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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고통 앞에서 하느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무죄한 이들의 절망을 비웃으신다네.
세상은 악인의 손에 넘겨지고 그분께서는 판관들의 얼굴을 가려 버리셨네.”(욥 9,23-24 참조)
이스라엘의 지혜문학
구약 성경의 ‘욥기, 잠언, 코헬렛, 지혜서, 집회서’, 이 다섯 권은 흔히 ‘지혜문학’으로 불립니다. 모세오경과 역사서와 예언서가 주로 이스라엘의 구세사와 그 의미에 대하여 말한다면 지혜서들은 절대지혜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참된 가르침에 대해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세상과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경험에서 얻은 도덕-신앙적 원칙과 실천적 지식을 담고 있지요. 사실 인간의 삶과 죽음, 기쁨과 고통, 세상의 이치에 관한 나름의 지혜 전승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들에게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 지혜’ 전승은 주로 왕자들과 젊은 관료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지침 역할을 했고, ‘메소포타미아의 지혜’ 전승은 마술, 주술적 형식과 관련된 지식까지도 상당 부분 포함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구약 성경의 지혜’ 전승은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 라는 대원칙하에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를 전합니다. 우리 구원의 길을 비추어준다는 점에서 여느 세속적 지혜와는 비교 불가의 가치를 지닌 것이지요. 이번 호에는 구약 성경 지혜서의 첫 번째 책인 욥기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질문,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얼마 전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에서 강을 건너 밀입국하다 스물여섯 살 아빠와 두 살배기 딸이 물살에 휩쓸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난과 폭력을 피해 어떻게든 살아보려다 숨진 어린 부녀의 사진 아래에는 이런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도대체 신은 어디 있는가? 왜 신은 보고만 있는가?” 가난과 기아로 뼈만 남은 아기들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현실에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이걸 보고도 신이 있다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모순과 부조리로 비춰지는 일들은 다반사입니다. 착하고 성실히 살아도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과 악하고 게으른데도 유복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갑니다. 의인으로 살려고 발버둥칠수록 손해만 보는 듯한 이런 현실을 과연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요?
욥기는 인간 실존의 문제인 ‘의인의) 고통’과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말합니다. 욥기가 쓰여진 시대는 왕국의 멸망과 유배를 겪은 뒤 ‘의인은 축복과 장수를 누리고, 악인은 저주와 멸망에 처해진다.’는 절대적 신명기 사상(신명 30,15-20)이 도전받던 시대였지요. 욥기가 제기하는 문제, ‘하느님은 왜 의인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 우리 시대까지도 이어지는데,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욥기입니다.
욥기는 어떤 책인가?
‘욥’이란 이름은 일반적인 히브리 이름이 아닙니다. 욥이 하느님께 도전하며 저항하는 책의 내용을 고려할 때 히브리어 동사 ‘아얍(‘적이 되다’)’에서 파생된 작위적인 이름이지요. 그리스어 칠십인역 욥기 끝에는 욥이 아브라함의 5대 손이었다는 첨언도 있습니다만 사실 욥을 실존 인물로 보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욥기는 지혜서로서, 주인공 욥에게 닥친 재앙, 그의 고뇌와 항변, 깨달음과 회개, 믿음의 완성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를 전하는 책입니다.
욥기는 산문체로 쓰여진 머리말과 맺음말(1-2장; 42,7-17), 그리고 운문체로 쓰여진 중심부(3,1-42,6), 이렇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들은 문체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머리말과 맺음말은 ‘욥이 흔들림 없는 믿음(1-2장)으로 의로움을 인정받은 이야기’(42,7-17), 중심부는 ‘욥이 하느님께 시시비비를 따지며 고뇌하다가(3-37장) 회개한 이야기’(38,1-42,6)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머리말과 맺음말만으로도 충분히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점에서(믿음 → 보상) 학자들은 먼저 이 부분이 민담 형태로 존재했고 차차 전통적 신학 사상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긴 중심부가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저자는 욥을 우츠 땅에 살던 동방인, 즉 이방인으로 소개합니다.(1,1-3) 성경의 책 한 권 전체의 주인공이 이방인인 경우가 좀처럼 흔한 일은 아니지만(cf. 모압 여인 룻을 주인공으로 한 룻기) 이렇게 성경 저자가 굳이 이방인을 주인공으로 삼을 때는 속 깊은 신학적 의도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방인 욥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비단 유다인들뿐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여 시대와 국적을 초월한 모두를 ‘의인의 고통과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고민과 성찰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탄과) 내기 때문에 의인을 고통에 빠뜨리시는 하느님?
욥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1,1.8; 2,3)로서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1,2-3)였습니다. 유다인들의 개념상 ‘동방’은 전통적으로 현자들의 땅이었고(1열왕 5,10) ‘부’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축복을 의미하니, 한마디로 욥은 한 점 흠도 없는 ‘의인’, ‘현자’,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욥이 하느님의 허락 하에 까닭 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천상 어전에서 있었던 하느님과 사탄 사이의 ‘내기’(1,6-12; 2,1-6) 때문이었지요. 이 대목에서 ‘하느님이 왜 사탄과 내기를 하시나? 내기 때문에 의인을 고통 받게 하신다고?’ 하는 거부감을 가지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성경 저자가 이 대목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따로 있습니다.
첫째, 저자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주관하시지 않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신학적 이해를 전제로, 의인 욥의 몰락 또한 ‘하느님께서 아셨고 허락하신 일’로 표현한 것 입니다. 마치 하느님이 사탄의 계책에 말려들어서(?) 혹은 욥을 가벼이 여기셔서(?) 내기를 했다는 식의 이해는 옳지 않습니다. 둘째, 욥기 저자의 시대에 사탄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사탄은 세상을 두루 살피면서 때로 인간을 고소하고 중상하는 존재로, 천사들과 함께 천상 어전의 일원으로 하느님의 명을 수행하는 존재로 이해되던 때였지요.(1,6-7; 2,1-2).
저자는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하는 사탄의 말을 빌어, 하느님의 축복과 인간의 신앙을 인과관계로 묶어버린 전통적 교리의 맹점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1,9-11; 2,4-5) 이야기의 초입부터 이미 그런 기복 신앙은 잘못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셋째,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느님과 사탄이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 소재’가 아니라 이유 없이 주어진 시련에 대한 욥의 응답입니다. 전 재산과 자식들까지 모두 잃고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1.21)라고 응답했고, 몸이 썩어 문드러져 잿더미 위에 앉아 아내의 폭언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라고 응답했던 욥의 흔들림 없는 믿음 말이지요.
고통에 대한 욥과 친구들의 상이한 이해
강건한 믿음으로 일관했던 욥은 친구들과 논쟁을 시작하면서 점차 하느님께 무죄함을 항변하며 저항하는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욥을 위로하러 찾아온 세 친구는 그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겉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얹고 목 놓아 울며 이레 동안 한마디 말조차 못한 채 곁에 앉아 있었지요.(2,11-13) 그러나 욥이 지독한 고통 속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여태 살아있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자(3장), 친구들은 욥에게 대화를 걸며 다그칩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모두 다 언급할 순 없지만 요지는 분명합니다. 욥과 친구들이 타협점을 찾지 못한 것은 서로의 의견이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게나, 죄 없는 이 누가 멸망하였는가 … 재앙을 뿌린 자는 그것을 거두기 마련이라네.”(4,7-8)라는 말은 친구들의 논리를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그들의 말은 욥처럼 성찰과 고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저 조상들로부터 전해받은 교리 지식(인과응보에 따른 상선벌악의 전통적 사상)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입니다. 머리로만 아는 교리나 지식이 아니라 자신처럼 실존적 경험에 근거해 말하라고 욥이 아무리 설득해도(6,24-30) 소용이 없었습니다. ‘고통은 자기 죄에서 기인한 벌’이니 무조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라는 친구들의 말을 듣다 보면(8,3-7; 11,11-20) 문득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떠오를 정도이지요. 스스로의 무죄함을 알기에 억울한 욥은 전통적 가르침을 거부하면서까지 하느님의 무죄 판결을 요구하지만, 하느님은 그저 침묵하시니, 점차 욥은 하느님의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며 무죄한 이에게 고통을 주시는 그분을 ‘피고’로 몰아갑니다.(13,22) “나는 소송을 준비하였네. 내가 정당함을 나는 알고 있다네. 자, 나와 소송을 벌일 자 누구인가?”(13,18-19) 욥이 세 친구와 대화를 마치면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자(31장), 엘리후라는 한 젊은이가 나서서 다시 대화를 이어가는데(32-37장) 큰 틀에서 볼 때 그 역시 세 친구의 이전 논리를 크게 벗어나진 못합니다.
창조주의 ‘자유’와 ‘완전한 섭리’를 선포하시는 하느님
혹시라도 ‘욥은 고뇌하는 의인’, ‘친구들은 머릿속 지식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재단하는 위선자’라는 단편적인 시선으로 욥기를 바라 보았다면, 마지막에 이어지는 하느님 말씀(38,1-40,2; 40,6-41,26)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욥을 단죄했던 친구들을 책망하실 뿐 아니라(42,7-8), 욥 또한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자”(38,2)라며 꾸중하시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느님은 왜 욥을 나무라시는 걸까요? ‘고통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고집했던 친구들처럼 ‘나는 무죄하니 이 고통의 의미를 밝히라.’라고 항변하는 욥 역시 그저 ‘인과응보’의 논리로 하느님의 질서를 판단할 뿐, 그분의 전적인 ‘권능’과 ‘자유’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송사(31,35-36)를 받아들이시기라도 하듯 폭풍 속에 나타나신 하느님은 “왜 의인에게 고통이 주어지는가? 하느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항변하던 욥의 질문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감히 답할 수 없는 수많은 수사학적 질문들을 쏟아내시며(“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당신이 전 우주의 주권자 주인임을 상기시키십니다(38-39장). 이 하느님의 말씀은 언뜻 보면 동문서답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대한 권능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지혜를 말씀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어째서 개인과 사회의 불의와 악이 성공하고 장수하게 두어 세상을 온전히 주관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항변하던 욥은(21,7-13.17-34; 24,12) 입을 다뭅니다. 하늘과 땅의 창조와 운용부터 작은 생물들의 미세한 움직임들까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섭리하시는 창조주 앞에서 ‘저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설명해 보십시오!’ 외치며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했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교만한 것이었는지 인정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욥기가 제시하는 회개의 출발점이요 본질로 욥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욥은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였다.”(42,7)
욥은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40,4) 하고 응답하며 이제 말하기를 그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침묵과 경청이야말로 하느님과의 참된 관계의 시작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원했던 대답을 온전히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요? 하느님의 첫 번째 말씀(38,1-40,2)이 끝난 뒤 욥은 범접할 수 없는 하느님의 권능 앞에 그저 ‘침묵’하며 스스로를 닫아버렸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둘째 말씀(40,6-41,26)이 이어진 뒤 그는 마침내 하느님을 향하던 ‘도전과 항변을 돌이켜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하느님은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면서도 “욥은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였다.” 하시는데, 그럼 하느님께서 어여삐 보신 이 “올바른 것”이란 뭘까요? 그것은 욥이 친구들처럼 구태적 인과응보의 묵은 인간적 논리 안에 하느님과 진리를 가두어 놓고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을 체념하며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기어이 그분을 만나 뵙고자 했던 용기와 끈기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겠지요. 이 세상이 고통이 그저 인과응보의 원칙, 인간이 파악한 원칙에 따라 운용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끝까지 외쳤던 욥의 모습을 하느님은 의로움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욥기가 주는 교훈
욥기는 불평하지 말고 무조건 참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책도 아니고 의인의 고통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주는 책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걸까요? 어쩌면 욥의 친구들처럼 다른 사람한테는 ‘믿어라, 참아라. 하느님 뜻이다.’ 쉽게 타이르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시련이 닥칠 때는 유리처럼 쉽게 금이 가고 깨어지는 믿음을 지닌 우리에게 네 자신의 믿음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한번 고민해 보라고 권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입이 있으면 제발 한마디 말이라도 해 보소서!’ 아무리 외쳐 봐도 한없이 침묵을 지키시는 그분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욥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하느님께 끝까지 도전했던 그의 싸움은 결코 하느님을 부정하고 원망하며 그분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직접 만나 더 신뢰하고픈 열망으로 점철된 처절한 신앙의 투쟁이었음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매일 우리가 만나는 걱정과 고통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당장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고통과 아픔을 억지로 설명하려 하다보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거나 그분을 비난하게 되기 쉽습니다. 지금 당장은 알아듣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부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로써 그 아픔을 끌어안고 욥과 함께 긴 시험과 단련의 영적 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그 길은 칠흑보다 어둡고 답답하지만 저 침묵 속 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만나 욥과 함께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42,5)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월간빛, 2019년 9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