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가)∼(라) 시기에 해당하는 사실로 옳은 것은?
------------------------------------------------
(가) (나) (다) (라)
조선건국준비 제1차 미·소 5·10
위원회 결성 공동위원회 총선거 실시
개최
---------------------------------------------
① (가)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가 개최되었다.
② (나)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③ (다) :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 협상을 제안하여 평양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④ (라) :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다.
정답: ③
*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연대기
광복 직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 일부를 이양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1945.8). 여기에는 민족주의 세력도 일부 참가하였으나 좌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1945.9)했기에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임시민주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에, 신탁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찬성하는 좌익이 대립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1차: 1946.3~5, 2차: 1947.5~8)가 열렸으나, 협의 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 문제 등으로 결렬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론을 내비친 정읍 발언(1946.6) 이후 우익 세력은 자신들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고, 여운형과 김규식은 중도 세력은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1946.7) 합작 운동을 추진하여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에까지 이르렀다(1947.10).
그러나 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후, 한반도 문제는 유엔에 이관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다. 1948년 1월 유엔 한국임시 위원단이 남한은 입국하였으나, 소련이 이에 반대하자,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다(1948.2). 분단을 우려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실패하였다(남북협상, 1948.4).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비밀 선거인 5·10 총선거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1948년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고, 제헌 국회에서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8.15).
② 제헌국회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여(1948.9), 반민특위(1949. 1~8)가 활동하였지만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친일파 처벌은 성공하지 못하였다.