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학의 학맥을 찾아>7<도시샤대학 신학부
기독교 정신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자유스러운 학풍
일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샤대학 신학부는 1875년 대학의 설립과 함께 시작됐다. 동지사(同志社)대학으로도 불리는 있는 도시샤대학은 일반인들에게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윤동주와 정지용이 나온 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도시샤대학은 해방을 전후로 상당수의 한국인이 유학했던 학교. 특히 신학부 출신이 많아 해방 이후 한국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해방 전에는 정대위 윤성덤 김태묵 서남동 등이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했으며 해방 후에는 강근환 기원형 김호식 박영배 김영일 김수진 반병섭 노홍섭 김병순 등이 수학했다.
도시샤대학 신학부는 전반적으로 진보적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한다. 이는 도시샤대학이 일본조합교회의 영향 아래 설립된 학교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일본조합교회는 전통적으로 좌파 성향이 강했던 교단. 그러나 1942년 일본 개신교파가 '일본기독교단'으로 통합된 이후로 각 대학의 신학적 차별이 없어졌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일부 교단 환원주의자들은 일본기독교회(장로교), 감리교 등 소수 교단을 만들어 나갔고 교단 신학교도 세웠다. 현재 일본기독교단에 속해있는 대학은 도시샤대학 신학부와 동경신학대학 두 곳이다.
도시샤대학은 종합대학이지만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인 만큼 지금도 신학부가 중심적인 학부 구실을 하고 있다. 도시샤대학 신학부는 전통적으로 역사신학이 강하며 그런 이유로 조직신학도 역사신학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 신학부가 한국 신학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국내에 민중신학과 토착화 신학의 문을 연 양대 신학자, 서남동과 윤성범이 공부한 곳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죽재 서남동은 193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나이에 도시샤대학 문학부 예과를 1년 수료한 후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쌓았다. 도시샤에서의 신학공부는 서남동에게 있어 신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41년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서남동은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의 전신),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 등을 지내며 독자적 신학노선을 구축, '민중신학'을 창출하여 한국은 물론 제3세계 신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41년 도시샤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해천 윤성범 목사는 신학의 토착화와 한국적 신학을 주창한 인물. 바르트의 제자이기도 했던 윤목사는 단군신화 논쟁(1963), 유교의 진리체계와 접목시킨 '성(誠)의 신학' 논쟁(1973)을 불러일으키는 등 기독교와 한국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197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한 그는 국내 유교·불교 학자들과도 폭넓은 교유를 가지며 국제 종교사회학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국내 신학자 중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최초로 받은 사람은 현 서울장신대 총장인 민경배 박사다. 민총장은 1984년 '한국에 있어서의 씨족주의 운동과 기독교회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신학박사를 받았다.
민경배 총장 이전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고 이국선 목사도 1969년 도시샤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또한 1974년부터 86년까지 향린교회 당회장, 91년까지 경동교회 당회장, 2000년까지 예닮교회 당회장을 지낸 바 있는 김호식 목사도 1972년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한 인물.
도시샤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한 국내 기독교 역사학자로는 강근환(서울신대 명예총장), 민경배, 서정민 교수(연세대) 등을 꼽을 수 있으며 교회사 야사가로 유명한 김호진 박사도 도시샤에서 수학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는 현 안양대 교수인 조재국 교수가 1995년 '한국의 민중종교와 기독교'를 주제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학부는 아니지만 서울여대 총장이었던 고황경 박사와 감리교여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이었던 김옥라 박사도 도시샤대학 출신이다.
도시샤대학은
도시샤대학은 1875년 전도사이자 교육자였던 니지마 조'新島襄: 1843∼1890'가 세운 도시샤에이학교'同志社英學校'가 전신이다. 설립 당시의 교사는 니지마 조와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D.데이비스(James D. Davis) 2명이었으며, 학생은 8명이었다. 1904년 도시샤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12년 '전문학교령'에 따라 도시샤대학이 되어 신학부와 영문과·정치경제부를 개설하였다. 1920년 '대학령'에 따라 대학이 되었다가, 제2차세계대전 뒤인 1948년 교육제도 개편에 따라 새로운 체제의 대학이 되었다.
현재 신학부·문학부·법학부·경제학부·상학부·공학부의 6개 학부와 6개 연구과를 둔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도서관에는 184만여 권의 각종 도서가 소장되어 있으며, 부설시설로는 언어문화교육연구센터·이공학연구소·아메리카연구소·인문과학연구소·학술정보센터 등이 있다. 기독교 교육시설로는 기독교문화센터가 있으며 선각자의 사상이나 지식을 배우는 채플시간, 공개강좌, 채플콘서트 등을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대학 재학생은 2만 2636명(남학생 1만 5348명, 여학생 7,288명)이고, 대학원 재학생은 2,014명(남학생 1,421명, 여학생 593명), 교수는 450명(조교수 및 강사 포함),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50명이다. 현재 신학부에 재학하고 있는 한국학생은 10여 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에서도 출원할 수 있다는 점, 학부·대학원 모두 특별학생(이수한 과목의 학점은 정규 학생에게 졸업(수료)학점으로도 인정된다)제도를 두고 있다는 점이 도시샤대학의 특징이다. 현재 외국인 유학생 과목으로 일본어, 일본사정을 설치하는 등 유학생 유치체제를 정비하고 있다. 또 유학생이 경제적으로도 안심하고 면학에 힘쓸 수 있도록 다양한 장학금제도를 마련하고 있는데 정규학생에 대해서는 수업료 30%를 감면하고 있다.
기독교 정신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자유스러운 학풍 속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낸 대학으로 유명하며, 특히 윤동주가 이 대학 영문과에 재학중 사상범으로 몰려 옥사한 바 있다. 교토 시내에 있는 메인 캠퍼스 교타나베'京田邊' 캠퍼스 외에 교토부 이마데가와시'今出川市'에 이마데가와 캠퍼스가 있다. 도시샤여자대학과 도시샤중·고등학교 및 유치원과 함께 종합학원 도시샤를 구성하고 있다. 이마데가와 캠퍼스 내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