에서 200m 정도 골목길을 올라가면 볼 수 있다. 지금은 생가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지난해 사업계획변경을 이유로 중단됐던 복원공사가 재개돼 오는 10월9일 한글날에 문을 열 예정이다. 연면적은 기존 5만8584㎡에서 7만8019㎡ 로 늘어났다. 또한 지상에는 부지 면적 3400㎡에 생가와 기념관, 광장, 주차장 등이 건립된다.
교회는 올해로 9년째 지역 노인 150명에게 목요 급식을 대접하고 있다. 또한 6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연 1회 효도관광을 실시하고 있다. 지역 내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사랑의 바자회를 추석을 전후해 열고 있다.
병영교회 입구에는 토종 소나무 한 그루가 구부정하게 서서 성도들을 반갑게 맞고 있다. 어른 키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이 소나무가 외솔 최현배 선생이 이 교회 교회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1889. 10. 2 데이비스(Davies)남매, 시드니를 출발하여 40여일간의 항해 끝에 호주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부산에 도착하다.
1890. 04. 05
데이비스, 천연두에 걸려 부산에서 소천하다.
1890. 08. 25
호주장로회 여전도회 연합회가 조직되다.
1891.12.
호주 장로회 멕케이 목사부부가 여선교사 멘지스, 포세트, 페리 양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다.
1895. 05. 20
호주장로회 아담슨목사(A. Adamson) 조선에 도착하다.
1895. 01. 08
병영교회가 설립되다.
(이희대씨가 병영 서리 372번지 자신의 집에서 호주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그의 어머니,
숙모 그리고 동네 사람 박정아, 김본혜, 이선대와 같이 감사예배를 드린 후 자신의 가옥을
교회설립을 위해 헌납하다.)
1895.
아담슨 목사, 호주 여선교사들과 함께 병영교회에 순회목회를 시작하다.
1895.12.
호주 여선교사 브라운(Anges Brown)부산에 도착하다. 이후 다른 여선교사와 함께
병영교회에서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하다.
1900. 10
왕길지(G. Engel 王吉志) 목사, 부산에 도착하다.
1901. 04. 02
왕길지 목사, 아담슨 목사 후임으로 병영교회 순회 선교사를 맡기로 하다.
1901. 04. 12
왕길지 목사, 병영교회에 순회 선교사로 처음 오다.
1902. 03. 30
왕길지 목사, 어른 12명, 어린이 4명에게 세례를 베풀다.
1902. 03. 31
예배당을 처음 매입하다. (현재의 주소지인 서동 260-2번지)
1906.02.
본 교회 교인 박민윤, 이유택이 울산읍내 교인들을 위하여 분교하여 강정교회(江亭敎會 /
현재 울산제일교회)를 세우다.
1908.
한국인 초대 교역자로 부산진교회의 심취명(沈就命)장로가 조사(助事)로 부임하여 와서
본교회는 당회가 구성되다. 초대 당회장은 왕길지 목사가 맡다.
1908.08.
아담슨 목사, 호주 장로회 마산선교부를 개설하다.
1910.02.
메켄지(J. N, Mackenzie) 목사가 부산에 도착하다.
1910.
본교회 교인 박정하, 박종호 형제가 송정교인들을 위하여 분교하여 지당교회(芝塘敎會 /
현 송정교회)를 세우다.
1912. 01. 06
경상노회가 조직되다. 초대 노회장에 왕길지 목사가 피선되었고 노회가 설립 될 당시 당회가
조직되어 있는 교회는 병영교회를 포함하여 10개처였다.
1912.
경상노회에서 선교사들이 경상도지역을 12지역으로 분할하여 지역책임을 맡기로 하며 메켄지
목사는 울산 병영당회, 기장 안평당회 등 경남 동편을 맡았으며, 본 교회에서 왕길지 목사에 이어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다.
1912.
예원배 목사(A. C Wright 芮元培)가 부산에 도착하다.
1912.
심취명 조사 겸 장로가 사임하다. (목사 안수 후 풍기읍교회로 부임하다.)
이진호 조사가 제2대 교역자로 부임하다.
1915.
이진호 조사가 사임하다.
박성태 조사가 제2대 교역자로 동래평전교회에서 부임하다.
1917.
박성태 조사가 사임하고 굴화리 교회로 부임하다.
1917. 09. 01
이기선 목사가 제4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오다. 울산읍교회를 비롯한 여러교회를 함께 했고, 우상리교회에서 위임식을 거행하다.
1917. 11. 11
이봉주(규한), 제2대 장로에 장립하다. 동부경남에서 피택된 최초의 장로가 되며 당회장은
이기선 목사였다.
1919. 04. 05
병영의 기미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다. 본교회 교인 이문조, 이현우 등이 주동이 되다.
일본 경찰이 교회를 수색하고 교인들을 검색하며 교회 서류들을 압수하는 과정에서 초기
병영교회 자료들은 다 유실되었고, 불온사상을 가진 교회로 지목되어 사찰과 탄압이 더욱
심했으며, 이로 임하여 교센느 위축되어 갔고 교인들은 많이 흩어지게 되었다.
병영교회는 울산교회의 초대교회로서 이 지역사회 선교를 위해 먼저 세움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런 만큼 역사적 사명이 분명한 교회입니다.
2009년 115년이란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가진 교회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비전과 다각적인 목표를 두고 하나님의 영역을 넓혀가는 교회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지역교회와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교회로서 그 가교적 역할과 견인차적 역할을 담당하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역사의 배후에서 인류의 구원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외국의 선교사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호주장로회 아담스 목사는 1895년 5월에 이대희씨가 병영 자신의 집의 가옥을 교회설립을 위해 헌납하여 설립된 병영교회에 호주 여선교사들과 함께 순회목회를 시작하였다. 1902년 2대 선교사인 왕길지 목사가 어른 12명과 어린이 4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현 주소의 예배당을 매입하면서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을 섬겨왔다.
첫댓글 정말 갖기 어려운 자료 공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귀한 자료를 정리하셨군요. 두동 은편교회사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